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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합니까(마17:14-20)-2024.11.27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갑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12제자를 택하셔서 그들과 동거동락하시면서 다양한 제자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 대한 설교를 들었고 복음을 배웠습니다.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심도 보았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치유시는 것을 목도했습니다(마9:35). 실제로 제자들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귀신들이 자기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눅10:17). 그러면 이제 복음에 대해 눈이 뜨일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의 질문에 기분 좋은 답을 하던 베드로를 보십시오(마16:16).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신다고 가르치시자 베드로가 발끈합니다. 마치 자기가 주님을 지켜드리겠다는 것이지요(마16:21-23). 이는 아직 제자들의 믿음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순간순간 자기들의 컨디션에 따라 요동치는 믿음이었던 것이지요.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듣기에 불편할지 모르지만 12제자 중에서도 이들은 핵심그룹에 속한 제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동행시키셨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세 사람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본문은 높은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확히 어떤 산인지 모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헐몬산이나 다볼산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산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셔서 아주 특별한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산에서 주님은 변형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셨으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거기다가 모세와 엘리야를 소환하신 것입니다. 세 사람은 세 분이 함께 미팅하신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친히 동행하던 제자들이었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소환되어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해 주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주고 싶은 주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마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시켜 주시고자 하시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어도 그것이 정녕 그들의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을 초래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죽하시면 주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변화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시던 것을 보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흥분했습니다. 그중에서 역시 베드로의 반응이 압권입니다. 그는 현장에서 예수님께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직접 이 산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내려가서 옥신각신하며 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식의 말이겠지요. 사실 예수님으로부터 소환받은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것이지요.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소환하신 것이 예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자들에게는 쇼킹한 일로 비추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건히 하는 믿음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에 비치는 황홀한 광경만 목도한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을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도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엎드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선명히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감격했다기보다는 모세와 엘리야의 소환에 흥분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주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 곁에 있는 자들은 주님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였던 것이지요. 우리도 가끔 주님 외의 것을 보고 흥분하고 감동합니다. 금방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을 보고 말입니다. 주님 주변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주님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영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눈에 보는 것에 감격하고 흥분한다는 말이지요.
베드로도 당시 현장에서 깨닫지 못하던 광경을 성령을 받은 이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는 베드로후서1장16절부터 19절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증거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기대치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만 경배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산 위에 주님과 동행하던 세 명의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면 산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세 명의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했으나, 산 아래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솔직히 산 위의 제자들이나 산 아래의 제자들 모두가 다 도토리 키재기식의 믿음이었지요. 산 위에 주님을 따라갔던 제자들이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것이나,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간질 병자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 모두 다 믿음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어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사람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기 아들이 간질병으로 자주 불에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 달라고 했는데 고쳐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세대를 탄식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아들에게 붙어 있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니 아이가 즉시로 간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종용히 묻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지요. 왜냐면 분명히 주님이 열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에게도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좇아내는 권세를 주셨거든요(마10:1). 그런데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수치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은 믿는 우리 모두가 할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병을 고칠 수 없습니까?’ ‘주님, 우리는 어찌하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주님, 우리는 왜 자주 넘어집니까?’ ‘주님, 우리는 왜 영적 전쟁에서 실패합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주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말입니다. 너희 안에 있는 믿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17절). 과연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적은 것일까요? 사실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양의 문제도 아닙니다. 믿음은 있고 없고의 문제입니다. 만일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는 역사가 나타났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문에 빠집니다.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전혀 영향력이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믿음의 하드웨어가 장착되어 있지만, 그 하드웨어를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최소한 이번 치유 사건에서 만큼은요.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항상 우리의 믿음이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충만할 때도 있으나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에 대해 말할 때 큰 믿음과 작은 믿음으로 구분합니다. 믿음의 크기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이즈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크다, 혹은 작다라는 크기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과연 큰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속칭 각종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생활 잘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것일까요? 혹은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찬송 잘하고, 전도 잘하는 것일까요? 미안합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런 것들로 우리 믿음의 크기를 측량 받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2) 믿음이 적은 자들의 특징
그러면 우리 주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근거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에는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증거가 몇 군데 있습니다. 4복음서 중에 주로 마태복음에 자주 나옵니다. 아주 특별하게 사용된 몇 구절을 통해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하신 주님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마태복음6장30절에서3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마6:30). 주님은 염려하는 자를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악한 독소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적게 만듭니다. 믿음을 축소 시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두렵고 무서워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8장23절에서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다에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입니다(마8:26). 그리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니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무서움증이나 두려움증이 믿음을 방해하는 적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갉아먹고 축소시킵니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들은 무서움과 두려움증이 심합니다.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떨면서 이제는 다 죽게 되었다고 겁을 냅니다. 그런 자들은 세상에 돌아가는 시스템에 민감합니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경제적인 상황에 민감하다는 말입니다. 혹은 자기 건강에도 민감합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을 축소시킵니다. 예전에 가나안을 정탐하던 열명의 정탐꾼들이 경험했던 두려움의 바이러스가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파괴하는 독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 자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14장22절부터3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아시는 주님이 제자들의 배를 향하여 바다를 걸어오십니다. 그러자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향해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이번에도 주님께 선수를 치며 말씀합니다.
진짜 주님이 맞다면 자기로 하여금 물 위로 걸어오게 해주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갑니다.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손을 내미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입니다(마14:31). 이는 의심하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라는 말입니다. 의심은 믿음의 적입니다. 의심은 내 안에 있는 믿음을 축소 시키는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16장1절부터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이 먹을 떡을 챙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음란한 세대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자 누룩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먹을 떡을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수근거린 것입니다. 아무도 챙기지 못함을 책망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자 주님이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고 말입니다(마16:8).
이들은 여태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엄청난 기적을 맛본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염려나 두려움, 의심이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3)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지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염려나 두려움이나, 혹은 의심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들은 우리 신앙의 이해를 돕기 위한 특징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도 이런 것들은 다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 안에 염려 없습니까? 두려움 없습니까? 의심하는 것은 없습니까? 혹은 은혜를 잊어버린 것은 없습니까? 감히 어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도 다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믿음이 적은 자들은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단 말일까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믿음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은 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근본적인 기준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생명이 없는 믿음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죽은 믿음은 역사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이지요.
생명 없는 믿음은 내 안에 예수가 없는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내안에 생명의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믿음입니다. 내안에 예수님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5장12절은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안에 예수님이 나의 주와 왕으로 계시는지의 여부를 말입니다(고후13:5).
본문에서 주님은 생명 있는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도 생명이 있기에 땅에 떨어져 죽으면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역사하는 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신앙의 모습으로 우리 믿음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냐는 것이지요. 믿음에 생명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믿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믿음의 판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자들은 생명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생명 있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혹은 믿음의 역동성이 없다면 믿음이 적은 자라는 평가를 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책망받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역동성을 믿지 아니하고 믿음을 확장시키지 않았음을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제자들 안에 있는 믿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수를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쫓아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극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을 극대화시킨다는 것은 주님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고 친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할 때 우리도 능히 주님처럼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다. 믿음에 생명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