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을 맞이하여 아버지학교와 10년을 함께 성장한 1기 이산영님(본부 1기)를 만나러 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현재 하고 있는 토목설계 일에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싶어 대학원(한양대 대학원 첨단건설구조공학과)에 진학했다는 그는 두 시간 뒤 있을 시험을 준비하는 대신 월간 ‘아버지’를 위해 과감히 시간을 내주었다. 젊은 학생들과 어울려서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이산영님을 통해 아버지학교 10년의 추억을 꺼내본다.
첫 만남은 이렇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본 이산영 님의 아내는 전화를 걸어 그에게 아버지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마침 그는 충현교회 새가정부에서 서무과장으로 있으면서 가정사역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보다 기도생활도 못하고 영적으로 침체상태에 있었기에 도전을 받고 싶어 흔쾌히 승낙했다.
1995년 10월 두란노 어린이연구원에서 출범한 1기 아버지학교의 영광스러운 장소는 서빙고 온누리 교회 유아실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상을 펴고 강의를 들었던 1기는 8개 조로 4주 과정을 마치고 총 65명이 수료했다. 당시 이산영 님의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바로 미국에서 시작된 남성들의 개신교 ‘영성회복운동’ 단체인 프라미스 키퍼스(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집회 모습이 담긴 영상물 상영이었다. 그는 대형 경기장에 외국인 아버지들 10여만 명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무척 놀랐고, 우리나라 아버지학교도 머지않아 이 장면을 연출할 것이라 기대했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학교를 기획한 도은미 사모의 ‘성은 생명이다’라는 주제의 강의는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고 음지로 몰아 놓으려던 성을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느끼게 해 준 강의였다고 말한다.
아버지학교 씨 뿌리는 것에 큰 기쁨
이산영 님은 1기 수료 후 “가정 사역의 대안은 아버지학교다”를 외치며 95년부터 현재까지 사명감을 가지고 10년간 조장, 관리팀장 등의 스태프로 봉사했다.
“매 주 지원자들을 섬길 때 기쁨이 되는 것은 그들이 회복되는 모습입니다” 라고 하는 이 형제는 98년 서산에 충서 1기를 개설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98년 직장일로 서산에 발령받아 내려가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가정법원에 다닌다는 교회 형제를 만나 나눔 도중 서산이 이혼율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부부의 이혼으로 겪게 될 자녀들의 상처를 생각하며 2년을 기도하고 준비해 2000년 11월 삽교감리교회에 아버지학교를 개설하였다. 그 당시 10명만 아버지학교를 수료하면 개설이 가능해 그는 교인 10명을 데리고 서산과 서울을 왕복했다. 또한 충서 1기에는 가장 기억 남는 지원자도 있었다. 1조 조장으로 섬길 당시 아내 상습폭행, 알코올 중독으로 이혼직전까지 간 형제가 수료식에서 아내와 화해하고, 예수님을 영접 했을 때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쉴 새 없이 뿜어졌다고 말했다. 수료자들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기쁨을 얻어 더 아버지학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10년의 봉사경력 안에도 고통과 슬픔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믿지 않는 조원이 아버지학교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세례까지 받고 성경적 아버지로 거듭나려는 찰나 병 때문에 일찍 하나님 곁으로 갔을 때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고 한다.
또한 함께 동역하는 형제들 중에 자기를 드러내며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서로 상처를 줄 때는 고통스럽고 안타까웠다는 그는 우리 모두 낮은 자세로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학교를 섬겨 무너지는 가정을 하나씩 하나씩 일으키자고 말했다.
평양 아버지학교를 꿈꾸며
“아버지학교 강의는 다시 들어도 새로워요.”
아버지학교에서 배운 것이 너무 많다는 그는 축복기도, 허깅, 가정일까지 모두 습관화되었다고 한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아버지학교 수료생이든 아니든 심지어 직장에서까지 허깅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한다. 직장에서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더니 지금은 오히려 허깅하는 것을 잊고 그냥 지나칠 때면 섭섭해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영적으로 세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참 진리(^^)를 깨달았다.
1기의 자부심을 묻자 그는 자부심은 교만스러운 단어인 것 같다며 1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학교의 산 증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학교는 전도의 도구로도 최고라며 그 매력에 푹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는 그는 아버지학교를 사랑하는 진정한 마니아임에 틀림이 없었다.
북한선교에 비전이 있어 언제든지 부르시면 달려가겠다는 이산영 님은 전공을 살려 평양에서 건설업에 종사하며 선교도 하고, 아버지학교 전도사로도 사역하고 싶다고 한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방화대교, 청담대교 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건설에 참여했다는 그가 북한을 품고 있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시종일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터뷰에 응했던 그는 오히려 10년을 돌아보며 사역 횟수, 기억에 남는 조원, 아쉬웠던 점 등을 적어보며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심에 감사했다.
코앞에 닥친 시험보다, 내일 보고할 토목설계보다도 돌아오는 토요일에 어떻게 아버지학교를 섬길지 걱정하는 그에게서 아버지학교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섬김이들이 많아 아버지학교 운동이 멈출 수 없나 보다.
첫댓글 넘 반듯하게 사는 것 아녀???대충 살어 로즈님 처럼(좋은엄마아님이밝혀짐)ㅋㅋ
에구 ...무시라..울아부지 클났네..
ㅎㅎㅎㅎ쇠 방망이?무셔라`
요즘은 쇠방망이루 통하는구려
가끔은 실수도 하면서~~~울 친구들도 한번 몽땅 가보지?
아부지 학교에...울들은 엄마핵교가야지..
울친구 힘겨운 세월 헤치고 건강한 남하에 아버지로 거듭나게 살아줘서 존경한데이 짝 짝 짝
잰 많이 존경 받거든 .......저 있지........날 존경하면 않되겠니??
이눔아 호호호 그만웃기삼ㅎㅎ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