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에서 만난 위기"
창세기 12장 10-20절
요즘 새벽 예배는 마가복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 중에
마가복음 4장 35-41절을 다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곤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
안드레와 야고보가 앞장을 섰을 것입니다.
항구를 떠나 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예수님은 이미 곯아 떨어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파도가
배를 삼킬 것처럼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우왕좌왕 거리며 물을 퍼냈습니다.
이미 온 몸은 내리는 비로 젖었고,
서로 소지치며 조심하라고 외쳐댔습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떤 생각이 들것 같나요?
저라면 당장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아, 예수님!
오늘은 좀 집에서 쉬려고 했더니
갑자기 배를 타자고 하셔서
이런 일이 생겼잖아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 말씀에 따라 순종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가득차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깁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걸 버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기근은
하나님의 약속마저 잊게 만드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사래가 말해요.
“여보, 쌀독에 쌀이 떨어져 가요.
어쩌죠?”
그러면 아침부터 또 하늘만 쳐다봅니다.
언제 비가 올지 알수 없는 상황에
하염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겠죠.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빛에
심어둔 곡식들은 메말라 갔습니다.
여기저기서 가축들이
물을 달라고 울어댑니다.
사람들도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식량이 없어 지쳐갔죠.
이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말씀대로 살았는데
문제를 만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죠.
요즘도 여름에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걱정합니다.
농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곡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 물가가 오르고,
결국 경제까지 여파가 미치게 되죠.
하물며 지금부터 4000년 전에 살던 아브람에게
기근은 어마어마한 위기였습니다.
결국 그는 궁여지책으로 남쪽에 있는
애굽 행을 택합니다.
지금도 이집트에는 6,650km나 되는
엄청난 길이의 나일강이 있습니다.
한강의 길이가 514km인데 반해
12배가 넘는 길이의 강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물은 가뭄이 와도
농사 걱정이 없게 만들었죠.
인간적으로 볼 때 아브람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근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보단
양식을 구할 수 있는 애굽 행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애굽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했던 말이 뭐였나요?
“수고했어.
이제 내가 책임지고 우리 가정 먹여 살릴게.
당신은 좀 쉬어.”
라고 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합니가?
11-13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창세기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지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기 아내가 예쁘니까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가져갈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게 걱정되니까 “오빠”라고 하랍니다.
아브람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아브람의 말처럼
아내 사래는 이복 동생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언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집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자 데려가면서
아브람에게 양과 소, 노비 등
선물을 줬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내를 바로에게 팔아버린 셈이죠.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두 번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먼저는 약속의 땅을 떠나는 일이죠.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인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들겠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지 않나요?’
오늘 본문은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주권의 문제를 말하고 있어요.
아브람은 문제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그래서 가정을 이끌고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향해 떠났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이 늘 좋은 곳은 아닙니다.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브람의 조카 롯의 종들과
아브람의 종들이 가축 먹이는 일로 싸웠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롯에게 먼저 선택지를 줍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해주면
내가 그 반대로 가겠다.”
롯은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땅을
선택합니다.
그곳이 바로 소돔 땅이었고,
나중에 불과 유황 심판을 받게 되죠.
눈에 보이는대로 선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의 아내와 남편을 선택하신거죠?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죠.
믿음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 넘어집니다.
우리는 자기 눈이 아니라
하나님 눈에 맞춰 살아야 해요.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떠나
자기 눈에 좋은 땅을 선택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결국 이런 선택은 더 큰 실수를 자아냅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했죠.
이건 들통나지 않아도 나쁜 행동이고,
들통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인 센서가 망가지자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센서가 고장나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늘 점검해야 하죠.
결국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등판하십니다.
우리 함께 17절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곧장 아브람을 불러
그를 추궁했습니다.
왜 말을 하지 않았냐며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곤 아브람과 그 일행을
모두 애굽에서 쫓아 냅니다.
그렇게 아브람의 가나안 탈출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 본문에 숨겨진 하나님의 성품이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다가왔습니다.
먼저는 훈련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소가 가장 힘듭니다.
아침에 기상 소리에 맞춰서
각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좌우로 정렬하며 가야 하죠.
화장실을 갈 때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이땐 군종병도, 의무병도 다 예외가 없습니다.
죽어라 뛰고, 총쏘고, 가스 훈련받고, 기합받고
하다보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기본 체력이 달라집니다.
이전까지 사회에서 불규칙하게 살았던 사람도
점점 군인의 기본이 다져집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근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시작이 바로 ‘기근’이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을 쓰시기 위해
항상 준비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아브람은 기근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절대 주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기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죠.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신 걸까요?
이전까지 그는 우상 만드는 일을 하던
아버지 곁에서 자라왔습니다.
가나안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기근 중에도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지 물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나는 기근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때론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힘들고 괴로울 수 있어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복의 통로로,
복의 근원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욥기 23장 10절을 읽겠습니다.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단단한 광물이 금이 되기 위해선
수많은 제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려고
뜨거운 용광로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평범했던 돌멩이가
반짝거리는 금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는 원래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들 아니었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금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먼저 믿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브람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죠.
당장 아브람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통해
축복의 씨가 이어지게 하셔도 되는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잘못은 아브람이 했지만,
수습은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어릴 적 저희 아버지는
장난도 많이 쳐주셨지만 굉장히 엄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하루는 동생과 집 앞에서
축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제가 찬 공이
건너편 집 유리창을 깨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랐는데 그날 집에 아버지만 계셨어요.
두려운 마음에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 드릴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사실대로 말씀드렸어요.
“아빠, 제가 축구하다가
길 건너에 있는 집 유리를 깼어요.”
예상대로 아버지의 호통이 이어졌습니다.
“뭐라고? 유리를 깼어?
네가 잘못했으니까 얼른 유리집 찾아가서
수리해달라고 해!”
동생과 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유리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리집에 사람이 없었어요.
동네를 돌면서 다른 유리집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어린 제가 찾을 수 없었어요.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유리집을 찾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생각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결국 눈물이 펑하고 터졌죠.
그렇게 훌쩍거리며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어요.
저는 다시 밖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깨진 유리창이 모두 깨끗하게
새 걸로 고쳐진 거 아니겠어요?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모두 고쳐 놓으신 거였어요.
잘못은 아들이 했지만,
해결은 아버지가 하신다는 게 이거 아닐까요?
아브람이 잘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해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어요.
하나님 눈에는 오직 아브람만 보였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시선은 그대로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증거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약속하셨어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죠.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 28절 아닙니까?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기독교에 잘못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형통한다”
더 이상 이런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다고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축복받고, 건강하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문제가 생깁니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
자녀의 일탈, 예기치 못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만 봐도 그러십니다.
목회를 잘 하시다가
갑자기 췌장암이 찾아왔습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어요.
그전까지는 건강하셨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이 찾아오자
얼마나 충격이 크셨겠습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인생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췌장암으로 인해
더 하나님을 의지하셨고,
지금은 치유 받고
간증하며 다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췌장암이라는 기근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람도 똑같습니다.
그가 눈으로 보기에 좋았던 이집트에 갔다가
이런 봉변을 겪지 않았다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기 전에
그 땅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가면
꼭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아빠 언제 도착해요?”
형이 물어보면 동생도 물어봅니다.
“아빠, 얼마나 남았어요?”
“응 금방 가.”
말씀을 묵상하며 아이들의 모습이
제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가장 많이 했던
기도가 이거였어요.
“하나님, 하나님 어떻게 해요?
하나님 이 어려움은 언제 끝나요?”
그때 주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은 이거였어요.
“요셉아, 걱정하지마.
잘 가고 있어.
금방 도착해.”
오늘 기근 속에서 고민하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을
후회하는 분 계십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도
이렇게 말 하실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
잘 가고 있고, 금방 도착한단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우리를 잘 아시고 죽기까지 살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