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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말씀/ 히브리서 5:11-6:20 요절/ 히브리서 6:1,2 | 2023. 2. 12 | |
히브리서 제 5 강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제가 근무하는 직장에는 작년에 할아버지가 된 분이 있습니다. 옆에서 보니 그분은 손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저를 별로 관심 없는데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손주의 성장 뉴스를 전합니다. 사실 누워있던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고 서고 걷기 시작할 때 부모는 기쁨이 넘치고 육아의 고단함을 다 잊습니다. 배변도 못가리던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게 될 때 감격스러워 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을 영접함으로 영적인 생명이 태어난 우리가 점점 성숙해져 갈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숙한 크리스찬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시간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는 영적 성숙의 비결을 배우고 실천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웃음꽃이 활짝 피게 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단단한 말씀도 배우고 순종할 때 성숙하게 됩니다.
5:11절을 보십시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함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독자들이 영적인 깨달음이 둔하여 이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여기 ‘둔하다’라는 말은 6:12절에 나오는 ‘게으르다’와 원어로 볼 때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데 게으른 타성에 빠져서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이요? 아유 복잡해요, 구지 그런 것 까지 알아야 하나요? 단순하게 설명해 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말 아닙니까?” 이에 저자는 왜 히브리 성도들이 단단한 말씀도 배워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 성도들은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달 받은 기독교 3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신앙생활 한지 30년 가까이 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어 이제는 성경선생이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신앙이 쉽게 흔들리는 것을 볼 때 초보 말씀공부를 다시 받아야 할 처지 되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는 복음의 말씀을 가르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은 받지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헌신, 희생, 주권신앙에 관한 말씀은 부담스러워하고 체험한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장성한 자는 튼튼한 이와 소화기관이 있어서 알타리무도 씹어 먹고, 갈비도 뜯어먹고, 잡곡밥도 잘 소화시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장성한 자는 단단한 말씀도 지적인 감각, 영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그 의미를 깨닫는 자입니다. 여기 ‘연단을 받아’라는 말씀은 ‘훈련되어’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읽고 깨닫고 삶에 적용하는데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전후문맥도 살펴보고, 배경지식도 찾아보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자 힘쓰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는 자들입니다.
과학자들은 어린 아이가 조금씩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발육에 좋다고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씹을 때 뇌 신경세포가 활성화 되고, 칼슘과 불소 성분이 있는 침 분비가 많아져 충치도 예방 되며, 입 주변근육의 발달로 언어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성숙해져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어려도 단단한 음식을 먹기 시작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숙도 같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을 볼 때 신앙경륜이 오래된다고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도 조금 단단하고 부담되는 말씀도 자꾸 배우고 묵상하고 적용할 때 성숙하게 됩니다.
강찬솔목동님은 단단한 말씀도 잘 받는 귀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으로 요나서를 읽으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배우려 하지도 않았던 자신을 죄인으로 깊이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목동 준비 말씀은 로마서였는데 바울과 같이 죄의 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그는 이번 전국학생수양회 인생소감 강사가 되기까지 성장했습니다. 신앙생활 한지 1년도 안되었는데 찬솔목동님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단단한 말씀도 배우고 영접하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말씀, 여러 번 읽고 생각해야 하는 말씀, 순종을 요구하는 부담되는 말씀도 잘 받아 성숙해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야 합니다.
6: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저자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구체적으로 6가지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들입니다. 2개씩 연결되어 있는데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란 죽음 혹은 정죄를 유발시키는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요 안수는 치유를 위한 기도나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질 때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마지막날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것을 말하며 영원한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 곧 둘째 사망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것들이 초보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저자는 이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은 NIV 성경에 ‘beyond’로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또한 ‘완전한 데란’ 'maturity'로 성숙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히브리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서 완전한데 곧 성숙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기초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초가 중요하지만 기초만 닦으면 안 됩니다. 집 짓는 사람이 기초만 닦고 기둥을 세우지 않고 지붕을 덥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망으로 치닫게 하는 죄의 행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 인간의 죄성과 , 나의 죄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가, 이런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가 깨달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 힘과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은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 부활신앙으로 사망권세를 이기고 한계를 뛰어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고 닮아가는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9-10절을 볼 때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로 알고 믿었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삶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절기나 제사와 율례가 있는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장기간 지속되는 핍박과 삶의 역경으로 말미암아 지쳐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초를 넘어서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주를 넘어서 만유의 상속자요, 세상의 창조자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천사,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을 예수님,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알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갈 때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도 삶의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 성숙한 신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운전을 시작하면 뒷 유리에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운전한지 몇 십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왕초보, 저도 제가 무서워요”라고 쓰고 다니면 안 됩니다. 무서워서 고속도로 운전은 시도도 못하고 집 가까운 곳만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장롱면허로 퇴보하면 더욱 안됩니다. 생활과 업무 운전은 기본이요 수양회 픽업도 하고 선교사님 공항 픽업도 할 줄 아는 성숙한 운전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초보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보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릴 때는 얼마나 미숙했습니까? 목자님에게 사랑 받고자 동역자와 경쟁하느라 속이 시끄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믿음이 연약해 명절에 부모님께 핍박의 말 조금만 들어도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했습니다. 스피릿이 넘치면 연약한 자들을 판단하고 다운되면 잠수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조금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겨지면 분을 내고 거친 말을 쏟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주변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배워가며 이런 초보적인 신앙을 넘어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여기서 안주해야 할까요?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
그런데 저자는 6: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였습니다. 영적 성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해하거나 ‘빨리 성장 좀 해라’ 푸쉬(push)하지 말고 겸손히 기도하며 영적 환경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고 닮아 성숙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에서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럴 때 삶의 다양한 문제들 곧 물질문제, 인간관계문제, 노후문제, 양문제, 동역문제 등을 해결해 나갈 지혜와 힘을 예수님으로부터 얻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얻는 데만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측량할 수 없이 크신 분이심을 깨닫고 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닮아 가고자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퇴근 후 센타 와서 30분 이상 말씀묵상과 성도의 교제와 1:1을 통해 예수님을 배워가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결단을 지켜갈 힘주시길 기도합니다.
4-6절에서 저자는 성숙이 아니라 오히려 기초가 무너져 버린 자들 곧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받을 무서운 결과를 경고합니다. 그리고 어떤 밭은 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채소 내지만 어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처럼 무엇을 믿고 성숙해 지느냐에 따라 인생의 열매는 극명히 차이가 남을 가르칩니다.(7-8)
셋째, 영혼의 닻인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6: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저자는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게으르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며 약속을 상속 받은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소망이 풍성히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시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오래 참음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믿음의 선진인 아브라함도 복의 근원이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기업인 이삭을 받은 것 신앙생활한지 25년 후 였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믿음을 지키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두가지 변하지 못하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곧 약속하신 하나님과 이를 맹세로 보증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맹세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지만 연약한 아브라함을 위해 친히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저자는 소망이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휘장 안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신 곳입니다. 휘장 안에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실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참 소망입니다.
특히 저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내면의 중심은 영혼입니다. 영혼은 영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본질입니다. 사단은 죄의 유혹과 사망의 권세로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고자 합니다. 그런데 배가 닻을 내리면 폭풍우나 파도에도 떠내려가지 않듯이 참 소망이 있는 자는 사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이 강건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씁니다. 운동와 건강식을 챙겨 먹고 요즘 말로 ‘멘탈이 털리지 않기’ 위해서 독서와 명상과 산책 등을 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배가 표류하거나 파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나만 ‘벼락거지’가 되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파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와 죽음을 접할 때 사망권세의 태풍이 불기도 합니다. 공부의 중압감이 많은 JBF들에게는 신앙생활은 내려놓고 학업에 올인 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의 폭풍우가 불기도 합니다. 좋은 직장을 얻고 결혼하고 승진하는 것 같은 축복의 해류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영혼의 닻인 소망입니다.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튼튼하고 견고한 참 소망입니다. 그러나 참 소망, 하늘 소망을 가진자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단한 말씀도 잘 배우고 영혼의 닻과 같은 소망을 든든히 가짐으로 더욱 성숙해져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넘어서 예수님을 더욱 알고 닮아 성숙한 신자가 기도합니다.(김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