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양육 십계명 |
|
|
1. 비판 속에서 자란 아이는 비난을 배운다. 2. 적대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싸움을 배운다.
3. 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는 부끄러움을 배운다.
4. 수치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죄책감을 배운다.
5. 관대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참을성을 배운다.
6.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배운다.
7. 칭찬 속에서 자란 아이는 고마움을 배운다.
8. 공명정대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정의를 배운다.
9. 배려와 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신뢰를 배운다.
10. 인정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남도 소중히 여긴다.
자녀 양육 십계명을 잘 살펴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큽니다. 1~4까지의 계명은 율법적 양육에 대한 경계입니다. 이런 율법적인 양육은 자녀의 가능성을 제대로 열어주지 못하고 퇴보시키고 맙니다. 앞의 네 가지가 율법적인 양육에 대한 것이라면 뒤의 여섯 가지는 복음적 양육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께서 주신 잠재능력을 마음껏 계발하도록 칭찬하고 힘을 실어줍시다. 우리 후대가 복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삶의 규모를 갖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큰 인물로, 창조적 소수로 자라날 수 있도록 말이지요./자료ⓒ창골산 봉서방 |
|
원망 |
<원망>이라는 우리말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 40회가 나온다..
[출 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백성이...원망하여 가로되 - 이들의 원망 시점이 홍해 바다의 기적으로 인한 찬양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이들은 홍해 사건을 체험한 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던 3일 전의 태도와는 달리 환경이 조금 변하여 갈증이 나고 육체가 피로해지자 곧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한편 '원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룬'은 '고집세다', '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밤을 세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자손이 터뜨린 첫번째 원망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 '원망하지'의 헬라어 '스테나제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신음하다'(롬 8:23;고후 5:2,4) 또는 '탄식하다'는 의미이다. '스테나제테'는 금지를 나타내는 '메'와 연결되어 '탄식'을 지속적으로 금지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핍박자들을 향한 원한의 탄식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온전히 기뻐하고(1:2) 그리스도를 소망해야 한다.
한편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크리데테'는 단순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문자적으로는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마 7:1)는 의미이다. 이는 원망을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정죄를 받아 함께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강조 조건적 명령이다.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서 계시니라 - 본문은 8절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권면을 보충하는 경고이다.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수신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마 24:33;막 13:29;계 3:20,).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는 이미 심판하실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문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원망하는 죄를 회개하게 하소서.../자료ⓒ창골산 봉서방
한국교회가 반드시 바꿔야 할 예배 관행 6 |
한국교회가 반드시 바꿔야 하는 잘못된 예배 관행은 무엇일까. ‘예배 갱신의 신학과 실제’ ‘예배학 사전’ ‘기독교 예배학 입문’ ‘복음주의 예배학’ 등의 저자이자 예배학의 권위자인 조기연 서울신대 교수(예배학)로부터 한국교회가 꼭 고쳐야 하는 6가지 잘못된 관행을 들어봤다.
통일성 없는 예배
예배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그날 주제에 맞게 성경봉독, 설교, 찬송, 기도가 이뤄져야 한다. 만약 설교자가 ‘일이 잘될 때 조심하자’고 해놓고 성가대가 ‘온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자’는 찬송을 했다면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다. 교회력에 맞게 설교자와 성가대원 등 예배인도자가 가운을 통일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이 부각되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이다. 시종일관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는 내용으로 구성돼야 하는데 인간의 욕심과 필요를 채우다 보니 예배의 본질이 흐려진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닌 목사와 성도끼리의 만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회의하듯 진행하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재현되는 구원의 스토리이자 드라마다. 따라서 예배는 고도로 정교하게 짜여지고 진행감이 있어야 한다. ‘누가 나와서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다’식의 중계방송식 멘트나 새신자 환영, 광고시간 등은 예배를 산만하게 하는 요소다.
말만 넘쳐나는 예배
예배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건’이지 설득이나 이해의 시간이 아니다. 예배시간은 말로 하는 강의가 아니라 ‘신성한 것’과 접촉하는 체험의 시간이다. 예배는 듣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점 아래 무릎을 꿇거나 성찬을 위해 걸어 나가고 종소리를 듣는 등 적극적인 행동이 포함돼야 한다.
구경만 하는 예배
한국교회 예배에서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앉아서 듣기만 하는 예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기도제목을 제시해 통성으로 기도하거나 세 가지 성경본문을 성도들이 직접 나와서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례전이 결핍된 예배
초대 교회는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찬식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했다. 그러나 급진적 종교개혁 이후 성례전이 없는 예배가 보편화됐다.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한 가지 축이 없어진 기형적인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선 구속사의 상징인 성례전을 회복해야 한다. (국민일보)/자료ⓒ창골산 봉서방
반드시 피해야 할 7가지 대화 형태 |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대화의 빈곤>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대화>일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의사 소통이 열려 있고, 사랑이 식어진 바르지 못한 대화에는 반드시 의사 소통이 막혀 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바르지 못한 대화의 형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격렬한 화약 같은 말 -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늘 그래!" "똑바로 좀 들어!" "이제는 당신 좀 변해!" 이런 식으로 불 같이 말해서 문제를 확대시킵니다. 자신의 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줄을 항상 본인이 알면서도 그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2. 침묵 - 침묵은 의심, 혼동, 추측, 경멸, 무관심, 냉정함을 상대방에게 전합니다. 침묵 속으로 빠지지 말고, 험한 말로 남을 침묵 속으로 빠뜨리지 마십시오.
3. 실망시키는 말 - "어린애도 너보다는 낫겠다." 상대방의 잘못을 인식시키겠다는 의도로 이런 말을 하지만 이런 말은 태도 변화를 이끄는 데 가장 부적합한 말투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효과가 있어 보이나 나중에는 그 말을 아예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말을 할 때도 '녹음기 틀어 놓은 말'로 무시해 버립니다.
4. 빗대어 하는 말 -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도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남을 끌어들여 말합니다. 선한 얘기는 그렇게 해도 좋지만 나쁜 얘기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5. 방어적인 말 - 불편한 말을 들었다고 대뜸 맞대응해서 짜증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상대방의 필요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6. 감정 섞인 말 - 큰 소리, 화난 소리, 격렬한 소리, 극적인 소리도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솔직한 반영이라기보다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나쁜 획책으로 보여집니다.
7. 너무 말을 많이 함 -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분위기를 장악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이중적 의미를 지닌 말, 미덥지 못한 눈빛, 가로채는 말, 분별없는 말, 경청하지 못하는 태도 등을 피해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말에 어떤 고칠 점이 발견되었습니까?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인간 관계의 주인공이 되지 않겠습니까?/자료ⓒ창골산 봉서방
도레미파솔라시 계이름의 의미 |
도레미파솔라시 계이름의 의미
라틴어에서 유래한 ‘도레미파솔라시’는 고대 ‘그레고리오 성가(그레고리안 찬트)’에서 기원한다.
대략 서기 1000년경까지의 악보에는 4선으로 된 악보위에 ‘네우마’라고 하는 여러 종류의 음표만을 찍었을 뿐, ‘도레미파솔라시’와 같은 음계명은 없었다.
그렇던 것을 당시의 교회 음악가인 귀도(Guido d’Arezzo,995-1050)라는 사람이 성가대가 음을 확실히 잡게 하기 위하여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성가인 ‘성 요한 찬미가-(Ut queant laxis)’라는 노래를 가지고 음계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 노래의 라틴어 가사는 아래와 같다.
‘Ut Queant laxis / Resonare fibris / Mira gestorum / Famuli tuorum, / Solve polluti /Labii reatum’
위 가사의 첫 머리인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에 시(Si)를 첨가하고 우트(Ut)를 대신에 하나님이란 뜻의 Do(Dominus)를 써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우트(Ut)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도레미파솔라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 당신의 종들이 당신이 행하신 일에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더럽혀진 입술에서 모든 죄악의 더러움을 씻어 주소서.”라는 뜻이 된다.
우리가 특별히 바흐의 바로크음악을 통하여만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레미라솔라시’의 계이름 속에 담겨진 하나님 찬양의 뜻을 안 후, 음악을 듣고 찬양을 부르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음을 느껴야 한다.
오늘도 수많은 음악과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속에 ‘도레미파솔라시’, ‘하나님, 당신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도록 더럽혀진 입술에서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라고 찬양하는 소리가 있다. 이제 음악을 들을 때마다 모든 음에 깃들여진 이 뜻을 생각하며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하자./자료ⓒ창골산 봉서방
질문의 십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