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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어의 치유력와 그림자의 인격화
-왜 이제부터 ‘문학치료’가 아니라 ‘문학언어치료’인가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동물 가운데서 로고스를 가진 유일한 존재다. 모든 동물 가운데서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말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러므로 말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 가진 유일한 존재인 이상 언어의 본질 구조와 인간존재의 구조와는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또한 역으로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유언이 인간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존재하는 한, 언어란 우리들의 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다. 언어는 항상 우리들과 함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어만큼 우리 인간과 친근한 것은 없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언어란 우리들에게 존재적으로 가장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들은 언어로써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 들지 않는다. 언어의 본질은 인간 그 자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일상성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말은 진리를 내포한다. 문제는 유전자는 정서적 언어에 크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문장을 정서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언어미학에 신경을 써야 한다. 언어에 색깔을 익혀 체질화시켜야 감동어린 문체를 획득할 수 있다.
미국 북텍사스대학교 제니 리 교수는 KICU 문학언어치료학 특강에서, 우리 몸 안의 면역세포는 언어에 반응한다고 말했다. 언어는 에너지이며, 파동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몸을 지배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이 한 말만큼 변화하고, 그 말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 몸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리학자이자 교수인 페니베이커 박사는 지난 20년간의 연구를 통해 "말과 글"이 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면역체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글쓰기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면 언어와 치유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II. 펼치며
1. ‘문학치료’ 용어 비판
문학을 활용하여 사람을 치료하는 행위를 문학치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독서치료와 글쓰기치료를 종합한 개념인데, 문학치료는 문학작품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치료자와 환자의 상호작용으로 읽기와 쓰기를 통한 치료라 할 수 있다. <문학치료>라는 개념의 문제점은 ‘문학치료’가 문학을 가지고 치료한다는 뜻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치료의 자료 또는 재료로서 문학이 아닌 것은 제외되어야 하는데, 현재 널리 통용되고 있는 ‘문학치료’ 개념 중에 ‘문학’이 문학 아닌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 일차적으로 문제가 있다. 문학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단편적 부분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한 통일된 유기체로서 전체 작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치료는 문학 작품으로 치료한다는 의미를 내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학치료는 개념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학치료란 개념 속에 논리적 모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문학치료의 범위 속에 일기, 반성문, 스토리텔링, 잠언, 아포리즘, 드라마, 연극 심지어 철학, 인문학까지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문학이란 개념을 너무 폭넓게 사용하는 것이며, 문학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일기나, 반성문, 스토리텔링, 드라마, 연극 등이 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수단을 통한 치료 행위를 문학치료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독서 치료도 문학치료에 포함되는데, 독서 행위가 문학 치료의 범위에 포함되려면, 텍스트는 반드시 문학이어야 하고, 통일된 유기체로서 작품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아닌 책으로 치료를 하는 것은 어떻게 문학치료라고 할 수 있는가. 글이라고 다 문학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독서치료가 모두 문학치료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문학이 아닌 텍스트로 치료하는 것을 문학치료에 포함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2. 왜 문학언어치료인가?
문학언어치료는 문학치료라는 개념의 비판적 성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학치료가 엄밀한 의미에서 독서와 창작을 종합한 개념이라면, 문학언어치료는 문학치료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독서와 창작을 비롯하여 문학이 아닌 문학적 언어를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 쓰이고 있는 문학치료는 문학언어치료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문학치료라고 하면 문학이라는 제품을 가지고 치료해야 하고, 문학언어치료는 문학적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치료학은 주로 비문학가들을 교육대상으로 해왔다면, 문학언어치료는 비문학전문가보다는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문학가를 교육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학치료와 치료자 특성에서 성격을 달리한다. 문학치료가 언어를 매개로 한 통일된 유기체로서의 전체 작품으로 치료하는 것이라면, 문학언어치료는 쉽게 말해서 문학언어, 즉 일상언어를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은 말이나 언어로 치료하는 것이다. 통일된 유기체로서의 작품을 포함해서 단편적 부분으로서 잠언, 광고 카피, 속담이나 격언도 포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치료가 내포하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문학치료에 쓰이는 자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차원에서 앞으로 문학치료는 문학언어치료로 개념을 수정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논리적 모순을 짚어 보자. 문학치료는 글쓰기치료를 포함한다. 글쓰기치료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저널(Journal)은 기존의 일기를 문제해결과 자아발견과 성장을 목적으로 개발한 글쓰기기법이다. 애덤스는 저널치료를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영적으로 더 나은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반성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라 명명하였다. 글쓰기/저널 치료의 효과는 글을 쓰는 사람의 주요 관심사와 갈등과 혼란스러운 점들을 명확하게 해 주며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던 과거의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과 그때 사건을 보는 현재의 느낌을 함께 쓸 때 치료의 효과가 크고, 거기에 얽힌 모호한 감정들이 의미 있는 감정으로 재구성됨으로써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일기는 그 자체가 문학이 아니다. 심지어 문학치료에서는 문학성에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문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문학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문학치료 안에 문학성을 배제한 비문학적 텍스트에 의한 독서치료와 글쓰기/저널치료를 포함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독서치료가 문학치료에 포함되려면, 독서 자료는 문학작품이 되어야 마땅하고, 저널치료에서 저널은 문예문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내부 모순을 안고 있는 문학치료란 용어의 문제점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개념이 문학언어치료라는 것이다. 또 하나 문학언어치료가 문학치료와 다른 것은 문학치료가 인간의 내면치료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문학언어치료는 인간의 언어행위도 치료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기술로서 언어를 전화하고 순화하여 대인 관계에서 불안과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3. 문학언어치료의 역사와 목적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스위스의 한 중세 대수도원 도서관에도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문학이 가지는 치유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치료와 성장을 위해 시와 노래가 쓰인 예는 이미 원시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제의에서 무당이나 제사장들은 개인이나 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서 시나 노래를 읊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대한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그것을 물(액체)에 녹여서 환자가 마시게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1030년경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의 시와 음악이 사울 왕 속의 “야수”를 잠재우기도 하였다. 의술과 예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신화 속 아폴로 신이 의신(醫神)이면서 동시에 시/예술의 신인 것을 봐도 알 수 있으며 테살리 지역의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신화에 보면 오세아누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은 병든 마음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했고 싸이코 드라마라는 용어에 이어 싸이코 포이트리라는 용어도 생기게 되었으며 1960년대에 오면 집단 심리치료의 발달과 더불어 심리치료사들이 시치료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치료는 재활, 교육, 예술창작, 상담,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정신의학전문가들은 첫째, 문학의 환기작용과 둘째, 글쓰기의 힘이라는 문학의 치료적 힘을 확인하여 주었다. 문학, 특히 수필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과 생각을 환기시켜 이끌어 내는 강렬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담자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글로 쓰든 아니면 자신만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쓰든 글쓰기가 놀라운 치료의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이봉희)
문학언어치료학의 탄생 배경에는 특정한 말과 단어가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바탕한다. 만사의 화근이 되는 입과 마음을 다스려 근심을 치유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데 문학언어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문학언어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 자기개발을 위한 문학언어치료이든 임상적 문학언어치료이든 소통을 통한 갈등의 연소이든 환자/참여자의 자아 존중감의 회복과 향상, 그리고 사기진작에 있다. 참여자의 전인적 성장을 도와서 자신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보다 아름답게 자신을 개발하며 변화될 수 없는 현실과 실존적 상황에 보다 창의적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써 내재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내적 능력과 적응기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듯이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관심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진정 먼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언어적으로 공격해 와도 자신을 잘 다스려 자신 있게, 슬기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다.
문학언어치료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증진시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인 존 던의 말대로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 누구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만남을 통한 치유”를 이루는 것으로 특히 그룹/집단 문학치료 모임의 토론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피가 뜨겁고 감성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학언어치료는 더욱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귀납적 사고 구조도 문학언어치료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갑’보다 ‘을’이 되는 상황이 많아지는 요즘에 말로 인해서 생기는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이 때, 문학언어로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불통으로 인한 불안과 갈등이 해소되어 행복한 삶이 보장될 것이다.
문학언어치료는 더 나아가 현실을 직면하며 그에 근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문학언어치료는 참여자들에게 ‘실존적 문제’를 직면하도록 돕는다. 실존적 문제란 예를 들어 “삶은 때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다. 아무리 타인과 친밀할지라도 나의 삶은 여전히 내 홀로 직면해야 한다.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해야한다. 따라서 보다 정직하게 살아야하며 사소한 일에 얽매여선 안 된다. 타인들의 도움과 인도와 무관히 내 삶의 방식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와 같이 우리가 보다 성숙하게 직면하고 포용해야 하는 실존적 한계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문학언어치료는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하여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 자아를 개발하며, 격렬한 감정들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생각, 통찰, 또는 정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자유롭고 풍성하고 유익한 미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자신의 문학언어를 갖고 문학언어를 창조적으로 생성하여 배려하는 언어를 구사할 때, 우리는 다치지 않고 싸우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치료사는 또 다른 “타인들” 즉 치료그룹의 참여자들과 함께 보물을 찾는 일이 용이하도록 도와준다. 치료란 바로 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초점이 외부의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인식의 변화와 자아의 발견과 성장, 확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문학언어는 갈등을 조절하는 기술로서 평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 로버트 풀검의 말대로 막대기나 돌멩이는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은 마음을 무너뜨린다. 문학언어치료는 누군가 공격을 해와도 마음과 입을 잘 다스려 언어적 모욕을 당하지 않고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측면에서 비폭력의 방법을 시사한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끝난다. 시의 일차적 기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놀라움에 있다.”고 말한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이끌며, 그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참여자 스스로가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문학/시라는 이 말 속에 문학언어치료의 과정과 효과가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정한 말과 단어는 행동뿐만 아니라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문학언어치료의 당위성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우리의 눈은 영국 시인 코울리지의 말대로 "낯익음과 이기적 근심걱정의 막"에 가리어져 있어서 세계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앞에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으되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막은 우리의 눈, 즉 판단력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습관성 때문에 통찰력이 무디어지고 자동화되어서 자동기계나 도식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그 막을 거두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것이 문학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 문학치료 참여자에게 자신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이봉희)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대화법이 다르다. 말과 언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그 의미를 갖는다. 배설하는 말이 아닌 배려의 말이 필용하다. Anger에 한 자만 더 하면 위험danger가 된다. 성숙은 공감의 가장 좋은 지표다.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평상시의 기대와 조금이라도 다른 친숙하지 않은 사물들에 주목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문장보다 감동어린 예술적인 문장의 필요성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5. 문학언어치료의 효과
문학언어치료학 전공 과정은 독서 치료와 문학 치료를 통합하고 시, 수필, 소설, 아동문학, 드라마 등의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 잠언, 명언등의 다양한 문학언어 치료적 매체들을 활용하여 치료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을 교육하고, 언어미학과 커뮤니케이션 기법 등의 소통적 연구프로그램을 개발함으로써 불안과 갈등을 조정하는 문학언어치료 교육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개설되었다. 문학치료가 인간의 내면, 즉 심리라는 한 측면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다면, 문학언어치료는 심리치료뿐 만 아니라 언어치료, 즉 화용론적인 측면을 포괄하면서 커뮤니케이션 기법까지도 다룬다는 면에서 문학치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외연을 확대하였다는 데서 문학언어치료학의 생성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문학언어치료는 진정한 자기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피투성이의 모습이거나, 용처럼 끔직스런 모습일 수도 있다. 내 스스로 미로 속에 깊이 가둬둔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처럼 나의 어둡고 고통스런 과거이거나 내면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이카로스나 디달로스 같은 창조적 힘과 자유에의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나의 모습이야말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나" 즉 자기인지 모른다. 미국 공인 문학치료사 이봉희 교수는 문학치료란 영어로는 포이트리테라피(Poetry Therapy),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 저널테라피(Journal Therapy)를 모두 포함한 말로 참여자와 치료사 사이의 치료적 상호작용을 위해 문학과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치료는 문학과 참여자(내담자)와 훈련받은 문학치료사/촉진자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으로, 참여자에게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자아인식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사(촉진자)는 참여자/그룹의 성격과 치료목표에 따라 선별한 여러 형태의 문학을 촉매로 치료적 대화와 토론을 사용하여 참여자의 통찰과 성장과 문제해결을 돕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교수는 문학치료와 관련된 글에서,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문학’은 여러 장르의 상상의 문학, 이야기, 신문기사, 노랫말, 연극, 시, 영화, 비디오, TV드라마, 일기 등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사용한 광의의 문학을 말한다. 문학은 치료를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하게 되며 치료 경험은 문학치료사, 시인, 또는 시/문학치료의 수련을 거친 전문가의 ‘촉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술로서 문학의 초점이 문학 자체에 있다면 문학치료에서 사용하는 문학은 예술적/문학적 가치나 위대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아발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고 했는데, 이 대목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은 어디 어떤 분야에서도 문학이어야 한다. 예술로서의 문학이 따로 있고, 문학치료로서의 문학이 따로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문학의 목적으로 교훈과 쾌락에 ‘치유’를 더 한다 해도, 문학의 목적이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교수는 “문학 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는 시, 일기, 콜라주나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등을 하는데 이때 참여자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나 자기 성찰이다.”라고 말한다. 요슈타인 가아더는『소피의 세계』에서 철학하는 유일한 능력은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다. 문학은 우리의 삶의 사소하고 작은 일상에서 경이로움과 즐거움에 놀라워 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개발해준다. 이러한 능력의 회복은 자아성찰로 이끌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더 심오한 정신과 영적인 경이로움인 믿음, 신뢰, 우정, 사랑, 아름다움, 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통찰력을 깨우쳐주게 된다. 아름다움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때 개개인은 산타야나가 말하듯 “자아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문학이란 언어를 통해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실천하는 장이다. 어떤 통념화된 가설이나 목표를 가지지 않는 횡단하는 유목민이다.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중심세력이 아닌 주변부 타자들의 담론인 것이다. 플로베르의 표현일어설은 문학언어를 캐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경구다. 평범하고 뻔한 내용의 것은 생소하게 표현하여 신선감을 일으키고, 새롭고 생소한 것은 오히려 평범하게 표현하여 친근감을 획득하는 방법인 순질이화나 이질순화의 기법도 자주 활용해야겠다.
문학언어치료사는 교환가치와 대립하는 문제적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써지 않도록 흔들어 깨워야 한다. 톡톡 튀어오르는 상상을 부여잡고 더 즐겁게 세상을 변주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글은 이 세상과 같아서 어디에나 있는 것 같지만, 멀어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먼 것이고, 꼭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신선한 시각은 고착되고 습관화된 사고에 새로운 눈을 부여하게 되며, 우리의 건강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유발시켜준다.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공간의 감옥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수인과 같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장소”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무한한 세계로 탐험하고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하며 결국 현실 속 우리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문학이 내면의 진실을 환기시키고 감정의 공감과 해방을 통한 정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문학이 지닌 심미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며 따라서 문학의 심미적 요소들이 문학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자신의 언어를 다루고 지켜보는 분야가 문학언어치료다. 창조화법과 긍정의 화법을 통하여 세상의 모습과 이야기를 새롭게 긍정적으로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문학언어는 문학언어미학에 홀리는 사람들 스스로를 들여다 보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전체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6. 수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다양한 학문이 발전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념투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보다 실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되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졌는가? 광야의 예언자나 영웅, 개척자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사라지고 물질적 풍요를 신봉하는 대중 집단의 시대가 열렸다. 비록 제1, 2차 세계대전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이념이나 인종간의 대립 또는 살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증오와 상호비난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융이 말하는 그림자의 인격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융 심리학의 최종 목표는 자기실현이다. 수필을 쓰면서 자기 성찰을 하는 이유는 자기실현을 위해서다.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시작되는 전환의 시대에 인간의 내면, 특히 그 어두운 측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지 모른다. 모든 재앙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 융은 사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 재앙의 근원뿐 아니라 이른바 '구원'의 근원도 발견하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악마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심역에 출몰하여 인간을 괴롭힌다. 무의식의 열등한 부분인 이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는 것이 그림자의 인격화다. 수필 창작은 바로 그림자의 인격화를 이루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문학언어를 가르치는 교수는 문법을 학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건설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단어 선택법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글쓰기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다. 인식이란 인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인도의 기업인 라메슈와 다스는 “말은 줄에 걸린 빨래처럼 마음의 바람에 펄럭인다.”고 했다. 망치를 휘두르며 관계를 만들 수 없다. 망치라는 연장 하나만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못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수필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엄청나게 큰 세계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우리의 마음' 이라고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남의 마음' 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마음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오해를 받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혹은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을 한탄하고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모른다"고 실토한다. 이로써 우리는 나와 남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평소에 모르고 지내는 '속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이나마 시인하는 것이다. 작가 스콧 피츠제랄드는 “최고의 지적 능력은 동시에 반대되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여부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실수는 몰라서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수는 발견의 첫걸음이다. 그 경험을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그 어떤 잘못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 마법사 멀린은 “슬플 때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길지 않지만 예의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길다고 하였다. 마음을 갈고 닦아 타인의 마음을 얻는 기술을 터득해야겠다. 수필에서의 설득이란 공감이다. 공감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자기 영혼과의 대화다. 마음의 문을 열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에 비유를 했지만, 융은 "섬"에 비유를 했다. 프로이트는 해면 위에 드러나는 빙산의 윗부분을 의식이라고 했고 해저에 있는 빙산의 아랫부분을 무의식이라고 비유를 했다. 그러나 융의 경우에는 섬의 비유를 통해 바다 위에 드러나 우리가 섬이라고 알고 있는 부분이 의식이며, 조류에 의해 드러났다 사라졌다하는 부분을 개인무의식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언뜻 보면 섬은 서로 분리되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섬과 섬은 사실상 해저면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융에 따르면 언뜻 사람과 사람이 달라 보이지만 깊은 집단무의식 층에 들어가면 사실은 "서로 이어져 있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만큼 인간의 정신에 대한 견해에 있어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보다 폭넓은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필은 무의식을 탐구하는 간접적 방법에 가장 효과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문학 장르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시시각각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의식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무의식의 적극적인 성찰의 한 방법은 심리학자에게 가서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인 분석작업이다. 또한 종교적 수행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한 인격의 창조적 변환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일상적인 자아의식이나 페르조나를 초월하는 신성한 힘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론 그런 종교적 수행이나 무의식의 분석작업을 하지 않아도 무의식을 깨달아나갈 수 있다고 융은 주장한다. 그것은 무의식 자체가 그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서 의식을 자극하여 무의식을 깨닫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대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상실의 아픔이 자기성찰의 귀중한 기회이며, 성숙에의 의미 있는 고통이듯이 우리는 언제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고,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런 체험,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병고의 시련으로 표현된다.
자아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느냐 모르고 지나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아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무의식의 창조적 작용은 융의 심리학적 용어로는 자율성(autonomy)과 보상과정(compensation)으로 표현된다. 마치 자율신경계가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신체기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신체생리를 조절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피가 모자랄 때 피가 부족한 피를 체내에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이 자동적으로 빨리 뛰는 것과도 같다.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의식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의 이미지를 활발히 보내서 그것을 보상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이성적인 남자의 꿈속에서 그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한 행동을 하게 하거나 평소와는 달리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만든다. 혹은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꿈에서 깃발을 들고 데모행진의 선두를 달리는 영웅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욕구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일방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무의식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자율적으로 보상작용을 발휘하므로 누구든지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자기인식의 작업을 소홀하게 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보상작용의 강도가 높아지고 무의식의 과보상(overcompensation)은 결국 의식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교란시켜 노이로제의 증상이나 생리적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식을 깨달아 나가야 하고 그 가운데 무의식의 중요한 내용들인'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자기' 라고 부르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무의식의 의식화과정 중에서 처음 만나는 무의식 - 그림자(shadow)는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무의식의 내용이다.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심리적 내용들이다. 그림자란 무의식 속에 있는 열등한 인격(성격)이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나(자아)와 페르조나의 의식 반대편에 있는 무의식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가 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그림자는 본래 의식에 가까운 무의식의 내용이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별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다.
우리 옛말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두 손이 맞닿아야 소리가 난다"라던가 "끼리끼리 싸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두 사람이나 두 집단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또한 민간설화에 많이 나오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가짜와 진짜 등 무수한 쌍들은 인간정신의 의식인 자아와 무의식인 그림자간의 명암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파괴적이고 위험하며,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어느 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자기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투사된 자신의 무의식적 그림자를 다시금 나에게 되돌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여 자신의 그림자가 깨달아질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그림자의 부정적인 작용은 해소되어, 자아의 삶을 돕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으로 바뀐다.
인간의 마음 속에 얼마나 무서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 심리적 의미에서 진정한 성숙의 첫단계라고 할 수 있다.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문제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림자의 투사는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 증오와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는 틀림없이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선입견을 서로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으면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두 사람 사이의 오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투사된 그림자의 내용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면 "그것봐, 내 말이 틀림없잖아. 그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투사를 강화시킨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간다.”고 했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하는 법이다. 앨런 클라인, 전 미국유머협회 회장은 “우리의 태도가 세상을 색칠하는 크레용이다.”고 했다. 그림자의 투사는 삶을 부담으로, 투쟁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 진실이 과장되면 상대는 분노하기 마련이다. 대화의 정확성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틀렸다거나 오해를 유발하는 말이 돌발행동만큼이나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림자의 투사는 직장동료, 선후배, 청소년친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크던 작던 자주 일어난다. 형제자매는 물론 시누이 올케사이, 또는 세대간,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 권위적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일어날 수 있다. 아들이 실제 이상으로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필요 이상으로 거북하게 느끼거나 어려워하고, 시누이 올케사이에도 서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 우리는 그림자의 투사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항상 그림자의 무의식적 투사에 의해서 비롯된다. 가족 중에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이며 '미운오리새끼'를 만들어 내는 것도 가족성원의 그림자의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라기보다는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이다. 가족구성원 중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의 그림자가 무의식적으로 투사되고, 그가 그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가족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저 애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지?" 등의 표현에 바로 가족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희생양'의 의미가 담겨 있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을 성찰할 때 성찰의 장애 요인으로 ‘그림자’라고 하는 심상과 부딪힌다. 그림자는 한 마디로 무의식에 들어 있는 인격의 열등한 부분이다. 그림자가 무의식에 남에서 출몰할 때마다 우리는 여러 증상들로 고통받는다. 그 증상들은 우울증도 있고, 히스테리, 강박증, 불안 신경증도 있다. 증산들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순전히 심리 영역에 머문다 하여도 고통스럽기는 육체적인 것보다 더 심하였으면 심하였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림자의 인격화는 정서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통한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의 자세로도 소통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직접적인 방법은 수필 쓰기다. 수필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소통에 참여한다. 수필은 감정과 생각, 의지까지도 표현하므로 소통의 길이 된다. 말하자면 수필에는 화자의 감정만이 아니고 정보와 사고까지도 실린다. 수필을 통해서 화자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고 개념을 통해서 그가 살아온 사회의 가치관에 어떻게 순응하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감정 상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문제는 화자가 수필에다 총체적인 자신을 싣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그림자의 상태로 자신을 무의식 속에다 매몰시켜 버린다. 즉 자신을 숨기고 잇다는 사실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본래 수필의 존재 의미가 소통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숨기고 있는 수필은 소통 상실이다. 그런데도 수필 언어에서는 은유와 환유라는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하므로 상실된 언어를 더더욱 은폐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흔하다. 감정의 소통으로 내면화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치료라면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다. 수필을 통해 정서를 고백하는 것을 상실된 언어를 되살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문학적 언어의 표현이라고 하여 내면 깊숙이 매몰되어 있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신분석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와 환유의 방법으로 변형하여 드러낼 뿐이다.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되게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이 가능하다. 문학언어라고 하는 은유와 환유로 자신을 담아놓을 때는 수필을 쓰는 자신도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진솔한 표현을 강조하는 수필 쓰기가 좋다.
수필은 소설과 시와 비교하여 다른 측면이 있다. 허구가 아닌 사실 자체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은폐시킬 수 있는 허구나, 진실하지 못한 표현은 수필의 정의적 개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성찰은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고나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III. 닫으며
문학언어치료학의 탄생은 ‘문학치료’라는 개념 비판으로부터 나왔다. 학문의 발전은 비판적 생성과 반복을 통해 더욱 융성해진다고 할 때, 문학치료에서 문학언어치료로의 변화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모든 것은 우리의 해석에 달려 있다. 사건 자체는 스트레스를 일으키지 않는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세익스피어는 “본래부터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법륜 스님이 말한 ‘제법이 공하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문학언어치료는 결국 문제를 해결하여 소통을 강화하는 길이다. 정서적 언어 활용을 통한 갈등과 불안의 치유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이다. 그림자는 의식의 반대적인 측면이므로 의식이 합리성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면 비합리성은 의식의 뒷면으로 배제되어 무의식을 형성하여 그림자가 된다. 도덕적인 완전무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에 어긋나는 부분은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그림자가 된다. 이렇게 형성된 그림자는 투사의 기전으로 타인을 통해 나타난다. 자기 성찰을 할 때 투사는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림자는 내 인격에서 제외된 부분이다.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나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결국 그림자는 의식의 세계에서 푸대접을 받아서 버림받고 추한 모습이라고 하여 우리가 영원히 또는 완전무결하게 추방할 수는 없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문학언어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발견이다. 문학언어치료사든 내담자든 텍스트의 이면으로 찾아가야 진실을 만날 수 있다.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서 살려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내담자가 쓴 글은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풀어야 할 기호 내지는 암호인 것이다. 이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이 바로 자기 성찰의 과정인 것이다. 글로 쓰여진 회상의 이면에는 다른 기억이 은폐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은폐된 기억에는 글쓴이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의식의 세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은 덮개기억이라는 유쾌한 기억으로 바꾸어서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심리 과정이 나타나는 이유는 억압해버리는 기억도 억압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픈 경험도 기억으로 남으려는 힘이 있다. 이것을 심층심리 용어로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때 경험의 주인은 타협점을 찾아서 별로 유해하지 않은 기억으로 대체하여 의식 세계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는 글의 표면적 내용 뒤에 숨어있는 자신을 탐구하고 성찰하여 숨어 있는 욕망을 찾아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자신이 옳다는 마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점이다. 선불교센타는 “누군가 무엇인가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그 누구인가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봉희 교수의 말을 결론에 대신한다. “릴케가『말테의 수기』에서 말하듯 세상은 거대한 병원인지 모른다.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의미에서 어떤 질병이든 병에 걸려있거나, 또는 잠재적인 환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중)는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은 다만 병이 들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깊이 병든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신체적 질병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 격변을 겪은 이후의 후유증 등은 거의 전문적인 도움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심지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경우라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이 그 도움을 받는 일 자체를 가족의 수치심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렇게 상담문화가 보편화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진지한 관심과 상담,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의 하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못한 환경에서 문학/예술이 본래의 기능과 가치인 치료적 힘을 회복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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