루브르 Le Louvre musée
역사적 공간: 요새에서 왕궁으로
처음 루브르를 건립한 목적은 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요새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파리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프랑스의 정세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루브르는 화려한 왕궁의 모습으로 변해 갔는데, 프랑스를 지배한 왕들에게 루브르는 어떤 의미였을지 함께 상상해 보자.
12세기 말, 필리프 오귀스트(Philippe Auguste, 1165~1223) 왕의 치하에서 파리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며 하나의 작은 마을에서 프랑스의 수도로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 파리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을 쌓았고, 센(Seine) 강변을 따라 거대한 요새를 세워 강력한 방어기지를 마련했다.
이렇게 루브르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으며,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박물관 내부에 남아 있는 원형 망루들을 통해 중세의 흔적들을 느끼곤 한다.
루브르에 요새를 짓기 시작한 필리프 오귀스트 왕의 초상화
루브르 성의 원형 망루들이 아직
박물관 내부에 남아 있다.
이후 샤를 5세(Charles V, 1338~1380)는
요새였던 루브르를 왕실의 거처로 개조했으며, 자신이 수집한 수사본들을 내부에 새로 지은 도서관 탑에 장서해놓았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1494~1547)는 필리프 오귀스트 왕이 세웠던 원형 망루를 허물어버리고,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Pierre Lescot)를 기용해 루브르의 대대적인 공사를 지휘했다.
이때부터 루브르는 중세의 요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왕궁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며 화려하게 변모해나갔다.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달력> 중 '10월'
앞부분에는 밭을 가는 농민들을, 뒷부분에는 15세기의 화려했던 루브르 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루브르를 요새에서 왕궁으로 변모시킨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의 왕들은 루브르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야심찬 계획들을 세웠다.
특히 앙리 4세(Henri IV, 1553~1610)는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와
루브르 궁(Palais du Louvre)과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가 건립했던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을 연결해 기존의 협소했던 루브르를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했으나,
끝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루브르의 대회랑(grande galerie)의 완공은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다.
루브르 궁과 튈르리 궁을 연결하는
대회랑의 건축 계획
루브르 궁의 위기: 루이 14세와 베르사유로의 이전
새로운 군주와 함께 루브르 궁의 모습은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을 불러들여서 유럽 최고의 왕궁을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국왕의 갑작스러운 베르사유로의 이전 결정은 루브르 궁을 아무 쓸모없는 건축물로 남기고 말았다.
앙리 4세가 서거한 이후,
루브르 궁의 증축공사는 잠시 중단되었으나,
루이 13세(Louis XIII, 1601~1643)
때 재개되었다.
건축가 자크 르 메르시에(Jacques Le Mercier)는 루브르를 원래 규모의 4배로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했고,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은 궁의 내부 장식을 담당했으며,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는 프랑스풍의 왕실 정원을 가꾸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루브르는 절대군주의 권력에 힘입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재임 시절에는 소회랑(petite galerie, 지금의 아폴론 회랑galerie d'Apollon)이 재건되었고,
베르니니(Bernini)와 같은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해 왕궁 재건축에서 설계상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궁의 정면을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를 주축으로 한 건축위원회에 '콜로나드(Colonnade,
원주로 장식된 부분)' 축조를 명했으나, 왕의 베르사유 이전 때문에 이 계획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루브르 궁 콜로나드
축조 공사 현장의 모습(1674년)
루브르의 소회랑, 현재 아폴론 회랑의 모습
태양왕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이전은 루브르 궁에 큰 타격을 초래했다. 물론 왕궁의 역할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선왕들의 컬렉션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개인 아틀리에 atelier)에서 창작활동을 계속 진행했다.
또한 17세기 중반에 설립된
프랑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는 루브르에서 정기적으로 수업과 강연을 열어 미술 교육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하지만 프랑스 군주들의 영광을 상징하던 루브르 궁은 루이 14세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텅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루브르, 예술적 공간으로의 변신
루이 14세가 떠난 루브르 궁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라 퐁 드 생티엔은 버려진 왕궁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다가 루브르 궁의 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길은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루브르는 예술의 장이 되었고, 2년에 한 번 개최했던 루브르에서의 살롱(Salon) 전시회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프랑스의 걸작들이 있는 건물[루브르 궁]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궁전 안의 청결한 장소를 택하여 거기에서
[왕의 소장품인] 유럽 최고 거장들의 작품들과 베르사유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작품들을 [아카데미가 정한 회화장르의 위계에 따라] 잘 정리하여 전시하는 것입니다.
- 라 퐁 드 생티엔
쓸모없이 방치된 루브르가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첫 전시회가 1667년에 팔레 루아얄(Palais-Royal)에서 개최되어 이후 간헐적으로 열리다가,
1699년에는 루브르의 대회랑에서, 그리고 1725년에는 대회랑의 서쪽에 있는
살롱 까레(Salon carré, 정사각형 모양의 방)에서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전시회장의 이름을 따서 전시회 자체를 '살롱(Salon)'이라고 불렀으며, 루브르 궁은 점차적으로 예술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변화하면서 박물관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생토뱅이 스케치한 1765년 살롱전(展)의 모습(1765년)
루브르 궁에서 개최한 살롱전(展)은 1753년부터는 정기적으로 2년에 한 번, 즉 현재의 비엔날레(Biennale) 형태로 개최되었으며, 약 한 달 동안 대중에 개방되어 있어서 언제나
북새통을 이뤘다.
살롱전의 활성화는 미술비평 작업으로 연결되었고,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 전시회 관람에 대한 평을
<문예비평Correspondance littéraire>에 실어 미술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 살롱전의 모습은
가브리엘 드 생토뱅(Gabriel de Saint-Aubin)의 스케치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오늘날과 달리 빈틈없이 그림들이 전시회장의 벽에 빼곡히 걸려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림들 중에서 당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던 역사화나 종교화가 상층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무용지물의 건축물로 전락할 뻔했던 루브르는 살롱전과 함께 부활했다.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라 퐁 드 생티엔(La Font de Saint-Yenne)을 비롯한 18세기 왕실 건축 총감독들은 루브르 전체를 뮤즈(muse)들의 전당,
즉 박물관(musée)에 가깝게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라 퐁 드 생티엔은 『프랑스 미술현황에 대한 고찰』에서 비어 있는 루브르 궁을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고,
건축 총감독이었던 마리니 후작(Marquis de Marigny)과 앙지비에 백작(Comte d'Angiviller)
은 루브르를 채울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주문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왕궁으로서의 루브르는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루브르를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소장된 작품들이 대부분 전리품이긴 했지만,
루브르는 마침내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
같은 해 7월 14일, 성난 시민들은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베르사유 궁에 기거하다가 심상치 않은 민심의 변화를 감지하고 탈출을 시도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고 차례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된 루이 16세의 초상화
같은 해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의 초상화
구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루브르 궁에 있던 왕실 소유의 수많은 예술작품들도 혁명정부에 몰수되었다.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에 휩싸인 프랑스에서 예술작품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바렌으로 도주했던 루이 16세가 파리로 압송되는 장면
대혁명 이후 군사적인 업적들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정권을 손에 쥐게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정치·경제적 문제들로 불안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루브르-튈르리 궁의 연결 공사를 재개했으며, 궁의 내부와 외부 장식들을 보완하고,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와 북쪽 회랑을 건설하는 등
루브르의 대공사에 돌입했다.
"무엇이든지 큰 것이 아름답다(Tout ce qui est grand est beau)"고 생각한 나폴레옹의 의지는 루브르를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8세기 파리의 루브르, 변화를 꿈꾸다.
왕궁에서 박물관으로 재탄생한 루브르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Le Louvre)'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아마도 '박물관(musée)'일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루브르는 유명한 회화·조각 작품들이 즐비한 장소로 익숙한 공간이지만, 사실 이곳은 파리를 지키던 요새이자 왕궁이었고,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18 세기 세계를걷다
네이브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