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20분 거리에 단골 마트가 있고 거기서 일본맥주와 새우, 게롤슈타이너 탄산수를 반드시 구입한다. 커피는 에스프레소와 핸드드립을 기분에 따라 섞어 마시며 연식이 오래된 독일차를 몰고 주말에는 김밥을 먹으며 소설책을 읽는다.
비싸지 않은 영국제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LP와 진공관이 자아내는 따뜻한 음색에 별다른 향수(鄕愁)가 없으며 음반과 책이 일정량 이상으로 늘어나면 대개는 처분해 버린다.
늦은 밤에는 면세점에서 산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며 오페라를 듣거나 보다가 잠이 든다.”
언젠가 (아마도 괜한 심술에 젖어) ‘하루키 스타일’(?)로 나의 평범한 일상을 적어본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이름 없는 아저씨의 삶도 이렇게 크고 작은 세밀한 루틴과 굴곡진 기호(嗜好)로 가득 차 있거늘, 하물며 작가라는 양반이 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 클래식과 오페라, 재즈와 올드팝, 싱글몰트와 수동기어 자동차, 심지어 일상의 어떤 쓸모없는 불편함까지도 - 고도의 문학적 선망으로 자꾸만 승화시키는가에 대한 어떤 치기어린 짜증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마도 독일 작가들에게 잔뜩 빠져 있었을 때였다. 일방적인 선망(羨望)이라고 불러도 좋다. 후덥지근한 여름 물안개처럼 펼쳐진 그 중문(重文)과 복문(複文)의 질식할 것 같은 두텁고 복잡한 세계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절망보다 더한 환희를 느꼈다. 절묘한 조사(助詞)의 꺾임과 여백으로 가득 찬 담백한 댄디함의 ‘하루키 월드’에 전혀 동화될 수 없었다. 귄터 그라스의 끈적함에, 하인리히 뵐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또 언젠가는 나도 토마스 만을 단숨에 읽어 내리라는 그런 희망에 들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혹은 세월이 흘렀다. 하루키는 나이가 들었고, 나 또한 (다행히도) 조금은 철이 들었다. 그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렇게, 한없이 매료(魅了)되어서 읽었다.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따끈한 소설책이다. 아직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으신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스포’는 자제하려고 한다. 그래도 뻔한 건 있다. 여러 곳의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슨 대단한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소설이 아니다. 애초 하루키는 그런 방식의 이야기꾼이 아니며(예전 같았으면, 하루키는 그럴 수준이 못 된다 – 라고 말했을 것이다), ‘노벨상을 노리고 과거사 문제를 건드렸다’는 천박한 인상비평에는 일종의 역겨움마저 느꼈다.
대신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다른 소설들에서처럼 이번 작품에도 다양한 음악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그리고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인 ‘기사단장’ 자체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코멘다토레(Commendatore,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기사장’으로 칭하지만)에서 따온 것이다. 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이 돈 조반니와의 결투 끝에 그의 칼에 목숨을 잃는 오페라의 첫 장면은 소설 속에서 어떤 회화 작품으로 치환되어 내내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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