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합동위령미사 강론(06/10/2025)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조상 전래의 한가위, 추석 명절입니다. 한해의 추수를 감사하고 조상들의 음덕을 기리는 이날 우리는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뜻을 담아 우리 선조들을 기리면서 한가위 합동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여러모로 우리를 도와주신 그분들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광명을 누리기 위한 뜻에서 이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을 대축일로 받아들이고 지내는 것은, 각 민족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통과 문화 속에서 복음이 뿌리내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한가위 대축일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추석 명절이 단순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축제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년은 특히 추석 연휴가 시작된 금요일(10월 3일 개천절)부터 10월 9일(목)까지 거의 일주일째 계속되는 연휴가 가족들이 오가는데 여유로움이 있고 날씨마저 비교적 쾌청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축복해주시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 추석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 살아있는 부모, 형제를 뵙고 효도와 우애를 다짐하는 것이나 산소를 찾아가 돌아가신 조상을 뵙고 그들의 고마움을 추모하는 이 모든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속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온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서로 그동안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차례를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특히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당신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안식과 광명을 누리도록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는 가정에서 가족들끼리 제사를 봉헌하고 또 본당 가족들이 함께 모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인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추석의 의미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생각하지만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미사와 더불어 제사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의 ‘중국 예식에 근한 훈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여겨 금지해왔고, 이것이 박해의 구실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 훈령에서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그 나라 민속으로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을 보호 육성한다. 또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전례헌장 제37항)고 밝히고 있습니다. 얼마나 개방적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임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늘 추석 명절을 지내면서 조상에 앞서 가장 먼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모 형제와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겠으며 이런 은혜로운 축제를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 주 하느님께 감사하고 기뻐 뛰어라.”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내려주시고 겨울비도 내려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주시리라. 타작마당에 곡식이 그득 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가 넘치리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덕에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호로 자식도 보통 호로 자식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 이는 자신이 쌓아놓은 재산과 명성의 노예가 되어 지상에서의 삶에 만족을 느낄 뿐 자신을 있게 한 근본,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의 우물에 떨어지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부자가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수확을 혼자서 독차지하면서 즐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부자는 그 날 밤에 횡사(橫死)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자는 그 많은 수확을 혼자 독차지하지도 못했고, 실컷 쉬고 먹고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둔 곡식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그 많은 수확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그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부자는 죽을 짓만 골라서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선 그 부자는 어떻게 해서 그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었는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지어 보신 분들은 어떻게 곡식이 열매 맺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 인간이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한 톨의 쌀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셔야 하고, 적절한 햇빛과 기후를 주셔야만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요즘같이 농사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하늘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풍성한 수확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이 짓는 농사에 작은 노력을 보탤 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 점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부자는 자기가 땀을 홀려 애를 썼기에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고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은 오직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오만한 마음을 먹은 것이 근본적인 잘못이었습니다. 그 부자가 그 많은 곡식들을 서로 나눌 줄 모르고, 혼자 독차지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 수확이 자신의 노력으로만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그 부자의 주위에는 가난한 형제들과 굶주리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의 눈에는 가난한 형제들과 굶주리는 형제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으로 눈멀어 있었고, 탐욕으로 눈멀어 있었습니다. 부자의 눈에는 하느님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 더미와 재물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많은 것들을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혼자서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치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혼자서 독자치할까 하고 고민한 것입니다. 그 부자는 살 궁리가 아니라, 죽을 궁리만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늘이 두려운 줄도 모르는 오만함이 그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부자는 창고에 재물만 잔뜩 쌓아 놓고 있으면, 얼마든지 호의호식하면서 잘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창고에 쌓인 재물을 더 믿었습니다. 그러나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이 그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고 조상의 은혜를 알고 뭔가를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묵시록의 말씀처럼 “ 이제부터는 주님을 기리다가 죽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 이 명절을 보내면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이들, 가진 것이 없어 제대로 명절을 지내지 못하는 이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명절의 기쁨을 함께 하는 살아 가득한 한가위 명절이 되기를 빕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라는 말처럼 크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명절을 보내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