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잎 편지 33신]20여년간 한학 공부에 매진한 친구에게
친구, 세상이 좁다고 했던가?
1천 2백만명이 넘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서울에서,
그것도 우연히 퇴근길 버스안에서 자네를 만난다는 게 어디 보통의 인연인가.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깊은 업보가 있었던 게지.
명륜동에서 160번을 타는데, 맨 뒷좌석에서 “우천”하며 부르는 반가운 소리.
거기에 자네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 한학으로 고명한 공덕동 스승님에게 1주일에 한번씩 배우러 가는 길이라고.
참 대단허이. 나는 그때 성균관 한림원 주역강의를 땡땡이치고
광화문에서 친구와 술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네.
깨놓고 말하면, 정말 ‘이 나이’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더군.
어찌 그렇게 술 약속은 많고(내가 좋아 절로 만든 경우도 태반이지만),
읽을 책, 쓸 글은 많은지, 1주일에 2번 공부하는 한문공부도 못하겠더라고.
그래 작파하고 술이나 먹자고 가는 길에 자네를 만났지 뭔가.
이상한 게, 그런 곳에서 불쑥 만나면 유난히 더 반갑고 더 친한 느낌이 들더군.
지지난해 졸업30주년 기념문집을 펴낸다니까, 자네가 글을 보내왔지.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일깨워준 선생님”이라는 제목이었네.
읽어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군.
선생님으로 겨울방학이 되어 빈둥빈둥 놀다가 무언가 배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찾은 게 사단법인 유도회였다고.
거기서 최권훈선생님에게 논어를 배웠다고.
2년만에 책거리를 하는데, 선생님이 불러주시던 시조창에 꼬박 반했다고.
조르고 졸라 시조창과 시조짓는 법을 배웠다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강한 선생님과
지금껏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연례행사로 역사탐방을 다닌다고.
우리의 뿌리인 역사를 알려면 한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선생님에게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 ‘화동인물총기’ ‘열자’ ‘중국정사’ 등을 배웠다고.
정말 부럽고 대단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더군.
친구, 고등학교 3년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하지 않았으니 자네를 전혀 몰랐네.
언제 자네의 존재를 알았던가,
아마도 2006년 과천공원 장미원에서 열린 쌍륙절 행사때였을 걸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단단하게 보였네(강단있게 보인다고 하지).
주력(酒力)이 약한 데도 술을 아주 좋아하는 것같더군.
그때 자네는 분위기에 엄청 취했던 것같아.
행사가 끝나고 취한 자네 때문에 형수가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네.
그래도 ‘전라고 모임’에는 참석을 반긴다지.
그후 언젠가 오목교 삼순이집 벙개에서 부르던 시조창은
우재 친구와 함께 멋진 앙상블을 이루기에 충분했네.
말수도 적고 그저 싱긋이 웃기를 잘 하는 자네를
‘육산회’에서 가끔 만날 때마다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기회가 별로 없었지.
자네는 58년생(개띠)이어 우리보다 한 살 적다는 자격지심에
잘 나서지도 않는 겸손의 미덕을 가졌지만,
사나이들의 세계에 그게 무슨 대수인가.
우리 동창중엔 55년생(양띠)도 있고 56년 잔내비띠도 많지만,
나이 들어가며 어울리는데 그깐 ‘짠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예전 직장에 있을 때,
내가 주동하여 만든 사교클럽 이름이 ‘57그룹’이었네.
55년생부터 59년생까지는 정서도 비슷하니
다 같이 ‘맘 먹고 잘 지내자’는 취지였지.
우리는 명백히 ‘57그룹’이네.
혹시 아직까지 그런 생각이 있다면 금세 버리게.
‘객지 벗은 위아래로 열 살까지 맘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조선시대 선배들은 열 살 차이가 아니고
열 여섯 살 차이까지 ‘친구’로 허(許)하며 지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네.
생각해 보시게.
퇴계선생이 고봉 기대승을 만날 때 56세인가 그랬네.
그때 고봉이 33살이었을 걸세.
퇴계는 아들뻘인 고봉을 깎듯이 대했다네.
그러니 ‘사단칠정론’ 논쟁을 7년간이나 편지로 벌였지 않은가.
우리 친구들 중에 재수를 했거나 하여 들어온 56년생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
우리(57년생)를 무시하거나 깔보고, 괜히 나이가 한 살 많다는 생각으로
동창모임에 참석하기를 꺼려하는 동창들이 몇몇 있는데,
나는 그거야말로 그들의 쓸데없는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는가. 그깟 나이 한두 살 차이가 어떻다는 것인가.
자네가 벙개에 자주 얼굴을 비치니 참 보기 좋더군.
술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주량을 가름하며 권할 줄 아는 미덕도 가지고 있네.
그러니 앞으론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나올 수만 있다면 자주 만나며,
이제 시작하는 우리들의 우정을 가꾸어 나가세.
친구들에게 자네의 해박한 역사나 경전지식에 대해서도 가르쳐주고 말이네.
자랑이 아니네만, 지난번 관광버스 4대를 돌아다니며
내가 한 어리숙한 실천예절 강의처럼,
내년엔 자네의 특강을 기대해 봐도 되겠는가.
이왕 편지 쓴 김에 부탁이 있네.
오는 26일(목) 오후 7시, 오목교 삼순집에서 번개모임이 있네.
상계파 친구들과 연락하여 모두 참석, 자리를 빛내 주시게.
인허 정수인이라는 친구가 최근에 ‘모택동과 구새통’이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는데,
명색이 친구들이 몇이라도 모여 축하해주는 것이 싸가지 아니겠는가.
출판기념회라고까진 할 것 없어도,
한 권씩이라도 사주는 것이 예의겠지.
책은 조금 읽어봤는데, 의미가 심장하더군.
생소한 연변사투리와 방언투성이지만,
중국의 문화운동을 꼬집은 게 주제같더군.
그럼 그때 반갑게 만나세.
그리고 그때 멋드러진 시조창 부탁할테니,
질질 빼지 말고 시원하게 한번 뽑아보시게.
우천 합장
첫댓글 구구절절 가슴에 친구를 위하는 좋은글이네.
사나이 세계에 나이가 대수던가?
어떻게 잘 지내느냐가 중요하지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