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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묵상글 들 ( 사순 3주 목요일 - 기준의 문제로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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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3주 목요일 - 기준의 문제로다!
사순 3주 목요일-2018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앞을 향하여 있습니다.
내가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동쪽이 내 앞이고,
내가 서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서쪽이 내 앞이며,
앞으로 향하여 있다가 뒤로 돌아서면 이젠 뒤가 내 앞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내가 뒤로 돌아서면 내 뒤에 있는 것이고,
반대로 내 뒤에 있던 사람도 내가 돌아서면 내 앞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면 내 앞이 앞이지 다른 무엇이 앞이 아니고,
무엇이 내 앞에 있거나 옆에 있거나 뒤에 있는 것이지
내가 앞을 향하여 있거나 뒤를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앞뒤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분명
하느님일 거라 생각이 되어 다른 성경 번역들을 찾아보니
영어 성서는 “turned their backs, not their faces, to me.”라고,
공동번역 성서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외면하였다.”라고,
개신교 성서는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 하였다.”라고
각기 번역을 하였으며 그 공통점은 하느님께는 등을 돌리고
하느님 아닌 다른 쪽으로 그들은 향하여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과 뒤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일 때 내가 기준이 되고,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그가 기준이나 중심이 되어
그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는 늘 그를 향하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심이나 시선이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관심과 시선이 그에게 가 있으며,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 앞에 가 있게 됩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
저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흐뭇하게 떠올립니다.
이제 갓 걸음을 뗀 아기가 아장아장 또는 데똥데똥 걷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엄마에게 꽂히고 얼굴은 환하고
빨리 달려가 안기려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서는 덥석 안깁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은 누구도
아기와 엄마 사이에 있을 수 없고 온전히 아기만 있습니다.
이것처럼 온전히 사랑을 하면 다른 무엇이 끼일 수 없게
하느님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등을 돌리고 등을 보이는 것은 정말 할 짓이 못됩니다.
그에게 못할 짓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못할 짓입니다.
그에게서 나의 사랑을 거두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안에서 사랑이 떠나가는 것이고,
그가 내 앞에 없는 것 같지만 내게 사랑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일 때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이기에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은 모든 사랑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배반한다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내 앞에 없다면
하느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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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라파엘)신부님.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한 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답니다.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의 눈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행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가르침대로 살기는 싫다는 생각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상대를 험담하고 딱지를 붙이며 합리화 시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진리의 길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대로 사셨습니다. 누가 흔들어도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켜도 가야할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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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사순 3 목)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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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23: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마귀의 전능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질투의 가시에 찔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그분께 요구하였다.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은 그분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집안도 식구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뜻과 행실이 일치할 때 선다. 아마 베엘제불도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끊으면 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가? 마귀는 마지못해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막강한 힘을 누리며 본래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다루고 자기 외양간에 가두었다. 강도와 같은 자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그에게 넘어가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사람들은 진리를 알도록 부름을 받고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버리려는 자이다. 그분께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그분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주님을 도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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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예수님과 베엘제불>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이 이야기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은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킨 것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분열은 예수님 탓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의 탓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 탓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사람들에게 ‘참 평화’를 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 일을 ‘하느님의 일’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말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자가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저자는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우두머리 마귀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했다.” 라는 말은,
정말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다면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표징’은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데(요한 17,21),
사탄은 사람들이 분열되기를 바랍니다.
원래 사탄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스르고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아마도 자기 부하 마귀들이 예수님의 힘에 굴복해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대단히 분노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증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못해도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심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만들고,
또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앙갚음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분열되는 것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 되고,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편에 서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 자신들이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 있는 것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0-23).”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 자체가
당신의 권한과 권능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의 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사탄의 세력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예수님께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힘센 자’는 사탄이고, ‘더 힘센 자’는 예수님입니다.
‘전리품’은 마귀의 억압을 받고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나를 반대하는 자, 흩어 버리는 자’는 사탄 편에 선 자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사탄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탄을 숭배하거나 추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사탄을 추종하고 지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또 내세나 영혼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
이상한 종교나 미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 모두 다 포함됩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무관심’을 더 좋아합니다.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예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목활동이나 선교활동 현장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무관심한 사람’들, 또는 ‘미지근한 사람들’입니다.
본인들은 당연히 부정하지만, 그들의 무관심, 또는 미지근함은
그들이 사탄의 영향력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지옥에는 그렇게 자기 영혼 사정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
더욱 깨끗한 영혼이 되어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합니다.
그러나 무관심하거나 미지근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아예 의식하지도 않으니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 곳은 ‘하느님 나라의 밖’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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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⒈ 오늘 독서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예레 7,23)는
계약 정신을 상기시키신 후에, 당신의 말씀을 전할 소명을 받은 예언자들을 그야말로 ‘끊임없이’(예레 7,25)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 종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습니다(예레 7,24).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대적하게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궁정을 장악하고서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의 눈을
흐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하느님과의 소통이 가로막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에 대해서 예레미야도 이렇게 한탄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사마리아 예언자들에게서 고약한 일을 보았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잘못 이끌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제 악에서 돌아서지 않는다”(예레 23,13-14).
⒉ 그런데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예레미야 이후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님 당시까지도,
백성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짓 예언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으므로
이런 영적 단절 상태는 꾸준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심각하게 도지게 되면 백성 안에서
유난히 혼이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는 그게 벙어리와 귀머거리입니다. 귀먹으면 말도 못하기 때문에 청각 장애는
언어 장애를 수반하는 이런 신체적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서 예수님께서는 근본 원인을 마귀의 활약으로
진단하시고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셔서 간단히 고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악의에 찬
선동(煽動)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일부 군중은 감히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두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모함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벙어리 겸 귀머거리는 하느님과 영적 소통의 장애를 지니고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부마(付魔) 상태를 보여주는 표징이었던 셈이었습니다.
⒊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이 부마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현상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가려는 창조질서에 대해 악령이 도전하고 방해하는 간섭현상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육이 온전하게 결합된 상태에서라야
건강한 신체와 원만한 인격과 건전한 지성과 활달한 감성으로
하느님을 닮을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영혼이 건강하려면 사람의 혼(魂)이 하느님의 영(靈)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⒋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문제는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무속(巫俗)과 역술(易術)에서 나타나는 샤마니즘과
기복신앙 현상입니다. 이 현상도 부마현상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요? 우선 사실을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무속신앙 보존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 한국역술인협회 등에 따르면 현재 두 단체에 가입된 회원 수는
각각 30만 명이고 비회원까지 추산하면 무당(巫堂)과 역술인(易術人)은 약 100만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무속 및 역술시장의 규모는 최소 4조원에서 최대 6조원대로 보고 있다.”
(출처: 뉴스톱, 송영훈 팩트체커, 2020.01.06)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 보도대로라면, 천주교 사제 5천여 명보다는 훨씬 더 많은 셈이어서 무속과 역술에
의지하는 이들의 규모가 5백만 규모의 천주교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고 추산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서도
역술의 영향인 샤마니즘의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는 신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기복신앙적 경향으로 넉근히 뒷받침되는 사실입니다.
이는 실상 천주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 들어온 모든 종교가 마주치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⒌ 그래서 이러한 무속과 역술 현상은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해야 하는 당위성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모든 종교가 직면한 이 샤마니즘(Shamanism)과 기복신앙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느 다른 민족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 그 밑바탕에는
이 샤마니즘과 기복신앙과 관련한 종교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2백여 년 전 이 땅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올 때 조상제사 문제로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아
박해를 받았던 경험을 생각해서라도, 이 현상을 간단히 우상숭배와 미신의 부마현상으로 낙인찍어서는
안 될 줄로 생각합니다. 대홍수와 바벨탑 시대 이후에 아브라함 시대와 겹치는 이 땅의 역대 단군들도
샤만(Shaman), 즉 무당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늘의 뜻을
묻는 종교적 직분을 다른 모든 일에 앞서 중요시했고 이 흔적이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과
전통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⒍ 원래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에 묻고 이를 알아보고자 태동한 태극 사상에서 연원한
역(易)의 이치가 역술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점치는 상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년 운수(運數) 보기, 사주(四柱) 풀이, 이름 짓기, 관상(觀相), 궁합(宮合), 택일(擇日),
풍수지리(風水地理) 등으로 풀어 미래를 점쳐주는 역술인(易術人)들이 성업(盛業) 중입니다.
심지어 대학입시를 앞두면 ‘쪽집게 과외’까지도 고액으로 거래됩니다. 이렇게 궁금한 미래에 대해서
역술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불행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무속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꼬이거나 맺힌 개인사를 풀고자 씻김굿(解怨祭)이나 기복제(祈福祭), 위령제(慰靈祭) 등을 전문적으로 드리는
무당(巫堂)들이 그래서 많습니다. 무속과 역술에 대한 이 같은 현실은 윤리적으로 판단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현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혼이 영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 당위적 현실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일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영적 갈증을 보여주는 징표이며,
민족 단위의 사상에 있어서나 개인 차원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혼과 영의 결합은 더욱 절박한 과제임을
말해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⒎ 2백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진리를 들여와서 전해준 신앙선조들도 단군 이래 명맥을 이어오던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에 대해 그 종교적 맥락은 물론 미신화의 피해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양 신학이 반영된 천주교 교리를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게 토착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인데, 이 토착화의 노력을 우리도 계승하여 민족 복음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외래 종교의 인상을 졸업하여 민족 복음화의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도 유교도 외래 종교였습니다만 토착화의 노력 덕분에 우리 민족의 사상으로
들어오게 된 교훈에서 배워야 합니다.
단지 오늘날의 무속과 역술이 미신화된 요소가 있다면 창조 신앙에 입각하되 삼재 및
태극 사상의 본래 취지에 비추어 질서있게 정돈하면 됩니다. 특히 신자들에게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실체를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알려주는 한편 조상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영적 위계질서를 가르치는 일은 십계명의 제1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매우 엄격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⒏ 민족 복음화의 중차대한 과업에 있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대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어 예언자들도 보내시고 구세주까지 보내시어
인류 전체가 하느님의 빛을 받게 하셨듯이, 우리 한민족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비슷한 시기,
즉 대홍수와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 문명의 여명기(黎明期)에 하느님의 빛을 받아 천지인 삼재 사상과
태극 사상으로 홍익인간을 실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그 소명과 역사는 외세에 부역하던 세력에 의해 핍박을 받고 가려져 왔고
그래서 중화사관(中華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음험한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이 그늘진 역사에는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들도 중화사관에 빠진 유림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역사도 포함됩니다. 일제는 총칼로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으면서 한민족의 혼까지 빼앗으려고 식민사관을
강요하며 민족 사상의 원류도 신화(神話)나 미신으로 격하시키고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해방 이후에도 무속과 역술이 천하게 취급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 조상을 공경하는 제사에 조상을 신으로 간주하고 불러내는 초혼(招魂) 의식 등에
미신적 요소가 있어 교황청에서 금지했다가 호된 박해를 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교황청에서도 조상공경을
표현하는 제사에서 미신적 요소를 배제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께 공경의
예로써 절을 하며 연도까지 바쳐드리게 된 과정이 좋은 거울이 됩니다. 이런 좋은 선례에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와 사상을 미신화시키지 말고 복음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셔서 귀먹은 벙어리를 치유해 주셨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소통시켜주는 예언 활동이 필요합니다.
원래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맡길 예’(預)자를 써서 예언(預言)입니다.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미래의 일을 함부로 점치는 ‘미래 예’(豫)자를 쓰는 예언(豫言)이 아닙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공동선에 있어서 시대의 징표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예언활동도
필요하지만, 개인사에 있어서도 성숙한 신자들이라면 무속이나 역술에 의지한다든지 기복신앙에
머물지 말고 예언의 은사를 발휘할 필요도 절실합니다. 이 은사는 온전한 영혼, 원만한 인격 그리고 건전한
영성을 갖출 때 주어집니다. 또한 서로 간에 빚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한(恨)과 상처를 보듬어 치유하자면
우리네 인간관계가 좀더 정이 넘치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게 됨으로써 부마현상에 빠지지 않고,
우리 교회와 민족이 하느님께 충실하고 인류에게 빛을 비추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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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신앙인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분의 삶의 방향이 우리를 구원과 행복으로 이끌어 주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주위의 모든 것, 곧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환경과 인간의 관계, 환경의 변화 등에서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기보다 의심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어떤 악의와 안 좋은 의도가 있는지 의심합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 선의와 의향을 의심하면서 그 뒤에 도사리는 꼼수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호의와 친절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군중 가운데 몇몇 사람은 예수님의 선한 행위도 그 놀라운 기적도 믿으려 하지 않고 왜곡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선한 의지를 왜곡할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없는 능력과 힘을 질투하여서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인기를 예수님께서 빼앗아 가실 것만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 왜 자신에게 그런 선한 의지를 표현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만 기적을 행하시는지에 대한 불만과 불평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의지와 행위를 왜곡하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 사라지는 사회 문화가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한 번쯤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시작해 보는 것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의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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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사회의 위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다른 여가가지 위기가 있지만 가장 큰 위기는 ‘기후변화와 인구감소’라고 합니다. 기후변화는 인류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구감소도 우리사회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태어났던 1960년대에는 매년 100만 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58년이 지난 2021년에 태어날 아이는 20만 명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추세로 30년이 흘러간다면 대한민국은 엄청난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육과 국방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3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인구감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주의를 뜻하는 모더니즘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종교의 자리에 과학이 들어오는 시기, 신의 자리를 국가가 대신하는 시기, 경쟁을 통해서 성장하는 시기,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근대주의는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풍요속의 빈곤을 만들어냈습니다. 2번의 세계전쟁은 인간의 지성과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빈익빈부익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코로나19 앞에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식(知識)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知)는 입으로 화살이 들어가는 형상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굶주린 사람은 도와주고, 아픈 사람은 보듬어 주고, 잘못했으면 부끄러워하는 것도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서 무지(無知)한 사람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것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돈 때문에 형제를 속이고, 양심을 파는 것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것, 다윗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것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식(識)은 소리와 말을 배우는 형상입니다. 아이는 배워야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배움의 결과입니다. 인류는 사냥하는 법, 농사짓는 법, 불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고, 가르쳤습니다. 예술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다고 하였습니다. 무식(無識)한 사람은 마땅히 배워서 알아야 할 것을 배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헤로데가 구세주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무식한 행동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무식한 행동입니다.
오늘 독서는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망각했습니다. 당연히 지켜야 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의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무식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젖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구세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지식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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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 하느님 공부, 삶의 공부 -
요즘 전개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갖는 느낌은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의 부정적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고귀한 품위의 아름다운 인간이지만 동시에 참으로 끝없는 탐욕의 추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사상누각砂上樓閣의 오늘 날의 문명처럼, 참으로 스승을, 중심을, 방향을, 전통을, 영혼을, 길을 잃고 욕망의 사람들만 득실 거리는 혼란의 디지털 시대같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잃은 시대같습니다. 참으로 결정적 마음의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無知;ignorance)입니다. 무지로부터 시작된 마음의 병은 하느님을 잊은 망각, 마음의 완고함, 눈멈, 오염, 무분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이나 제1독서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이들 역시 무지에 눈먼 완고한 사람들이요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의 부정적 본질같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분도수도자의 특성을 요약한 참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비단 분도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본질적 열망을 대변하는 말마디로 이 또한 인간의 긍정적 본질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위대한 생태사상가인 김종철 선생을 잃었고, 올해는 위대한 통일운동가인 백기완 선생을 잃었습니다. 어제는 제가 애독하는 녹색평론에서 김종철 선생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읽었고 나누고 싶습니다.
2015년.10월 25일 법정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의 ‘맑고 향기롭게’의 일요특강 “공희供犧, 생태문명의 원리’ 주제하에 시공을 초월하여 실감나게 전달되는 내용중 쌀과 쌀밥에 관한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자기를 제물로 하여 바친다’는 불교 용어인 공양供養의 원래 뜻인 공희供犧는 그대로 우리의 성체성사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마디입니다.
공희供犧의 표현이 주님의 성체요, 우리 또한 공희가 되어 복음적 섬김의 삶을 살아갑니다. 잡곡밥이 좋다 하지만, 여전히 쌀밥에 끌립니다. 어제는 모처럼 저녁 쌀밥에 나중에는 반찬없이 꼭꼭 음미하며 씹어 먹었습니다만 역시 뒷맛이 좋았습니다.
“지금 우리 쌀이 왜 남아돌아가고 있습니까? 쌀을 안 먹고 엉뚱한 것 많이 먹기 때문이잖아요. 예전에 이렇게 밀가루를 많이 먹었습니까?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었습니까? 지금 쌀을 안 먹잖습니까. 밥을 안 먹잖아요.
쌀이라는 것은 밀하고 달라서, 밀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서 영양 균형을 맞춰야 하지만 쌀은 완전식품이라서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품성에도 관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사람들보다 동양 사람들이 대체로 정서가 좀 정적이잖아요. 저는 이것이 쌀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디도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명상생활을 하는 동안에 채식만 하다가 우유를 몇 잔 먹으니까 자꾸 잡념이 생기고 마음이 가라앉질 않더라는 거예요. 예민한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이렇게 음식이 굉장히 중요해요. 음식이 우리 세포를 만듭니다. 우리를 만들어요.
저는 아이들이 된장도 안 먹고 김치도 안 먹고 쌀도 안 먹고 가공식품과 고기만 먹다가 이상하게 되지 않나 걱정이 됩니다. 집집마다 요즘 아이들이 다 자기 부모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잖아요, 그렇지만 등산이라도 같이 해보면 굉장히 약해요. 지구력도 없고 강인하지 못해요.
저는 밥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밥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밥을 지키기 위해서 농민들이 어떻게 고생하는가, 하늘과 별과 바람과 비가 땀과 결합헤서 종합 예술품으로서 쌀이 나오는 거잖아요.
일찍이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 ‘만사지식일완萬事知食一碗’, 밥 한 그릇을 제대로 알면 만사를 안다했는데, 하나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압축하고 있는 말이 공양인 거예요. 아, 하늘과 농부와 별과 바람과 비가 결합해서 하나의 제물이 되어서 나를 모시는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밥 먹는 시간이 한없이 거룩해집니다. 쌀 한 알 씹으면 희열이 생깁니다. 나한테 희생되겠다고 온 거잖아요.
해월 선생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그랬습니다. 만물의 관계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다. 하늘이 하늘을 먹여 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말한 ‘하늘’은 모든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하늘의 도움없이는, 하늘의 정기없이는 어떤 생명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없어요.“
그대로 성체성사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하늘인 우리가 하늘이신 성체의 주님을 모시는 미사시간이 아닙니까?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식사하는 시간은 참으로 겸허와 감사로 하늘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또한 하늘이 되는 거룩한 미사시간의 연장인 겁니다. 그러니 하늘을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런 밥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정말 심각한 병은 육신의 잡다한 병에 앞선 마음의 병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 완고함의 병, 탐욕의 병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끈질기고 심각한 무지의 바이러스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들이 우리를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영육의 모든 잡다한 병들의 뿌리에는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잊은 무지의 병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그리도 많은 병에 죄요, 병자와 죄인들 세상인것입니다. 병자들과 죄인들로 차고 넘치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을 아는 하느님 평생 공부가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자승자박自繩自縛 제꾀에 제가 넘어간, 오늘날 영리한 듯 하지만 참 어리석은 무지의 현대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예레미아가 탄식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대로 오늘의 부정적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여전히 반복되는 오늘날의 인간현실이 아닙니까!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광야인생 여정중 세 유형의 인간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성인, 하느님을 떠난 폐인이나 괴물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중독되거나 미치면 폐인이요 괴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무지의 완고함에 눈먼 군중들은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적을 몰라보고 곡해하여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중상 모략하며, 예수님 자체가 하늘의 표징인데 한 술 더 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일갈이 이들을 잠잠케 합니다. 예나 이제나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마귀魔鬼와 악귀惡鬼들을 제압하는 가장 힘센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양자택일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인가, 또는 주님 편에 서지 않고 주님과 떨어져 무지의 눈먼 어리석은 삶을 살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평생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아는 공부와 우리를 알아가는 삶의 공부가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매일미사보다 평생 하느님 공부와 삶의 공부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육의 건강을 선물하시며 배움의 여정에 한결같이 겸손하고 검소하고 근면한 평생 학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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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72개국 사람을 대상으로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행복을 조사했습니다. 우선 노인과 젊은이 중에서 행복도는 누가 더 높을까요? 정답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행복도가 낮은 계층은 어디일까요? 3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인 중장년층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54세 이후로 행복도가 급상승했습니다.
중장년층에서 행복도가 낮아지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기대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2~30대는 막연한 큰 기대를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서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중장년층으로 실제로 실직이나 이혼도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런 감정의 바닥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부를 조정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꽤 살만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노년이 젊었을 때보다 더 큰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모두가 행복을 느끼게 될까요? 노년이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것에 대한 만족이 없으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작은 것에 대한 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자기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웃들과 함께할 때 분명히 커다란 행복감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희망을 품으면서 크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한다면, 주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에 군중들은 깜짝 놀라지요. 벙어리 마귀는 다른 마귀들보다 훨씬 기가 세고 고집불통이기 때문에 쫓아낼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에는 어려운 일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어려운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 내고, 대신 마귀의 전능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깁니다.
자기 편을 제거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마귀들이 그렇게 할까요? 누구 좋아하라고 자기 편을 없애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참 진리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거짓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는 노력보다는 크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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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갈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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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법륜 스님의 책을 읽다가 어떤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고민 많은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과 딸이 30살이 넘었는데 취업에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아직도 준비 중인데 정말 고민입니다.”
이 고민에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30살 넘었는데 나쁜 짓 해서 교도소에 있는 자식도 있고, 결혼하고서 불화로 이혼해서 할머니에게 손자를 맡기는 자식도 있고, 사업이 망해서 부모 호주머니를 다 털어가는 자식도 있는데…. 아주머니 자식분들은 참 효자네요.”
맞습니다. 세상에는 고민거리만 가득한 것 같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모두가 다 감사한 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더 많나요? 고민이 많습니까?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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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묻습니다. 복을 바라는지 저주를 바라는지.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대해 몇 사람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이라고 수근거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선을 악이라 부르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목소리지요.
말을 못 하던 이가 말을 하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요. 한 사람이 평생 얽매여 있던 억압과 부자유에서 풀려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사람은 마음에 품은 것을 누리기 마련입니다. 형제의 치유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는 것이고, 의혹과 왜곡의 마음으로 비틀어 보면 자신이 믿는 대로, 마귀 베엘제불의 힘을 선택한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주님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시는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 7,27)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이 엮어 온 관계성의 역사는 슬프게도 거부와 불순종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신부로 선택하신 백성에게서 신랑이신 하느님은 늘 내쳐지고 외면당하셨지요. '백성의 불륜과 배반, 하느님의 분노, 백성의 회개,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안고 가는 문제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계획과 주님의 뜻이 상충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주님의 뜻을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것으로 외면해 버리기도 하니까요. 대놓고 베엘제불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주님의 선의를 왜곡하고 의심하며 결국 자기 뜻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알면서도 주님께서 보내시면 순종해 그분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는 예언자의 심정을 느껴 봅니다. 무수한 참 예언자가 하느님처럼 배척받고 무시당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지요. 예수님 역시 이를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계십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이들의 마음의 문을 끊임없이 두르리며 진심의 사랑을 알아들어 달라고 호소하십니다.
갓난 아기가 그 조그만 손으로 아빠나 엄마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에너지가 흐르는 장면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선의와 호의, 진실을 의심치 않고 순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창조하고 살리시고 되살리는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지해 살아가는 겁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느냐, 베엘제불과 함께 살아가느냐는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의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최선인지 의심하며 그분을 시험하고 떠보는 일을 그만 멈추라고 호소하십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주님 현존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 기대어 나아갈지, 베엘에불의 힘을 힐끗거리며 나아갈지, 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녹록치 않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손가락 꼭 잡고 그분 현존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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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에 대한 군중의 반응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놀라워 한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런 막말을 해댑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다양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써 온전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딴지를 걸면서 폄훼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의로운 일에 끝까지 딴지를 걸고 폄훼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너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보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기보다는, 시기하거나 그 의로움을 폄훼(헐뜯음)할 수 있습니다.
너의 의로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11,2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편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고, 마음이 갈라져 사탄의 편에 서면 결국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 편인가?
아니면 사탄의 편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30,15.19b-20)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편에 섭시다!
생명과 행복을 선택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매달립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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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하시다가도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길은 참 많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 수많은 지뢰가 매설된 지역, 그래서 크고 빨간 글씨로 ‘절대 출입 금지’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길은 절대로 걸어서는 안 되는 길이겠지요.
전문 등산객들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맞습니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가장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깜박하고 목적지를 놓치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재빨리 유턴 지점을 찾아 목적지를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기본이 뭔지? 상식이 뭔지?
인간으로서 통상적으로 해야 할 바가 뭔지?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지도와 좌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재설정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회심’이요 ‘회개’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동족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이렇게 외칩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레미야서 7장 24절)
참으로 딱한 백성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길이 아닌 길을 걸었습니다.
절대로 들어서지 말아야 할 우상숭배의 길, 사탄의 길, 짐승의 길, 불순종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간절한 외침에 귀를 꼭 틀어막고 배신과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진노는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벌하시다가도 눈물 흘리시는 분, 내리치시다가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니,
또 다시 당신 백성들을 가련하게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또 다시 우리 인간을 향해 허리를 굽히시며 통사정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예레미야서 7장 23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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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선교하지 않는 신앙인 = 전쟁 중 탈영한 군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들을 믿게 하려거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은 마치 악의 세력과 전쟁터에서 싸우시는 장군과 같으십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서 그분 곁에 머문다는 사람들이 “혹시 적군 아닌가요?”라고 하거나, “아군이라는 표징이 있나요?” 라고 한다면 답답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군인이라고 하면서 그분과 함께 싸우지 않는 사람은 적군이나 다름없습니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탈영은 어느 군대에서는 사형입니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직무를 이어받아 세상에서 악과 싸워가며 교회라는 방주에 사람들을 태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의무는 하지 않고 놀고먹으며 불평만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어떠한 단체나 사회도 그 사회에 머무르려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해야 합니다.
지난해 6월 8일, 서울 강동구 고덕역 인근에서 구급차를 가로막아 이송 중이던 환자를 숨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최씨(32)는 사설 구급차가 앞으로 끼어들자 고의로 들이받아 사고를 낸 뒤 “사건처리를 먼저 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최씨는 “환자부터 이송하고 오겠다.”라는 구급차 기사의 말에 “죽으면 내가 책임진다.”라며 붙잡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환자 이송은 11분이 지체됐고 80대 환자는 최적 시간을 놓쳐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씨는 수리비 명목으로 총 72만 원을 받아 챙겼습니다.
최씨는 지난 2017년 7월께에도 서울 용산구 인근에서 택시를 운행하다 사설 구급차가 끼어들자 고의로 들이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밖에도 2017년 6월부터 2019년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작은 사고에도 크게 다친 것처럼 행세해
보험사로부터 1700여만 원의 보험금을 받아 챙겼습니다.
2015년과 2016년엔 피해 운전자에게 직접 370여만 원을 치료비 명목으로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최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최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었습니다.
검찰에서는 2심 때 2년 징역형은 너무 가볍다며 7년을 구형하였습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이란 커다란 한 사회에 살기 위해서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사회에 피해를 주고 결국 사회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당합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 사회가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더 완전한 행복의 나라를 원하십니다.
19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주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사건은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로프에 걸려 차갑고 깊은 바닷속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허우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몇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와줘요. 난 헤엄칠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영에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익사자의 가족은 그 사람을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렇듯 사회에서는 그저 남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의무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무관심으로 누군가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책임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지옥이라는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배에 타서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 배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얻어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선교하러 오셨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배에 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선교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에 사기를 떨어뜨리는 탈영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열네 척밖에 배가 없는데 수백 척의 일본 배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몇 명이 탈영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려워서 떠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들의 목을 칩니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습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누군가에게 당하고 있는데 팔짱만 끼고 있는 자녀는 잘못이 없을까요?
그것 자체가 부모를 괴롭히는 사람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혼을 구하기 위해 악의 세력과 전쟁 중이시고 우리는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팔짱만 끼고 구경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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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사순 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보고도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는 상대를 좋게 보려는 사랑의 마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가 들린 사람이 있어서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이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놀라워하면서도 박수를 쳐도 모자랄 판에 우두머리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고 합니다. 심보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치유를 해 주셨으면 자기들의 이웃이기도 한데 같이 더불어 살면서 굳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되는지 말입니다. 이건 그 벙어리가 싫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그런 기적이 그들의 눈엔 '눈엣가시'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기적이 신령한 하느님의 권능이라든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들에게 그 어떤 표징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그들 마음에는 마음을 쓰는 심보가 이미 어떤 현상을 삐뚤하게 보려는 심보가 있어서 그게 있는 한 어떤 표징도 그들의 눈을 가려서 볼 수가 없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적이라는 게 큰 기적만 기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하루하루가 어쩌면 하나의 작은 기적의 연속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걸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적을 보고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 우연히 알게 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뇌에 문제가 있어서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재활을 하고 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때 그분이 하신, 인상적인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건강할 때 두 발로 걷을 수 있었던 게 얼마나 그게 하느님의 축복이었는지 하고 말입니다. 그땐 그게 축복이라는 걸 전혀 몰랐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리는 작은 기적인 이런 축복도 하느님의 축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모습 속에서 저의 모습도 이런 면이 있지 않은가 하고 반성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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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1. 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예레7,23-28)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23~24)
예레미야서 7장 23절은 직접화법을 사용하여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해 명령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출애굽 직후에 우선적으로 명령하신 중요한 요구사항이 바로 순종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1사무15,22)
예레미야서 7장 23절에서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내 말을 들으라'는 요구이다. 풀이하면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요구이다.
여기서 '너희는~들으라'에 해당하는 '쉬므우'(shimu)는 '듣다'란 의미 뿐만 아니라 '순종하다'란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능동 명령형 동사이다.
또한 '내 말을'(내 목소리를)에 해당하는 '베콜리'(beqolli)는 전치사 '뻬' (be)에 '목소리', '소리', '말'이란 의미를 지닌 명사 '콜'(qol)에 1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가 부착된 형태의 표현이다.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뻬'(be)는 종종 주어가 목적어에 대해 인격적으로 위탁함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여기서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느님의 목소리,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같은 본문의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제사 이전에 당신을 향한 인격적 신뢰, 그리고 그에 따른 순종을 요구하셨음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당시 선민들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도 않았으며, 그에 대해 순종하지도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인격적 신뢰와 순종의 자세없이 드리는 제사는 분명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하느님을 비인격적인 자연물 등을 신격화한 우상처럼 취급하는 가증하고 역겨운 것, 죄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7장 23절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들이 얻게 될 축복이 제시된다. 그것은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계약적 관계를 소유하게 되며,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탈출기 19장 5절에는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다만 하느님의 소유, 곧 하느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며 특별히 보존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말씀은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도 역시 상기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하느님의 소유, 하느님께 소속된 자로 인정받기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들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제사 의식만으로 자신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누리는 자들이라고 확신하였고 자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먼저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할 것이 제사가 아니라 순종에 있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라는 명령을 주시며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제시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안전과 유익, 선한 삶 등의 축복이 주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앞서 제시된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이것을 감안할 때 주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주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은총, 하느님의 보호와 위로, 돌봄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 역시 형식적 제사 의식만으로 축복을 기원하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가 신앙의 본말(本末)을 왜곡한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예레미야서 7장 24절에서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남부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점차 악화되어 결국 배반으로 치닫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남부 유다의 반역의 면모는 '그들은 순종하지도 않고'이다.
이것에 해당하는 '로 샤메우'(lo shameu)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부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와 '듣다', '순종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샤마으'(shamah)의 완료형이다.
이것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로 제시되는 것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이다.
여기서 동사로 사용된 '힛투'(hittu)는 '뻗다', '펴다', '기울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나타'(nata)의 사역형으로서 앞서도 사용된 부정어 '로'(lo)와 더불어 사용되어 듣지 않으려는 고의성이 강조된 표현이다.
이어서 세번째로 제시되는 것은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이다.
여기서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와 '고집스럽게'란 표현은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대체하여 자기들의 행동의 원리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발한 것이다.
특히 '걸었다'에 해당하는 '와이엘레쿠'(waielleku)는 계속적 의미의 접속사 '와우'(wau)에 '걷다', '실행에 옮기다', '행하다'란 의미를 지닌 '얄라크' (yallak)동사의 능동 미완료형으로 즉각적인 행동, 또는 실천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과 거절로 일관하였으며, 즉각적으로 그것을 대체할 것으로 자신들의 악한 본성, 사악한 마음의 꾀를 따르며 그것이 요구하는 것에 주저함없이 순응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것은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이다. 여기서 '뒤를 향하였다'는 것은 '등을 내게서 돌렸다'는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 그 누구도 왕의 앞에서 등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설령 왕 앞에서 물러날 때에도 뒷걸음질하여 물러나야 했다.
일반적으로 등을 보인다는 것은 변덕, 변절, 변심, 배신을 의미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앞이 아니라'는 말은 '그 얼굴을 나에게 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얼굴을 향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자비와 은혜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얼굴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질시하고 미워하고 인격적으로 모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본절은 아주 쉬운 회화적 표현을 통해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선민들의 죄악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벙어리 마귀 치유
(루카11,14-26)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말하지 못하고 사람의 뜻으로 말하는 이를 성경은 벙어리, 눈 먼 이라고 한다(병행 복음 마태12,22-30 ; 마르3,20-27 참조)
성경을 사람의 눈(수준, 지혜)으로 읽었기에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말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 말 못하는 이가 하늘의 진리를 말하게 된 것이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표징 이신데, 그들이 그 하늘의 진리를 못 보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못 보는, 눈 멀고 말 못하는 이들인 것이다. 오늘날도 내 소원을 들어 주시는 그 능력의 예수님으로 본다면 눈먼 이가 되는 것이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만 말했고, 그 하느님의 일만 하셨기에, 하느님의 손가락(능력)으로 마귀를 쫓아 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세상) 노예생활에서 이끌어 내신 후 광야에서 십계명을 주신 일이다(탈출31,18)
십계명은 하나의 계명이다. 그 열 개의 계명, 한 계명씩 그 안에는~ 나무 하나의 희생(죽음)으로 쓴물(죄인)이 단물(의인)이 되는 (탈출15,25), 그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그 계명인 것이다.
그 나무 하나의 희생, 그 사랑이 담겨있는 곧 십자나무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의 계명인 것이다. 십계명은 그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사랑의 계명인 것이다.
그 사랑, 그 하나의 계명을 모르고 열 개의 법으로 받아 지킨, 그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을 챙기려 했던 것이~ 마구(뱀)의 유혹, 그의 거짓말인 것이다.
그 유혹을 먹은 아담의 후예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계명(말)을 참으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본래 세상은 하느님의 신성인 사랑, 그 사랑의 법, 계명으로 지어졌다(로마1,20)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인간의 계명이 들어왔고, 오늘 그 인간의 계명이 쫓겨났으니 하느님의 말씀, 계명(사랑)의 회복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다시 드러나 나타난 그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 율법(힘센)으로 완전무장을 하면 우리의 재산(구원)은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불가능 하기에 율법으로는 *죄만 알 뿐인 것이다(야고1,8~11 로마3,20참조)
그래서 힘센 그리스도, 곧 율법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그 율법의 힘센 무장을 解除 시키고, 우리의 재산(헛된 구원)을 다시 빼앗아 더 힘센 그리스도의 영의 것으로 참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더 힘센 그리스도의 영, 그분이 구원의 진리임을 깨닫고 그분 편에 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말(가르침)로 이웃이 그분과 하나,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웃에게서 마구(뱀)의 말, 그 더러운 말, 영(마귀)이 쫓겨 나는 것이다.
24a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 세상은 하느님의 본성, 사랑, 그 진리의 말씀(물)로 지어졌기에 그 진리의 물이 없는 곳을 찾지 못한다.(로마1,20)
24b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하느님의 말씀(계명, 지혜)을 마음 안에 진리로 잘 간직하고 있다가 인간의 말이 다시 들어오면,~ 곧 인간의 가르침(지혜)이 들어와 더 멎저 보이고 옳아 보여,(인간의 지혜, 계명은 인간의 도리이지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어리석게 생각되어 그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버리면, 말끔히 치워 버리면~
(1코린1,23 2,14) 1,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 그러면, 그는 더러운 영(거짓말)의 사람이 되어 영원한 감옥, 지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숨겨진 말씀을 깨달아, 성경을 하느님의 뜻, 지혜, 계명으로 읽고, 묵상하여 내 마음 안에 간직하는 그 실행을 한다면~ 더러운 영(거짓말)은 다시 쫓겨나고 구원의 진리(말씀), 곧 하느님의 약속이 다시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아멘.!!!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1,14~23)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0)
'손가락'에 해당하는 '닥튈로'(daktylo; the finger)인데,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며(탈출8,19; 31,8; 신명9,10), 특히 하느님의 능력을 의미한다(시편8,4).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을 표시하기 위해서 더 흔하게 '하느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탈출7,4.5; 9,3).
루카 복음 11장 20절과 병행되는 마태오 복음 12장 28절에는 '하느님의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3,22; 4,1.18참조).
구약의 표현에 있어서 '하느님의 손'과 '하느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었음을 볼 때(1역대28,12), 루카와 마태오 복음사가는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미 ~와 있는 것이다'로 번역된 '엡타센'(ephthasen; has come)은 '도달하다', '앞서오다'는 뜻이 있는 '프타노'(phthano)의 부정과거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그 시점에 이미 하느님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페2,2) 가운데 하느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면, 여기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이 기능한 또하나의 이유는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에프 휘마스' (eph' hymas; to you)라는 표현이 미래의 청중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군중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사건은 단순한 구마 기적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상징적 사건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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