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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 제단
27: 1-8
1.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찌며
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찌며
4. 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5.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찌며
6.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찌며
7.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찌며
8.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대로 그들이 만들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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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미터나 되는 성막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번 제단입니다. 그리고 뒤에는 물두멍이 있고 그 뒤에 성막 본건물의 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놋으로 만든 번 제단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자 합니다.
이 제단은 너비가 5 규빗(2.2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3규빗(1m30cm)으로 상당히 큽니다. 8절에 보면 이 단은 산에서 내가 보여준 대로 널판으로 만들되 속이 비게 하고 놋으로 싸고, 채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동식 제단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행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이 제단을 메고 다니며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어디서나 그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그리스도의 증표였습니다. 앞으로 움직이는 제단이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 죄를 사하리라는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제단이신데,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죄를 사해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1. 제단의 의미
제단 이란 원어는 “들려지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제단은 제물을 들어서 올려놓고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고, 그 제단위에서 제물을 드릴 때에도 요제나 거제 등은 그 제물을 쳐들어서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들려지다.’ 라는 단어도 그리스도를 계시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2:32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놋으로 만든 번제단에서 높이 들렸던 제물처럼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21:8)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갈 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고, 날마다 기적의 음식을 먹었으면서도 감사 하지는 않고 도리어 불평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와 불신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독사들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뜯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온 몸에 독이 퍼져 죽게 되어 살려달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엉뚱한 처방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놋쇠로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뱀 독이 올라서 죽는 사람들은 장대에 높이 들린 놋 뱀을 바라보면 독이 사라지고 산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처방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놋 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똑똑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3:14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제단위의 제물처럼, 광야의 놋 뱀처럼 높이 들리신다는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살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왜 높이 들려야 했습니까? 제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보셔야 용서가 되었기 때문에, 제물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라고 높이 들어야 했습니다. 제단위에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양이나 짐승들인데, 그 피는 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그 제단아래 붓고 그 제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제물을 드리는 이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를 십자가아래 다 쏟고, 높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화목을 이루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제단의 위치가 주는 계시
이 제단은 성막의 문 바로 앞에 있어서 밖에서 성막으로 들어가려면 꼭 거쳐야만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모세가 알아서 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러주신 그대로 배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치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하나님의 사이 중간에 계신분이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다른 길이 없고 다른 구주가 없습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그래서 불신자는 모두 전도의 대상인 것입니다.
천하에 사람이 수 십 억이 살고 있고, 이전 시대부터 살아온 모든 사람을 다 합하면 수 백 억이 넘겠지만, 그 많은 사람가운데서 죄 때문에 영생과 행복으로부터 영영 멀어진 인간을 영생의 하나님께로 데려다 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맡기려고 단 한분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통해야 하고 인간과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하고, 우리의 육체를 입고 우리의 고초를 다 겪으신 분이기에 우리와도 통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 죄의 형벌을 당신이 당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중보자의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죄가 없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아니면 그 누구라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딤전 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한분 밖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분을 통해야만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성막 뜰의 문을 들어서면 우선 그 제단이 앞을 딱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제단은 죽지 않은 사람은 가로막고 죽은 사람만 통과시키는 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짐승이 대신 죽어 주었어요. 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세요. 하는 경우에만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심을 믿으면 가능합니다.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존심, 자기 의지, 육신적 논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매단 놋 뱀이 내 몸속에 흐르는 독을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2000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오늘 내가 지은 죄를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말도 안돼, 나는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그 공로로 죄를 씻을 거야.” 아직도 이렇게 자기가 살아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제지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신비한 처방이었습니다.
롬9:32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었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지만 자기를 죽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겐 거치는 돌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자기의 공로나 선행이나 업적으로 신에게로 가고자 한다면 십자가는 그를 제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란 중보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중보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중매자는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값을 치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마다 ‘중보기도팀’을 만들고 중보기도를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분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기왕이면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 라고 하면 체면도 서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호응이 높을 것은 분명합니다. 흥행을 위해서는 그런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중보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성경적으로 옳지 않고 참람한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2000년 9월에 모인 85회 총회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금지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중보자로 봇물이 터지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신학생들도 분별없이 그 단어에 매달립니다. 왜들 그럴까요? 인간도 자기 속에 있는 잠재력을 일깨우고 계발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며 신에게 도전하게 하는 뉴에이지사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단이 하와에게도 그렇게 해서 무너뜨렸습니다. 교회가 뉴에이지 사상은 비판하면서도 뉴에이지 사상에서 출발한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다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제단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죄인을 가로막는 곳입니다. 죽어야만 거기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살아서는 아무도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임시적으로 사람 대신에 짐승을 죽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제물입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서 자기가 중보기도를 해주겠다는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논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는 것이며 이는 참람한 자세입니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대책 없는 죄인인데, 내가 필경 죽었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군요.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죽이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 주님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통하는 것입니다. 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막으로 갈 수가 없고, 그리스도를 통과하면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돕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고, 심각히 교만한 발상입니다. 딤전2:1에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도고라는 올바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평생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 즉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지만, 한 번도 내가 중보기도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고라는 말이 어려워서 못씁니까? 중보라는 말은 쉬운 말입니까? 도고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고, 중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나도 그 일 좀 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이번 주 기독신문에 신선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부전교회가 새로워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제 눈에 띈 것은 ‘도고기도팀’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서로 돕는 도고의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3. 뿔이 달린 제단
아마 전 세계에 있는 제단 중에서 네 귀에 뿔이 달린 제단은 모세가 만든 제단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단에 뿔을 달라고 하셨을까요?
제물 된 짐승을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 매기 위해서일까요? 이미 죽여서 각을 뜬 제물을 제단에 바쳤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이것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일을 계시합니다.
1) 뿔은 능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짐승의 뿔은 그 짐승의 힘의 상징입니다. 제단의 뿔에는 죽은 제물의 피를 바르게 되어있으며(출29:12), 쫓기는 사람이 성전으로 달려가서 제단 뿔을 잡으면 절대로 죽이지 못하고 살리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반역하였던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붙잡아서 살았고,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뿔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시18:2).
죽게 된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제단 뿔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복음의 능력, 천하의 만민을 다 구원할 수 있는 무한대한 능력, 어떠한 인간도 다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제단에 있다는 것입니다.
롬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제물 되신 그리스도는 만민을 살리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2) 네 뿔은 네 방향을 향하여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능력이 되셨다는 이 소식은, 동서남북에 전해야 할 참으로 좋은 뉴스입니다. 뉴스라는 영어는 North, East, West, South의 첫 자를 합한 말입니다.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퍼져야할,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높이 들려 죽으시고 그 공로로 죄인인 나를 살리셨다는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해당되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살리고,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이 복음이야 말로 Good News이며,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복된 발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온 세상 모든 족속에게 전하고 가르쳐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 우리 교회에 부과된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성도가 됩시다.
4. 나무로 짜고 겉은 놋으로 싸라
제단은 2m25cm×2m25cm 이나 되는 대형 단입니다. 거기는 족히 황소 한 마리를 각을 떠서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의 구조를 보면 좀 특이합니다. 속은 아주 단단한 쉬띰나무로 만들어야 했고, 겉은 놋쇠로 싸서 밀봉하게 하셨습니다. 쉬띰나무는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인성을 상징합니다. 그 나무 제단위에 불을 붙이고 짐승을 태웁니다. 그러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연약한 인성에 하나님의 가혹한 진노가 떨어질 것을 예고합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 라는 영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우리는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전에 이미 수많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물론 당하신 모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친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고 살에 맞는 끝에는 금속이나 뼈 조각을 달아놓았기 때문에 채찍을 치고 잡아당기면 살점이 줄줄이 뜯어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주 금식하시고 피곤하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쇠약하셨던 주님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살이 찢기고 터져서 온 몸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 나무토막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채찍 맞으며 올라가셨고,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우리가 바늘만 찔려도 고통을 참을 수 없고, 문에 손만 치여도 펄쩍펄쩍 뛰는데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작정하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놋쇠는 열전도가 아주 높은 금속입니다. 제단 위에 올려놓은 짐승이 재가 되도록 몇 십분, 몇 시간씩 태우니 제단의 놋쇠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놋으로 싼 제단 속의 나무는 놋쇠만큼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이 높아도 제단 속의 나무는 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놋으로 싸서 밀폐했기 때문에 그 속에 산소가 들어가지 않으니까 놋 판 속의 나무는 열만 한없이 높아지지 불에 타지는 않는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보여주고, 또한 그런 고통과 사망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너무 높은 고열에 벌겋게 달아오르지만 나무는 타지 않도록 놋쇠로 밀봉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모진 형벌을 다 받으셨고, 죽으시나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다시 살아나실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섬세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충 읽으니까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출애굽기 설교를 하면서 염려가 하나 생겼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런 계시가 거기 숨어있었네. 하나님의 말씀은 역시 완벽해, 요즘 나는 말씀의 맛에 빠졌어.” 하는 성도가 나오는 것은 만 번 좋은데, 혹시나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갖다 붙이시는지, 그게 정말 그런 뜻이었을까? 목사님이 억지로 갖다 붙이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 하는 분이 한분이라고 계실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유일한 성경인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책이라고 주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히 1:1-2를 보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창조하신 분이고 상속자이신데, 옛날에 족장시대나 선지자 시대에는 마치 퍼즐 조각처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들로 말씀하시더니 마지막 날, 즉 때가 되자 그 아들을 직접 보내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 계시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다른 부분과 연결하고 신약의 말씀으로 증명하면 구약의 본 내용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만 찾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 구약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게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나 복음은 값싼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가 쉬우면 쉬울수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부분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오실 것을 얼마나 많이 예고하였으며, 그가 하실 일을 얼마나 자세하게 예언하셨습니까? 그를 준비하시고, 그를 죽으시게 하시고,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를 당신 우편에 다시 올리시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켜 믿는 일까지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고를 알기나 합니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사실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큰 대가를 들여 준비해 주신 일이기에,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믿어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명확히 증언하는 구주이십니다. 철저히 믿고 사명감 있는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