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이병주(李炳注: 1921- )</p><p>경남 하동 출생. 일본 메이지 대학 문예과 졸업. 와세다 대학 불문과 수학. 진주 농대, 해인대 교수 역임. 1965년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지에 발표하여 등단. <국제신보> 주필 논설위원 역임. 그는 시간과 공간의 폭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지성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대중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준다. </p><p>주요 작품으로는 <마술사>, <패자의 관>, <변명>, < 산하>, <관부 연락선> 등이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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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배경 : 시간 - 일제 말기에서 8 15 해방, 6 25 전쟁,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민족 혼란기. / 공간 - 동경, 지리산. 인물 : 이규 - 몰락한 지주 집안 출신. 일본 프랑스로 유학함. 박태영 - 이규의 중학 동창. 동경 유학생. 좌익 남로당원, 빨치산이 됨. 하영근 - 만석군 지주. 딸 윤희와 이규를 결혼시켜 유학보냄. 하준규 - 일제 치하에서 저항 운동을 했고, 후에 공산당원이 됨. </p> - 주제 : 민족사의 수난기에 처한 민족적 삶의 좌절과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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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지리산>은 이병주의 다른 장편 <관부 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 대하 소설이다. </p><p>이병주의 소설 세계는 사건을 에워싼 상황 전개가 광범위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다채로운 분위기들이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등단 작품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파란만장한 흥미있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사상적이며 지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다. </p><p>이 작품 역시 우리의 생생한 역사를 배경으로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유려한 필치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지리산>은 가장 격동기였던 일제 말기에서부터 민족 해방, 6 25 동란을 거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그 격동의 현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평가나 관점에 다양한 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다. </p><p><지리산>은,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민족사적 과업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숱한 인간사, 승자가 되지 못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빨치산들, 그리고 역사의 행간(行間)에 묻혀 버린 숱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엮어 내는 민족의 대하 드라마이며 민족의 뼈저린 아픔을 형상화한 민족 대서사시라는 소설사적 의의를 지닌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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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이규의 집안은 본래 천석지기였으나 몰락하여 정미소 경영으로 간신히 맥을 유지해 간다. 창씨 개명의 조치가 내려진 1940년에 '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의 삼고(三高)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일본인 세스꼬와 연애를 하게 되고 마늘 사건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박두경이란 학생을 만난다. 민족 의식을 지닌 박두경과의 대화를 통해서 '규'는 민족혼을 생각하게 되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p><p>한편, 그 해 7월 '규'의 중학교 친구인 태영이 유학을 왔다. 태영은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수재였으나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독립 운동의 길을 걷기로 한다. 그래서 태영은 우유 배달부로 취직을 한다. 그는 훗날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 전검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활을 지켜 나가면서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김숙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다가 태영은 같은 배달부인 무나까와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물들게 된다. 무나까와는 일본 공산당 창설의 시초가 되었던 동경 제국대의 '신인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전향을 거부, 우유배달부로 신분을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는 자였다. </p><p>곧 이어 미 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도(半島) 청년들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된다. 태영은 이를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하준영이란 선배를 만난 태영은 김숙자를 남겨둔 채 조선으로 돌아와 하준규, 노동식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 곳에서 보광당이라는 집단을 결성하고 식량 비축, 무술 훈련 등을 조직적으로 행한다. 이즈음 지리산 내에는 하준규의 학교 선배인 차범수가 이끄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이규의 숙부와 조선 공산당 창단 멤버인 이현상을 만난다. </p><p>해방이 되자 반천골, 거림골, 보광당 도령들이 모두 패관산으로 모여 개간을 하면서 힘을 합쳤다. 그리고 이현상은 공산당 창설을 위해 즉시 서울로 올라가고 하준규는 H군 인민 위원회 치안 부장이 된다. 박태영은 그를 돕지만 이규는 고향으로 내려가 하영근의 딸 윤희와 결혼한다. </p><p>이규는 윤희, 하준규, 박태영, 노동식과 함께 1945년 10월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최남선 등과 만나 사학과 민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박태영, 하준규, 노동식 등은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규는 1946년 1월 여의도 공항에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p><p>박태영은 김숙자, 권창혁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당원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나 점차 박헌영을 위시한 당 지도부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되고, 그로 인하여 근신 생활 후, 당원 자격도 박탈당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을 들러 노조를 조직해 책임자로 있는 노동식을 만나 그릇된 상황 판단으로 당이 자꾸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데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박태영은 함양군 당 책임자에서 조직책으로 강등당한 하준규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역시 자신의 목표와 당의 목표는 같지만 그 내부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호소를 했다. </p><p>다시 서울로 올라온 박태영은 민전 사무국에서 일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그러나 민전은 미 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개점 휴업 상태가 되고 만다. 그 후, 태영은 이현상을 찾아가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박헌영은 이미 당원 자격이 박탈되어 버린 박태영에게 당분간 후방에서 공부나 하라는 말을 한다. </p><p>미 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정세는 공산당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그런데도 당 지도부에서는 아전인수 격의 상황 판단으로 대대적인 폭동을 계획하고 노동식, 하준규에게 폭동 지령이 내려진다. </p><p>한편,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한 박태영은 '국립 서울 대학교'에 밀어닥친 좌우익의 격렬한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서 박태영은 당 결성 초기에 경성 대학 병원 동맹원 전태일로 가장했었던 일 때문에 이중의 학적을 가진 채 순수 독서회를 만든다. 당에서는 이즈음 경성 대학 당 사업이 부진함을 느끼고 태영을 복학시키고자 하지만 태영은 이를 거절한다. </p><p>폭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동식, 하준규는 지리산으로 피신한다. 그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피신해 왔다. 그러나 당에서는 이들에 대해 하 등의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 박태영은 이 사실을 알고 학원 내에서 상당한 물자를 모아 지리산으로 피신한 이들에게 인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또다른 신분인 전태일을 쫓는 경찰의 심문을 간신히 피한다. </p><p>하준규는 중학교 동기 동창인 함양 경찰서 서장 T씨와 면담을 갖게 된다. T씨는 하준규에게 자수할 것을 권유하지만 하준규는 듣지 않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준규는 자기 살 궁리만 하면서 빨치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중앙 정치 위원 심종범을 추방해 버리고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그는 박태영과 해후하여 객관적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되어 감을 깨닫지만, 경남 도당에 대한 그의 불만은 김삼룡에 의해 인정을 받는다. 그 후, 하준규는 지리산 지구 인민 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다가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자 해주에서 열리는 조선 인민 대표회의 대의원으로 월북하게 된다. 이즈음 박태영은 김경주라는 고향 사람을 만나 비관론에 물들게 된다. 그는 그 해 10월 20일, 국군 14연대에 의해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발생 이후 무익한 살상과 그에 따른 가혹한 숙군 작업을 보고 공산당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p><p>49년 2월, 갑자기 찾아온 순이로부터 태영은 하준규가 월북하고 노동식은 경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찰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의 물자 보급 책임자로 알려진 전태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 </p><p>50년 2월, 다시 나타난 순이는 하준규가 인민군 소장이 되어 강원도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해 4월, 태영은 노동식의 동창생인 문남석 형사에게 붙잡힌다. 그는 서울에서 무법 지대인 지리산으로 끌려가기 일보 직전에 고향 후배인 배명근 경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진다. 그러던 중 6 25가 터지고 구치소에 있던 수감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태영은 김숙자와 뜨거운 해후를 하게 되고, 하준규의 군대가 아니면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p><p>하영근의 집 문제로 시 인민 위원장을 찾아갔던 태영은 김삼룡을 밀고한 안영달이 경기도 인민 위원장으로 있는 것을 보고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이 화근이 되어 태영은 정치 보위부에 끌려간다. </p><p>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갑자기 반전되었다. 태영은 숙자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태와 함께 후퇴한다. 순창에 도착한 그들은 50년 9월 29일 결성된 조선 노동당 전라북도당 유격대 사령부 산하의 빨치산이 된다. 통신병이 되어 각기 떨어지게 된 이태와 박태영은 2만 명이 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서 회문산을 기적적으로 빠져 나온다. 51년 6월 전북 부대에서 박태영, 이태 등은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의 승리 사단으로 전속된다. </p><p>덕산 전투 이후 남부군은 하동읍, 구례읍, 화개 장터, 곡성, 운봉 등 지리산 주변을 거의 돌다시피 하는데, 이태가 복귀했을 때는 16명이 넘던 소대원이 10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부군은 반년 동안 인원의 절반 가량이 줄어들어 25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10월 중순 경 부대가 재편되면서 이태는 부대 본부 요원이 되어 '승리의 길'이라는 신문과 전기를 쓰게 되고 박태영은 여전히 평전투원으로 남게 된다. </p><p>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12월이 되자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공비 소탕 작전을 벌인다. 남부군은 악양 전투 실패 이후, 지리산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52년 1월 중순에 시작된 2차 공비 소탕 작전 때, 주능선을 넘다가 병력이 60명 가량으로 줄어들고 또 행군 도중 공격을 당해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남조선 최강의 유격대로, 남한 6도 빨치산 부대를 총지휘하던 남부군 사령부는 마침내 30명밖에 남지 않은 부대원을 거느리고 전멸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은 간신히 2차 공세를 벗어나지만 초라한 상태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면서 그 해 봄을 맞는다. </p><p>태영은 보급 투쟁 중, 이규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토벌대 대대장으로 있는 주영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대로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 해 3월이 되자 다시 토벌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남부군은 30-40명의 소대 넷으로 재편성되어 개별 행동을 하게 된다. 3차 토벌 작전이 끝날 무렵 남부군은 다시 40명 안팎의 소집단으로 움츠러들게 되고 그 와중에서 낙오된 이태는 결국 국방군에게 투항한다. </p><p>박태영은 입당하여 당원으로서 남부군 참모가 되라는 이현상의 권유를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태영이 제안한 도피 전법으로 남부군은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무사히 6월의 공세를 넘길 수 있었다. </p><p>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박헌영 계열은 종파 분자로 지명돼 숙청당하게 되고 이현상은 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된다. 결국 빨치산에 대한 언급은 일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된다. </p><p>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현상 일당은 경남 도당으로 이동하던 도중, 미리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이현상을 비롯한 중요 간부가 몰살된다. 이로 인해 박태영은 남은 대원들의 지휘자가 된다. 이영희가 이끄는 경남 부대는 그 해 11월에 전멸한다. 이로 인해 빨치산의 조직적 항거는 종지부를 찍는다. </p><p>그럭저럭 53년을 넘긴 박태영 일행은 그 해 2월 순이를 만난다. 그는 순이로부터 하준규가 체포되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54년 6월 전대원을 자수시키고 정복희, 순이 등과 함께 산에 남는다. </p><p>이 대하 소설의 대단원은 작가의 에필로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p><p>― 이규는 56년 1월 프랑스에서 귀국한다. 그는 형무소에 있는 순이로부터 박태영, 정복희가 55년 8월 31일 지리산 청학동에서 경찰에 포위된 채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되고 자신만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순이 역시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사형된다. 숙자는 태영의 아들을 낳는다. </p><p align="right"><김용직, [이병주의 '지리산' 해설] 참조>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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