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마가복음 9:1~8
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나의 최종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에서 신실한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명 변화산 사건으로 불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前)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 2절 서두를 보면 ‘엿새 후에’라는 구체적인 시간이 나옵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9)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막8:9)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엿새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세 제자 앞에서 ‘변형’되십니다. ‘변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테몰포데 μετεμορφώθη’인데, 영어로는 To transfigure 혹은 To transform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 단어는 모습과 형태 혹은 모양이 본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평소의 외형적인 모습이 완전히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변형의 모습을 본문 3절은 ‘그 옷이 광재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 앞에서 변
형되사 그 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신적 모습을 직접 분 유일한 사람들이며, 예
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변화될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기도 합니다.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온전하게 드리신 후 그 안에 들어 있었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내 안에 쉼 없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변화’란 단어가 ‘메타몰포우스데 μεταμορφοῦσθε’로서 예수님의 변형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며 살아갈 때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 성장하게 되고 예수님이 보이신 영광의 형체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인데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한 것인지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됨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형을 이루게 됩니다.
막 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엘리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말 4:5에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하여 말하기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나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향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회개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그 일을 엘리야가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선지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외침에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죄를 버리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선지자와 엘리야에게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메시아를 받아들이게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모세와 엘리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지만 눅 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세상을 떠날 것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과 더불어 모든 선지자가 외쳤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예언이 성취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광을 드러내셨고, 장차 믿음의 성도에게 주어질 영광을 보이기도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을 보이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이 담겨 있습니다.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율법에 담아 이를 읽고 순종하므로 거룩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거룩함이 이루어졌을 때 영광의 빛으로 드러납니다.
모세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인도했습니다.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으로 인도한 것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한 율법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던 사건과 오늘의 말씀이 흡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도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산과 구름이 배경으로 나오는 것도 같으며 산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장소로 자주 등장하고 구름은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드러났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 투영된 것이라면 예수님의 옷에서 광채가 난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그 자체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출애굽의 지도자의 삶을 살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담긴 율법을 받아 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빛났습니다.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광채는 잠시 있다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고 사는 성도에게 임할 영광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빛날 것이요 영원할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변형된 광채를 본 제자들의 반응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랐을 때 말로만 전해 들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지혜로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희고 환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누가복음 9:32 보면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깊이 졸다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라 왔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깊이 졸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예수님의 변형된 신적 모습을 보게 되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너무나 황홀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기에 이것을 길이 보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고 난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왜 초막을 짓자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초막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절기 중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중요한 가을 절기가 있습다. 그것이 초막절과 추수 절기입니다.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은 애굽에서 벗어난 후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규례이기도 합니다. 초막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소망하면서 거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기억하게 하는 곳이 초막입니다. 잠시 세상에 머물다 본향을 향하여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초막에 머물었습니다.
이런 말을 드리고 있을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둘러 덮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고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을 목격하니 두렵고 무서워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심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성도들의 사건으로 실현화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매 주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되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막 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의의 옷을 입으셔야 했습니다. 이 옷은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 완성된 옷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흰색은 예복과 성결의 색이며 승리와 천상의 색상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 땅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으셨던 광채가 빛나는 의의 옷을 입고 우리는 영원한 예배자로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영광스러운 그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욱 성결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이 교회를 향하여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