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을 돌리던 벗이 시인이 된 이유
공장을 돌리던 친구가 시인이 되어 시를 쓴다. 그 자체가 격에 맞지 않는 일처럼 보이는데 시인은 스스로 자기 몸값은 병신육갑이라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내 고깃값은 병신육갑/박진한
도무지 얼마인가
미쳐가는 부도어음이
퍼질러 앉은 모래를 센다
지나가는 사람이 밟아 버렸다
남은 물기하나마저도 흩어진다
다시 모래를 센다
때아닌 회오리바람이 분다
타오르는 오기는 또 모래를 센다
너울파도가 삽시간에 묻어버린다
시작의 뒷면이 끝
마침내 모래의 숫자를 알았다
세상은 겨우 세알
지나간 어제를 다스리고
메마른 오늘을 적시며
암벽을 타듯 내일을 견디면
모래알 노래하는 모레다
그래
내 몸값은 세 근 고깃값이다
이 땅에서 순간 병신이 된다는 것
병신육갑 내 고깃값이
모레를 불끈 쥐며 모래를 흩트린다
* 연속된 부도를 맞고 휴지조각이 된 어음쪼가리 앞에서 망연자실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서 무슨 형이상학이 있겠는가. 이 시는 그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청업체 사장들의 현실을 전한다. 돈을 세고 있어야 할 사장이 모래알을 센다. 물기하나 없는 모래알을 센다. 직원들 급료는 무엇으로 주고, 밀린 자재값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그 고통을 드러내어 시인은 말한다. 세상은 겨우 모래 세알이라고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까지 포함해서 모래알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면 내가 일한 내 수고는? 그 값은 고기 세근 값도 못되는 병신육갑이지만 어차피 모래알 같은 인생이니 다시 한 번 일어서보자고 모레(미래)를 잡으려고 세고 있던 절망의 모래를 흩트린다. 우리사회가 쌓은 저 많은 부의 이면에는 모래알만 세고 있어야 하는 수많은 하청업체(말이 좋아 협력업체) 사장들과 근로자들의 피눈물이 서린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박진한의 다음 시 <당신보다 거짓말을 선택했다>를 보자
조그만 하청공장을 하던 시인이 7억도 못되는 7천만 원을 떼이고 참 자기가 아닌 모습으로 버티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한탄하며 목숨을 끊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유서를 쓰는 장면이 떠로른다. 모진 목숨 거짓된 삶을 다시 살아야 하나 여기서 끝낼까? 웰빙이란 말이 있으니 웰다잉이란 말도 있겠지. 마지막 남기는 말들 속에 선택 없이 선택되어진 언어들처럼 오늘의 나 또한 내가 선택해서 된 것도 아닌 것을-. 내가 살아야 한다면 남도 살아야 하는데 왜 세상은 자기만 살려고 “웰빙”만 외치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거기에 반기를 들고 “웰다잉”이라는 거짓말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진정한 참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보다 거짓말을 선택했다/박진한
칠천만 원 떼이던 날
生라면을 씹어 먹었다
하늘 통째 내려앉고
땅은 한숨보다 깊게 꺼져
두 발이 버티기엔 그 돌침이 너무 뾰족했다
‘리부팅’중인 가슴
오류 또 오류
그것이 원인이었다
타들어가는 지뢰, 그 선을 밟고 있는 당신
가장 짧은 단어로 비명은 잘렸다
네 발자국은 길게 묻혀 버린다
‘하드파괴’
붉은 신호가 들고
미쳐가는 피가 깜빡거리고
머릿속 배터리 희미해지는 끝을 잡고
줄줄 휘갈겨 마지막 말들을 적고
웰다잉이란 웃기는 놈 잠깐 떴다 사라지고
어지러운 합성어가 왔다 가고
선택 없이 선택된 언어를 당신에게 전한다
이런 시들을 통해서 시인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것도 우리시대의 우리 책임이 아닌가하고 되묻고 있다. 그래서 공장을 돌리던 그가 시인이 되어 지난 아픔들을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게 <다빈치 구두를 신다>고 외치는 이유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