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공(李 空): 케노시스 삶의 미학
김종헌 목사(로고스문화교회)
Ⅰ. 서론: 하나님의 미적 판단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다. 하나님은 지 정 의를 지닌 분이다. 그래서 때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시기도 하지만, 때론 윤리적이고 미적인 판단을 하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자신의 감정을 즐겨 표현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무려 일곱 번이나 하셨다.1)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적인 행위로 완성된 결과들을 보시면서, 놀라운 기쁨과 한없는 만족감을 표현하셨다.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보시고 너무도 기뻤다. 그래서 ‘나 너무 기분 좋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2) 즉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표현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윤리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미적 관조의 표현'이다. “보시기에”는 히브리어 ‘라아(רא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라아’는 단순히 힐끗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것들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셨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을 심미적 관점에서 보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미학적 판단을 하셨다. 곧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다. “좋았더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브(טוֹב)’를 사용하고 있다. ‘토브’가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등을 말하며,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토브’에는 윤리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가 동시에 들어가 있다. ‘좋은 것’, 즉 ‘선’은 윤리적 가치이다. ‘즐거움’, 즉 ‘유쾌함’은 미학적 가치이다. 그러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에는 윤리적 판단과 미학적 판단이 동시에 담지되어 있다.
왜 하나님께서 윤리적 판단과 미학적 판단을 동시적으로 하셨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윤리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을 하나로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윤리적인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보시기에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 판단에는 넓게는 윤리적 가치, 미적 가치, 진리적 가치가 하나이다. 즉 선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은 참된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참된 것은 선한 것이며, 선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진 선 미를 하나로 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것은 참된 것이며, 좋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에는 '윤리적 가치'와 '미적 가치' 그리고 '진리적 가치'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사람 역시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서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셨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가치 판단이다. 여기서 “심히”(ך)는 ‘풍부하다’, ‘크다’, ‘강렬하다’, ‘심하다’ 등으로 그 양과 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완성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훼손했다.
근대 호남 영성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이공 이세종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특히 그가 보인 ‘케노시스 삶의 미학’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그동안 이세종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윤리적 혹은 영성 신학적 관점에서 진행되었다.3) 필자는 그의 삶과 영성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다’4) 라는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여기서 미학은 이론학문으로서의 미학이 아니라, 미적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즉 ‘아름다움’을 말한다. 이세종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심히 아름다운 삶은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세상과 심히 구별된 삶을 살았다. 지금의 시간성 속에서 지난 과거의 이세종을 조명해보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삶을 남겼다. 그러면 그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Ⅱ. 케노시스 삶의 미학
1. 케노시스와 ‘이 공’
이세종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비움’(空)이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이름을 이공(李公)이 아니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길 원했습니다.5) 즉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 대해서 ‘공(空)’을 쳐버렸다고 말했다.6) 이공(李空)에서 공은 ‘비움’, 즉 ‘케노시스’(κεηόσίς)이다.7) 이세종이 40여세 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63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의 20여년간의 신앙생활은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회심한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엄두섭에 의하면, 이세종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지만, 자식이 없자 소문난 무당을 불러다가 집에서 굿을 했다. 그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무당은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지라고 했다. 당시 이세종은 무당의 말을 신처럼 믿었기에, 명당자리에 3층으로 산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목수가 가끔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곁에서 들었고, 그 목수에게서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빌려서 보았다고 한다.8)
이세종이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선가 성경책을 얻어서 읽다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종교적 회심을 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통해서 그간 자신이 산당에 드리는 제사가 헛수고이며, 참 하나님이 아닌 잡신에게 드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당에 꾸며 놓았던 모든 것들을 불사르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회심한 이세종의 삶은 비움, 곧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케노시스 이론은 19세기 중엽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9) 그 대표적인 학자가 토마시우스(G. Thomasius)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Christi Person und Werk)에서 케노시스 이론을 보다 체계화시켰다. 토마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양성론이 위격적 연합이라는 개념만 가지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히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의 인성을 가지고 계심을 충분히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케노시스의 개념을 제안하였다.10)
토마시우스는 ‘케노시스’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사람됨과 그의 하나님 되심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독론에 대한 과학적 회의주의와 인본주의적 해석에 대응하였다. 토마시우스는 성육신의 사건을 성자가 인간의 본성을 취함과 동시에 그분의 자기 비우심의 사건으로 보았다. 성자 하나님께서 케노시스라는 행동을 통해서 육신이 되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었다.11) 즉 성자는 케노시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케노시스 기독론은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면서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성자의 하나님 되심이 멈추어진 것은 아니다. 성자의 신성이 손상됨이 없이 온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12) 그래서 케노시스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참된 인성도 확보하는 통로를 제공한 셈이다.
필자는 여기서 케노시스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논증에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논증하는 케노시스에 초점을 두고, 이세종의 비움의 영성을 논하고자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케노시스가 언급되고 있는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길 권면했다.13) 사도 바울이 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14)을 갖기를 권면했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런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취한 것이다. 즉 신이신 그리스도가 인성을 지닌 사람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을 바울은 ‘케노시스’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비워”라는 말은 ‘헤아우톤 에케노센’(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이다. ‘헤아우톤’은 재귀 대명사로서 ‘그 스스로’, ‘그 자신 혹은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헤아우톤은 그리스도가 갖는 영광, 혹은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권위의 행사, 신성, 하나님과의 동등됨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15)
그러나 ‘자기를 비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지닌 신성이나 본질자체를 완전히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비워”로 번역된 헬라어 ‘에케노센’의 원형 ‘케노오’(κενόω)는 ‘비우다’, ‘공허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본래 지니고 있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잠시 내려놓은 것을 말한다.16) 즉 신성의 본질은 동일하시지만, 주님이 자신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17)
7절 말씀을 문법적으로 볼 때, “자기를 비워”(헤아우톤 에케노센)가 주문장이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는 보조문장(분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자기 비움의 결과는 종의 형제를 가진 것으로 사람들과 같이 된 것이다. 결국 ‘케노시스’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임하심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케노시스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자기 비움이 완성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이 불교적 비움과 다르다는 점이다. 언어적 의미로 서로 비슷하나, 내용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우리의 비움은 자기부정을 통한 하나님의 영의 충만이다. 곧 완전한 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말한 비움은 돈오(頓悟), 즉 자각이며 깨달음이다. 스스로 무함을 자각하며, 관조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비움은 자기 초월과 해탈의 경지로 이르는 과정이며, 철저한 자기수행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비움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18)
이세종은 철저히 자기 비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자기 비움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정신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했다.
2. ‘이 공’과 하나님의 생기
이세종은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고 주로 '공기'를 마셨다. 특히 죽기 전 두 달 동안 물만 마시다가, 마지막 한 달은 물도 끊고 공기만 마시고 지냈다. 이세종은 곁에서 간호하던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 나도 먹어야겠다고 하면서 공기를 마셨다.19) 이세종에게 공기는 어떤 의미인가? 이세종이 공기를 먹고 살기로 결심한 것은 자연묵상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이세종은 말씀묵상만이 아니라, 자연 묵상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는 자연 사물을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에 내재된 하나님을 보았다. 땅에 개미들, 나무의 곤충들,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였다.
이세종이 추운 산당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깨달은 일이다. 그가 살았던 산당은 겨울이면 방이 몹시 추웠다. 그런데도 산에 있는 땅벌들이 산당의 천장에 들어와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세종은 겨울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내다 새로운 계절에 다시 살아나가는 벌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금수곤충도 겨울에는 공기만 먹고 살아 갈 수 있다. 사람도 어느 기간은 곡식을 안 먹고 공기만 흡수하고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밥을 안 먹고 지낼 수 있어도 잠시라도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공기는 인간 생활에 그처럼 긴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기운이니 안 마시고는 못 산다”20)
이세종은 벌들의 겨울내기를 보면서, 우주의 근원이 공기임을 깨달았다. 공기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원천이었다. 고대 그리스도의 자연철학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우주의 근원을 ‘공기’로 보았다. 그는 호흡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사람의 체온과 성장, 그리고 건강의 근원을 공기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공기로 간주하고 그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완성했다.
그러면 이세종이 자연묵상을 통해서 형이상학적 세계에 눈이 열린 것인가? 엄두섭은 이세종이 공기를 먹었다는 것을 동양의 도가 철학, 인도의 선인들의 삶을 가져다 설명하였다. 이세종에게 공기는 단순한 도인들이 호흡하는 기(氣)가 아니다. 도인들은 대기 속에 충만한 기를 호흡법을 통해서 흡수했다. 그들은 호흡법을 통해서 공기 속에 있는 에너지를 섭취하며 살았다. 그래서 인도의 선인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공기 에너지를 마시며 여러 날들을 견디어 왔다. 그러나 이세종이 그들의 호흡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세종은 “예수를 먹어야 산다. 예수가 나는 힘이다”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그러면 그에게 예수를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의 먼지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었다(창2:7)21).
그렇다면, 우리는 역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생령 곧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령을 잃어버리면, 들짐승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이세종이 공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육의 본능을 비우고, 대지의 근원인 하나님의 생기를 먹고자 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다. 그때 마귀가 찾아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면서 마귀를 물리쳤다. 이세종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를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예수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공기를 먹는 것은 영의 양식을 먹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공기를 먹는다고 심호흡을 하고 먹는 소리까지 냈다고 한다.22) 이세종이 공기를 먹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다.”(갈2:20)
이세종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는 공기를 마실 때마다 즐거움을 표현했다. 그것은 썩어질 육신을 땅에 두고, 영으로 그분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공기를 들어 마실 때,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예배를 드리게 했다.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는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이다. 곧 예배는 영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기를 먹을 때, 예배의 자리를 사모했던 것이다. 예배 안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공기와 온전히 하나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이세종은 초인인가?
3. ‘이 공’은 초인인가?
엄두섭은 그의 저서『호세아를 닮은 성자』에서 이세종을 ‘초인(超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공은 초인인가? 엄두섭이 말한 초인의 정의는 무엇인가? 엄두섭은 명확하게 초인에 관해 정의하고 있지 않다. 초인이라는 말이 철학적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독일 철학자 니체(F. Nietzsche)이다. 니체는 대지의 주인을 ‘초인(übermensch, 위버멘쉬)'로 정의하고 있다. 독일어 위버멘쉬는 사람을 넘어선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말로 초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초인은 현재의 나를 넘어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23)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초인은 무엇인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데 있다”24)
심연 위에 놓인 인간은 초인을 향해 걷는 존재이다. 인간은 밧줄 위에서 추락과 몰락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초인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 존재이다. 니체는 인간의 거듭남의 과정을 삼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즉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로 논증하고 있다.25)
낙타는 항상 등에 짐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이다. 낙타는 인내심이 많으며 무거운 짐을 등에 싣고 사막을 달린다. 낙타는 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도덕적 명령을 짊어지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이다. 즉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는 정신, 순종과 복종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내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는 존재는 낙타의 단계에 있는 자이다.
두 번째로 사자는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존재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기존의 가치와 관습, 규범을 파괴하는 부정의 정신을 소유한 자이다. 사자는 스스로 명령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부정과 파괴의 정신을 소유한 자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부정하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은 사자의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어린 아이는 순진무구하며, 현실의 부정적인 요소를 쉽게 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갈등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아무런 고민 없이 순응하며 적응하는 순수한 긍정의 정신이 어린 아이다. 그래서 니체는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26)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린 아이가 되어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니체에게 어린 아이는 현실에 대한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긍정의 사유체계를 가진 자이다. 니체가 어떻게 정신의 변화를 결국 어린아이의 긍정성에서 찾을 수 있었는가? 필자는 성경에 있다고 본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를 비유해서 천국을 말씀하셨다.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7)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왜 사람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하는가? “어린 아이들과 같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먼저 어린 아이와 같다는 말을 영어로 하자면, ‘Childish’란 의미로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의존적인 인간형을 말한다. 즉 유아적 존재는 어떤 일을 객관성과 합리성을 갖고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런 형의 어린 아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어린 아이의 순수성과 삶의 긍정성이다. 즉 어린 아이는 외식하지 않으며,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어린 아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다. 사람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긍정성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인-아이”가 됨을 말한다.
이제민 신부는 “성인-아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어린이 상은 덜 성숙한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이 상은 지긋한 어른의 나이에도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순수한 얼굴이다. 순수한 할아버지는 어린이가 아니면서 어린이다. 즉 어른을 뛰어넘은 어린이다.28) 어른 중에는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 있는가 하면,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닌 어른이 있다. 후자의 어른은 처음의 어린이와는 다르지만, 그 마음은 같다. 다시 말해서 “성인-아이”라 말할 수 있다. “성인-아이”는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다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어른이 됨을 말한다.
예수님이 말한 “어린아이”는 이기주의와 온갖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찬 어른의 단계를 극복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을 갖는 “성인-아이”를 말한다. 즉 “다시 어린이가 된 어른 속의 어린이, 영의 인간이다.”29) 이제민 신부는 이와같은 영의 인간을 ‘자기 일생의 삶을 통해 자기의 원천을 찾는 사람’,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인 영원을 찾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30)
그러면 이세종의 삶은 어떠했는가? 예수를 믿고 변화된 이세종은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이세종은 거치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을 가다가 동네 심술궂고 장난기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다짜고짜 이세종을 끌고 가서 길가에 있는 나무에 새끼줄로 동여매어 놓았다. 그리고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라고 말하고 그는 자기 길을 가버렸다. 이전 같으면 분노했을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바보 이세종’이 되어 버렸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그저 예예 하였다. 이세종을 나무에 묶어 놓고 갔던 사람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했던 일이 생각나서 그곳에 가보았다. 오후가 되도록 이세종은 여전히 나무에 묶인 채로 그대로 있었다.
이세종은 자신을 묶어 놓고 가버린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원망과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세종을 엄두섭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를 믿고 실제로 그처럼 산 사람(성인-아이)은 이세종 한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31) 즉 이세종은 순수한 “성인-아이”의 삶을 살았다.
이세종은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려고 했다. 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욕구를 초월하려고 했다. 그는 심한 질병이 걸렸을 때에도 약을 쓰는 것을 거부하면서 “예수보다 더 좋은 의사가 어디 있어요, 신약보다 더 좋은 약이 어디 있어요”하면서 의학적 치료를 받지 않았다.32) 이세종에게 ‘자기 초월’은 믿음의 외적인 증거였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가 보여준 초월을 ‘의식 내재적 초월’과 ‘의식 외재적 초월’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즉 초월은 ‘안으로의 초월과 ‘밖으로의 초월’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넘어서 의식 안으로 초월’과 ‘자아를 넘어서 밖으로 향하는 초월’이다.
의식 내재적 초월은 나의 생각, 고집, 현실의 잡념을 넘어서 ‘순수의식’(reine Bewußtsein)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순수의식’은 세상에 가치에 때 묻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곧 ‘순수한 성인-아이’를 말한다. 이세종은 내적초월을 통해서 ‘순수의식’(성인-아이)에 이르고, 외적 초월로 나아갔다. 그는 외적 대상이 주는 욕망을 넘어섰다. 즉 그는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병든 문제, 성 문제 등을 모조리 초월했다. 그래서 엄두섭은 이세종을 ‘초인’이라고 불렀다.
그럼 내적 초월의 완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이세종은 내적 초월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다. 다시 말해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에 인격적 참여를 한 것이다. 이세종은 언제나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 성령을 못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차 타는 사람이 차표가 있어야 하듯, 성령을 받아야 천국을 간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강조했다.33)
기독교 영성학자들은 기독교 영성을 ‘자기 초월의 경험’과 연관시킨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영성학자인 샌드라 쉬나이더스(S. Schneiders)는 영성을 “사람이 인식하는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하여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을 위한 기획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험”(the experience 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으로 정의하고 있다.34) 쉽게 말하면, 영성은 자신이 지각하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여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의 삶을 통합하려고 할 때에 얻어지는 체험을 말한다.3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초월이다. 자기 초월은 깊은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기독교적 영성에 이르는 자기 초월은 자신의 육신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의 삶과 인격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의미한다.36)
이세종은 내적 초월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상의 욕망을 초월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외적초월은 내적 초월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37) 그의 내적 초월은 자기 비움이며, 그 자기 비움을 통해서 대상이 주는 욕망(외적초월)을 넘어설 수 있었다. 이세종의 내적 초월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거룩한 가난이다.
4. 청빈의 미학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후에, 그는 스스로 가난해 졌다. 그는 성경 한 구절을 읽으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과거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자신이 습관적으로 했던 일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가 남의 밭을 지나다가 콩잎을 뜯어 먹었던 일이 기억나면, 그 콩 밭 주인에게 찾아가서 자복하고 그 값을 변상하고 회개했다.
이세종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케 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져야 한다.”38)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여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묻자, “빌어먹어라. 거지가 되라”39)고 말했다.
이세종은 무엇보다 구제를 열심히 했다. 자기 돈과 곡식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특히 노인과 어린이가 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었다. 혹 거지나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 그가 먹는 대로 차려서 대접하였다. 이세종에게 구제는 나의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쓸 것을 필요한 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아야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40)라고 정의했다.
예수 믿기 전에 부자로 살았던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가장 큰 특징은 거지처럼 살았다는 점이다. 왜 이세종은 스스로 가난해졌는가? 이세종의 가난은 케노시스의 삶에서 온 것이며, 마음의 가난에서 시작되었다.41) 그는 낮아지고 비움으로써 거룩한 가난을 실천했다. 성령을 받은 후에 그의 마음은 가난해졌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42) 이세종의 가난은 가난한 마음의 외적표현이며, 케노시스의 삶 자체였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기 전에 그가 살고 있는 등광리 부락에서 첫째가는 부자였다. 그러나 그가 회심을 한 후에 그의 재산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가 남에게 원통한 일을 하면 되겠느냐면서 장롱 속 깊숙이 간직해 둔 보따리를 끄집어냈다. 그 곳에는 가난한 시골 농민들이 돈을 빌려 쓰려고 전답과 집문서를 담보로 저당 잡히고 간 문서들과 빚 문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43)
이세종은 회심한 후에 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다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었다. “엣소! 당신의 문서 도로 받으시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시오”44)라고 말했다. 그리고 물건을 꾸어간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가지라 했다. 이현필은 이러한 이세종의 행동을 “일대 희년을 선포한 것이다. 그 마을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요 희한하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45)고 말했다. 또한 엄두섭은 이세종의 변화된 모습을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세리 삭개오의 모습과 연관해서 말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고백했듯이, 이세종은 ‘소유의 가난’을 실천하였다.
이세종의 ‘소유의 가난’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었다. 이세종은 어느날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나이 어린 불쌍한 거지를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주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생각해 보니, 그 거지의 남루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눈에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 그래서 다시 그 거지를 찾아갔는데, 그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세종은 거지를 온종일 찾아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 원적골이라는 곳에서 그 거지를 만났다. 이세종은 그 거지에게 “당신께 좋은 일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46)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거지에 주고, 자신은 거지가 입고 있던 떨어지고 더러운 옷을 입었다. 이세종의 ‘마음의 가난’은 ‘소유의 가난’으로 나아갔다.47)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마음이 가난해졌다. 그의 마음은 자기부정을 통해서 철저히 비워졌다. 예수를 믿기 전에 채워졌던 그의 마음은 비워짐의 가난을 경험했다. 마음의 가난이 그를 소유의 가난으로 인도했다. 이세종의 가난의 영성은 존재 자체의 가난으로 나아갔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존재 그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는 칡넝쿨이 가는 길을 막아도 밟지 않고 일일이 치우며 걸어 다녔다. 심지어 길가에 있는 잡초도 안전한 곳에 옮겨 심어 주었다. 쓰러진 풀들을 다시 세워주었다.
한번은 이세종이 산길을 가로질러 뻗어간 칡넝쿨이 사람의 발에 밟혀 줄기와 마디가 터져서 우유 빛 진액이 피같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털썩 주저앉아서 탄식했다. “아이쿠 뉘게 짓밟혀 이렇게 물이 뚝뚝 흐르는 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다.48) 이세종은 길을 갈 때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녔다. 실수로 자기 발밑에 개미 한 마리라도 밟혀 바동거리는 것을 보면 슬피 울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로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 마땅한 놈인데 네가 내 발에서 밟혀 죽다니”하면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울었다.49) 이세종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로 소중했다. 그래서 엄두섭은 이런 이세종의 마음을 “자비심은 물결같이”라고 표현했다.
필자는 이세종의 이런 마음은 ‘존재의 가난’에서 온 것으로 여긴다. 존재의 가난은 사람이 흙임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흙먼지로 지음을 받는 존재임을 알고, 흙처럼 낮아지는 것이 존재의 가난이다. 사람(human), 겸손(humility)은 모두 라틴어 흙(humus)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발에 밟히는 흙임을 아는 자는 겸손해 진다. 겸손해 진다는 말은 곧 흙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세종은 사람만이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했다. 그는 사람이 짐승들을 해치지 않으면 짐승들도 해충도 맹수도 결단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동물들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이유는 모두가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벌레 한 마리의 목숨도 불쌍히 여기고 경외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귀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버릴 것이라곤 없다”고 고백했다.50) 이세종의 청빈의 미학은 마음의 가난에서 소유의 가난으로 그리고 존재의 가난을 통해서 세상과 하나가 된 것이다.51)
Ⅲ. 결론: 케노시스 미학을 남기며
이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남긴 재산은 바가지 세 개 뿐이었다.52) 그는 그의 도움을 받았던 주민들이 그를 위한 송덕비를 세우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예수를 믿고 그의 이름이 이공(李空)으로 불러지길 원했던 것처럼, 그의 마지막 인생은 공(空)이었다. 자기 부정과 자기 비움을 통해서 그의 삶의 흔적은 거룩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셨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을 살지 못했다. 자기애와 욕심 때문에 자기 비움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비움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해지면서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필자는 서론에서 “좋았더라”는 말에는 윤리적 가치판단과 미적 가치판단이 동시에 담지 되어있다고 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은 곧 아름다움 삶이다. 이세종은 케노시스의 삶을 통해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남겼다. 하나님은 자기비움을 철저하게 보여준 이세종의 삶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세종은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과 기록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어찌보면 우리가 이렇게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조차도 거부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질이 흙먼지(아파르)임을 알고, 공기 중의 흙먼지가 되길 원했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케노시스 삶의 미학’은 공기 속의 흙먼지가 되어 우리의 호흡으로 다시 들어오고 있다. 예수 믿고 공치는 인생을 살았던 이세종. 그는 케노시스의 삶의 미학을 통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었다.
■참고문헌
권문상,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새물결플러스, 2008.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분도출판사, 2019.
김금남, 「우리들의 거울: 이세종선생」『동광원 사람들』도서출판사색, 2011,
김수천, 「이세종선생의 영성형성을 위한 성서묵상 훈련 고찰」, 이세종기념사업회, 2018.
대천덕, 예수원 엮음, 『우리와 하나님』, 홍성사, 2015,
리처드 포스터, 권달천․황을호 옮김, 『영적 훈련과 성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되는 길』 ,생명의 말씀사, 2007.
서굉일, 「이공 이세종의 한국교회사적 위치」, 이세종기념사업회, 2017),
심중식, 「예수 제자교육훈련과 이세종의 영성」, 이세종기념사업회, 2017.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은성, 1993.
유은호, 「이세종의 생애와 영성사상에 관한 연구」, 이세종기념사업회, 2014.
유장춘, 「이세종 선생의 영성과 삶이 제시하는 기독교 사회복지 정신과 실천 원리」, 이세종기념사업회, 2018.
유해룡,『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7,
이강학, 「기독교 영성 이해: 정의 , 해석, 경험 그리고 훈련」, 해석학연구소 엮음,『한국교회의 올바른 영성 확립과 해석학』, 호남신학대학교출판부, 2010.
이강학, 「기독교 영성학과 이세종 영성」, 이세종기념사업회, 2015.
이제민, 『인생피정』, 생활성서, 2003.
이후정, 「이세종의 수덕적 삶」, 이세종기념사업회, 2015.
제자원 기획 편집,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빌립보서․골로새서』, 바이블네트, 2012.
최광선, 「이공 이세종 선생 생태영성 탐구」, 이세종기념사업회, 2014.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장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19)
................................................................ 미 주 ....................................................................................................
1)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이나 하셨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 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창조행위가 완전하며 흠이 없으며, 즐거움 것이었으며, 만족스러운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2)이것은 성경에 나온 말씀이 아니라,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3)이세종 기념 사업회는 그동안 5차에 걸쳐서 학술세미나를 진행하였다. 1차 세미나는 “성자 이세종과 문화 컨텐츠 활성화 방안”(하동안, 조현, 2012.11.11), 2차 세미나는 「이세종의 생애와 영성사상에 관한 연구」(유은호, 2014), 「이공 이세종 선생 생태영성 탐구」(최광선, 2014), 3차 세미나는 「기독교 영성학과 이세종 영성」(이강학, 2015), 「이세종의 수덕적 삶」(이후정, 2015), 4차 세미나는 「이공 이세종의 한국교회사적 위치」(서굉일, 2017), 「예수 제자교육훈련과 이세종의 영성」(심중식, 2017), 5차 세미나는 「이세종선생의 영성형성을 위한 성서묵상 훈련 고찰」(김수천, 2018), 「이세종 선생의 영성과 삶이 제시하는 기독교 사회복지 정신과 실천 원리」(유장춘, 2018) 등이 있다.
4)하나님이 최종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는 말은 “웨힌네 토브 메오드”이다. 여기서 웨힌네(ה)는 ‘그리고 보라’(and behold)라는 말이다. 즉 일종의 감탄사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라아’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31절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서 ‘보시니’가 ‘라아’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유심히 보시고(라아), 너무 기뻐서 보라!(힌네) 감탄사를 하시면서 메오드(심히) 토브(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은성, 1993. 37쪽. 이세종의 탄생과 사망년도는 전기 작가들 간에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세종의 탄생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이현필은 1880년, 엄두섭은 1878년 혹은 1879년, 윤남하는 1879년, 차종순은 1883년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세종의 생애와 영성사상 연구」를 발표한 유은호 교수는 이세종은 1877년 7월 1일에 태어나 1942년 6월 4일 오후 9시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면사무소에 있는 제적등본을 들고 있다.
6)엄두섭, 앞의 책, 22쪽. 원래 이세종의 본명은 ‘영찬’이었다.
7)대천덕 신부님은 공(空)이란 한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空은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자 空을 분석하면서, 먼저 예수님이 사람의 지붕(⼧)밑에 들어와서 친히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자를 보면, 노아의 홍수 때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여덟 명이었다. 그러므로 '⼋'는 세례를 의미한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과 하나 되기 위해서이다. 또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실 때 노동자로 사셨다. ‘공’(⼯)자는 노동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노동자로 사셨고, 가장 낮은 계층으로 오셨다. 이처럼 대천덕 신부는 예수님을 空으로 해석했다.(대천덕, 예수원 엮음, 『우리와 하나님』, 홍성사, 2015, 88-89쪽 참조)
8)엄두섭, 앞의 책, 27-32쪽. 엄두섭은 이세종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① 이세종이 산당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김제 만경에 가서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찬송소리가 들려서 찾아들어가 구약성경을 빌려서 레위기를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부인을 시켜 열두 제상을 차리고 하고, 정성을 드리다가 나중에 어느 교인에게 신약성경을 빌려보고 그 행위를 시정했다는 설이다. ② 이세종이 광주의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에 다니는 학생 두명에게서 찬송가를 얻어서 불러보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③ 이웃에 나주읍에서 이사온 가정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에 예수를 믿다가 그만 둔 사람으로 그들이 쓰지 않던 구약성경이 있어서 빌려서 읽어보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 등이다.
9)권문상,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새물결플러스, 2008), 69쪽
10)같은 책, 71쪽.
11)같은 책, 72쪽.
12)토마시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을 때 본질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신적인 그 무엇도 버리지 않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형태로 존재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있어서 신적인 양태(mode)를 버리신 것이며,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성부와 함께 처음부터 지니고 계셨고 세계를 상대해서 행사하시며 완벽하게 집해하고 다스리셨던 신의 영광을 포기 하신 것이다.(권문상, 앞의 책, 73쪽)
13)예수님은 케노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24절, 마가복음 8장 34절,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아파르네오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의 의미는 케노시스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4)여기서 ‘마음’은 헬라어 ‘프로네오’이다. 프로네오는 ‘생각하다’, ‘얻으려고 애쓰다’, ‘~에 마음을 두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품어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각을 가져라.’는 말입니다.
15)제자원 기획 편집,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빌립보서․골로새서』, 바이블네트, 136쪽 참조
16)외프케(A. Oepke)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적 형상과 존재방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에 의해 그것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고 해석했다. 외프케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로 고린도후서 6장 8절에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를 제시하고 있다.(바이블렉스 5.0, 빌립보서 2장 7절 주해 참조)
17)로마이어(E. Lohmeyer)와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18)불교가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비우기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묵상 마음을 채우는 시도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R. Foster)는 ‘자기 부인’을 ‘자기 멸시’와 구분하여 설명한다. 자기 멸시는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자신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 가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즉 자기 멸시는 창조의 선함을 부정하고 자기 부인은 창조의 선함을 입증한다. (리처드 포스터, 권달천․황을호 옮김, 『영적 훈련과 성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되는 길』 (생명의 말씀사, 2007), 166쪽 참조.
19)엄두섭 앞의 책, 126쪽. 참조
20)엄두섭, 앞의 책, 125쪽.
21)개역개정이 네페쉬 하야를 “생령”이라 번역하고 있다. 영어성경은 생령을 living soul 혹은 living being로 번역하고 있다. 필자는 생령이라는 번역이 하나님의 생기로 탄생한 인간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흙먼지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기”에서 “기”는 히브리어 ‘네샤마’이다. ‘네샤마’는 자주 루아흐(spirit)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20:27)에서 영혼이 네샤마인데, KJV는 네샤마를 spirit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령으로서의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기(영)가 사라진 존재를 혈육만 있는 존재, 곧 ‘바사르’가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바사르)이 됨이라”(창6:3)
22)업두섭 앞의 책, 126쪽.
23)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장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19), 15쪽. 니체는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존재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을 더러운 강물이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 초인은 바다이다.
24)니체, 앞의 책, 19쪽.
25)인간 정신의 변화에 대해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를 참조하면 된다.(니체, 앞의 책, 35-38쪽)
26)니체, 앞의 책, 38쪽.
27)마태복음 18장 3절.
28)이제민, 『인생피정』(생활성서, 2003), 41쪽 참조.
29)같은 책, 43쪽
30)같은 책, 43쪽.
31)엄두섭, 98쪽.
32)엄두섭, 앞의 책, 82쪽 참조.
33)엄두섭, 앞의 책, 88쪽
34)Sandra M. Schneiders, "Theology and Spirituality: Strangers, Rivals, or Partners?", Horizon 13(1986).266.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7, 17쪽 재인용.
35)영성이란 존재론적 의미에서 영이란 실재를 통한 자아 초월적인 능력 그 자체를 말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 초월적인 경험을 현재적인 삶으로 실현하고 통합하려는 그 과정과 실체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유해룡,『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7, 17쪽)
36)이강학, 「기독교 영성 이해: 정의 , 해석, 경험 그리고 훈련」, 해석학연구소 엮음,『한국교회의 올바른 영성 확립과 해석학』, (호남신학대학교출판부, 2010), 102쪽,
37)이세종은 자신이 초인으로 평가받는 것을 철저히 부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저술을 남기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것을 부정하였다. 세상에서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우리가 오늘날 이세종을 삶과 흔적을 복원하여 재생하는 것은 그를 초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별된 인간’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엄두섭이 이세종을 초인이라고 정의 한 것은 현실의 욕망과 집착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말한 것이다.
38)엄두섭, 앞의 책, 169쪽.
39)같은 책, 37쪽. 이세종의 말에 오복희는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섰다. 즉 탁발을 실행했다.
40)같은 책, 15쪽.
41)내적 초월의 삶이 그를 거룩한 가난으로 인도했다.
42)“심령이 가난한 자”를 영어 성경은 공히 ‘the poor in spirit’로 번역하고 있다. 즉 심령은 헬라어로 ‘프뉴마’이지만,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영혼’ 혹은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
43)엄두섭, 앞의 책, 13-14쪽.
44)같은 책, 14쪽.
45)김금남, 「우리들의 거울: 이세종선생」『동광원 사람들』도서출판사색, 2011, 11쪽
46)엄두섭, 앞의 책, 17쪽
47)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고 했다. 즉 누가는 ‘심령’(프뉴마)이라는 말을 제외하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누가가 말한 가난은 ‘소유의 가난’을 말한다. 누가는 물질적으로 충만한 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풍족한 자들에게 ‘소유의 가난’을 강조했다. 즉 부자들에게 ‘소유의 나눔’을 강조한 셈이다. 누가는 그 대표적인 경우를 세리 삭개오를 제시하고 있다.
48)엄두섭, 앞의 책, 54쪽.
49)업두섭, 앞의 책 55쪽.
50)이세종은 나무나 풀뿐만 아니라 금수곤충까지도 자비심을 베풀고 살생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에게 해로운 동물이라도 죽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동물을 죽이는 것이 선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한 판단근거를 잠언 12장 10절에 근거하고 있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51)독일의 신비주의 영성가 엑크하르트(M. Eckhart)는 영적 가난을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했다.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nichts willen)이다. 이것은 집착적 자기 의지, 소유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의지의 가난이다. 둘째, “아무것도 알지 않는 것”(nichts wissen),즉 무지이다. 무지는 인간의 오감으로 얻어진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빛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nichts haben)이다.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분도출판사,2019), 205-217쪽 참조.
52)엄두섭, 앞의 책,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