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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입성>(유리화), 떼제의 에릭 수사, 떼제 화해의 교회
몇 해 전, 중국 칭다오에서 허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구급차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압축성 요추 골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료진은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수술 대신 보존적 치료를 택한 나는 복잡한 수속 끝에 한국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긴 회복의 시간이 이어졌다.
사고가 난 순간 나는 문득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이 생겼을 때 나는 벌써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칭다오에서 내일은 베이징에서 기도회가 있고 열흘 뒤에 북한에 가야 하는데 어쩌지?” 평소에 “하느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떠나가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한 번도 죽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옛 수도자들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곧 “죽음을 생각하라”, “너도 죽을 목숨임을 기억하라”라는 모토로 방 안에 해골을 두고 산 사람도 많았다. 기도실 한쪽에 선배들의 유골을 눈에 보이도록 차곡차곡 쌓아 놓은 동방 수도원의 사진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의 신심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병상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어 간병인이나 간호사가 몸을 닦아 줄 때, 불현듯 내가 죽으면 이렇게 누군가 내 몸을 닦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것을 앞당겨 체험한 셈이었다. 병원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이 기회에 유언을 하나 써볼까도 생각했다. 만약 쓴다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넘치도록 많이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 생명의 주재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전부일 것이었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조차도 그분의 자비로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절실히 다가왔다.
잠시나마 죽음을 가까이 체험하고 나면 많은 것이 정리된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 좀 더 분명히 알게 된다. 나는 단 한 순간을 살더라도, 두려움이나 아쉬움 없이 더 자유롭게, 더 사랑하면서 또 그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불완전한 삶을 살다가 끝내 불완전한 상태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되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으로 살고 싶었다.
아버지가 되는 것
병원에서 나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가끔 ‘아버님’이라 부르는 간호사나 조무사도 있었다. 한국을 떠날 때 공항의 안전 검색원 청년도 나를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리는 것은 지금도 어색하다. 떼제 안팎에서 많은 청년을 동반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들을 자식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기 때부터 가까이 지내는 조카 하나가 언젠가 내게 “삼촌이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라고 편지에 써서 나를 감동시킨 적이 있기는 하다.
2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청년에게 수사님은 이미 아버지 같은 존재랍니다.” 내가 막 40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 뒤에 큰 수도회의 원장이 된 캐나다 친구 하나와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년의 수도자들에게 그것이 중요한 주제라고 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가?’, ‘누구를 키워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독신 수도자로서 나는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나를 아버지라 불러주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경청과 신뢰를 통해 내가 누군가를 격려하고 그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면,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 누구의 이해도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가 나이가 많건 적건, 나를 무어라 부르건, 나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좀 더 자유를 맛보며 떠날 때 더없이 기쁘다. 나는 가끔 개인적인 문제가 있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의 아픔과 상처, 분노와 좌절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말하는 이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교회 안팎에서 대화가 필요한 곳에 독백만이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젊은이들과 소수자들, 일반적인 기준에 조금 어긋나는 경계인들과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 한국의 교회와 신자들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가? 어떤 낙인도 찍지 않고 섣부른 판단이나 정죄도 없이, 하느님의 귀한 자녀로 환대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자세를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 상처 입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만 보고 상처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누군가 싸매주고 보듬어주기를 바란다. 그 상처가 잘못 건드려졌을 때 더 아파하고 분노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 혹은 상처가 어떻게 지금의 행동이나 태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 때 우리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인간도 바뀔 수 있고 특히 젊은이의 경우, 무한한 변화와 성장, 성숙이 가능하기에, 지금의 행동만으로 너무 냉혹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하겠다.
상처와 치유, 경청
나 역시 젊었을 때는 나와 남의 상처를 잘 보지 못했다. 상처는 모두 흉터였고 아름다운 흉터는 없었다. 몸과 마음의 보이지 않는 흉터, 감추고 있는 상처는 얼마나 많을까? 오래도록 억압해 두어 자신도 흔히 잊고 있는 상처도 있다. 오래도록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무의식에까지 깊이 자리한 채 우리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했거나 버림받고 배신당한 체험은 나이와 상관없이 깊은 상처가 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자나 수도자도 예외가 아니다. 공동체의 이상을 간직한 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처받은 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은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 여행이나 순례 때 만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다. 나에게 들은 얘기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자기 얘기를 털어놓게 된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사연을 더 진솔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다. 동기가 어쨌든, 그렇게 자기 얘기를 한 사람은 해방감을 맛본다. 켜켜이 쌓인 상처와 실타래처럼 복잡한 문제의 해결책을 금방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그저 “들어 주기만 해도”, 그런 경청은 치유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사고를 당하고 치료하면서 나는 “더 천천히 걸으라”라는 처방과 숙제를 받았다. 의료진은 부러진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문 이후에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낫고 난 뒤에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것은 나에게 더 잘 들을 수 있는 기회이자, 그렇게 하려는 다짐이다. 내 몸의 소리, 마음의 소리를 듣고 남의 얘기도 더 잘 들으면서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좀 더 귀 기울이는 삶이다.
병상에 누웠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언젠가 여러 나라와 도시를 다니며 활동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온전히 하느님을 바라보며 존재 자체로 찬양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수도생활의 최종 목적지가 아닐까? 그리고 이 땅에서 숨 쉬는 동안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가야 할 길이리라.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열심히 뛰어다닌지 몇 해가 되었다.
잠시 심호흡하면서 내 눈길과 손길과 발길이 어디를 향하고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거듭 살펴본다.
※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귀중한 지면에 졸고를 실어주신 「주간기독교」에 감사드립니다.
신한열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살면서 30년 이상 유럽과 동아시아를 오가며 국제 젊은이 모임을 이끌었다.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와 비영리단체 이음새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서울시 문화다양성 전문강사로도 일한다. 쓴 책으로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이 있다. ‘수사’는 직분이나 직책이 아니라 개신교의 ‘형제’와 같은 호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