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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림절=‘이미’와 ‘아직’의 시기=‘깨어있음’의 시기 /신희준 신부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교회력(敎會曆)으로는 새해의 시작이자 세속력(世俗曆)으로는 묵은 한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이미’와 ‘아직’의 과도기적인 삶을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대변해줍니다. 즉,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우리에게 강력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아직’ 오셔야 하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우리는 ‘이미’ 구원과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지만 ‘아직’은 온갖 고난과 욕망의 질곡을 살고 있는 세속의 자녀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대림절은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대림절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가 대림절의 진리를 완전히 새롭게 배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림절의 진리란 다름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대림절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직’도 대림절임을 말합니다. 즉, 달리 표현하자면,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임을, 인류 전체가 어두움에 놓여 있지만 하느님의 빛을 받고 있다는 것임을 말합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이렇게 ‘이미’와 ‘아직’의 시기인 대림절은 또한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어라 …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사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만만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직장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안정된 수입을 확보 할 수만 있다면, 원하는 학교에 다닐 수만 있다면, 승진할 수만 있다면, 월세와 전세를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할 수만 있다면, 안정된 노년을 살 수만 있다면, ….
이렇게 살아가면서 걱정거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또 새로운 걱정거리는 그동안 이루어놓은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더 많은 것을 확보하고 싶다는 욕망을 우리 안에 조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드높은 명예를 누리면서도 더 많은 것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라고 해서 우리 지위를 전용하고 뇌물을 주고받으며 세속의 ‘절대 권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자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새롭게 기운을 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두움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비추어 주시는 자비의 빛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부족함에 실망하지 말고 우리 안으로 겸손하게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새해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묵은 지난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시기에 한 번쯤 여유를 갖고 우리 안을 들여다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도 빛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안경 삼아 우리 주변을 둘러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깨어’ 사는 우리에게 아기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물, 곧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수원] 깨어 준비하기 /이형묵 신부
여행 전문가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 과연 이 말대로 여행준비를 철저히 하고 많이 공부하면, 그만큼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준비를 소홀히 하면, 여행에서 얻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도 우리는 늘 최종목적지인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온전하게 준비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총과 축복들을 느끼고, 그분과의 영원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 시기를 시작으로 다시금 한해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제 4주 후면 다가올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깨어 준비하라’입니다. 깨어 준비하는 것에 있어서 ‘어떻게’ 깨어 준비하느냐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1차적으로 ‘누구를 위해’ 깨어 준비하느냐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그 대상과 목적지가 올바로 확립되어야, 그 길로 온전히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주님께서 오시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그 대상도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축제인 동시에,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익숙한 축제입니다. 공휴일로 지내며 많은 이들이 이날을 축하하면서 기쁘게 지내고 선물도 주고받습니다. 주님의 탄생이 온 인류의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작 그날의 주인공을 망각한 채 그저 즐기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주님께서 축하받으셔야 하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주님께 축복을 받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세상의 논리와 단지 공휴일로서의 의미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대림 1주일에 “깨어 있어라”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깨어 맞이해야 할 대상은 바로 당신임을 일러주십니다. 세상의 이벤트나 세상에서 주는 기쁨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축복과 당신이 주시는 사랑이 그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이제는 우리들이 그러한 목적을 확고히 다지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대림은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기다림은 곧 설렘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마음속 상태를 늘 점검하며 나에게 오실 주님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을 기다렸던 설렘이 큰 행복과 기쁨으로 바뀌어, 우리들 안에서 큰 은총으로 열매 맺을 것입니다.
[의정부] “깨어 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2.44)/김규봉 신부
대림시기입니다. ‘대림’(待臨)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오신 분을, 여전히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어 기다리라 말씀하십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실 것이며, 수많은 백성들은 일제히 주님의 산으로 모여들 것이라 합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이사야 예언자가 환시로 받은 말씀에 비해 훨씬 더 원대하고 근원적인 것이 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을 바라거나 지배조차 욕심내지 않으며,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는 펼쳐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더 간절하게 요청되는 현재입니다.
새해 첫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그 꿈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서 다시 준비되고 시작되어야 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창조질서의 보전과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금, 여기서 이루어 가도록 “깨어 준비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해 덕담이자 우리에게 던지시는 외침입니다.
[인천] 예수님을 기다림/김태현 신부
오늘 제대를 보면 전 주와는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네 개의 초가 있고 그중 한 개의 초에 불이 켜져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이자,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이 시작된 것입니다. 매해 대림이 되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구약의 백성들은 4000년이나 기다려 왔지만 우리는 그 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으로 육화되는 신비를, 그리고 그 신비의 절정이 자신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그 죽음이 생명을 다시 누리는 부활의 신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매해 감탄을 해도 부족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라옵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하는 감동과 함께 자신에 대한 반성도 가슴을 때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너무나도 자주 잊어버려 행복보다는 세상일에 대한 욕심과 한탄 속에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 때문입니다.
어떤 곤충학자에 의하면 어떤 날벌레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앞에서 날고 있는 날벌레의 뒤만 쫓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앞쪽 날벌레도 마찬가지라서 그러다 보면 그저 자기들끼리 뒤를 따라 빙빙 돌기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가까이에 먹이가 있어도 무턱대고 돌기만 하다가 결국 굶어서 죽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어떤 통계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80%이상이 ‘다른 사람이 욕심내니 나도, 다른 사람이 하니 나도 한다’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도 우리에게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요? 세상일에 휘둘려 고단하고, 걸림돌에 넘어져 아파하는 우리에게 갑자기 닥쳐올 주인이 올 것이라는 예고와 그 주인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구원이라는 큰 선물로 약속되어진 행복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삶에 더 큰 희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대림입니다. 성탄절 아침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내 양말 속에 무엇을 넣고 갔을까 하고 흥분하는 아이의 기다림처럼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성 아타나시오 성인의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으니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하느님과 일치하는 구원, 새롭게 탄생할 우리의 삶을 희망하며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몰아내고~”성가의 한 구절처럼 대림 시기동안 구세주께서 탄생하시기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을 잊지 않고 깨어 산다면 더 많은 기쁨과 희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산] 마태 24, 37-44; 이사 2, 1-5./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은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빌며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과 원동력으로 영입합니다. 유대교는 율법 준수 여하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주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영입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우리가 퇴치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 1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은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상(日常)에 묻혀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아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삶이 발생합니다. 그 삶에서는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던 내 이웃이 내가 돌보아주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가꾸고, 내가 획득한 자격증을 과시하면서, 내가 가진 재물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과 허세에서 한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진리가 보입니다. 그 진리는 나와 내 주변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게 해줍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여 은혜로움이 주변으로 흐르게 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하고 실천해야 진리입니다.
우리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시야 안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이 유리할 것만 찾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편안함을 위협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배격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만 보고 사는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에서 주변을 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이웃 앞에서 우리의 몸짓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일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영입하고, 그분의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시야 안에 우리의 생명을 위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과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에 골몰한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새로움을 찾아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이, 멀리 계시고,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살아계십니다. 은혜로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분의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 32). 성령은 그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 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의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의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
[춘천] 기다림/김선류 신부
대림절(待臨節)은 성탄 대축일 전 4주간을 말합니다. 대림이란 오심을 기다린다 흑은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 대림절은 두 가지 기다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전례적으로 앞으로 한 달 후면 다가 올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구세주요 심판자로 재림(再臨)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림은 기다림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기쁘고 설레일 수 있지만 일이나 별 의미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워낙 성격이 급해서 기다리기를 싫어합니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약속시간에 늦으면 초조해 하고, 음식점에서도 음식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올라치면 ‘아줌마 빨리 안 나와요?’ 하고 재촉하며 수저까지 미리 들고 앉아있습니다. 특히 일 때문에 누군가를 만날 때는 더욱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저이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릴 때에는 잘 꾸미고, 몇 시간이고 행복해하며 순간 순간을 기쁘게 기다리고는 합니다. 이것이 저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냐에 따라서 모습도 상황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대림시기, 예수님을 기다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기다림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 사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누고 절제하며 성탄 시기를 준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축제와 행사로서 성탄을 준비한다면, 그저 재미나 일로 성탄시기를 보낼 것입니다. 사실 매번 대림시기에 보면 현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예수님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눔보다는 선물과 쇼핑, 축제의 의미가 더 큰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성탄은 즐거울 수 있지만 그저 매년 찾아오는 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참된 의미는 구세주요 심판자로 재림(再臨)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모습도 그에 걸맞는 모습을 지녀야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릴 때, 잘 꾸미고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듯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모습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대림 1주, 성탄을 준비하는 첫 주일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꾸며야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이 대림절 동안에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빛 안에서, 그 빛으로 옷을 입으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독서
연중 제33주일에 우리는 루카복음의 종말 설교를 들었는데, 오늘은 마태오가 전하는 종말 설교를 듣게 됩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 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려야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37 – 41절까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맷돌을 갈고 음식을 준비하며 일터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우리 일상을 살아갈 때, 어느 날 갑자기 오십니다. 42절에서는 앞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첫째, 주님은 당신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깨어 있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42절) ‘깨어 있다’ 는 것은 말 그대로 잠에서 깨어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음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맑은 정신이 지배하는 빛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오시는 주님을 보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하는 권고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 11 – 14ㄱ) 바오로는 ‘입는다’ 라는 동사를 되풀이하면서 마지막에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적당한 옷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고대에 ‘입는다’ 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 라는 표현은 특히 세례와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갈라 3, 27) 제2독서의 빛을 받아 우리는 주님이 현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세, ‘깨어 있다는 것’ 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 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에 인도된 자세와 생각들로 걸어가는 것, 제1독서의 이사야가 예고한 대로 “주님의 빛 속에서 걸어가는 것” 입니다. (이사 2, 5) 그분을 향하여 걸어가면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사 2, 3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그의 삶을 변형시키는 ‘빛’ 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 4)
둘째, 주님은 또한 ‘준비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로 준비하라는 말씀일까요 ?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충실한 종이 멀리 떠난 주인을 기다리듯 (24, 45 – 51), 기름이 채워진 등을 가진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듯 (25, 1 – 13) 준비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고 한 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준비된 처녀들은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가 아니라 즉시 “오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렇다, 내가 곧 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묵시 22, 17. 20 참조) 우리가 신랑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할 ‘기름’ 이 무엇인지는 신약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행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 남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것 (티토 3, 14ㄱ), 간직하고 있는 주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 설명하는 것 (1베드 3, 15), 세상의 속된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생활방식을 증언하는 것 (2코린 10, 6),온갖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하는 것 (에페 6, 15),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것 (1요한 3, 11).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중간기를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는 말씀은 종말을 간절히 기다리던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오늘, 2010년 11월에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히 요구하시는 자세입니다.
성찰
깨어 있는 사람은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주님, 제가 오늘 신랑을 기다리며 제 등과 함께 준비해야 할 기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십시오. 대림절 하루하루를 그 기름을 준비하며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기도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 (묵시 22, 20)
임숙희(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대구] 신앙인의 별명은 기다리는 사람 /이기수 신부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사랑받으면서 기다렸습니다. 여행자는 버스와 비행기를 기다립니다. 학생들은 시험의 결과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아니, 어쩌면 삶의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대림시기로 한 해를 시작하는 교회는, 신앙인은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절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음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것이고, 둘째,세말 심판을 위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일 년 열두 달이 모두 대림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립니까? 바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인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냈습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유와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노아의 홍수를 되새기면서 그 때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홍수가 들이닥쳤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타락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마구)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8-39)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 하는 여자들처럼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종말은 닥칩니다. 엄청난 파멸을 몰고 왔던 홍수는 일상에 안주하는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무관심과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나쁜 짓이나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일상적인 삶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때까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늘 깨어 기다리며 순간순간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별명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아멘.
[마산]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임효진 신부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대림 첫 주일 복음도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 준비하는 삶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의 연속입니다.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기 전에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열 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는 각자 다양한 삶의 굽이굽이 마다 많은 것들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뛰어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 수능을 잘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 성직자가 되고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통해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생의 절반은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의 연속임이 분명합니. 그런데 이 모든 기다림과 준비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향한 기다림이고 준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요 목적지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야 말로 우리 삶이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기다림과 준비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실한 깨어 있음과 준비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우리 안에 강생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림시기 동안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깨어 기다리고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다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중략)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1-14)
그러므로 대림시기 동안에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44 참조). 아멘.
[마산]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임효진 신부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대림 첫 주일 복음도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 준비하는 삶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의 연속입니다.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기 전에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열 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는 각자 다양한 삶의 굽이굽이 마다 많은 것들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뛰어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 수능을 잘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 성직자가 되고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통해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생의 절반은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의 연속임이 분명합니. 그런데 이 모든 기다림과 준비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향한 기다림이고 준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요 목적지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야 말로 우리 삶이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기다림과 준비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실한 깨어 있음과 준비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痢� 안에 강생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림시기 동안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깨어 기다리고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다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중략)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1-14)
그러므로 대림시기 동안에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44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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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해주신 덕분에 우리들이 편하게 주일 복을을 대합니다. 우리 모두 깨여 있어 대림시기 은총의 시간이 되여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