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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송년예배특강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히12:1-13
요절/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하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은 송년예배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전 생애에 걸쳐 거룩한 나그네의 길,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2019년 한 해 동안도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지금까지 왔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지만, 때로는 세상을 향해 눈 돌리고 안일과 연약함으로 죄악에 넘어지기도 했고 고난과 시련으로 절망하고 주저앉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 해만 돌아보더라도 신앙생활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 한숨과 부담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내하며 신앙의 경주를 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이신 예수님께 한 수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먼저,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나 혼자만 외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고 지금도 함께 하는 분들이 많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 인내하라는 걸 보면 아마도 어떤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은 로마에 사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연대는 AD64-67년 로마 네로황제 때입니다. 64년에 로마에 큰 화재가 났습니다. 콜로세움 같은 대전차 경기장에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해 6일 동안 로마의 14구역 중 10구역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때 네로황제가 로마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건설하기 위해 고의로 불을 지르고 불을 보면서 시를 읊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네로황제는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여러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 예수만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이 미움 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때부터 신자들에게는 고난의 경주가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매달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소뿔에 찔려 죽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면 신자들을 공중에 매달아 불로 태워서 등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대교는 지도층의 노련한 타협으로 핍박 없이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예수님을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남은 자들도 고통스런 이 신앙 경주에서 탈선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겐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11장에 보면,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비롯한 19명의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얘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구름 같이 많은 선진들도 우리 못지않게, 혹은 더 혹독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므로 하늘상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바톤을 넘겨받은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잘 해주기를 바라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길에는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고 그들과의 관계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인들은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재도 있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옆에만 돌아봐도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이 있고 또 내년에도 각 캠퍼스마다 새롭게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삶에 대해 확신과 위로를 받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은 결코 나 혼자 달려야 하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 아닙니다.
둘째,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경주의 관건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경주자가 할 수만 있으면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뛰면 가장 효율적으로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중을 생각해서 최소한의 팬츠와 러닝셔츠만 입고 달립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도 할 수만 있으면 홀가분한 몸으로 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도들을 무겁게 하고 얽매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달리고자할 때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반복해서 제자양성에 실패한 경험이, 사명에 대한 부담감이, 인간적인 정과 욕심들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지 않는 습관들도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 방해 요소입니다. 지나친 인터넷 서핑이나 게임, 웹툰, 습관적인 TV시청이나 세상의 잔재미를 즐기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저자는 ‘죄’를 표현할 때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죄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죄에 빠지면 쉽게 빠져 나오기 어렵게 됩니다. 호기심 때문에 쉽게 죄를 짓는 순간 죄는 그 사람을 얽어매어 죄에 끌려 다니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칼 하임은 죄를 ‘창살 없는 감옥’에 비유했습니다. “죄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 이 감옥의 문은 누구든지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한번 들어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왜냐면 그 감옥의 문은 오로지 밖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얽어매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특히 불신의 죄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모임을 분열시킵니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게 되면 미움과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세상욕심이나 탐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소원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세상과 비교하고 세상의 잔재미들만 즐기다보면 영적소원이 퇴보하게 됩니다. 또 정욕의 죄가 큰 장애물이 됩니다. 정욕을 품으면 죄의식과 수치심과 무력감이 엄습하여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무거운 것들을 회개하고 털어버리고 벗어버릴 때 심령이 날아갈 듯 가벼워집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새 힘이 솟아납니다. 영적 소원도 강렬해집니다. 얼굴도 환해지고 스피릿도 넘치고 발걸음도 가벼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로 인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시 때때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회개와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셋째,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왜 인내가 필요합니까? 우리의 달리는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마라톤에서는 여러 번의 dead point가 있다고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는 죽음의 구간을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달리는 방향과 바람이 반대로 불어 강한 바람의 저항을 뚫고 달려야 하는 코스도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리 달려도 속도가 나지 않고 숨은 턱에까지 차고 다리는 풀리고 정말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납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에도 이런 크고 작은 시련들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갑작스런 어려움을 겪는다든지, 애써 섬긴 사람들이 도리어 마음을 할퀴어놓고 떠난다든지 할 때면 믿음의 경주를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게만 여겨집니다. 내가 드린 수고와 진심에 비해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우리 마음에 낙심이 들어옵니다. 인간관계에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길 때 피곤하고 지칩니다. 세상과의 비교의식 때문에 마음이 슬플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안에서조차 패배의식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이때도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참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어떤 일에 있어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그가 ‘끝까지 참았느냐’, 아니면 ‘참지 못하고 포기했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참고 신앙의 경주를 마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달려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경주자는 그의 시선을 늘 코스의 종착지를 보면서 달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를 하는 경주자도 그의 눈과 시선을 항상 예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이는 계속해서 fix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겨울에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갔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어느 날 아침에 소년과 할아버지는 산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시합을 청했습니다. “너와 내가 5분을 걸어서 누가 더 똑바로 걷는지 내기하자!”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발을 쳐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걸었습니다. 그는 결코 늙고 연약하신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5분 후에 각자 걸은 길을 돌아보니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자로 똑발랐지만, 소년의 걸음은 삐뚤빼뚤 엉망이었습니다.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허리도 굽고 힘도 없으신데 그렇게 똑바로 걸을 수 있었나요?” “얘야, 너는 네 발을 보고 걸었지만 나는 저 산위의 소나무를 보고 걸었단다. 목표가 정확하면 걸음도 정확해진단다.” 신앙의 경주를 하는 우리도 우리의 눈과 마음을 예수님께 fix하고 달려야 합니다. 소년이 자기 발만 쳐다보고 달린 것처럼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모세를 바라보았습니다. 핍박받는 초라한 가정교회보다 날마다 웅장하고 화려한 의식이 있는 유대 성전제사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안에서 화려한 가운을 입고 속죄 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합니까? 우리는 날로 변해가는 화려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나이에 걸 맞는 존경과 명예,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주위의 크고 화려한 교회들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교회가 안 된다, 안 된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 해도 메가 처치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의 모 교회는 관광명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웅장한 예배당, 그 안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의식이 있는 예배를 부러워하기 쉽습니다. 반면 작은 교회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 섬기는 제자양성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캠퍼스 현실과 양들만 바라보면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가셨고 그 길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린 한 번의 제사로 온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으면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눈을 고정시켜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킬지라도 어떤 예수님께 고정하느냐에 따라 달리는 길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 넘치는 예수님만을 생각합니다. 만사형통의 예수님께 눈을 고정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교회의 부흥과 성공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무슨 일이든 잘 되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현장을 보면 어떠합니까? 십자가가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실패가 있고 좌절이 있습니다. 수치가 있고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이런 현장에서 우리의 눈이 영광과 존귀, 능력의 예수님만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고난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한눈을 팔며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고난을 피하고 편하고 쉬운 길만 걸으려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달려야 할 길을 제대로 달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리려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의 실상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보다는 능력과 영광과 권세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신자가 당하는 고난은 마치 예수님을 잘못 믿어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안타까운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또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자기에게 거역한 죄인들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참으셨습니다. 3년 동안 친히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며 섬겼던 백성들의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를 참으셨습니다. 이들을 참으실 뿐 아니라 이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하시며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리다 언제 낙심하고 지칩니까?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그것도 믿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우리는 마음 드려 누군가를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의 약점을 들고 와서 심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나름 해명하고 변명하지만 상대방은 자기주장만 고집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픕니다. 양을 섬기다가 이런 일을 몇 번 당하면 더 이상 양을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동역자들과 이런저런 일로 몇 번 부딪히면 관계를 끊고 적당히 살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나름 말씀대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보다 못한 형편 때문에 그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낙심하여 지칩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가 받은 상처가 치유됩니다. 다시 일어서서 달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기에게 거역한 죄인들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반항적인 사람들도 참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 같은 죄인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죄인에 대해서도 참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이 유다처럼 배반하고, 백성들처럼 배은망덕하고 거역하기를 수시로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원망의 말, 불신의 말, 교만의 말, 거역의 말을 다 참으시고 끝까지 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거역하고 배반하는 사람들로 인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가 평생 바라보아야할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fix시키고 예수님이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하셨는가를 배우고자 해야 합니다.
저도 히브리 성도들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도 가끔씩 세상으로 눈을 돌릴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고교시절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종종 듣게 됩니다. 형편 잘 나가는 친구들의 생활을 들을 때면 순간 스스로 마음이 위축될 때도 있었습니다. 복음역사를 섬기면서도 양들이 자라다가 떠나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작은 교회의 어려움 앞에서 사람이 많은 큰 교회를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은 제가 평생 눈을 고정하고 바라보고 배워야 할 분이 모세나 대제사장처럼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영광 받는 삶이 아니라 죄로 비참하게 죽을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드려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 십자가를 참으시고 거역한 죄인들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우는 삶인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듭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 섬기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내면에 큰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양들의 거절과 떠나감이 있는 복음역사를 섬기고자할 때 낙심이 되고 피곤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령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지라도, 일생 많은 제자를 세우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을 얻고 배우는 기쁨과 보람이 있다면 그 삶이 진짜 목자의 삶이요 제가 달려가야 할 길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참으시고 거역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배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의 현재 신앙은 어떻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죄들과의 싸움에서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달려야 할 길을 달리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습니까? 5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잊어버리니 세상의 유혹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없으니 그들에게 주어진 징계와 고난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훈련 앞에서 낙심하고 꺾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고 자식이 부모로부터 훈련을 받는 것은 자식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엄마 아빠로부터 훈련을 받지 못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는 친 자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들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관심합니다. 무관심하면 잘되거나 말거나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이렇게 저렇게 자식을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이 있고 훈련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의 참아들이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잘 감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훈련한다고 해도 감정적일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과도하게 징계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가 못한 일을 아들딸들을 통해 이뤄보려고 무리수를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훈련 때문에 아들딸이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훈련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나에게 꼭 필요한 훈련을 필요한 만큼 하십니다. 그 훈련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함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 거룩함은 의와 평강입니다. 즉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훈련으로 연단된 사람은 쉽게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반석과 같이 흔들림 없는 평안을 유지하게 됩니다. 혹시 현재 나에게 고난이나 훈련이 있습니까? 훈련 없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훈련의 과정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작은 시련이나 훈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달려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달려야 합니까? 우리는 고난과 아픔을 인내하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 그리고 당신을 거역한 자들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달려야 할 길을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달리는데 방해하는 무거운 것들, 걱정근심이나 탐심, 세상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 안에서 벗어버리고 죄짐들을 던져버리고 달려야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피곤한 손, 낙심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2020년 새해에도 힘찬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