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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1편 7절-62편 1절.
61편 7절-8절: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62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61편 7절: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어떤 자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하겠느냐? 하나님께로 피한 자, 진리 속으로 들어간 자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거한다. 진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훈의 사상 정신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피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진리 신앙사상의 인격적 관계성적으로 들어가는 거고, 신앙의 세계는 이걸 다루는 거다. 단순히 ‘교회에 왔다. 안 왔다. 열심히 충성봉사를 한다. 안 한다’ 이런 걸 기준 삼아 보는 게 아니다. 진리 속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전도도 나올 수 있고 기도도 나올 수 있는 거다.
2절에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했는데, ‘높은 바위’란 시온성을 말하는데, 어떤 자가 시온에 거하는 거냐? 시온에서 누가 통치하느냐? 다윗이 통치를 한다. 그러니까 다윗의 진리통치 안에 거하는 자가 시온에 거하는 거다. 이 시온성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인데, 시온에 산다는 이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시온에 사는 자는 이해타산 사고방식 평가성이 모든 면에서 높다. 신앙사상이 높으려면 인격과 성품이 진리화 되어야 한다. 소원 목적이 세상성으로 되어있으면 아무리 ‘믿음. 믿음’ 해도 낮은 것을 말하게 되고 세상을 말하게 된다.
시온성에 거한다는 것을 진리의 높은 터에 산다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진리로 무장이 된 하나님의 본질적인 고차원적인 영적 신앙사상을 의미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진리생명의 말씀의 교훈으로 보호하신다. 아가페 사랑으로 보호가 된다. 진리생명으로 보호는 아가페 사랑이 들어있는 보호다. 아가페 사랑이라고 할 때는 교훈적으로 진리가 들어있는 거다. 진리사랑이란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을 흔히들 육적 일반적인 개념으로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한다. 말 자체는 맞는데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해서 죄를 짓는 곳에 끼어서 같이 죄를 지어주고 사람을 죄 가운데 살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말은 맞지만 아가페 사랑에는 진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사랑이 아니다. 사망에 먹히는 사랑이 아니다. 진리로 들어가 있다. 그러면 왜 무조건 사랑을 하시느냐? 상대를 올리기 위해서다. ‘무조건’이라고 하는 여기에는 주님의 성품의 질적 차원이 들어있는 거다. 이게 없는 ‘무조건’에는 사람이 살아나지 못하고 아무런 영생의 효력이 없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보호하시느냐? 진리진실로 사는 자를 보호하신다. 종교적인 세상 넓은 길, 사망 길, 인본주의 사랑, 인본주의 신앙사상에서는 진리로 되는 아가페 하나님의 보호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싶으면 생명 길, 좁은 길, 진리 신앙노선으로 가야 한다.
8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그리하시면.’ 어떻게 해 주시면?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를 보호해 주시면. 그러면 어떤 면으로 보호냐? 진리로 보호다. 이렇게 되면 자기는 진리 자체화가 되는 거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는데, 보호해 달라고 할 때 ‘내가 진리로 살겠습니다. 내가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살겠습니다. 나를 보호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를 진리로 인도해 주신다. 이게 주님의 보호다. 진리를 떠난 보호는 있을 수 없는 거다. 진리를 떠난 보호를 원한다면 이는 자기 욕심대로 보호해 달라는 거다.
자기의 욕심적이고 세상적인 보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보호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그 사상이 하나님 쪽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이게 옳은 거다. 자기의 소원 목적이 세상 쪽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이건 아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원하면서 세상을 의지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가 들어가겠느냐? 안 들어간다.
8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4절에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라고 했고, 그리 하오면 7절에서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라고 했다. 이 기도는 옳은 기도고 맞는 기도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신을 보호해 주시면 주의 이름을 영영히 찬양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우리의 기도도 이래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해 주시면 자기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 드린다고 하는 전제조건이 붙은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 어떻게 살겠으니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해야 한다. 이 기도가 바로 된 거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 다윗에게 하신 언약과 약속의 기도다. 다윗을 붙잡고 우리에게도 ‘너희들도 다윗처럼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
여기에 와서 이 교훈을 받다보면 기도가 줄어든다? 왜 그럴까? 이 교훈을 받기 전에는 늘 세상적인 소원 목적으로 이런 저런 걸 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게 되고 성경대로 기도를 하려고 하니 기도가 줄어들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다윗의 기도가 영적 차원의 기도인 것을 모르면 오늘날 자기는 다윗처럼 쫓겨 다니지 않으니까 다윗이 ‘나를 건지소서. 피하게 하소서. 높은 바위에 거하게 하소서’ 라는 등의 기도를 보면서도 그것이 현재의 자기에게도 영적으로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기도가 안 나오는 거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야 만이 그 일이 자기 마음에 들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하려면 천상 어려운 사건을 많이 당해야 한다.
왜 꼭 육신이 어떻게 되고 해야만 기도를 하느냐?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안 보이는 세계는 더욱 더 복잡다단하다. 사람마다 정신이 굴곡진 것, 꺾어진 것, 꼬불꼬불한 것, 빗나간 것, 이탈된 것 등 정말 복잡하다. 성격적인 면도 그렇고, 성질적인 면도 그렇고, 하지 말하는 것을 부득부득 하려고 하고, 하라는 것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하는 이런 게 참 많다. 자기의 이런 정신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에서 빗나간 것인 줄을 모르면 이런 것을 놓고 기도를 할 수 없다.
다윗은 자기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있는 거다. 그런데 다윗의 신앙차원이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에게 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에 맞는 기도를 했다. 이렇게 되니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가 된 거다. 기도의 응답이 척척 되는 거다. 그래서 모든 사사건건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간 거다.
다윗도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해 주고 싶은 게 있는 거다.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마땅한 기도, 하나님께서 해 주고 싶어 하시는 것, 응당히 해 주시고자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고 당연히 받을 것이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받아야 한다. 살아생전에 받고 가야 한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이게 없이 그냥 교회 다닐 거냐?
성경이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권고하는 것은 ‘하라. 그러면 내가 해 주겠다’ 이게 들어있다. 인격과 성품 면에 이게 들어있다. 그래야만이 세상에 있는 것을 이용해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원하신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 구하라는 것은 주겠다는 거냐, 안 주겠다는 거냐? 주겠다는 거다. 약속이다.
자기 속에서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거다. 그런데 뭐가 가장 시급하냐? 보통 보면 지혜를 구하는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생활 면에 지혜가 없구나. 하나님 아버지, 내가 생활 면에 지혜지식이 부족합니다’ 이런 기도도 있을 거고, 대인관계가 잘 안 되면 ‘내가 대인관계를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라는 기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에 대한 답이 성경에 다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얻고, 부족하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깨달음의 만나를 주신다. 이건 받는 자밖에 모른다. 들어주시려고 권고 권면하는 거고, 기도를 하라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약대로의 기도를 해야 한다.
다윗의 서원이 무엇이냐? 주의 이름을 영영히 찬양하는 거다. 다윗의 찬양은 그냥 노래를 부르기 위한 찬양이 아니라 환난 날에 피난처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증거의 찬송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기뻐서 속에서부터 나오는 게 찬양이다. 그래서 계:에 보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찬송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가 기도를 해서 하나라도 고쳐진 게 있느냐? 있어야 한다. 고쳐야 한다. 일반사람들이 나를 볼 때 별 허물이 없고 별 문제없이 일상생활을 해 나간다고 해서 고칠 게 없느냐? 아니다. 못 고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상황적으로 몰아붙이면 그 때 가서 고치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까? 말하자면 왜 꼭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려고 하느냐 그 말이다.
아이들은 이상하게 꼭 얻어맞아야 고친다. 이런 게 아이겠지만, 그런데 어른인데도 꼭 얻어맞아야 고친다면 이 사람이 애냐, 어른이냐? 애다. 얻어맞고 고친다면 얻어맞고도 안 고치는 것보다야 좋지만 얻어맞기 전에 말로 할 때 고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거다. 얻어맞고 고친 사람은 점수가 덜한 거다.
62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여두둔은 기브온의 성막에서 노래와 관현악으로 봉사하던 찬양대의 지도자다. 세상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다. 음악에도 법칙이 있다. 여두둔이 하는 노래에도 법칙이 있다. 가락의 법칙, 장단의 법칙, 강약의 법칙, 가사의 법칙, 고저의 법칙 등 법칙이 많다. 그런데 찬양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 사상적 감화 감동이다.
사람의 감화 감동성에는 선악과 먹고 나온 감화 감동성이 있고, 생명과 먹고 나온 감화 감동성이 있는데, 성전에서 여두둔의 법칙을 따라 하는 찬양은 성령에 감화 감동이 되어서 나오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신, 곧 성령에 감화 감동된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천국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우리에게 다 육신적으로 고향이 있는데, 나이를 많이 먹으면 왜 자꾸 고향을 그리워하느냐? 하나님 앞에 설 때가 가까워 옴을 알고 본향인 천국을 더욱 그리워하며 준비하라는 거다.
나그네는 외롭다. 고독하다. 나그네는 눈물이 많다. 나그네는 슬픔을 많이 겪는다.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노래, 인간 나를 지으신 원인 동기 목적에 대하여 감사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노인들은 세상에 대한 감화 감동을 받으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라고 노래를 하고, 청년들은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라고 노래를 한다. 그러면 교회의 청소년들은 어떤 노래를 하느냐?
성도들도 노래를 해야 하는데, 자연에 관한 노래를 불러도, 그리고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를 보더라도 성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과 섭리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것에서 신앙의 이치가 나오고 지혜가 나오는데, 이에 대해 찬양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된 노래다. 이런 노래는 가사도 아름답고 곡조도 아름답다. 이런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사람의 마음이 가사와 곡조에 따라 정돈이 되고 의로워진다.
우리가 부르는 진리성가 중에 아브라함의 노래가 몇 절까지 있느냐? 18절까지인데, 이걸 부르다 보면 성령에 감동이 된 자는 아브라함의 정신에 젖어서 기쁨으로 부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언제 18절까지 다 부르나’ 하며 부르게 되니 그만 지루함이 쓱 들어온다. 그러면 이 사람은 감화 감동이 없는 거다. 공암에서 집회할 때 아브라함의 노래를 부를 때 처음 참석하신 나이 드신 목사님이 어떻게 눈물을 많이 흘리시던지.
세상인간의 노래는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할지라도 전부는 해 아래의 노래다. 그런데 해 아래에 속한 노래라도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는 게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이런 것도 세상노래라고 해서 무조건 금해서는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만물을 보고 구원도리나 신앙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육신의 오각의 오감성에 속한 것도 많이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런 게 안 되면 진리에 관한 표현을 못하게 된다.
육신의 오각의 오감성으로 느껴지는 것을 육신으로 표현을 안 한다면 이 사람이 진리의 감화 감동성이 입혀졌을 때 이걸 어떻게 표현하겠느냐? 육신의 오각의 오감성의 느낌을 육신으로 표현하듯이 성령의 감화 감동성을 육신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감화 감동성을 육신으로 표현해 낼 때 이걸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육의 감화 감동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우리는 육신의 감화 감동성도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못 써먹으면 인간미가 없어진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술람미 여자를 사랑했는데, 술람미가 솔로몬의 옆으로 지나갈 때 이것을 본 솔로몬이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무척 사랑한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남녀가 시집장가는 왜 가는 거냐? 육신이 있다는 것은 육신으로 자기의 의사나 감정을 충분히 나타내라는 거다. 이게 참 아름다운 거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과 자기와의 영적 감각성을, 주님과 자기와의 사랑을 충분히 나타내라. 이 마음이 아름다운 거다. 사람이 감성이 진하고 깊어야 모든 사물을 보고 느낄 줄을 알고, 깨닫게도 되고,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는 거다.
남편들이 몸 파는 여자를 찾아가는 일이 있는데, 남자들의 마음이 왜 그리로 끌리는 거냐? 물론 몸 파는 여자는 사랑으로 좋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자기 아내에게서 몸 파는 여자가 해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곳에 가는 거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우리로 보도록 하는 거냐? 영적인 차원을 위해 육신적인 면의 오각의 오감성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 간에 충분하게 써먹으라는 거다. 안 쓰면 그만큼 둔해진다.
인간에게 오각의 오감성을 주신 것은 충분하게 느끼고 만족하라는 거다. 이걸 안 써먹는다면 이 사람은 그 면에 재앙을 받았구나.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주신 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에 마음껏 써서 충분하게 구원을 이루고 오라는 거다. 안 써먹고, 쓸 줄 모른 채 둔감하게 있다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세상노래에는 명랑한 노래도 있고,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다. 이런 세상노래는 아무리 열심히 불러도 다 마치고 나면 뒷맛이 허무하고 울적해지고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세상노래는 자기가 좋아서 부르는 것뿐이지 아무 뜻도 생각도 없는 거다. 장구를 퉁퉁 치면 그 옆에서 듣는 사람은 가슴이 울린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에 동요가 온다. 이래서 한두 사람이 뛰어나가서 그 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면 같이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가서 함께 춤을 춘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뭘 깨달아서 그러는 거냐? 귀로 듣고 마음이 울려서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 여기에는 뜻이 깊은 생각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해 놓고서 나중에는 펑펑 운다. 그렇게 울고 나도 아무런 뭐가 없다.
요즘의 노래는 음란하고 발광이고 난잡한 게 많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속에 든 것이 발광적으로 표출이 된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일수록 머리털 색깔도 파랗고 빨갛고 노랗다. 이게 그 사람의 정신을 말해주는 거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깨닫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은 없고 속에 든 것이 발광적으로 표출이 될 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