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0-35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축복과 저주 / 안양준 목사
지난 주간에 저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온 성의 인구가 불과 만2천명 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성에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것을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범죄한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공동체 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은 여리고 성과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 근처의 에발산이라는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율법을 선포하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전쟁 중에 드린 예배입니다.
수 8:30에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여리고성 전투와 아이성 전투가 끝난 뒤입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가 아닙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신 27: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희가 요단을 건너간 후에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전쟁이 그쳐지지 않은 와중에도 여호수아는 에발산에서 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2.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새 돌로 만든 단
여호수아가 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8:31에 보면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철연장으로 다듬은 것이란 사람의 손이 많이 간 돌입니다. 그런 돌은 외부로 볼 때에 훤씬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철연장을 계속하여 사용하다보면 바깥의 모양에만 관심이 가고 실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관심을 적게 두게 됩니다.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단이란 외부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예배의 진실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수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가공되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아름다운 솜씨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 편에서 인간의 이성에 맞게, 편리하도록 다듬었을 때 보다 자유스럽고 매끄러워 보일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 아래 두려고 하는 신성 모독 죄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순수한 돌위에 8:32에 보면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언제나 말씀이 있습니다.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은 오랫동안 새겨 두기 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듣고 잊어 버릴 것이 아니라 돌위에 새겨서 두고 두고 간직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고후 3:3에는 ‘육의 심비’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비석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는 이렇게 순수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작업입니다.
3. 축복과 저주
8:34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의 회중이 모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듣기 좋은 축복의 내용만 낭독하지 않았습니다. 축복의 내용과 함께 저주의 내용도 함께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의 귀에 듣기 좋은 말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잘 알려진 부분이 신명기 28장입니다. 신명기 28장을 자세히 읽으면 1-1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축복을 기록하였지만 15-68절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 마음대로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히 살지 못하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에게는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많은 길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이 두 갈래 길을 축복과 저주라는 극명히 대조되는 길로 묘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날마다 만나는 갈림길은 축복 내지 저주를 선택해야 하는 두 갈래 길입니다. 마치 그 옛날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제시되었던 길처럼 말입니다(창 13:9, 10).
이제 여러분은 생명과 사망이란 두 갈래 길(신 30:19, 20), 좁은 문과 넓은 문이란 두 가지 선택(마 7:13, 14) 앞에 서 있습니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소년시절에 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알고 노래를 연습시켰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루치아노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가수의 길을 걸을 것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대답이 “루치아노야! 두 의자에 앉으려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일생동안 너는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결국 루치아노는 가수의 길을 선택했고 처음으로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7년,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에 도달하기까지 또 7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목소리를 주셔서 그 좋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의 일생은 언제나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한 의자’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축복의 산인 그리심을 택하느냐 아니면 저주의 산인 에발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결국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은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27절),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28절)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밀씀에 순종함으로써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요, 말씀이 자신의 삶 가운데 있지 않기에 저주가 따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