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채울 점을 얻어라<소학(小學)>.
살아서는 연락도 없고 평소 소통 없이 지내다가 어쩌다 제형편에서 비롯된 집안의 사고 이친 또는 관혼상례에 뜬금없이 들려오는 소식은 도대체 무슨 이치와 신념으로 통고해 오는지 모르겠다.
죽어서 아니 유세차가 아니라 위세 차 연락한다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음이다.
요즘에는 모바일로 장례가 성행하고 있다.
만남과 어우러짐 속에 상호 이해관계의 어떤 관계함 속에서 하는 소통은 정작 본인이 아니라 함께라는 구성요건으로 가족도 있고 주변 지인도 있음이다.
이 모든 걸 서로 배려하고 장려해 보면서 정과 한을 나누는 함께라는 건 우리 삶의 공동체 아니던가?
비겁하고 비굴하게 쫀쫀하게 살면은 안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원래는 우주 사이에 나보다 더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뜻으로 인간 존엄의 가치를 말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혼자 다 차지하겠다는 아주 강력한 야심이나 독보적인 존재감이 느껴지는 자수성가형 사람들의 이반된 사고의 편집성마저 엿볼 수 있다.
자아의 위축을 의미하는 존재 은폐형에 더해 우리는 과연 나로서 존재하며 관계를 맺고 살려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타인의 시선 속에 나를 숨긴 채 의미 없는 숫자 채우기식 관계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관계함들의 모순에 대해서 회의감마저 느껴본다.
근래 들어 최근에 인간관계에서 느낀 피로감이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들은 나만의 내면적 숙의함이어야 할까?
삶의 굴레에서 책임 회피적인 비겁함과 용렬함은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독점 독질적인 잣대를 보이면서 좁은 소갈머리로 타인의 성취를 시기하고 자신의 과오는 주변의 탓으로 돌리며 숨어버리는 비겁함을 보이면서까지
겉으로는 사회적 규범과 예의를 지키는 척하지만 익명성 뒤에 숨거나 이해관계가 없는 곳에서는 지독한 이기심을 드러낸다.
앞에서는 웃으며 관계를 맺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실속만을 챙기는 이중적인 태도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 아니던가?
개인화의 변질에 따른 고립된 이기주의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서적 마비와 관계를 오직 수단으로만 소비하는 태도는
타인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배타성으로 변질되기 일쑤이다.
이런 배타적이고 이중적인 인간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욱더 자신을 숨기게 된다.
결국 깊이 있는 유대감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탐하는 우둔한 삶들이 파편화된 채 부딪히는 삭막한 풍경만 남게 되는 것이다.
세월의 번잡함들속에 삶과의 관계의 모순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일상의 의미또한 용기를 내어 마음을 깨달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식은 경험을 만나 위력을 발휘한다.’ <명심보감>
그리고 ‘고난은 경험과 지혜를 선물한다.’ <근사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