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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권 세기(世紀) 고려(高麗) 2
○ 금(金)나라 목종(穆宗) 영가(盈哥) 10년 계미 숙종 8년 2월에 고려가 비로소 와서 통호(通好)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숙종 7년 임오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영가(盈哥)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회하였다.
○ 고려의 지역은 압록강(鴨綠江) 동쪽과 갈라로(曷懶路)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요나라 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으며, 백산(白山)이라는 산이 그곳에 있는데, 이는 대개 장백산(長白山)
으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 살펴보건대,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리고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금나라의 선조는 본국 평주(平州)의 승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이다.
처음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으며, 여진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
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으며,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큰아들을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막내를 영가(盈哥)라 하였다.
그 가운데서 영가가 가장 웅걸차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큰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영가의 뒤를 이었으며, 오아속이 졸하자 그의 동생인 아골타(阿骨打)
가 즉위하였다.
예종(睿宗) 4년 6월에 동번사(東藩使) 요불(褭弗)ㆍ사현(史顯)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가 일찍이 「우리 조종들께서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의리상 대방에
귀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지금 태사로 있는 오아속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예종 12년 3월에는 아골타가 아지(阿只) 등을 파견하여 글을 올렸는데, 형제(兄弟)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고
(祖考) 때부터 한 귀퉁이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일러 대국(大國)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 조심하여 섬
겼다.’ 하였다.
14년 8월 정축에 중서 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더구나
금나라가 발원한 곳은 반은 우리 땅이다.’는 내용이 있자, 금나라 임금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금나라의 선조는 본디 고려에서 나와서 복종하여 섬기던 자이다.
여진이 비록 예전에 고려에 속하였으나, 다시 고려와 통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앞서 어떤 의원(醫員)이 병을 잘 치료하였는데,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그의 이름도 밝
히지 않고는 여진의 완안부(完顔部)에서 살았다.
목종(穆宗) 때 어떤 척족(戚族)이 병이 나자 이 의원이 진찰하여 병세를 살폈다.
목종이 의원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 사람의 병을 낫게만 해 준다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의원이 좋다고 하였다. 그 사람의 병이 낫자, 목종이 처음에 약속한 대로 돌려보내 주었다.
을리골령(乙離骨嶺) 복산부(僕散部)의 호석래(胡石來) 발근(勃菫)이 고려와 여진의 사이에 살고 있었다.
목종이 족인(族人) 수아(叟阿)를 시켜 호석래 발근을 초청해 오도록 하고는, 인하여 수아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까지
의원을 호송해 가서 돌려보내 주게 하였다. 그 의원이 고려로 돌아가서 고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진의 흑수부
(黑水部)에 사는 부족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군사가 더욱 정예롭게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 하였다.
고려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여진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얼마 뒤에 호석래가 귀부(歸附)하였으며, 마침내 을리
골령 동쪽에 있는 여러 부족들을 거느리고 모두 귀부하게 하였다.
○ 아소(阿疎)가 요나라에서 그의 무리인 달기(達紀)를 시켜 갈라전(曷懶甸) 사람들을 선동하니, 갈라전 사람들이
달기를 체포하였다. 금나라 목종이 달기를 고려로 송환하면서 고려 왕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목종이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는 알로한(斡魯罕)을 시켜 고려로 가서 싸움에 이긴 것을 통보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승리를 축하하였다. 얼마 뒤에 또 사갈(斜葛)과 알로한을 시켜 고려로 가서 빙문
하게 하니, 고려 왕이 말하기를,
하고는 이어 큰 은반(銀盤) 하나를 주면서 사례하였다. 그 뒤에 갈라전의 여러 부족들이 모두 금나라로 귀부하고자
하였다. 고려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와서 귀부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고려에 가까워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다.
고려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귀부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사갈이 고려에 있다가 갈라로(曷懶路)를 오가면서 이런
사실을 모두 알았다.
이에 드디어 석적환(石適歡)을 시켜서 갈라전으로 가서 갈라전 사람들을 귀부시키게 하였다.
석적환이 출발하기 전에 목종이 죽고 강종(康宗)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강종이 석적환을 파견하여 성현(星顯) 통문(統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을리골령에 이르러서 군사를 더 모집한
다음, 활녈수(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을 순행하면서 배반하여 도망한 7성(城)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 갈라전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고하였다. 갈라전의 관속(官屬)들이 사륵(斜勒)
상온(詳穩)과 치라보(治刺保) 상온으로 하여금 고려로 가게 하니, 석적환 역시 배노(盃魯)를 파견하여 고려로 보냈다.
그러자 고려에서 차라보 등을 머무르게 하고 배노는 되돌려 보내면서 ‘너와는 의논할 일이 없다.’ 하였다.
이에 오수(五水)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였으며, 단련사(團練使) 가운데 붙잡힌 자가 14명이나 되었다.
《이상 모두 금사》
○ 강종(康宗) 오아속(烏雅束) 2년 갑신에 숙종 9년 고려가 와서 침공하자, 석적환이 크게 격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을 추격하여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벽등수(闢登水)에서 막아 다시 크게 격파하였다.
그들을 추격해서 벽등수로 들어가 잔병들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말하기를,
하면서, 단련사 14명과 6로(路)의 사인(使人) 가운데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
를 요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사갈로 하여금 국경을 확정하게 하였다.
사갈이 을리골수(乙離骨水)와 갈라전(曷懶甸) 활녜수(活禰水)에 이르러 두 달간을 머물렀는데, 사갈이 송사(訟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사건이 있을 적마다 지체시키므로 백성들이 아주 괴롭게 여겼다.
이에 강종이 사갈을 송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잔수(三潺水)에다가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지난날에
몰래 고려와 왕래하면서 화란을 일으킨 자들을 즉시 법에 의거해 처단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불문에
부치니, 강종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동》
○ 요 천조(遼天祚) 건통(乾統) 5년 숙종 10년 11월 병진에 고려의 삼한국공(三韓國公) 왕옹(王顒)이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우(王俁)가 사신을 파견하여 부음을 고하였다. 《요사》
○ 송 휘종 숭녕(崇寧) 5년에 예종(睿宗) 원년 왕우가 왕위를 이어받고 나서는 조공하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리고 또 사자(士子) 김서(金瑞) 등 5인으로 하여금 태학(太學)에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박사(博士)를 두었다.
《송사》
○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는 원우(元祐) 5년(1090)부터 원부(元符) 원년(1098)에 이르기까지 공사(貢使)를
두 번 보내왔다. 이에 3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어루만져 편안하게 해 주었는데, 이는 원풍(元豐) 때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황제가 천자의 자리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바치고 크나큰 선대의 업적을 계승함에 온 천하의 모든 나라
들이 다 신하 노릇을 하였다. 이에 황제의 덕이 온 번복(藩服)에 덮이고, 황제의 은택이 바다 건너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에게 명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고려로 사신 가도록 하였는데, 예물을 풍성하게 하고, 은혜로운 조서를 또렷하게 내렸다.
이는 고려에 은혜를 더 내려서 총애하고 무휼함으로써 돌아가신 신종황제의 뜻을 이어 더욱 거룩하고 융성하게 하기 위
해서였다. 숭녕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의 매잠(梅岑)을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고려 왕 왕희(王煕)가
거란 왕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이름을 왕옹(王顒)으로 고쳤다. 그러나 신종황제 때부터 먼 외방 사람을 힘써 무휼하
면서 오도록 함에, 하늘마저 슬기로운 그 계책을 도와주었다.
이에 고려의 왕 왕휘(王徽)가 왕위를 이어받아 그 뜻을 이어받드니, 이는 아마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왕휘는 충순(忠順)하고 사리를 잘 따랐다. 그리하여 중국을 높이 떠받들 줄 알아 중국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 예모와
뜻이 정성스럽고 도타웠으며, 심지어는 중국 장사치들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예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정사를 베푸는
데 있어서는 어짊과 용서를 숭상하였으니,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숭녕 초에 왕옹이 죽으니, 나이가 50세였으며, 세자인 왕우(王俁)가 즉위하였다.” 하였다.
○ 금 강종(金康宗) 4년 병술 예종 원년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위를 승습한 것을 축하
하였다. 강종이 배노(盃魯)를 보내어 빙문하게 하고, 또 전에 약속한 대로 망명한 백성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구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하였다. 강종이 이 말을 믿고 완안부(完顔部)의 아괄(阿聒)과 오림답부(烏林答部)의 승곤(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
로 가서 이를 데려오게 하고, 강종은 마기령(馬紀嶺)의 을척촌(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인도해 오기를 기다렸다.
아괄과 승곤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이들을 살해하고는 갈라전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9성(城)을
쌓았다.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하였는데, 태조(太祖)만이 혼자 아뢰기를,
하니, 강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알새(斡賽)로 하여금 내외의 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 아도한(阿徒罕)을 선봉으로 삼았다. 고려의 군사 가운데 해도(海島)에 주둔한 자들이 있었는데, 아도한이 군사 30명
을 거느리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 영책(營柵)과 전함을 불태우고 이들을 격파하니, 드디어 타길성(駝吉城)이 함락되었다.
○ 고려의 군사 수만 명이 와서 대항하였다.
알새가 군사를 10개의 부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나가고 들어와 드디어 크게 격파하였다.
○ 혼탄(渾坦)이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고려 군사를 만나 오래도록 힘을 다해 싸웠다.
사묘아리(斜卯阿里)가 분기하여 창을 앞세우고 달려가 진중에서 적장을 찌르자, 적이 드디어 무너졌다.
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사묘아리가 먼저 적병을 쳐부수고 두 성을 빼앗았다.
고려 군사들이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요해처를 차지하고 있어서 진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사묘아리가 이들을 추격하여 갈라수(曷懶水)에 이르렀다. 고려의 군사들이 앞 다투어 강가로 달아나자, 사묘아리가 그
틈을 타서 거의 대부분을 죽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석적환과 군사를 합하였다. 도중에 적병 5만 명을 만나서 이들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 알로(斡魯)가 알새(斡賽)를 대신해서 몇 달 동안 군사를 거느렸다.
알로 역시 고려의 9성(城)에 대치해서 9개의 성을 쌓아 버티면서 나가서는 싸우고 들어와서는 지켰다.
○ 6월에 알새가 다시 군중으로 왔다. 고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자, 알새가 이들을 패퇴시키고는 진격해서
그 성을 포위하였다. 7월에 고려에서 다시 강화를 요청하니, 강종이 이르기를,
하였다. 고려에서, 도망하여 고려로 들어간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고 9성의 둔수(屯守)를 파하며, 침략한 옛 땅도 되돌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고려와 강화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살펴보건대, 9성은 함흥부(咸興府) 이북의 지역이다.
○ 요 건통(乾統) 8년 예종 3년 4월 병신에 고려 왕 왕우를 봉하여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삼고 그의 아버지인 왕옹을
고려국왕에 증직하였다. 12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요사》
○ 금 태조 수국(收國) 원년 예종 10년 9월에 태조가 이미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키고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명
하여 보주(保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보주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바,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해서 보주를 설치하였
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가고살갈에게 명하여 빼앗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가고살갈이 군사를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또 고려 왕이 장차 사신을 보내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태조가 납합오준(納合烏蠢)으로 하여금 군사 1백 기(騎)를 가지고 돕게 하고는 가고살갈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하였다. 11월에 요나라에 딸린 여진(女眞)인 마만(麻懣)ㆍ태만(太彎) 등 15명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개주(開州)를 공격
하여 함락시키니, 보주에 있는 여진의 여러 부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태조가 가고살갈(加古撒喝)을 보주로 도통(保州路都統)으로 삼았다. 태조가 요나라 임금의 군대를 격파하여 쫓아내
었다. 가고살갈이 합주(合主)ㆍ순화(順化) 두 성을 격파한 다음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보주를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알로(斡魯)로 하여금 갑사(甲士)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금사》
○ 2년 예종 11년 윤1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요나라와 싸워 승리한 것을 축하하고, 또 말하기를,
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신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그러고는 가고살갈과 납합오준 등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가고살갈, 아실뢰(阿實賚) 등이 보주를 공격하자, 요나라의 수장(守將)이 도망쳤는데 고려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얼마 뒤에 고려국왕이 포마(蒲馬)를 시켜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국왕에게 유시하기를,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보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 송 정화(政和) 6년에 예종 11년 고려의 사신을 올려 국신사(國信使)라 하고 예우를 서하국(西夏國)보다 낫게 하여
요나라 사신과 함께 모두 추밀원(樞密院)에 예속되게 하였다.
그리고 인반압반관(引伴押伴官)을 고쳐 접송관반(接送館伴)이라 하고, 《대성연악(大晟燕樂)》을 하사하고, 변두(籩豆)ㆍ
보궤(簠簋)ㆍ준뢰(尊罍) 등의 제기(祭器)도 하사하였으며, 사신에게 예모전(睿謨殿) 안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송사》
○ 금 천보(天輔) 2년 예종 13년 12월 갑진에 발근(孛菫) 출패(朮孛)를 파견하여 요나라 지역을 평정하였다고 고려에
유시하였다.
○ 금나라에서 고려에 유시하기를,
하였다.
○ 윤달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요나라를 이긴 것에 대해 축하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3년 예종 14년 11월에 고려에서 갈라전(曷懶甸)의 장성(長城)을 3척 가량 높여서 쌓자, 변경의 관리가 군사를 출동
시켜 저지시켰으나, 고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갈라전 발근 호라고(胡刺古)ㆍ
습현(習顯)이 이 사실을 아뢰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상동》
○ 4년에 예종 15년 함주로 도통사(咸州路都統司)가 보주(保州)ㆍ필리위(畢里圍) 두 성에다가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키
면서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상동》
○ 요 천경(天慶) 10년에 예종 15년 고려에서 군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여 금나라를 막고자 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힐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요나라가 망하였다.
○ 고려는 요나라와 더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이 2백여 년이었다. 《이상 모두 요사》
○ 송 선화(宣和) 4년 임인 예종 17년 3월에 고려 왕 왕우가 병이 심해지자,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4월에 왕우가 훙하였다. 이자겸 등이 이에 세자 왕해(王楷)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해는 얼굴이 준수하게 생겼으며, 몸체는 작았으나 자태가 풍성하여, 살이 많이 쪘다. 성품이 지혜롭고 학식이 풍부
하였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여,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관속들이 잘못을 범할 경우 반드시 엄하게 꾸짖었다.
즉위함에 미쳐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했으나, 나라의 관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꺼렸다.
지난번에 신사(信使)가 고려에 이르자, 조서(詔書)를 받고 표문(表文)에 배례하며 잔치를 베푸는 예를 거행함에 있어
서,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어른다운 의젓한 풍모가 있으니, 역시 동방 오랑캐의 어진 임금이 되는 것
이 마땅하다. 《고려도경》
○ 5년이다. 인종(仁宗) 원년 당초에 고려의 풍속에는 형이 죽을 경우 왕위를 아우가 이어받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
왕우가 졸하자, 여러 동생들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고려의 상(相) 이자겸이 왕우의 아들인 왕해를 임금으로 삼고
와서 부음을 고하였다. 황제가 이에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과 중서 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墨卿)에게 조서
를 내려서 위문하게 하였다.
왕우가 왕위에 있을 적에 중국 조정에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2명의 의원이 가도록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예종 13년에 송나라에서 합문 지후(閤門祗候) 조의압(曹誼押), 태의국 교수
(太醫局敎授) 양종립(楊宗立)ㆍ두순거(杜舜擧), 교학(敎學) 성상(成湘), 학록(學錄) 진종인(陳宗仁)ㆍ남줄(藍茁)이
나왔다.
《고려도경》에도 말하기를, “정화(政和) 무술년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직(醫職)에 있는 사람을 파견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남줄 등이 고려로 가서 2년간 머무른 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의원 2명이라고 한 것은 앞의 2명은 의술에 정통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따라왔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의원들이 2년을 머무른 뒤 돌아왔는데, 왕해가 의원들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두 의원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송사》
○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국가에서 바야흐로 여진과 통호(通好)하고 있을 때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
의 곁에서 모시고 있는 의원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노의(老醫)들을 불러 그 가운데 두 사람을 택하여
고려로 가도록 하였다.
의원들이 고려에 이르자 날마다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의술(醫術)에 관한 것은 물어보지 않으면서 중국 대궐 안의 일
에 대해서만 자주 물어보았다. 이에 두 의원이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자, 고려의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아주
긴밀한 일이 있어서 송나라 황제께 진달하고자 하는데, 사신으로 나오는 자가 비밀을 지키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에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을 구하여 이 일을 분부하려는 것이다. 공들에게 대궐 안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공들이 참으로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며 신임을 받는 사람들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두 의원이 인하여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고려의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송나라 황제께서 여진과 더불어 화친하고는
거란을 협공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대개 우리나라는 여진과 육로로 서로 통하고 있어서 항상 사람
들을 시켜서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
여진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거란을 이긴 뒤에는 반드시 송나라를 쳐들어갈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나라도 역시 스스로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항상 그에 대한 대비책을 생각해 왔다.’ 하였다.
두 의원이 그들에 대한 방비책을 묻자, 고려 임금이 말하기를, ‘여진에서 진법(陣法) 하나를 만들었는데, 아주 뛰어난
진법이다. 내가 지금 그 진법을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하고는, 인하여 여진의 진법을 의원들에게 보여 주게
하였는데, 대개 괴자마(拐子馬)와 비슷한 진법이었다.
두 사람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자, 황제가 노하여 노의(老醫)를 불러 힐책하였는데, 한 사람은 대궐 문을 나가 피를
토한 뒤 죽지 않았으며,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죽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장단의(張端義)의 《귀이록(貴耳錄)》에도 두 의원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
○ 금 태종(金太宗) 천회(天會) 원년에 인종 원년 습현(習顯)으로 하여금 요나라의 주군(州郡)을 획득한 사실을 고려에
유시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바야흐로 난동을 일으킨 자들을 처형하고 있었으므로, 습현에게 “이것은 선부 국왕(先父國王)에게
내리는 글이다.”라고 하게 하였다.
습현이 관소(館所)로 나아갔다. 처형한 관료가 모두 70여 명이었다. 즉시 구례(舊禮)에 의거하여 접견하였다.
그러고는 표문을 올려서 요나라를 이긴 것을 축하하였으며, 아울러 방물도 바쳤다. 다시 요나라 황제가 하국(夏國)으로
도망친 사실을 통보하였다. 12월에 고수(高隋)와 사야(斜野)가 고려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고려
에서 접대하는 예가 불손하였다. 이에 고수 등이 감히 고려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하고는, 고수 등에게 되돌아오라고 명하였다. 《금사》
○ 살펴보건대, 《금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천보(天輔) 4년(1120)의 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2년 인종 2년 5월 을사에 갈라로 군수(曷懶路軍帥)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아뢰기를,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 7월 임진에 동지남로도통(同知南路都統) 골실답(鶻實荅)이 아뢰기를,
하였다.
○ 10월에 남로 군수(南路軍帥) 도모(闍母)에게 명하여, 갑사(甲士) 1천 명을 합소관로(合蘇館路)의 발근(孛菫) 완안아
실뢰(完顔阿實賚)에게 보태 주어 고려를 방비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송 선화(宣和) 7년에 인종 3년 흠종(欽宗)이 즉위하니 하례(賀禮)하는 사신이 명주(明州)에 이르렀다.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이 말하기를,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고려의 사신을 명주(明州)에 머물게 하고는 폐백만 바치게 하였더니, 이듬해에 비로소 본국
으로 돌아갔다. 왕휘(王徽) 이래로 비록 사신이 끊이지 않고 왔으나, 거란의 봉책(封册)을 받고 그 정삭(正朔)을 받들
어서, 중국 조정에 올리는 문서와 다른 중요한 문서에 갑자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고려에서 거란에게 한 해에 조공을
6회나 하였는데도 거란에서는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하였다. 금나라 사신이 고려에 가서는 더욱 거만하고 사나워서,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이 조금만 뜻을 거스르면
문득 머리채를 휘어잡고 매질을 하였으며, 우리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고 와서
엿보고는 하사한 물품을 나누어 가졌다.
거란에서 항상 고려가 서쪽으로 송나라에 조공(朝貢)하는 일에 대해 힐문하자,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사과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니, 거란에서 그제야 깨달아서 책망을 면하였다. 《송사》
○ 《손공담포(孫公談圃)》에는, “거란에 불사(佛寺) 하나가 있는데,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신이 거란에 가면 반드
시 그곳에 가서 분향하였다. 풍직(豐稷)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보니, 모두가 신종황제가
고려에 하사한 것이었다. 대개 고려는 거란에 제압당하여 매번 거란의 사신이 올 적마다 고려의 전각(殿閣)의 지붕을
덮은 치미(鴟尾) 기와를 모두 잠시 철거하였다.” 하였다.
○ 금 천회(天會) 4년 인종 4년 6월 초하루 병신에 고려국왕 왕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번국(藩國)으로
자칭하니, 너그러운 뜻의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7월 병인에 고백숙(高伯淑), 오지충(烏至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
하여, 사신이 왕래함에 있어서는 모두 요나라와의 구례(舊例)를 따르도록 하였으며, 이어 보주로(保州路)와 변방 지역
의 사람으로서 고려의 경내에 있는 자들을 모두 쇄환하게 하였다. 고백숙 등이 출발하기 전에 조칙을 내리기를,
하였다. 고백숙 등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왕 왕해가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모든 일을 예전에 요나라를 섬기던 규례
대로 하였다. 《금사》
○ 《문헌통고》에는,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여진은 혼동강(混同江)의 북쪽에 있는데, 고려와는 압록강 하나
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여진은 본디 거란을 신하로서 섬겼으며, 고려에 대해서는 노예로서 섬겼다. 그런데 강성해짐
에 미쳐서는 고려에서 도리어 신하로서 여진을 섬겼다.’ 하였다.” 하였다.
○ 송 고종(宋高宗) 건염(建炎) 원년 인종 5년 5월에 고종황제가 즉위하고는, 즉시 호려(胡蠡) 《송사》에, “적공랑
(迪功郞) 호려(胡蠡)를 파견하였다.” 하였다. 등을 보내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로 가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정에서
고려가 금나라 사람들과 통할까 우려한 때문이다.
금나라에서도 이때에 왕추(王樞)에게 책명(册命)을 가지고 고려에 사신을 가게 하였는데, 이 또한 고려가 우리 송나라
와 통할까 우려한 때문이다. 호려가 귀국한 것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에 빠뜨렸다. 《문헌통고》
○ 2년에 인종 6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니, 절동로 부총관(浙東路
副摠管) 양응침(楊應忱)이 살펴보건대, 《송사》에는 양응성(楊應誠)으로 되어 있다. 조서에 응하여 가기를 청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하였다. 《송사》에, “이로써 이성(二聖)을 맞이해 오기를 도모한 것이다.” 하였다.
3월에 양응침이 가 형부 상서(假刑部尙書)가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절동(浙東)의 수신(帥臣) 책여문(翟汝文)
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송사》에, “양응성이 그 말을 듣고서도 드디어 부사 한연(韓衍), 서장관 맹건(孟健)과 함께
항주(杭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려로 갔다.” 하였다. 6월에 양응침이 고려에 이르러 국왕 왕해에게 조서를 선유(宣諭)하
니, 왕해가 조서를 받고 나서 양응침과 더불어 서로 맞대고 의논하였다. 왕해가 말하기를,
하니, 양응침이 말하기를,
하니, 왕해가 난처해 하는 기색이 있었다. 조금 뒤에 왕해의 명으로 태부(太傅) 김부일(金富佾)이 관사(館舍)에 와서
말하기를,
하였는바, 고려 사람의 말이 과연 책여문이 앞서 헤아린 바와 같았다. 그러자 양응침이 말하기를,
하니, 김부일이 말하기를,
하였다. 《상동》
○ 양응침이 고려에 있은 지 수십 일이 되었다. 왕해가 다시 중서 시랑(中書侍郞) 최홍재(崔弘宰), 지추밀원사(知樞密
院事) 김부식(金富軾) 등을 시켜 관사(館舍)에 가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전날에 한 말을 고집하면서 변경하지 않았다.
관반사(館伴使) 문공인(文公仁)이 또한 말하기를,
하고, 최홍재는 말하기를,
하면서 끝내 조서에서 말한 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양응침은 고려에 64일이나 머물러 있다가 부득이 수창문(壽昌門)
에서 왕해를 만나 보고는 배표(拜表)만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상동 및 송사》
○ 10월에 양응침이 대궐에 들어와 입대(入對)하여 그동안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니, 황제는 왕해가 중국의 은혜를
저버린 것에 대해 몹시 노했다. 상서(尙書) 주승비(朱勝非)가 아뢰기를,
하니, 우복야(右僕射) 황잠선(黃潛善)은 아뢰기를,
하였다. 그러자 주승비가 아뢰기를,
하니, 황제의 노여움이 그제서야 풀어졌다. 이때 개봉윤(開封尹) 종택(宗澤) 또한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군사를 출동
시켜 금나라를 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문헌통고》
○ 11월에 왕해가 그의 신하 윤언이(尹彦頤)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사죄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성(二聖)이 아직 귀국하지 못하였으므로 잔치를 할 적에 음악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전문(殿門) 밖에다가 막차(幕次)를 설치한 다음, 객성관(客省官) 오득흥(吳得興)에게 명하여 사신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게 하고, 중서 사인(中書舍人) 장징(張澂)에게 명하여 예식대로 접대한 다음 귀국시키게 하였다.
《송사》
○ 3년 인종 7년 8월 임신에 황제가, 보좌하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하니, 여이호(呂頤浩)가 아뢰기를,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상동》
○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 금 천회 9년 인종 9년 2월 기해에 고려 왕 왕해가 표문을 올려 보주(保州)로 도망하여 들어간 변방의 호구(戶口)를
색출하는 것을 면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욱(勗)이 표문을 올려 보주로 도망쳐 들어간 호구를 색출하지
말기를 청하니, 태종이 따라 주었다. 이로부터 보주의 경계가 비로소 정하여졌다.
○ 태조가 고려와 화친한 때부터 여진 사람으로서 고려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을 모두 색출하였는데, 10년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이에 종실(宗室)인 욱이 글을 올려서 간하기를,
하니, 황제가 따랐다.
○ 한방(韓昉)은 천회(天會) 연간에 건문각 대제(乾文閣待制)로 승진하였다. 위위 경(衛尉卿)과 지제고(知制誥)의 벼슬
이 더해지고 고려국신사(高麗國信使)에 충임되었다. 이때 고려와 비록 예전에 통호하여, 천회 4년에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번국(藩國)을 칭하기는 하였으나, 서표(誓表)를 바치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금나라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서표를 바치라고 하였으나, 모두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한방이 다시 고려로 가서 두세 번 독촉하였다. 고려에서는 글을 읽어 고금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자를 온 나라 안에서
찾아, 말할 내용을 미리 상의하여 확정 지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사신을 접대하면서 수답하게 하였다. 열흘이 지나서
비로소 마주 대했는데, 고려에서 한방에게 말하기를,
하니, 한방이 말하기를,
하자, 고려 측에서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는 서서히 의논해 보겠다고만 말하자, 한방이 말하기를,
하였다. 고려 측에서 약속한 것과 같이 서표를 올리니, 한방이 이에 돌아왔다. 《이상 모두 금사》
○ 송 소흥(昭興 고종의 연호임) 원년 인종 9년 10월에 고려에서 장차 조공하는 사신을 보내려고 하자, 예부 시랑 유약
(柳約)이 말하기를,
하였다. 11월에 유약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나, 끝내 가지 못하였다. 《송사》
○ 2년 인종 10년 윤4월에 왕해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최유청(崔惟淸), 합문 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를 파견
하여 금 1백 냥, 은 1천 냥, 능라(綾羅) 1백 필, 인삼 5백 근을 조공으로 바쳤으며, 최유청이 바친 것도 그것의 3분의 1
은 되었다. 황제가 후전(後殿)에 나아가 인견하고는 최유청, 심기에게 금대(金帶) 2개를 하사하였으며, 따뜻한 조서를
내려서 돌려보냈다. 이달에 정해현(定海縣)에서 말하기를,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이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고려의 강수(綱首) 탁영(卓榮) 등에게 적당히 헤아려 은혜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12월에 고려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홍이서(洪彜敍) 등 65명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친다는
소식을 듣고 임안부(臨安府)의 부학(府學)에다가 그들의 관소(館所)를 정하기로 의논하였다. 그러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하였다.
○ 3년 인종 11년 5월에 조서를 내려서 홍혜사(洪惠寺)를 동문관(同文館)으로 만들어 고려의 사신들이 오면 접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고려에서 사신이 오지 않으면서, 바닷바람에 배가 뒤집혀서 오지 못한다고 핑계 대었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고려에서 거짓말을 하여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헌통고》
○ 6년 인종 14년 고려의 지첩관(持牒官) 김치규(金稚圭)가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는데, 조정에서 그가 금나라의 간첩
일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려서 은과 비단을 하사한 다음 되돌려 보냈다. 이로부터 사신이 20여 년간 오지 않았다.
《상동》
○ 금 희종(金煕宗) 황통(皇統) 원년 인종 19년 정월 임인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11월 기유에 존호를 받은 것을 하례하였다. 《금사》
○ 2년 인종 20년 정월 을사에 고려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 조서를 내려서 왕해(王楷)에게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을 더해 주었다. 《이상 모두 상동》
○ 6년 인종 24년 5월 임신에 고려 왕 왕해가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현(王晛)이 왕위를 이어받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상동》
○ 해릉(海陵) 천덕(天德) 원년 의종(毅宗) 3년 12월에 고려의 하정조사(賀正朝使)가 광녕(廣寧)에 도착하였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폐립(廢立)한 일에 대해 말해 주고 중로에서 돌려보냈다. 《상동》
○ 2년 의종 4년 정월 신사에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새로 즉위한 황제의 명휘(名諱)를 고유(告諭)하고,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폐립한 일에 대해 유시하였다. 3월 병술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송 소흥(紹興) 32년 의종 16년 3월에 고려의 강수(綱首) 서덕영(徐德榮)이 명주(明州)에 와서 말하기를,
하였는데, 명주의 수신(守臣) 한중통(韓仲通)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오불
(吳芾)이 아뢰기를,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중지시켰다. 《송사》
○ 효종(孝宗) 융흥(隆興) 2년 의종 18년 4월에 명주(明州)에서 고려가 입공(入貢)했다고 말하였는데, 역사서에는 이들
을 인견(引見)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다. 효종ㆍ광종(光宗)ㆍ영종(寧宗) 3조(朝)를 거치면서 사신의 왕래가 마침내
끊겼다. 경원(慶元 송 영종의 연호임) 연간에 조칙을 내려 상인들이 동전(銅錢)을 바꿔 가지고 고려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고 조정에서도 사신을 끊었다. 고려인이 사신으로 들어올 때마다 명주(明州)ㆍ월주(越州) 두 군(郡)에서는 그들
을 지공하는 데 곤욕을 치르는 탓에 시끄러워 편안치가 못하였다.
궁궐에 도착하고 나서는 관소에서의 접대와 향연의 비용 및 하사해 주는 물품의 비용이 수만금을 헤아렸는데, 고려의
임금에게 주는 것은 제외하고도 그만큼이나 들었다.
우리 사신이 가는 데는 두 척 신주(神舟)의 길이와 크기가 전함의 몇 배는 되어 그 경비가 막대하게 들었으며, 삼절(三節)
관리의 신분에 따른 급여는 모두 현관(縣官)에게 의지하는데, 이 비용 역시 많이 들었다. 앞서 소식(蘇軾)이 ‘고려가 조공
을 바치는 데에는 다섯 가지의 폐해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문헌통고》
○ 금 세종(金世宗) 대정(大定) 4년에 의종 18년 압록강의 보수(堡戍)가 고려의 침입을 받아 약간 부서지고 무너졌다.
《금사》
○ 5년 의종 19년 정월에 세종이 고려에서 온 정조사(正朝使)가 하직 인사를 하는 것을 인하여 유시하기를,
하였다. 처음에는 고려의 사신이 별도로 사사로이 예물(禮物)을 바치는 것이 상례가 되었는데, 이해 만춘절(萬春節)에
황제가 고려 사신이 사사로이 예물을 바치는 것은 전례(典禮)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서를 내려 혁파시켰다. 《상동》
○ 9년 의종 23년 12월 무술에 고려의 변보(邊報)에서, 왕현(王晛)이 손자를 얻었으므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고하려
고 한다고 하였다. 《상동》
○ 10년 의종 24년 11월 기묘에 왕현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가 왕현을 폐위(廢位)시키고 스스로 서서 왕
이 되었다. 고려에 생일사(生日使)를 보냈는데, 대종정승(大宗正丞) 규(糾)가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의 변리(邊吏)가
전왕이 이미 양위(讓位)하였다고 하면서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문관들을 많이 죽
이고, 왕을 거제도(巨濟島)로 추방하고, 태자를 진도(珍島)로 추방하고, 태손(太孫)을 죽인 다음, 왕의 동모제인 익양군
왕호를 왕으로 삼았다.
○ 11년 명종(明宗) 원년 정월 임진에 왕호가 나라를 양위받은 사실을 고하자, 파속로(婆速路)에 조서를 내려서 받아
들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유사(有司)에게 공문을 보내서 상세히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 통보하기를,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하면서 조서를 내려서 유사로 하여금 다시 상세하게 물어보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왕현이 나라를 양위한다는 내용
의 표문을 올렸는데, 살펴보건대, 《금사》 본기에는 4월 정묘에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선신(先臣) 왕해(王楷)가 동생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유언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은 죄가 많
아서 왕으로 세울 수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믿지 않고 여러 재상들에게 물어보자, 승상(丞相) 양필
(良弼)이 아뢰기를,
하고, 우승(右丞) 맹호(孟浩)는 아뢰기를,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이어 고려의 사신을 물리치고는 왕현에게 직접 상세히 물어보는 조서를 내린 다음, 이부 시랑(吏部侍郞) 정(靖)
을 왕현에게 직접 물어보는 사신으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금사》 본기에는 5월 신묘의 일로 되어 있다.
이때 왕호가 사실은 나라를 찬탈하고서 해도(海島)에다 왕현을 가두어 두고 있었다. 정이 고려에 도착하자, 왕호가 말
하기를,
하였다. 이에 정은 끝내 왕현을 직접 만나 보지 못한 채 조서를 왕호에게 준 다음, 왕현이 올리는 표문을 왕호에게 전달
받아 가지고 돌아와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전의 표문과 대략 비슷하였다. 정이 돌아온 뒤 세종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하였는데, 승상 양필과 평장사(平章事) 수도(守道)는 아뢰기를,
하였다. 12월에 왕호가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익명(張翼明) 등을 파견하여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12년 명종 2년 3월 정축에 숙직장군(宿直將軍) 오고논사열(烏古論思列), 상서 우사원외랑(尙書右司員外郞) 장향
(張享)을 왕호의 책봉사(册封使)로 삼았다.
○ 왕호의 생일이 정월 19일이었는데, 이해 12월이 다 가도록 미처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사가 내년에 거행하자고 주청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5년 명종 5년 7월 병신에 갈라로(曷懶路)에서 아뢰기를,
하니,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 조위총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왕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서언평(徐彦平) 등 96명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하고는, 조서를 내려서 서언평 등을 잡아 고려로 송환하게 하였다. 얼마 뒤 고려에서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례하였다.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킨 뒤로는 왕호가 파견한 생일회사(生日回謝), 횡사회사(橫賜回謝), 하정
조사(賀正朝使), 진봉사(進奉使), 만춘절사(萬春節使) 등의 사신이 모두 길이 막혀서 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호가 이 사실을 모두 아뢰니, 조서를 내려 그 뜻에 답하면서 사신을 파견하되 절차에 따라서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16년 명종 6년 12월에 고려에서 호부 상서 오광척(吳光陟)을 파견하여 조위총이 내부(內附)하는 것을 허락지 않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상동》
○ 17년 명종 7년 정조(正朝)를 축하하는 예물 가운데 옥대(玉帶)가 옥과 비슷한 돌로 만든 것이었다. 이에 유사가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하여, 중지하였다. 12월에 유사가, 고려의 하절(下節)인 압마관(押馬官) 순성(順成)이 규례를 어기고 갑사(甲士) 3명을
거느리고 국경을 통과하였다고 아뢰니, 세종이 사신이 범법한 것은 중한 죄에 해당되나,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만 하라고
하였다. 《상동》
○ 23년 명종 13년 12월에 왕호의 어머니 임씨(任氏)가 훙하였다. 왕호가 생일사 및 하례사(賀禮使), 회사사(回謝使)
등의 파견을 중지시켜 달라고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따라 주었다. 《상동》
○ 29년 명종 19년 장종(章宗)이 즉위하였다. 조사(詔使)가 고려의 국경에 이르러서 입국이 자못 지체되었다.
조서를 내려서 그 까닭을 물으니, 고려에서 공손하게 사과하였다. 《상동》
○ 장종 명창(明昌) 3년에 명종 22년 고려의 하절(下節)인 김정(金挺)이 고려로 돌아가다가 평주(平州) 무령현(撫寧縣)
에 이르러서 무령현 역(驛)의 사람 하첨아(何添兒)에게 맞아 죽었다. 유사가 사신이 오갈 적에는 적당히 군사를 배정해
호위하기를 청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장만공(張萬公)이 아뢰기를,
하니, 상이 그가 아뢴 것을 옳게 여겨, 지금부터 접반(接伴)하고 접송(接送)하는 정사와 부사가 사신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하였을 경우 죄주겠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예전에는 하정조사(賀正朝使)가 12월 29일에 들어와 알현하였는데,
명창 6년 12월 29일인 기묘일은 입춘(立春)이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2일 전에 들어와 알현하라고 하였다. 《상동》
○ 승안(承安) 2년 명종 27년 10월 경진에 상서성(尙書省)에서 아뢰기를,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위시키고 태자를 추방한 다음 왕의 동모제인 평량공
(平凉公) 왕민(王旼)을 왕으로 세웠는데, 왕의 이름을 왕탁(王晫)으로 고쳤다.
○ 3년 신종(神宗) 원년 3월 병인에 왕호가 표문을 올려서, 자신은 늙고 병들어서 나라를 동생인 왕탁에게 양위하였다
고 진달하였다. 이에 왕탁이 국사를 임시로 맡았는데, 이해에 왕호가 훙하고 왕탁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명종이 신종 5년 임술에 훙하였으니, 바로 금나라 태화(泰和) 2년(1202)이다.
이곳에서 이해에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4년 신종 2년 3월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탁을 책봉해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상동》
○ 태화 3년에 신종 6년 왕탁이 훙하였다. 아들 왕영(王韺)이 왕위를 이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에서 태화 4년에 왕탁이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기에, 동사(東史)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 4년 신종 7년 정월 초하루 을축에 고려의 겸인(傔人)이 조그만 패도(佩刀)로 이무(梨廡) 아래의 순랑(巡廊)을 깎고
있는 것을 직무를 보고 있던 관원이 발견하고서 규찰하였다.
관반관(館伴官)에게 조칙을 내려, 이후로는 기일에 앞서 공문을 보내 그런 짓을 못하도록 금지시키게 하였다. 《상동》
○ 지령(至寧 금나라 위소왕(衛紹王) 영제(永濟)의 연호) 원년 강종(康宗) 2년 8월에 고려 왕 왕영(王韺)이 훙하였다.
사자(嗣子)가 기복(起復)을 행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희종 7년 신미, 즉 금 대안(大安) 3년(1211)
에 최충헌(崔忠獻)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明宗)의 태자인 한남공(漢南公) 왕정(王貞)을 왕으로 세웠으며, 이름을
왕오(王祦)로 고쳤는데, 이가 바로 강종(康宗)이다. 왕위에 있은 지 2년 만인 이해에 훙하고 다시 세자인 왕철(王㬚)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희종은 뒤에 고종 24년인 송 가희(嘉煕) 원년(1237) 정유에 훙하였다.
《금사》에서 희종이 이해 8월에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9월에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변방의 관리가
아뢰기를,
하니, 예관(禮官)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하니, 황제가 재가하였다. 다음 해에 선종이 변경(汴京)으로 천도하여 요동의 도로가 불통되었다. 《상동》
○ 원(元) 태조(太祖) 철목진(鐵木眞 징기스칸의 이름) 11년 고종 3년 병자에 거란[契丹] 사람인 금산(金山)과 원의
원수(元帥)인 야율육가(耶律六哥) 등이 군사 9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도망쳐 들어갔다. 《원사》
○ 12년 고종 4년 9월에 야율육가가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곳에 웅거하였다. 《상동》
○ 금 선종(金宣宗) 흥정(興定) 원년 고종 4년 완안아리불손(完顔阿里不孫)에게 명하여 파속로(婆速路)에다가 원수부
(元帥府)를 열게 하였다. 이때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에 웅거해 있으면서 파속(婆速)의 경계 지역을 침략하였으
므로 고려가 그가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양곡 8만 석을 보내 도왔다. 《금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고종 3년 윤7월에 금나라의 동경 총관부(東京摠管府)에서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
에 첩문(牒文)을 보내어 포선만노를 협공하자고 하였다. 이때 포선만노가 요동에 웅거해 있으면서 천왕(天王)을 참칭
하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였다. 고종 4년 4월에 포선만노의 군사가 와서 대부영(大夫營)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원사》 지리지에는, 원나라 초기 계사년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해 포선만노를 포로로 잡았으며,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도달하여서 동쪽 지역이 비로소 평정되었다고 하였다.
○ 2년 고종 5년 4월 초하루 임인에 포찰오근(蒲察五斤)이 표문을 올리기를,
하였다. 이에 황제가 포찰오근에게 명하여 사람을 파견해서 조서를 가지고 고려로 들어가 유시해,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 금나라의 뜻이 아님을 고려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하였다.
○ 계축에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완안소란(完顔素蘭)을 파견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완안소란이 출발하기에 앞서 상언하기를,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전객서 서표(典客署書表) 유병(劉丙)을 파견하여 완안소란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원 태조 13년에 고종 5년 합지길(哈只吉)ㆍ차라(箚刺) 살펴보건대, 《원사》 본기에는 합진(哈眞)ㆍ예라(禮刺)로
되어 있다.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 사람 홍대선(洪大宣)이 군중
(軍中)에 나와 항복하고는 합지길 등과 함께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소를 잡고 술을 가지고 나와 원나
라 군사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추밀원사 이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 승지(樞密院使吏部尙書上將軍翰林學士
承旨) 조충(趙沖)을 파견하여 함께 야율육가(耶律六哥)를 공격하여 토멸시켰다. 차라가 조충과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조충이 해마다 공부(貢賦)를 바치겠다고 청하자, 차라가 말하기를,
하였다. 12월에 차라가 공문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자, 쌀 1천 곡(斛)을 보내 주었다. 《원사》
○ 금 흥정(興定) 3년에 고종 6년 요동행성(遼東行省)이 아뢰기를,
하였다. 이에 대해 재신(宰臣)들이 아뢰기를,
하니, 선종이 그렇게 여겼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위무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끝내 도로가 막혀 사신을 맞이
하지 못하였다. 요동행성에 조서를 내려, 고려를 계속해서 견제하여 우호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이 왕래하지 못하였다. 《금사》
[주D-001]목종(穆宗) :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哥)에게 추존(追尊)한 묘호(廟號)이다. 영가는 완안부(完顔部)의 기초
를 확립하기 시작한 오고내(烏古迺)의 뒤를 이어 계승한 추장으로서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오늘날의 간도
(間島) 지방을 복속하였으며, 다시 남하하여 광의(廣義)의 함흥평야(咸興平野)를 지칭하는 갈라전(曷懶甸)에까지
그 세력을 미치게 하여 금나라의 기초를 닦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76쪽》
[주D-002]동여진(東女眞) : 갈라전(曷懶甸) 지방에 있는 여진을 말한다. 고려와는 이미 정종 3년(948)부터 교섭이
있었지만 현종 이후 왕래가 잦았다. 그들이 고려에 오는 목적은 진공(進貢), 내조(來朝) 등이었으며, 그들의 생활
필수품이 부족할 때에는 해적이 되어 고려의 동해안과 일본의 서남해안을 노략질하였다.
[주D-003]백산(白山) : 백두산을 말한다. 백두산은 금나라 때 백산, 또는 장백산(長白山)으로 불렸다.
[주D-004]금나라의 …… 하였다 : 금나라의 선조를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은 《금사》의 세기(世紀)나
《송막기문(松漠紀聞)》을 비롯하여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이 모두 같다. 일본의 지내굉(池內宏)은 “금나라의 6대
오고내(烏古迺) 이전의 기사는 모두 세계(世系)를 연장한 가상의 인물이고 그 유래도 고려인 혹은 신라인으로 볼 수
없다.”고 추단하였다. 이에 대해 삼상차남(三上次男)은 ‘그것이 설화에 불과하나, 그 설화는 금나라 때 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후예 사상(高句麗後裔思想)을 경(經)으로 하고 금나라 황실의 정치적 필요를 위(緯)로 하여
성립한 것인 듯하므로, 시조가 고려인이라는 설은 실로 고구려인임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상기(金庠基)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임에 대하여는 그리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금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후고(後考)가 필요하나, 이 당시에 여진 사회에서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이라 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375~376쪽》
[주D-005]아지고촌(阿之古村) : 아지고는 아륵초객(阿勒楚喀), 즉 안출호(按出虎)의 이역(異譯)인 듯하다.《韓國史,
진단학회, 375쪽》
[주D-006]완안부(完顔部) : 12~13세기에 지금의 만주 아성현(阿城縣) 일대를 근거지로 살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의
부족 이름이다. 오고내(烏古迺) 추장 때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의 손자인 오아속(烏雅束) 때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아골타(阿骨打) 때에 이르러 금나라를 세웠다.
[주D-007]을리골령(乙離骨嶺) : 여진의 남쪽 지방에 있던 산이다. 지금의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나 함경북도
경성(鏡城) 부근에 있었다고 하나, 정설(定說)이 없다.
[주D-008]발근(勃菫) : 여진족 추장의 칭호이다.
[주D-009]갈라전(曷懶甸) : 고려 시대 때 흑수여진(黑水女眞)이 살던 지역의 명칭이다. 갈라전의 범위에 대해서는
고려의 기미주(羈縻州) 설치 지역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윤관의 9성 개척 지역이 함흥평야(咸興平野)에 한정된다는 설이 제기됨으로 해서 갈라전
의 지역 범위도 정평(定平) 이북으로부터 함관령(咸關嶺)을 잇는 함흥평야 일대에 비정되기도 했다. 정약용(丁若鏞)은
길주(吉州) 이남 함흥 부근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애당초 갈라전의 범위는 고려의 기미주의 계한(界限)인 길주 이북
으로부터 두만강 유역 일대를 포괄하였으며, 그 치소(治所)는 오늘날의 경성(鏡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갈라전 지역은 당시 두만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 남하해 오고 있는 완안부 여진과 고려 왕의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의 기미주를 여진에게 돌려준 뒤에 이르러서는 갈라전의 범위가 정주 이북 두만강 유역까지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변하였다.
[주D-010]소해리(蕭海里) : 거란국구장인(契丹國舅帳人)으로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다가 여진 지역으로 도망쳤다.
거란의 군사들이 직접 소해리를 토벌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완안부(完顔部)에 부탁하자 아골타(阿骨打)가
소해리를 죽였다.
[주D-011]성현(星顯) : 지금의 포이합도하(布爾哈圖河)를 가리킨다.
[주D-012]통문(統門) : 지금의 두만강을 가리킨다.
[주D-013]오수(五水) : 함흥평야를 흐르는 성천강(城川江) 등 다섯 하천을 말하는 듯하다.《김상기, 高麗時代史, 208쪽》
[주D-014]고려가 …… 축하하였다 : 김상기(金庠基)는 “여기에는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오아속이 사위(嗣位)한 것을
축하하였다고 하였으나, 당시 국제적 지위로 보나 또 오아속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시기임을 감안할 때 그의 사위를
하례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우며, 도리어 고려 예종의 사위를 알린 것이 이와 같이 바뀌어 적힌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때 완안부에서 고려로 보내온 사신의 이름은 《고려사》에 공아(公牙)라고 하였다.” 하였다.
《김상기, 高麗時代史, 215쪽 주》
[주D-015]9성(城) : 윤관이 갈라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함주(咸州)ㆍ복주(福州)ㆍ영주(英州)ㆍ길주
(吉州)ㆍ웅주(雄州)ㆍ통태진(通泰鎭)ㆍ진양진(眞陽鎭)ㆍ숭녕진(崇寧鎭)ㆍ공험진(公嶮鎭) 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
[주D-016]태조(太祖) : 아골타(阿骨打)를 말한다. 이름은 완안민(完顔旻)이고, 아골타는 여진명(女眞名)이다.
오아속(烏雅束)의 뒤를 이어 완안부의 추장으로 추대되어, 조부인 오고내 때부터 길러온 세력을 토대로 요나라의
지배에 반발, 독립 전쟁을 일으켜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주D-017]도문수(徒門水) : 지금의 두만강을 가리킨다.
[주D-018]갈라수(曷懶水) : 갈라(曷懶)는 금나라 시대에 함경도 지방에 대한 호칭으로, 갈라수는 함흥 지방의
성천강(城川江)이다.
[주D-019]9개의 성 : 김상기는 “고려의 9성에 대해 여진 측에서도 각각 9개의 성을 쌓아 대치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여진에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임시로 작은 성과 책(柵)을 쌓아 그곳을 공격의 근거지로 한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김상기, 高麗時代史, 221쪽 주》
[주D-020]황룡부(黃龍府) : 농안(農安)으로, 만주 길림성(吉林省) 북부에 있는 현이다. 요나라 시대에는 황룡부
(黃龍府)였다가 금나라가 지배하고부터는 제주(濟州)ㆍ융주(隆州) 등으로 바뀌었다.
[주D-021]합주(合主) : 요나라 때 설치한 만주 지방의 행정 구역 이름이다.
[주D-022]순화(順化) : 요나라 때의 현으로, 만주 요령성(遼寧省) 일대에 있었다.
[주D-023]석현(石顯) : 《요사》 태조본기에는 습현(習顯)으로 되어 있다.
[주D-024]발근(孛菫) : 여진족 추장(酋長)의 칭호이다.
[주D-025]갈라전(曷懶甸)의 장성(長城) : 고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말한다.
[주D-026]고려에서 …… 있었겠는가 : ‘사신이 논하기를’에서부터 ‘있었겠는가’까지의 기사는 《요사》 이국외기(二國
外紀)에 들어 있는 고려와 서하(西夏)의 기사에 대한 사론(史論)으로, 고려와 서하에 대한 내용이 혼재(混載)되어 있다.
본문 가운데 ‘틈만 있으면’부터 ‘경우도 있었다’까지는 서하에 관한 사론이다. ‘고려에서’에서 ‘하였지만’까지의 이 부분
은 《요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 “태종 통화(統和) 14년(996, 성종15)에 고려 성종이 표문을 올려 서로 혼인하자고
청하자, 부마(駙馬)인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이 기사가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통화 1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27]왕씨가 …… 17명이며 :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생략)
[주D-028]괴자마(拐子馬) : 진법의 일종으로 3기(騎)를 가죽 끈으로 연결시켜 함께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송사》 악비열전(岳飛列傳)에, “금나라 태조의 넷째 아들인 올출(兀朮)에게 경군(勁軍)이 있어 이들에게 두꺼운 갑옷
을 입힌 다음 3기(騎)를 가죽 끈으로 연결하여 함께 행동하게 하고는 이를 괴자마(拐子馬)라 불렀는데, 관군(官軍)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였다.
[주D-029]처형한 …… 명이었다 : 인종 즉위년(1122) 12월에 이자겸(李資謙), 이자량(李資諒) 등과 알력을 빚고 있던
한안인(韓安仁), 문공미(文公美) 등의 일파가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받아, 대방공
왕보는 경산부(京山府)로 내쫓기고, 한안인은 감물도(甘勿島)로 유배당하였다가 살해되었으며, 문공미 등은 유배당
하였다.
[주D-030]연운(燕雲) : 황하(黃河) 북쪽에 있는 연주(燕州)와 운주(雲州)를 가리킨다. 이때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
(欽宗)이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셔 오기 위해서 송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주D-031]연산(燕山)의 일 : 연산은 지금의 북평(北平) 지방으로, 송나라 휘종이 거란으로부터 빼앗아 연산부(燕山府)
를 설치하였다. 그 뒤 정강(靖康) 2년(1127)에 금나라와 이 지역을 다투다가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변이 일어났다. 정강(靖康)의 화(禍)라고도 한다.《宋史 卷23》 《讀史方輿紀要 卷11 順天府》
[주D-032]욱(勗) : 금나라의 종실(宗室)로, 목종(穆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본명은 오야(烏野)이고, 자(字)는 면도
(勉道)이다.《金史 卷66 列傳 第4 始祖以下諸子》
[주D-033]오복(五服) : 고대 중국의 행정 구역을 말한다.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5백 리마다 차례로 나눈 다섯 구역
으로, 상고(上古) 시대에는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라 하였고, 주나라 시대
에는 후복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이라 하였다.
[주D-034]사명(四明) : 산의 이름으로 영파부(寧波府)와 소흥부(紹興府) 사이에 있다.
[주D-035]강수(綱首) : 상인단(商人團)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강(綱)은 화물(貨物)을 총괄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수(首)는 우두머리이다.
[주D-036]부학(府學) : 부(府)의 치소(治所)에다가 설립하였던 관학(官學)을 말한다.
[주D-037]홍혜사(洪惠寺) : 《송사》 고려열전에는 법혜사(法惠寺)로 되어 있다.
[주D-038]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
(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 단(亶)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本紀 第5 海陵》
[주D-039]신주(神舟) : 송나라에서 고려로 가는 사행(使行)을 태우고 가는 선단(船團)의 중심이 되는 관선(官船)을
가리킨다. 원풍(元豐) 원년에 명주(明州)에서 신주 2척을 건조하였는데, 이름이 ‘허치원안제(虛致遠安濟)’와 ‘영비순제
(靈飛順濟)’이다.《宋史 卷487 高麗列傳》
[주D-040]삼절(三節) : 사행(使行) 가운데 정사(正使)ㆍ부사(副使)ㆍ서장관(書狀官)을 가리킨다.
[주D-041]진백(秦伯)의 …… 본받겠는가 : 무의(無衣)는 《시경(詩經)》 진풍(秦風)의 편명으로, 진(秦)의 강공(康公)
이 싸움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뜻과 달리 전쟁을 자주 일으키는 것을 풍자한 시이다. 여기서는 고려 사람들이 송나라를
위하여 금나라와 싸우지는 않을 것이란 뜻으로 쓰였다.
[주D-042]부우(傅雩)ㆍ왕륜(王倫) : 두 사람 모두 송나라 때 사람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억류되어 있다가
죽었다.
[주D-043]만춘절(萬春節) : 음력 3월 3일을 말한다.
[주D-044]생일사(生日使) : 금나라에서 주위에 있는 나라의 왕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이때 금나라에서는 서하(西夏)ㆍ
송(宋)ㆍ고려(高麗)에 생일사를 파견하였다.
[주D-045]파속로(婆速路) : 《일통지(一統志)》에, “요양성(遼陽城) 동쪽 4백 7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금나라 천덕(天德) 2년에 파속로 총관(婆速路摠管)을 두었는데, 원나라 초기에 파속로를
파사로(婆娑路)로 고친 다음 부(府)를 설치하였다.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관할에 속한다.” 하였다. 지금의 봉천(奉天)
봉황성(鳳凰城)의 동쪽 변경에 있다고도 한다.
[주D-046]맹안(猛安)이나 모극(謀克) : 모두 금나라의 관직이다.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맹안은 1천 부(夫)의
장(長)이고, 모극은 1백 부의 장이다.” 하였다.
[주D-047]서경 유수(西京留守) …… 일으켰기에 : 명종 4년 9월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 유수로 나가 있던
조위총이, 정중부 등이 의종을 죽이고서 장사 지내지 않고 있자 동북(東北) 양계(兩界)의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정중부와
이의방을 쳤다. 그 뒤 명종 6년 6월에 윤인첨(尹鱗瞻)에게 패하여 효수당하였다.
[주D-048]서언평(徐彦平) : 《금사》 고려열전에는 서언녕(徐彦寧)으로 되어 있고, 《금사》 교빙표(交聘表),
《고려사》 명종세가(明宗世家), 조위총열전(趙位寵列傳), 《동사강목》 제9에는 모두 서언(徐彦)으로 되어 있다.
[주D-049]살펴보건대 …… 바로잡는다 : 이 부분은 편찬자가 어느 사서(史書)를 근거로 하여 이렇게 고친 것인지 모르
겠는바, 아마도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신종은 태화 4년 1월에 병으로 인해 왕위를 태자인 왕덕(王悳)에게 전하였으며,
8일 만에 덕양후(德陽侯)의 집에서 훙하였는데, 왕덕은 희종(煕宗)의 구휘(舊諱)로 바로 왕영을 말한다.
《금사》에서 태화 4년에 왕탁이 훙하였다고 한 기사가 맞다.《東史綱目 第10上》 《高麗史節要 卷14 神宗靖孝大王》
[주D-050]신종 7년 : 이해가 원문에는 희종 원년으로 되어 있는데, 희종 원년은 태화 5년이기에 신종 7년으로 바로
잡아 번역하였다.
[주D-051]선종이 …… 불통되었다 : 이해에 금나라가 몽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중경(中京)을 버리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현(開封縣)인 변경으로 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요동을 경유하여 금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혔다.
[주D-052]금산(金山) : 거란 유민(遺民)의 추장으로,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운 야사포(耶斯布) 즉, 야시불(耶厮不)의
아들로 추측된다. 고종 3년(1216)에 걸노(乞奴) 등과 함께 야사포를 황제로 추대하여 대요수국을 세웠으며, 이해에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걸노ㆍ아아(鵝兒)ㆍ통고여(統古與) 등과 함께 거란의 유민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
서계(西界)의 여러 성을 약탈하고 개경 부근까지 위협하다가 김취려(金就礪)에게 패해 본거지로 퇴각하였다.
그 뒤 다시 침입하였으나 패하고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고려ㆍ몽고ㆍ동진(東眞)의 연합군에 대항하였다.
그 뒤 왕이라고 칭하다가 통고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그가 이끌던 거란의 유민은 김취려 등의 군사에 의하여 분쇄되
었다.
[주D-053]야율육가(耶律六哥) : 금나라의 북변 천호(北邊千戶)로 있다가 몽고군이 침입하자 10여 만 명의 무리를 끌어
모아 몽고에 붙고는 자립하여 요왕(遼王)이 되었다. 연호를 원통(元統)으로 고치고 요동 지방을 차지한 다음 함평(咸平)
즉, 지금의 개원(開原)에 도읍하였다가 다시 몽고에 항복하여 원수(元帥)가 되었다. 야율유가(耶律留哥)로도 표기한다.
[주D-054]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
(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
과 대립하였다.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기어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
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다. 1233년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55]대부영(大夫營) : 의주(義州) 부근 압록강에 있는 섬 이름이다.
[주D-056]호시(互市) : 외국과의 교역(交易)을 행하는 무역장(貿易場)을 말한다. 무역장은 두 나라 간의 국경 지역에
설치하여 물품을 교역한다.
[주D-057]합지길(哈只吉)ㆍ차라(箚刺) : 합지길은 《원사》에는 합적길(合赤吉)ㆍ합제제(合齊齊)ㆍ합지길(哈只吉)로,
《신원사》에는 합진(哈眞)으로, 《고려사》에는 합진(哈眞)ㆍ하칭(何稱)으로, 《고려사절요》에는 합진(哈眞)으로,
《동사강목》에는 합진(哈眞)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차라는, 《고려사》에는 찰라(札刺)ㆍ찰라(扎刺)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찰랍(札臘) 등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합진은 1219년에 동진(東眞)의 군사와
함께 거란의 유종(遺種)을 토벌한 몽고의 장수이다.
[주D-058]홍대선(洪大宣) : 홍대순(洪大純)을 말한다. 홍복원(洪福源)의 아비로, 이 당시에 인주 도령(麟州都領)으로
있다가 합진(哈眞) 등이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그를 맞이하여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