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웨슬리”는,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각종 사회 문제가 산적했던 영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크게 변혁시켰습니다. 이러한 웨슬리를 깊이 연구한 “웨슬리 브레디”는 그가 저술한 “웨슬리 이전과 이후의 영국”이라는 책에서, 웨슬리 이전의 영국 사회는,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대중들은 짐승처럼 술에 취했으며, 흑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매매하고, 동포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유괴하고, 도박 중독, 감옥 제도와 잔인한 형법, 정치적 부패 등 크게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 이후의 영국 사회에 대해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잔인했던 감옥 제도가 인간다워졌으며, 사회적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가난한 사람도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브레디”는 이에 대해, “인애와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고, 죄악에 대한 민감성을 갖게 된 것은 새로운 사회적 양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사회적 양심은 생동감 있고 실제적인 기독교의 복음주의 부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집 밖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왜? 등불을 집 안에 두지 않고 집 밖에 두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기에, 밤만 되면 캄캄한 칠흑같이 되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프랭클린의 집 앞을 지날 때는 바깥에 켜놓은 등불이 거리를 환하게 밝힘으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민들은, 각자 자기 집 앞에 등불을 켜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거리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가로등이 생기게 된 계기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가 만연한 곳에는 사랑이 식고 공동체 의식이 사라짐으로,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본 회퍼”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도록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목숨을 걸고 회개를 촉구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D. l. 무디는, “이 책이 당신을 범죄에서 막거나 죄가 당신을 이 책에서 막거나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 타락을 막지 못하면 세상이 성도를 타락시킬 것이라는 겁니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였던 “호켄다이크” 교수는, “교회는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그 존재가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곧, 교회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사도직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 존재의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나 태도를 통해,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알게 됩니다. 그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누구라고 하실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의 기대와 격려와 소망이, 성도인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둠의 삶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같은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은 누구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빛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빛나는 참 빛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에, 요 1: 9을 보시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 8: 12에서는,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참 빛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5: 8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빛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겁니다. 어둠은 빛을 감추지 못합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어둠 속에서는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인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도시는 물론, 서양의 많은 도시들도 언덕과 같은 고지대에 건설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고, 어두운 밤에 불을 켜 두면 멀리서도 그곳만은 쉽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성도된 우리의 삶은 숨겨진 삶이 아니라, 세상에 밝히 드러나는 삶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삶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단 12: 3을 보시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이 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합니다. 성도는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늘 켜두고, 필요 없을 때는 “말” 같은 그릇으로 덮어둔다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모디오스”로, 약 8.25리터의 양을 채울 수 있는 나무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말” 아래에 둔다는 것은, 빛을 감춘다는 겁니다. 이는, 성도인 우리가 등불과 같은 빛 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에 청결한 양심, 깨끗한 마음, 참된 경건한 모습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가 가지는 삶의 가치관이나 인생관, 물질관, 세계관이 뚜렷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어떻게 세상 속에서 참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먼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추어야 할 빛이 내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내게서 반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의 죄악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어, 본문 하반절을 보시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등불을 켜는 시기는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가나안은, 불신앙의 땅이었습니다. 온갖 죄악과 불신앙으로 가득찬 땅이었습니다. 또, 모세가 가야 할 곳도, 그를 환영하지도 않고 유익도 편함도 기쁨도 없던 애굽이었고, 그 곳의 왕인 바로 앞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빌 2: 15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합니다. 여러분, 등불은 말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게 해야 합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는, 등불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비추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성도인 우리를 통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 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본문의 “너희 빛”은, 다음에 이어지는 “너희 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둠 속에 거했음을 알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이처럼, 성도인 우리를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요즘, “무료 성경 학교”라는 푯말을 들고, 버스 정류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는 교주의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이라며, 사람들을 교주 앞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교주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또,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세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본문 끝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순교자이며,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입니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 43: 7을 보시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우리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번을 보시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전 10: 31을 보시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미국국가를 독창했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 상패까지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은퇴할 때,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심으로 내가 유명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인 미국의 여류 소설가 “스토우” 부인은, “내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의 저자라고요? 천만에, 나는 절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비천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 내용이 차례차례 환상으로 보여졌고, 나는 단지 그것을 옮겨 놓은 것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찬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고전 15: 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는 세상에서의 빛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우리를 칭찬하기 보다는,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를 빛나게 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빛나는 성도와 교회와 가정이 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비춤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세상의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