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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업장보살장의 본기무명과 사상
원각경은 원각과 무명이 주체이고, 무명에서 원각으로 나아가는 방편이 바로 묘용이다. 이 방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수습修習이다. 원각경은 원각과 수습 무명 또는 무명과 수습 원각이란 세 가지 기축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간다. 이 원각과 무명의 분신이 또한 청정과 환화이다. 이 다섯 가지 용어만 정확히 파지하면 사과반의思過半矣라 할 만하다.
원각과 무명의 관계를 범부중생은 천지현격으로 보지만, 여래의 수순각성隨順覺性에서 보면 그 경계가 동일하여 전혀 차별이 없다. 이 차별이 없는 세계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범부중생 곧 수행인의 분상에는 수습이 중추가 되고, 청정과 환화는 좌우 날개가 된다. 수습하는 가운데 청정에 청정상을 잊고, 환화에 환화상을 잊어버리며,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다 보면, 이미 무차별 세계에 이르러 있음을 알 것이다.
정제업장보살은 세존께 오직 하나만 간청한다. “오직 원컨대 여래께서는 저희들을 위하여 법성을 널리 개시하여 주소서.”(唯願如來廣爲我等開示法性) 개시법성이다. 이 법성을 개시하는 방편이 또한 수습이다. 정제업장보살장의 수습은 본기무명의 최초일념 곧 아상에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제명이 “정제업장보살장의 본기무명과 사상”이다. 원각경의 사상은 매우 난해하다. 난해한 경문을 평문으로 인도하는 수레가 바로 함허스님의 원각경설의이고, 또한 감산스님의 원각경직지이다. 이 글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정제업장보살장의 대체
2. 정제업장보살의 질문과 세존의 찬탄
3. 청정원각과 본기무명
4. 사상 중 첫째 아상
5. 사상 중 둘째 인상
6. 사상 중 셋째 중생상
7. 사상 중 넷째 수명상
8. 사상을 알지 못하면 성과와 해탈을 얻지 못한다
9. 자기의 미증을 청정한 원각으로 삼지 말라
10. 여래의 해행을 자기 수행으로 삼지 말라
11. 용맹심을 일으켜 번뇌를 항복시키라
12. 게송
13. 결어
1. 정제업장보살장의 대체
함허설의: 무구는 청정이고, ‘이미 이러한 것’은 업業이다. ‘이미 이러한 것’(已然)이란 ‘아직 이렇게 되지 않는 것’(未然)의 대대이다. 일념도 생기지 않고 외롭게 홀로 밝게 비춰주니, 이는 미연의 근원이고, 일념이 겨우 일어나자마자 육근이 모두 육식을 일으키니, 이는 이연의 업이다. 이 마음은 이미 이러하여 업을 이루면 곧 삼세三細와 육추六麤가 어지럽게 다투고 경쟁하듯 일어나 영명靈明한 진성을 덮어서 막아버리니, 그래서 고명孤明이 오히려 무명이 되고, 청정이 뒤엎어져 구예垢穢가 된다. 정제업장淨諸業障이라 이른 것은 모든 업장에 대하여 육추부터 삼세까지 이를 덜어내고 다시 덜어내며, 덜어내다가 덜어냄이 없는 지경에 이르니, 청정의 극한 무구를 말한 것이다.(無垢爲淨 已然爲業 已然者未然之對也 一念不生而孤明獨照 此未然之元也 一念纔起而諸根發識 此已然之業也 此心已然而成業 則三細六麤紛然競作 障覆靈明 所以明反無明 淨飜爲垢也 而云淨諸業障者 於諸業障從麤至細 損之又損損至於無損 淨盡無垢之謂也)
정제업장보살이 변음보살을 이어받아 질문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금강장보살부터 변음보살까지는 오개五蓋가 진성을 오염시키는 허물임을 상세히 진술했지만, 여전히 허물이 되는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정제업장보살이 그 근원을 끝까지 궁구하고자 질문하고, 여래는 사상을 허물의 원인이라 지적하신 것이다.(承辨音而發問者 何也 自金剛至辨音 歷陳五蓋染汚眞性之過患 而未明過患之所以也 故此菩薩窮盡其源而發問 如來指四相爲過患之因由也)
질문: “만일 이 각지覺知하는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면 무엇 때문에 오염되었고, 모든 중생을 미혹시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가?” 이는 오개가 진성을 오염시켜 허물이 되는 이유를 추궁하는 것이다.(問云 若此覺心本性淸淨因何染汚 使諸衆生迷悶不入 此推徵五蓋染汚眞性過患之所由也)
답변: “네 가지 전도를 실아의 체상이라 인식하고, 이로 인하여 갑자기 미움과 사랑 두 경계를 생기하니, 미움과 사랑은 곧 오개의 탐욕과 진에瞋恚이다. 탐욕과 진에를 들면 바로 혼침과 도거 의혹은 그 가운데 섭수하고 있다. 마치 사상 중에 단지 아상만 들어도 그 나머지는 전례를 따라 아는 것과 같다. 이는 오개가 진성을 오염시키는 허물이 본래 사상을 말미암아 이르렀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미 오개를 흩어버리고, 또 사상을 제거하면, 곧 추세의 장애가 다 없어지고, 청정무여淸淨無餘하여 정각淨覺이 저절로 현전한다. 이는 정제업장보살이 앞 변음보살장을 이어받아 질문한 이유인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 이른다.(答云 認四顚倒爲實我體 由此便生憎愛二境 憎愛卽五蓋之貪瞋也 擧貪瞋則沈掉與疑攝在其中矣 如四相中但擧我相以例其餘也 此明五蓋染汚眞性之過患本由四相而致之也 旣撒五蓋 又除四相 則麤細障盡淸淨無餘 而覺自現前矣 淨業所以承上章而發問者 以此頌曰)
맨 처음에 불각을 인하여 진상을 등지고,
이에 아상 인상을 일으켜 얼마나 단장이 끊어졌던가?
사상의 구름이 걷히고 일진법계를 드러내니,
바다와 하늘이 맑고 투명하여 만상을 뚜렷하게 하도다.
初因不覺背眞常 仍起我人幾斷腸 四相雲開一眞露 海湛空澄萬像彰
2. 정제업장보살의 질문과 세존의 찬탄
경문: 그때 정제업장보살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양발에 정례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부사의한 난사難事 일체여래의 인지행상을 널리 설하시고, 모든 대중이 미증유법을 얻도록 가지하시며, 조어사께서 항하사수의 겁을 지나며 부지런히 애쓰신 경계 곧 일체 공용을 보도록 가지하시니, 또한 일념과 같사옵니다. 저희 보살은 깊이 스스로 경하하고 위문하나이다.”(於是 淨諸業障菩薩在大衆中 即從座起頂禮佛足 右繞三匝長跪叉手 而白佛言 大悲世尊 爲我等輩廣說如是不思議事 一切如來因地行相 令諸大衆得未曾有 覩見調御歷恒沙劫 勤苦境界一切功用 猶如一念 我等菩薩深自慶慰)
해설: “또한 일념과 같다.”(猶如一念) 이는 무슨 뜻인가? 앞 변음보살장에서 설하신 스물다섯 가지 정륜의 경계를 일컫기를,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 일체 공용을 보도록 가지하시니,”라고 하신 것이며, 이는 각기 하나의 정륜마다 서가조어사의 과거 인지법행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기고 나서 다시 튕기는 그 찰나 사이에 비로자나장엄장 누각 안에 들어가고, 미륵보살의 과거 한량없는 겁의 인지법행을 하나도 남음이 없이 볼 수 있었던 것과 같다.
함허설의: 일미무수一味無修 중에 개시한 삼관은 진실로 사의하기 어렵고, 다시 스물다섯 가지 정륜을 개시하여 무르익은 근기를 끝없이 섭수하시니, 진실로 알 수도 바로 사의할 수도 없구나. 일체 공용은 스물다섯 가지 정륜을 가리킨다. 이는 바로 무수겁을 지나며 부지런히 애쓴 경계이다. 부처님의 개시로 인하여 일념에 즉시 아니, 그래서 깊이 경하하는 것이다.(一味無修之中開示三觀固難思議 復開諸輪攝盡機宜 實不可得而思議也 一切功用指二十五輪也 此乃歷劫勤苦境界也 因佛開示一念便知 所以深慶也)
해설: 일미무수一味無修는 무엇인가? 위덕자재보살장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무상묘각은 일체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여래를 출생하며, (출생한 여래는) 일체법과 동체로 평등하고, 모든 수행에 대하여 진실로 두 법이 없느니라.”(善男子 無上妙覺遍諸十方 出生如來 與一切法同體平等 於諸修行實無有二) 이는 동체로 평등하여 둘이 없는 법문이니, 이를 일미라 한다. “방편으로 수순하면, 그 수가 무량하지만, 돌아갈 곳을 원만히 섭수하고, 근성의 차별을 따르면, 응당 세 종류가 있느니라.”(方便隨順其數無量 圓攝所歸循性差別 當有三種) 이는 무수의 경계가 아니고, 수습하는 방편이다. 일미가 곧 무수이다. “일미무수 중에 개시한 삼관” 중에 일미무수는 무상묘각의 여래 경계이다.
섭진기의攝盡機宜를 “무르익은 근기를 끝없이 섭수한다.”라고 번역했다. 불교사전에서 기의機宜를 “이른바 중생이 모두 선근이 있다. 이 때문에 만일 제도하고자 하면 바로 그 근기를 수응하고, 적절한 교법을 베풀어야 한다.”(謂衆生皆有善根 故若欲度化 則隨應其機 而施之以適宜之敎法)라고 정의한다. 이를 의거하여 기의를 “무르익은 근기”라 해석했다.
“진실로 알 수도 사의할 수도 없구나.”(實不可得而思議也) 얻을 득得자와 사의는 동격이다. 안다, 깨닫는다, 등의 뜻이 있다. “진실로 알 수 없고, 사의할 수도 없구나.”
감산직지: 이는 들은 바를 경하한 것이다. 이른바 일심을 좇아서 모든 정륜을 건립하니, 바로 모든 여래의 인지행상이고, 부지런히 애쓰신 경계이다. 이를 일념에 모두 보았기 때문에 깊이 스스로 경하한 것이다.(此慶所聞也 謂從一心建諸定輪 乃諸如來因地行相勤苦境界 一念具見故深自慶也)
경문: “세존이시여, 만일 이 원각묘심의 본성이 청정하다면, 무엇 때문에 오염되어 모든 중생을 미혹하게 하며,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까? 오직 원컨대 여래께서는 저희들을 위하여 법성을 널리 개시하시고, 이 회상의 대중과 말세중생을 장래의 안목을 갖추게 하여주소서.” 이러한 말씀을 올리고 나서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차례나 간청하였으며, 마치자마자 다시 시작하려고 하였느니라.(世尊 若此覺心本性清淨 因何染污使諸衆生迷悶不入 唯願如來廣爲我等開示法性 令此大衆及末世衆生作將來眼 說是語已五體投地 如是三請 終而復始)
함허설의: 개오開悟는 응당 개시開示라 써야 한다. 개오라는 말은 문장을 익숙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래에 이른바 “장래의 안목을 갖추게 하여주소서.”라는 것이 곧 개오의 뜻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각성과 법성은 체용의 호칭이다. 각성은 연기가 아직 싹이 트지 않는 근원이니, 수증이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때이고, 법성은 완전히 연기를 가리키니, 미오가 나누어진 이유이고, 수증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제 미혹하는 연고와 수증하는 방편을 청하니, 이 때문에 “법성을 개시하신다.”라고 이른 것이다. 각성은 이미 개시를 받았기 때문에 벌써 개오했지만, 법성은 여전히 개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개시하여 주시기를 간청한 것이다. 만일 여전히 개시를 받지 못하면 스스로 개오할 수 없고, 장래의 안목을 갖출 수 없다.(開悟應作開示 開悟之言文未便故 下所謂作將來眼卽當開悟義也 覺性法性體用之稱也 覺性緣起未萌之源 修證未作之時也 法性全指緣起 迷悟所以分也 修證所以作也 今請迷悶之故修證之方 故云開示法性 覺性則已蒙開示 已得開悟 法性則未得開悟故 今請開示 若未蒙開示則自不能悟 不堪作將來眼也)
감산직지: 이는 정문正問이다. 앞 변음보살장에서 부처님은 일체여래의 원각이 청정하여 본래 수습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청정하면 본래 오염이 없다. 지금 무엇 때문에 오염되었고, 다시 방편을 빌려서 수행해야 하는가?(此正問也 上章佛說一切如來圓覺清淨本無修習 然清淨則本來無染 今因何有染污 更假修耶)
해설: 금강장보살장의 끝에, “선남자여, 허망한 부심浮心은 여러 교견巧見이 많아서 원각의 방편을 성취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은 분별은 정문正問이 아니니라.”(善男子 虛妄浮心多諸巧見 不能成就圓覺方便 如是分別非爲正問)라고 하니, 이 정문은 조리가 명백하고 사리가 올바른 질문을 말한다. 또 하나의 정문이 있다. 곧 정문은 반문反問의 대어이다. 묻고 답하는 정상대화 중에 질문을 정문이라 하고, 답하는 중에 되묻는 것을 반문이라 한다. 반문은 자주 쓰이지만, 정문은 매우 낯설다.
경문: 그때 세존께서 정제업장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선남자여, 그대는 능히 모든 대중과 말세중생을 위하여 여래의 이와 같은 방편을 자문하니,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을지니라.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설하겠노라.” 그때 정제업장보살이 성교를 받들고 기뻐하며, 모든 대중과 잠자코 경청하니라.(爾時世尊 告淨諸業障菩薩言 善哉善哉 善男子 汝等乃能爲諸大衆及末世衆生 諮問如來如是方便 汝今諦聽 當爲汝說 時淨諸業障菩薩奉教歡喜 及諸大衆默然而聽)
함허설의: 이미 추장麤障을 제거시켰고, 또 세혹細惑을 제거시키려고 하니, 또한 부처님의 본회本懷이기 때문에 찬탄하시고, 설법을 허락하신 것이다.(旣令除麤障 又令除細惑 亦佛本懷故讚而許說也)
3. 청정원각과 본기무명
경문: “선남자여, 일체중생은 무시이래로 나와 남 중생과 수명이 있다고 망상하여 집착하고, 사전도를 실아의 체상이라 인식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문득 미움과 사랑이란 두 경계가 생기고, 허망한 체상에 거듭 허망을 집착하며, 두 허망이 서로 의지하여 허망한 업도業道가 생기느니라. 허망한 업도가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유전이 있다고 보며, 유전을 싫어하는 이는 무턱대고 열반이 있다고 보느니라.”(善男子 一切衆生從無始來 妄想執有我人衆生及與壽命 認四顚倒爲實我體 由此便生憎愛二境 於虛妄體重執虛妄 二妄相依生妄業道 有妄業故妄見流轉 厭流轉者妄見涅槃)
해설: 사전도四顚倒는 하나의 불교용어이다. 네 가지 전도된 망견妄見이다. 유위의 사전도가 있고, 무위의 사전도가 있다. 열반경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부정不淨으로 보는 것을 무위의 사전도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사전도는 이와 다르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로 나와 남 중생과 수명이 있다고 망상하여 집착하고, 사전도를 실아의 체상이라 인식하느니라.” 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아상이 되고, 연이어 인상과 중생상 수명상이 된다. 나와 남 중생과 수명이 있다는 집착이 바로 사전도이다. 달리 말하면 사상이 곧 사전도이다.
알다 또는 인식하다는 뜻의 인認자는 경전에서 통상 부정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오인誤認 또는 착인錯認으로 읽고 번역하면 그 본의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지만, 이는 직역이 아니고 의역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인식한다고 해석했다. 이 점을 참작하고 읽으시기 바란다.
업도業道는 하나의 명사이고, 업業도 또한 그러하다. 몸과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 업이다. 몸을 몸과 입으로 양분하고, 마음을 뜻으로 보며, 이를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신구의 삼업을 위시하여 14종의 삼업이 있다. 신구의 삼업으로 육도를 윤회하는 일체 과정을 업도라 한다.
함허설의: 단지 하나의 생각 상想자가 삼계의 만법을 총지할 따름이다. 만일 망상이 없으면 만법이 모두 드러날 수 없다. 법성은 본래 자아가 없지만, 없는 가운데 종횡으로 계탁하니, 그 이름을 망상이라 한다. 내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계탁하니, 진실로 허망하다. 나를 인하여 다시 미움과 사랑이란 두 견해가 생기니, 이 때문에 거듭 집착한다고 이른 것이다. 두 가지 허망이 서로 도와서 업을 짓고 고과苦果를 초래하며, 태란습화 사생을 유력하고, 오도를 따라간다.(只一想字摠持三界萬法 若無妄想萬法俱沈 性本無我 無中橫計 名爲妄想 無我計我 固是虛妄 因我更生憎愛二見 故云重執 二妄相資造業招苦 歷於四生 因於五道)
해설: 오도五道는 육도와 그 뜻이 같다. 아수라취를 천도 또는 아귀도에 포함시키면 오도이고, 독립하면 육도이다. 아수라는 제석천왕과 전쟁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천도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감산직지: 이는 오염된 이유를 바로 답변한 것이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로 나와 남 중생과 수명이 있다고 망상하여 집착한다.”라는 것은 바로 문수장 첫머리에 이른바,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법상法相이라 인정하고, 경계의 연영을 자기 마음의 진상眞相이라 하느니라.”라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최초 불각이 본지법신을 미혹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환화처럼 허망한 오온의 신심을 인식하여 실아의 체상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아상이라 일컫는다. 내가 전전하여 여취餘趣를 향하여 나아감을 계탁하니, 이 때문에 인상이라 일컫는다. 내가 성쇠盛衰와 고락苦樂이 변이變異하며 상속함을 계탁하니 중생상이다. 어떤 일기一期의 명근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계탁하니 수자상이다. 내가 없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허망을 진신眞身이라 집착하니, 이 때문에 전도라 이른다.(此正答染污所以也 一切衆生從無始來妄想執有我人等者 正初所云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者也 由諸衆生最初不覺迷本法身故 妄認五蘊幻妄身心 爲實我體 故名我相 計我展轉趣於餘趣 故名人相 計我盛衰苦樂變異相續 爲衆生相 計有一期命根不斷 爲壽者相 以不達無我 執妄爲眞 故云顚倒)
또 허망을 나라고 집착하니, 이미 전도된 것이다. 게다가 이 망아妄我에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거듭 허망을 집착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의혹을 일으킨(起惑) 것이다. 마음과 경계의 두 허망이 서로 의지하며 갖가지 업을 지으니, 이 때문에 “허망한 업도가 생긴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조업造業이다. 이 때문에 망업이 있으니, 반드시 고보苦報를 받고 생사에 유전한다. 이는 고과苦果이다. 기혹과 조업 고과 셋은 모두 무턱대고 아집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삼계의 윤회를 받는다. 이 때문에 유전이라 이른다. 이는 분단생사이다.(然執虛妄爲我 已是顚倒 且於此妄我起憎愛之心 故云重執虛妄 此起惑也 心境二妄相依造種種業 故云生妄業道 此造業也 故有妄業 必受苦報流轉生死 此苦果也 惑業苦三皆因妄認我執以取三界輪迴 故云流轉 此分段生死也)
만일 이승의 부류가 생사의 고취苦聚를 싫어하고, 번뇌의 집취集聚를 끊으며 삼계 밖으로 벗어나지만, 다시 무턱대고 열반이 있다고 보고, 변역생사의 고취를 받는다. 이 모두는 내가 있다는 집착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문득 미움과 사랑이란 두 경계가 생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식識을 미혹하고 지혜를 미혹하는 추중과 미세의 구분이 있다. 추중麤重이란 식을 미혹한 것이니, 바로 범부가 무턱대고 오온을 나라고 인식하고, 마구 미움과 사랑을 일으킨다. 바로 금강경 전반부에서 천명한 것이 이것이다. 미세란 지혜를 미혹한 것이니, 바로 일체 성현이 무턱대고 증득이 있다고 하지만 능소가 여전히 잊히지 않으니, 곧 이 원각경이 설한 바이고, 바로 금강경의 후반부에서 천명한 것이 이것이다.(若二乘人厭生死苦 斷煩惱集出三界外 復妄見涅槃 以取變易生死之苦 皆由執我之故也 故云由此更生等 然此四相有迷識迷智麤細之分 麤者迷識 乃凡夫妄認五蘊爲我 妄生憎愛 乃金剛經前半所明者是也 細者迷智 乃一切聖賢妄有證得能所未忘 即此經所說 乃金剛經後半所明者是也)
이 가운데 추중과 미세 두 가지 아집은 바로 구생俱生에 속한다. 이 원각경의 중생은 그 경계가 구계九界를 포괄한다. 이 가운데 먼저 범부의 사상을 거론하여 삼승의 사상을 드러낸다. 범부의 사상은 증애를 말미암아 있고, 삼승의 사상은 증취證取를 말미암아 있다. 증취는 애근愛根의 종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범부와 성현을 견주어 거론한 것이다.(此中麤細二種我執正屬俱生 此經衆生意該九界 此中先舉凡夫之四相以顯三乘之四相 以凡夫四相由憎愛而有 三乘四相由證取而有 以證取發於愛根種子故 凡聖雙舉)
해설: 구생俱生은 함께 생긴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구생을 다시 해설하겠다.
경문: “이로 말미암아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원각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이들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있더라도 원각이 들어가게 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념과 식념이 모두 미혹에 귀착하느니라.”(由此不能入清淨覺 非覺違拒諸能入者 有諸能入非覺入故 是故動念及與息念皆歸迷悶)
함허설의: 비록 고를 싫어하여 집을 끊고자 도를 닦아서 멸을 증득할지라도, 무위에 막히면 승진을 구하지 못한다. 이는 살고 죽는 중생과는 비록 승침昇沈이 같지 않고 청탁도 다르지만, 여전히 원각에 들어가지 못한 그 점은 바로 동일하다. 중생은 유위에 막히고, 이승은 무위에 막히지만, 청정한 각해覺海는 성상이 함께 다하여 없다. 유위와 무위 양쪽이 모두 맞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익사를 피하려고 불속에 뛰어들거나, 산봉우리를 피하려고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 모두는 우환을 면하지 못한다.(雖厭苦斷集修道證滅 滯於無爲不求勝進 此與生死之衆 雖昇沈不同 淸濁有異 其未入覺則一也 衆生滯於有爲 二乘滯於無爲 淸淨覺海性相俱泯 有爲無爲二俱差過故也 如避溺投火逃峯赴壑 俱不免於患矣)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진성은 본래 허명하여 곧 횡계가 없지만, 횡계가 일어나자마자 허명은 바로 숨어버리니, 곧 무명의 체상이다. 이승은 비록 이미 번뇌를 끊고 벌써 생사를 여의었지만, 그러나 주재는 여전히 잊히지 않기 때문에 모두 미혹에 귀착하고, 각해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치 도둑의 두목이 아직 패퇴하지 않으면 나라도 또한 여전히 편안하지 못함과 같다.(所以然者 性本虛明而無橫計 橫計纔起 虛明卽隱 卽無明之相也 二乘雖已斷煩惱已離生死 然主宰未忘故 皆歸迷悶 不入覺海 如賊主未敗 國猶未寧也)
감산직지: 이는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바로 답변한 것이다. 위에서 설하신 바, 무턱대고 나를 집착하기 때문에 진성을 오염시키고, 이로 말미암아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대체로 각성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집착하니, 이 때문에 이르기를,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있더라도 원각이 들어가게 함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니, 만일 원각으로 원각에 들어간다면 바로 허공이 허공과 합쳐지는 것과 같다. 또 어떻게 이를 거부할 수 있으랴. 아집이 여전히 잊히지 않기 때문에 범부의 동념과 이승의 식념이 모두 미혹에 귀착한다. 아래는 거듭 미혹의 근본을 징석하는 것이다.(此正答不能入覺之所以也 由上所說妄執我故染污眞性 由此不能入清淨覺 蓋非覺性違拒不容入也 以執我能入覺 故云有諸能入非覺入覺耳 若以覺入覺 則如空合空 又何拒之有 以我執未忘故 凡夫動念二乘息念皆歸迷悶 下重徵釋迷悶之本)
경문: “무엇 때문인가? 무시이래로 있는 본기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되기 때문이니라.”(何以故 由有無始本起無明爲己主宰)
함허설의: 중생의 본기무명은 마치 사람이 태중에 눈은 없으나 정기를 받고 형체를 이룬 것과 같으니, 거심동념擧心動念이 모두 이 무명의 체상이다. 마치 사람의 명근이 출생과 함께 모두 생기지만, 스스로 명근을 끊기는 진실로 어려운 것과 같으니, 무명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주재자를 아직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종자從者가 잠복하고 있다가 다시 일어나고, 그루터기가 오히려 남아있기 때문에 지엽이 떨어지고 나서 다시 살아난다. 정인正因과 조연助緣이 서로 도와주어 영원히 단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衆生本起無明 如人胎中無目稟氣成形 擧心動念 皆是無明之相也 如人命根與生俱生自斷誠難 欲除無明不亦難乎 主宰未祛故 從者伏已還起 根株猶在故 枝葉去已還生 正助相資而未永斷故)
감산직지: 이는 미혹의 근본을 징석한 것이다. 본기무명은 이른바 최초일념으로 불각의 생상무명이다. 법신은 내가 없지만, 일념무명이 본지법신을 미혹함으로 인하여 아타나식을 이루고, 아상의 근본이 된다. 이로부터 모두 무명이 용사하니, 이 때문에 “자기의 주재자가 된다.”라고 이른 것이다. 나란 주재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무시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무명이 주재하니, 이는 아상이다. 설령 등각위에 이미 돌아왔을지라도 여전히 생상무명을 타파하지 못하면 이숙식이 아직 공적하지 못한 것이니, 모두 아상에 속한다. 그러나 이 경의 아상은 여러 경교經敎에 설한 바와 같지 않다. 다음 경문에서 저절로 밝혀진다.(此徵釋迷悶之根本也 本起無明謂最初一念不覺生相無明也 法身無我 由一念無明迷本法身成陀那識 爲我相根本 自此皆是無明用事 故云爲己主宰 我者主宰義 謂從無始至今一向皆是無明主宰 是爲我相 自等覺已還未破生相無明 異熟未空 皆屬我相 然此我相 與諸教所說不同 後文自明)
경문: “일체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안이 없으니, 몸과 마음 등의 체성이 모두 무명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명근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一切衆生生無慧目 身心等性皆是無明 譬如有人不自斷命)
감산직지: 이는 무시무명을 지금까지 끊기가 어려운 이유를 거듭 해석한 것이다. 이른바 전체무명은 변전하여 오온의 신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 근본무명은 근본지의 원조圓照가 아니면 타파할 수 없다. 모든 중생은 종래로 여전히 선지식을 만나서 혜안을 개발하고 원조하여 타파하지 못했는데, 어찌 무명으로 무명을 끊을 수 있는 이치가 있으랴. 이 때문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명근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此重釋無始無明至今難斷之所以也 謂全體無明變成五蘊身心 然此根本無明非根本智照不能破 以諸衆生從來未逢知識開發慧眼照破 豈有無明能斷無明之理耶 故云譬如有人不自斷命)
경문: “이 때문에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내가 수순해주어야 하고, 수순해주지 않는 이는 문득 증오와 원망이 생기느니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무명을 장양長養하기 때문에 염념 상속하여 도를 구해도 모두 성취하지 못하느니라.”(是故當知 有愛我者我與隨順 非隨順者便生憎怨 爲憎愛心養無明故 相續求道皆不成就)
함허설의: 비록 다겁을 지나오며 상속하여 도를 구해도 성취할 수 없다. 상속이란 이른바 염념이 상속하여 끊어질 사이가 없다는 것이고, 이른바 종자가 현행하고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아래 글에 이르기를, “말세 중생이 여전히 자성을 알지 못하면, 비록 다겁을 지나오며 부지런히 애쓰고 도를 닦아도, 단지 유위라 일컬을 뿐이고, 끝내 일체 성과를 성취할 수 없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비록 부지런히 정진해도 모든 병만 더욱 늘어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부지런히 애쓰고 도를 닦는 것과 이른바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것이 상속하여 도를 구함을 말한 것이다.(雖經多劫相續求道而不得成 相續者卽所謂念念相續無有間斷者也 非謂種子現行 相續不斷也 如下文云 末世衆生未了自性 雖經多劫勤苦修道 但名有爲 終不能成一切聖果 又云雖勤精進增益諸病 是故不能入淸淨覺 所謂勤苦修道 與所謂勤精進者 相續求道之謂也)
감산직지: 이는 무명이 장겁을 상속하는 이유를 서술한 것이다. 이른바 이 무명이 장겁을 상속해도 끊기가 어려운 것은 미움과 사랑이란 두 의혹이 있어서 이 무명을 자양滋養하기 때문이다. 나를 집착하기 때문에 곧 나를 편애한다. 만일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바로 다시 나의 애견愛見을 증장한다. 만일 나를 거스르는 이는 반드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낸다. 그러나 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또한 애착에서부터 일어난다. 그 애착을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고 원망할 따름이다. 이 미움과 사랑으로 무명종자를 자훈資熏하고 현행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영겁을 태어날 때마다 애증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 때문에 무명은 나날이 두터워진다. 그래서 장겁의 생사를 상속할 따름이다. 지금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불도를 구한다면, 어찌 성도하는 이치가 있으랴. 이 때문에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라고 이른 것이다. 아래는 사상을 보인 것이다.(此序無明相續長劫之所以也 謂此無明相續長劫而難斷者 以有憎愛二惑以滋養之也 以執我故則偏愛我 若有愛我者則更增長我之愛見 若違我者必生憎怨 然憎怨亦從愛起 以不順其愛故憎怨耳 以此憎愛資熏無明種子 發起現行 故劫劫生生愛憎未斷 故無明日厚 所以相續長劫生死耳 今以愛憎之心而求佛道 豈有成道之理耶 故云皆不就 下示相)
4. 사상 중 첫째 아상
함허설의: 사상의 4개 문단은 낱낱 문단마다 3개 단락으로 구분되고, 단락마다 모두 ‘선남자’라 표기하고, 또한 모두 결문結文이 있으니, 조리가 분명하고, 맥락이 일관한다. 비록 뿌리가 뒤얽히고 마디가 엉클어진 곳이 있지만, 그 혈맥을 찾는다면 은닉처를 얻을 수 없다. 인상과 중생상 수명상의 이 3개 문단 가운데 글에 궐자나 오자가 있고, 또한 도치도 있으니, 문의文義가 차서를 잃게 되어 혈맥이 불통하기에 이르렀다.(四相四段一一文分三節 節節皆標善男子 亦皆有結文 條理分明 脈絡一貫 雖有盤根錯節之處 尋其血脈不能得匿 人衆生壽命此三段中文有闕誤 亦有倒置 致令文義失次血脈不通)
해설: 사상과 관련한 함허스님의 설의는 사상 전체를 각 문단에 배대하지 않고 한꺼번에 해설했다. 그래서 이 설의를 경문의 각 단락과 서로 상응하게 배치하고자 한다. 위 글은 첫 대문이다.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아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證知한 것이니라.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전신이 순조롭고 쾌적하여 홀연히 나의 몸을 잊었느니라. 사지의 기맥이 이완되고 섭양에 처방을 어긋나게 하였더니, 침이나 뜸을 조금만 놓아도 바로 내가 있는 줄을 아느니라. 이 때문에 증지해야 비로소 아상의 체상을 나타내느니라. 선남자여, 그 마음으로 더 나아가 여래에 대하여 증지하고 필경 청정열반을 요지할지라도 모두 아상이니라.”(善男子 云何我相 謂諸衆生心所證者 善男子 譬如有人百骸調適忽忘我身 四支絃緩攝養乖方 微加鍼艾則知有我 是故證取方現我體 善男子 其心乃至證於如來 畢竟了知清淨涅槃 皆是我相)
해설: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문장의 전체 대의를 파악하는 핵심이다. 사상을 정의하고자 하면 가장 중요한 용어는 무엇인가? 바로 증오료각證悟了覺이란 네 글자이다. 이를 증지證知나 오지悟知 요지了知 각지覺知라 해석했다.
첫째 “무엇이 아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證知한 것이니라.”(云何我相 謂諸衆生心所證者)
둘째 “무엇이 인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한 바를 오지悟知하는 것이니라.”(云何人相 謂諸衆生心悟證者)
셋째 “무엇이 중생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이 저절로 증지하고 오지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善男子 云何衆生相 謂諸衆生心自證悟所不及者)
넷째 “무엇이 수명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고 요지了知한 바를 각지覺知하는 것이니라.”(云何壽命相 謂諸衆生心照清淨覺所了者)
이것이 바로 사상의 정의이다. 넷째 수명상의 각소료자(覺所了者)를 의거하면, 셋째 중생상을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하고 오지한 바를 요지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그러면 증오료각證悟了覺의 차서가 된다. 아래에서 다시 논하겠다.
현완絃緩은 거문고 등 현악기의 줄이 팽팽하지 않고 늘어진 것을 말한다. 수행이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과 같아서, 그 줄이 팽팽해도 안 되고, 느려져도 안 된다. 그 중도를 얻는 것이 묘하다. 이 줄을 인체에 배대하면 기맥과 같다. 상하로 일정의 범위를 벗어나면 건강에 탈이 생긴다.
내가 이 정제업장보살장을 읽으며 고심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증취證取이다. 이 취取자에 의미를 부여하면, “이 때문에 취를 증지해야 비로소 아상의 체상을 드러내느니라.”(是故證取方現我體)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취取자는 동작의 진행을 뜻하는 조사로 쓰이기도 한다. 가령 청취聽取라 할 때의 이 취자가 그러하다. “침이나 뜸을 조금만 놓아도 바로 내가 있는 줄 안다.” “아상의 체상이 드러남을 증지한다.” 상하의 글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가.
함허설의: 경에 이르기를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한 것이다.”라는 것은 중생은 바로 범위凡位의 이명이기 때문이다. 범위는 내범과 외범이 있으니, 이른바 사람 인人자에도 지인智人과 우인愚人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중생은 이승 이상부터 등각 이하의 중생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끊어야할 장애는 곧 내범의 세혹이니, 외범의 구박具縛한 추혹과는 같지 않다. 단지 이 원각경 가운데 사상은 금강경의 사상과 더불어 명칭은 같으나 취지는 다르다. 이쪽은 단지 수증하는 가운데 세혹을 가리킬 뿐이고, 저쪽은 모두 중생의 수에 있는 것이니, 무엇이거나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에 증지한 바가 있지만, 증지한 마음을 여전히 잊지 못하면, 그 이름을 아상이라 한다. 더 나아가 여래의 열반에 대하여 증지해도,(경문: 여래에 대하여 증지하고 필경 청정열반을 요지할지라도), 증지에 대하여 여전히 잊지 못하면, 모두 아상이라 일컫는다.(所謂謂諸衆生心所證者者 衆生是凡之異名也 凡有內凡外凡 如所謂人者有智人愚人之異也 此中衆生指二乘已上等覺已下之衆生也 故所斷障卽是細惑 不同外凡具縛之麤惑也 但此中四相與金剛四相名同趣異 此則但指修證中細惑 彼則凡在衆生數者 莫不有之也 心有所證 證心未忘 名爲我相 乃至證於如來涅槃 於證未忘 皆名我相)
해설: 이범二凡은 이른바 삼승의 수행인이 도제道諦를 보기 이전의 범위인데, 내범과 외범으로 나뉜다. 외범은 단지 교법을 듣고 믿기만 하는 범위로, 소승의 삼현과 대승의 십신보살의 지위를 말하고, 내범은 바로 그 법을 수행하여 성위에 가까운 범위로, 소승의 사선근과 대승의 십주 이상의 지위를 말한다. 이상은 불교사전을 의거한 것이다.
천도재를 지낼 때 축원문에 상품상생이란 말이 나온다. 구품왕생과 관련하여 정영사 혜원慧遠스님은 다음과 같이 배대했다. 사지에서 육지보살까지는 상품상생이고, 초지부터 이지 삼지보살은 상품중생이며, 종성 이상의 보살은 상품하생이다. 또 소승의 앞 삼과의 성자는 중품상생이고, 견도 이전의 내외이범은 중품중생이며, 견도 이전의 범부는 중품하생이다. 하품의 계위는 의보依報의 공과에 따라 하품상생과 하품중생 하품하생으로 나뉜다. 구품왕생의 계위는 제가의 이설이 파다하다. 여기서는 혜원스님의 설만 취했다.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아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한 것이니라.”
해설: 함허스님은 아상의 전체에 대하여 해설문이 하나이지만, 감산스님은 나누어 해설했다. 이에 경문도 따로 배대했다. 중복한 경문 중에 한자는 생략한다.
감산직지: 이는 아상의 체상을 바로 제시한 것이다. 이 아상 등 사상을 규봉스님의 구해는 모두 추중과 미세로 구분했다. 지금 부처님의 뜻을 자세히 보면, 무시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된다고 가리키니, 이는 아상의 체상(我體)이고, 이는 사상도 단지 생상무명을 준거할 따름이다. 지금 관조하고 깊이 궁구해도 대대가 여전히 잊히지 않고, 염념에 전전하며 사상이 있으니, 원래 추중과 미세로 구분할 바가 아니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하겠는가? 이른바 묘성妙性이 원명하여 본래 능소가 없으니, 진실로 최초일념이 이 묘성을 장폐함으로 인하여 그 본명本明을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무명이라 일컬는다.(此正示我相之體也 此我等四相舊解都分麤細 今詳佛意 指無始無明爲己主宰 是爲我體 是則四相單約生相無明 今以觀照研窮對待未忘 展轉有四 原非麤細之分也 何以明之 謂妙性圓明本無能所 良由最初一念障此妙性 失其本明 故名無明)
이로부터 오면서 한결같이 모두 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되고, 아상의 체상이 된다. 지금 시각始覺으로 관조하여 원각을 증지하려고 해도 여전히 원만하게 합일하지 못하니, 중간에 모두 근본무명을 인하여 장애가 되기 때문에 대대가 여전히 잊히지 않는 것이다. 곧 이 대대하고 증지하는 것은 바로 무명이고, 각성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마음으로 증지한 것이다.”라고 이른 것이니, 바로 아상이다. 이를 의거하건대, 시기무명이 아상이라면, 어찌 추중과 미세의 구분이 있으랴. 영가스님이 “일념 가운데 오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라고 하니, 바로 이 뜻이다. 지자는 청컨대 이를 깊이 살펴보시라. 아래는 비유를 써서 천명했다.(自爾以來一向皆是無明爲己主宰 而爲我體 今以始覺觀照欲證圓覺 未能圓合 中間皆因根本無明而爲障礙故 對待未忘 即此所對所證者 乃是無明非覺性也 故云心所證者 乃我相也 按此始起無明爲我 豈有麤細之分耶 永嘉(一念中五陰 正此意耳 智者請深觀之 下以喻明)
해설: 위 인용문은 영가집永嘉集의 삼마타송에 있는데, “일념 가운데 오음”(一念中五陰)이라 하여 간단히 인용했다. “다시 요간料簡한 이후에 반드시 일념의 가운데 오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역력하게 분별하면 명식明識이 상응하니, 바로 식음이다.”(復次料簡之後 須明識一念之中五陰 謂歷歷分別 明識相應 即是識陰) 시기무명은 본기무명과 같다. 감산스님은 이를 생상무명이라 말한다. 삼마타송은 아래와 같다.
또 말한다. “난상亂想이 곧 병이고 무기도 또한 병이며, 적적이 바로 약이고 성성도 또한 약이다. 적적은 난상을 일깨워주고 성성은 무기를 다스리며, 적적은 무기를 일으키고 성성은 난상을 일으킨다. 적적이 비록 난상을 다스릴 수 있지만 다시 무기를 환생시키고, 성성이 비록 무기를 다스릴 수 있지만 다시 난상을 환생시킨다. 이 때문에 ‘성성한 적적은 옳지만 무기한 적적은 그르며, 적적한 성성은 옳지만 난상한 성성은 그르다.’라는 것이다. 적적은 조연助緣이고 성성은 정인正因인 줄을 사유하라. 거듭 요간料簡한 이후에 반드시 일념의 가운데 오음을 명백히 알아야 하니, 이른바 역력하게 분별하라. 명식明識이 상응하면 곧 식음이고, 마음에 받아들이면 바로 수음이며, 마음이 이 도리를 반연하면 곧 상음이고, 이 도리를 널리 쓰면 바로 행음이며, 진성을 더럽히면 곧 색음이다. 이 오음이란 그 전체가 곧 일념이고, 이 일념이란 그 전체가 완전히 오음이다. 명백히 보라. 이 일념 중에 주재가 없으니 곧 인공의 지혜이고, 환화와 같은 줄을 보니 바로 법공의 지혜이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생각과 여섯 가지 요간을 알아야 하니, 원컨대 이를 싫어하지 말지니라. 마치 진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으니, 기와 조각이나 벽돌 부스러기 그리고 가짜 보배를 분명히 알고, 단지 남음이 없이 없애버리기만 하면 그 뿐이다. 설령 진금을 알지 못해도 진금 자체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니, 어찌 얻지 못할까 근심하랴.(又曰 亂想是病 無記亦病 寂寂是藥 惺惺亦藥 寂寂破亂想 惺惺治無記 寂寂生無記 惺惺生亂想 寂寂雖能治亂想 而復還生無記 惺惺雖能治無記 而復還生亂想 故曰惺惺寂寂是 無記寂寂非 寂寂惺惺是 亂想惺惺非 寂寂爲助惺惺爲正思之 復次料簡之後 須明識一念之中五陰 謂歷歷分別 明識相應 即是識陰 領納在心 即是受陰 心緣此理 即是想陰 行用此理 即是行陰 污穢眞性 即是色陰 此五陰者 舉體即是一念 此一念者 舉體全是五陰 歷歷見 此一念之中 無有主宰即人空慧 見如幻化即法空慧 是故須識此五念及六種料簡 願勿嫌之 如取眞金 明識瓦礫 及以僞寶 但盡除之 縱不識金 金體自現 何憂不得)
경문: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은 전신이 순조롭고 쾌적하여 홀연히 나의 몸을 잊었느니라. 사지의 기맥이 이완되고 섭양에 처방을 어긋나게 하여 침이나 뜸을 조금만 놓아도 바로 내가 있는 줄 아느니라. 이 때문에 비로소 아상의 체상이 드러남을 증지證知하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비유로 아상을 천명한 것이다. 이른바 중생은 일향 무명으로 용사하니, 아상이 있어서 저절로 그러하는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순조롭고 쾌적하면 몸을 잊는 것과 같다. 지금 관조하고 깊이 궁구함으로써 비로소 무명의 체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내 몸이 있는 줄을 아는 것과 같다. 마음을 관하고 취증取證하는 것은 바로 무명이고, 각성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비로소 아상의 체상이 드러남을 취증한다.”라고 한 것이다. 앞에서 부처님이 “무시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된다.”라고 천명하신 말씀은 바로 근본무명이 아상이 된다고 단적으로 가리킨 것이다. 어찌 추혹으로 간주하랴. 아래는 성지를 끝맺는 것이다.(此以喻明我相也 謂衆生向以無明用事 不知有我任運而已故 如人調適忘身 今以觀照研窮方顯無明之體故 如人針艾知有我身也 以觀心所取證者 乃是無明非覺性也 故云取證方現我體 前佛明言無始無明爲己主宰 乃的指根本無明爲我 豈可以麤惑目之耶 下結指)
해설: 감산스님은 경문의 증취證取를 취증取證으로 해석한 듯하다. 이 취증은 현대 법률용어의 뜻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경문: “선남자여, 그 마음으로 더 나아가 여래에 대하여 증지하고, 필경 청정열반을 요지할지라도 모두 아상이니라.”
감산직지: 이는 아상의 근본을 총결하여 가리킨 것이다. 그 뜻은 이른바 삼현이나 십성이 증지한 것도 아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여래의 구경열반에 대하여 증지할지라도, 만일 일념이라도 증성證性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면 바로 생상무명을 여전히 타파하지 못한 것이니, 바로 아상의 근본이다. 운문스님이 이르기를, “법신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변法身邊에 이를지라도 만일 법집이 잊히지 않으면 자기란 견해가 오히려 남아있으니, 또한 병이다.”라고 한 것이다.(此結指我相根本也 意謂不獨三賢十聖之所證者爲我 乃至證於如來究竟涅槃 若一念證性未忘 乃生相無明未破 正是我相根本 雲門云 法身亦有兩般病 得到法身邊 若法執不忘 己見猶存 亦是病)
해설: 운문스님의 법문이다. “또 법신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에 이르러도 법집이 잊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란 견해가 오히려 남아있어서 법신변에 떨어져 있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이고, 바로 명백할지라도 놓아버리면 또한 옳지 않다. 자세히 점검하고, 앞으로 무슨 기식이 있다면 또한 병이다.”(又法身亦有兩般病 得到法身爲法執不忘 己見猶存 墮在法身邊 是一 直饒透得放過卽不可 子細檢點 將來有什麽氣息 亦是病)
감산직지: 문: “삼승교 중에 설하기를, ‘구생아집俱生我執은 칠지에서 이미 타파되고, 그 팔지 이후는 바로 구생법집俱生法執이다. 이 법집을 타파하면 바로 묘각에 들어간다.’라고 한다. 이 경은 ‘등각후심等覺後心도 오히려 아상을 여전히 타파하지 못했다.’라고 하니, 어찌 서로 이와 같이 동떨어졌는가?”(問曰 三乘教中說 俱生我執七地已破 其八地後乃俱生法執 破此法執即入妙覺 今經等覺後心猶未破我相 何相懸若此耶)
답: 이 아집과 법집은 모두 하나의 아상에 속하니, 이른바 아상의 아집이고, 아상의 법집이다. 이 구생법집은 바로 아상이 집착한 법이기 때문에 법도 또한 아상이라 일컫는다. 이숙식이 아직 공적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증취를 준거하여 아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 경은 다른 경의 설법과는 동일하지 않는다. 사상이 모두 하나의 아상에 속하니, 이 때문에 “모두 아상이다.”라고 이른 것이다. 다음은 인상이다.(答曰 然我法二執總屬一我 謂我之我 我之法 然俱生法執正是我所執之法故 法亦名我 以異熟未空故 但約證取爲我耳 此經不同諸說 以四相總屬一我 故云皆是我相 次人相)
해설: 밀교에 제일아신第一我身이란 말은 있지만, 일아一我란 말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 하나의 아상이라 해석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이집二執이라 하고, 아집은 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으로 나뉘며, 법집도 구생법집과 분별법집으로 나뉜다. 또 구생아집과 구생법집을 구생혹俱生惑이라 한다. 이 구생은 어떤 하나가 생길 때 또 다른 하나가 따라오며 동시에 생긴다는 뜻이다. 동생여신同生女神과 동명남신同名男神을 구생신俱生神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양신은 사람이 태어날 때 동시에 태어나고, 양쪽 어깨에 앉아서 그 사람의 평생 선악을 기록한다고 한다.
5. 사상 중 둘째 인상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인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함을 오지悟知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있다는 것을 오지하면 나를 다시 인식하지 않으며, 오지해야 하는 것은 나가 아니고, 오지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미 일체 증지를 초과한 것을 오지해도 모두 인상이니라. 선남자여, 그 마음으로 더 나아가 열반을 원만히 오지해도 모두 아상인 것이다. 증지한 이회理會를 다 없애버려도, 마음에 조그마한 오지라도 남아있다면, 모두 인상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云何人相 謂諸衆生心悟證者 善男子 悟有我者不復認我 所悟非我悟亦如是 悟已超過一切證者 悉爲人相 善男子 其心乃至圓悟涅槃 俱是我者 備殫證理 心存少悟 皆名人相)
함허설의: 이른바 심존소오(心存少悟)와 비탄증리(備殫證理)란 이 양구는 아마도 도치된 듯하니, 응당 이르기를, “그 마음으로 더 나아가 열반을 원만히 오지해도 모두 아상인 것이다. 증지한 이회가 모두 다 없어져도 마음에 조그마한 오지라도 남아있다면 모두 인상이라 일컫느니라.”라는 것이다.(所謂心存少悟 備殫證理 此兩句恐倒置 應云“其心乃至圓悟涅槃俱是我者 備殫證理心存少悟皆名人相”)
증지에 대하여 여전히 잊히지 않고, 이미 그 증지가 허물인 줄을 오지했지만, 오지한 마음도 여전히 잊히지 않으니, 그 이름을 인상이라 한다. 더 나아가 여래의 열반에 대하여 증지해도 함께 아상인 것은 모두 그 증지가 허물인 줄을 오지한 것이다. 증지한 마음이 설령 다 없어질지라도, 오지하는 마음이 오히려 남아있다면, 또한 인상이라 일컫는다.(未忘於證 旣悟其非 悟心未忘 名爲人相 乃至證於如來涅槃 俱是我者 悉悟其非 證心雖盡 悟心猶存 則亦名人相)
해설: 위 경문은 함허스님의 수정본이고, 아래 경문은 원본 그대로이다.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인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함을 오지悟知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있다는 것을 오지하면 나를 다시 인식하지 않으며, 오지해야 하는 것은 나가 아니고, 오지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미 일체 증지를 초과한 것을 오지해도 모두 인상이니라.”
감산직지: 이는 인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앞 아상에서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한 것이 아상이다.”라고 하니, 곧 다시는 아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능히 오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인상이다. 대대하는 아상을 준거하니 인상이고, 타인이 아니다.(此示人相也 謂前所證者是我 則不復認我 若存我能悟之心 即爲人相 以約對我爲人 非他人也)
경문: “선남자여, 그 마음으로 더 나아가 열반을 원만히 오지해도 모두 아상인 것이다. 마음에 조그마한 오지라도 남아있다면 증지한 이회理會를 다 없애버려도 모두 인상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其心乃至圓悟涅槃 俱是我者 心存少悟 備殫證理 皆名人相)
감산직지: 이는 인상을 해석한 것이다. 이른바 설령 열반도 아상이라 스스로 증지하지 않음을 오지하니, 곧 능히 오지하는 이 마음을 모두 인상이라 일컫는다. 탄殫은 다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열반의 극진極盡한 도리도 아상인 줄을 분명히 오지해도, 만일 추호라도 남아있어서 오지하는 마음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면, 곧 인상이라 일컫는다.(此釋人相也 謂縱然悟得涅槃是我不自證取 即此能悟之心皆名人相 彈盡也 謂了悟涅槃極盡之理爲我 若存絲毫悟心未忘 即名人相)
6. 사상 중 셋째 중생상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중생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이 저절로 증지하고 오지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하기를, ‘나는 중생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중생이라 말한 것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줄 바로 아는 것과 같다. 어째서 나가 아닌가? ‘내가 중생이다.’라고 하면 곧 나가 아니다. 어째서 그도 아닌가? ‘내가 중생이다.’라고 하면 바로 그도 아니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단지 모든 중생이 분명히 증지하고 분명히 오지함이 모두 아상이고 인상일 따름이니라. 바로 아상과 인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요지하는 바가 남아있다면 중생상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云何衆生相 謂諸衆生心自證悟所不及者 善男子 譬如有人作如是言 我是衆生 則知彼人說衆生者非我非彼 云何非我 我是衆生則非是我 云何非彼 我是衆生 則非彼故 善男子 但諸衆生了證了悟皆爲我人 而我人相所不及者 存有所了名衆生相)
해설: 아상은 마음으로 증지하는 것이고, 인상은 마음으로 오지하는 것이며, 중생상은 마음으로 요지하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경문이 그러하다. 셋째 중생상이 요지하는 것인 줄을 어떻게 아는가? 마지막 글 때문이다. “바로 아상과 인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의 주어가 바로 중생상이다. 증지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아상이고, 오지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인상이며, 요지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중생상이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중생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이 저절로 증지하고 오지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謂諸衆生心自證悟所不及者)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오지함을 요지하는 것이니라.”(謂諸衆生 心了悟者)라고 할 수 있다. 증오료각證悟了覺이 여기서 완성된다.
함허설의: 또 “어째서 그도 아닌가? 내가 중생이면 그나 나도 아니기 때문이다.”(云何非彼 我是衆生 非彼我故)라는 구절의 비피非彼 앞에 아마도 즉則자가 빠진 듯하고, 또 피아彼我의 아我자는 연자衍字인지 의심스럽다. 응당 이르기를, “어째서 그도 아닌가? 내가 중생이면 곧 그도 아니기 때문이다.”(云何非彼 我是衆生 則非彼故)라고 해야 한다.(又云何非彼 我是衆生非彼我故 非彼之上恐闕則字 又彼我之我疑衍 應云 云何非彼 我是衆生 則非彼故)
증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오지하니, 바로 아상이 미치지 못하고, 오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요지하니, 곧 인상이 미치지 못하며, 요지하는 마음이 오히려 남아있다면 중생상이라 일컫는다.(悟證爲非而我不及 了悟爲非而人不及 了心猶存名衆生相)
해설: “인상은” 증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오지하니, 바로 아상이 미치지 못하고, “중생상은” 오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요지하니, 곧 인상이 미치지 못하며, “수명상은” 요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니, 이에 중생상이 미치지 못한다.
경문: “선남子여, 무엇이 중생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이 저절로 증지하고 오지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라.”
감산직지: 이는 중생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앞에 증지하고 오지하는 양쪽이 모두 허망한 줄을 각지하니, 바로 각지하는 마음을 중생상이라 일컫는다. 이 각지하는 마음은 증지하고 오지하는 마음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증지하고 오지하는 마음이 여읠 수 있음을 보기 때문에 중생상이라 일컫는다.(此示衆生相也 謂覺前證悟二皆是妄 即此覺了之心名衆生相 以此覺了之心非證悟之可及者 以見有證悟之可離故 名衆生相)
해설: 사상을 동사의 형태로 정리하면 증오료각證悟了覺이다. 이는 함허스님의 견해이다. 감산스님은 위 해설에서 요지를 쓰지 않고 각지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아래는 모두 각覺자를 쓰지 않고 요了자를 써서 해설하고 있다. 각료覺了는 각지覺知의 과거형이다. 번역함에 시제를 표현하면 글이 늘어지는 듯하다. 그냥 각지라 했다.
경문: “선남자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하기를, ‘나는 중생이다.’라고 하면, 곧 그 사람이 중생이라 말한 것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줄 아는 것과 같다. 어째서 나가 아닌가? ‘내가 중생이다.’라고 하면 곧 나가 아니다. 어째서 그도 아닌가? ‘내가 중생이다.’라고 하면 곧 그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산직지: 이는 중생상을 차용하여 천명한 것이다. 범부의 중생상은 바로 내가 감지하는 고통과 쾌락이 변전하며 상속함을 계탁하는 것이 중생상이다. 지금 성인은 단지 오지하고 증지함을 요지하고 능소를 다 잊어버릴 따름이다. 다만 능히 요지하고 마음이 남아있으면 중생상이 되는 것이니, 능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인의 그나 나라는 말을 차용하고, 비유로 이를 천명하니, 이른바 “내가 중생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것이다. 아래는 성지를 끝맺는 것이다.(此借明衆生相也 以凡夫之衆生相 乃計我所感苦樂變異相續爲衆生相 今聖人但以了悟證取 兩忘能所 只存能了之心爲衆生相 以不屬能所故 借世人彼此之語 以喻明之 謂言我是衆生故 非我非彼 下結指)
경문: “선남자여, 단지 모든 중생이 분명히 증지하고 분명히 오지함이 모두 아상이고 인상일 따름이니라. 바로 아상과 인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요지하는 바가 남아있다면 중생상이라 일컫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그 중생상을 바로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앞에 증지하고 오지하는 양쪽이 모두 미치지 못함을 요지했지만, 다만 이 요지하는 마음이 잊히지 않으면 중생상이라 할 뿐이다.(此正示其相 謂了前證悟二皆不及 只此了心不忘爲衆生相耳)
7. 사상 중 넷째 수명상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수명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고 요지한 바를 각지하는 것이니라. 일체 업지業智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명근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으니,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善男子 云何壽命相 謂諸衆生心照淸淨覺所了者 一切業智所不自見猶如命根 善男子 若心照見一切覺者 皆爲塵垢 覺所覺者不離塵故 如湯銷氷無別有氷知氷銷者 存我覺我亦復如是)
해설: 말미에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라는 구절은 “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다.”라는 구절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함허스님의 견해이기도 하다. “또한 그와 같다.”라는 말을 쓰고자 하면,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存我覺我)은 “내가 나를 각지함이 없는 것”(無我覺我)만 못하다.
경문의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은 수명상이 명백하다. 그런데 함허스님은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라는 구절로 수명상을 삼았다. 바로 경문의 존아각아(存我覺我)의 경계이다.
이 수명상의 경문은 함허스님의 견해를 따라 읽는 것이 옳은 듯하다. 존아각아(存我覺我)를 무아각아(無我覺我)로 읽는 것이 핵심이다. 만일 존아각아를 그대로 두고서도 읽을 수 있는가? 경문의 4개 단락 중에 둘째와 셋째 위치를 바꾸면 된다. 아래와 같다.
경문: ①“선남자여, 무엇이 수명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고 요지한 바를 각지하는 것이니라. 일체 업지業智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명근과 같으니라.” ③“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으니라.” ②“선남자여,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 ④“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함허설의: 또 수명상의 각소료(覺所了) 삼자의 아래에는 아마도 명수명상(名壽命相) 네 글자가 빠진 듯하다.(恐闕名壽命相四字) 위 3개 문단이 모두 이와 같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또 존아각아(存我覺我)도 또한 이와 같으니, 존아存我의 존存자는 무無자의 착오인지 의심스럽다. 응당 이르기를, “내가 나를 각지함이 없는 것도 또한 다시 그와 같다.”(無我覺我亦復如是)라고 해야, 위에서 이른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다.”라고 한 비유와 합치되기 때문이다. 또 여탕소빙(如湯銷氷)에서 역부여시(亦復如是)까지 이와 같은 등의 글은 응당 유여명근(猶如命根)의 아래에 있어야 하고, 바로 뒤에 선남자약심조견(善男子若心照見)에서 불리진고(不離塵故)까지 등의 글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은 결문結文에 상당하니, 응당 역부여시(亦復如是)의 뒤에 있어야 한다. 선두는 앞에 있는 것이니, 응당 아래와 같다.(又覺所了者之下 恐闕名壽命相四字 上三段皆有此例故也 又存我覺我亦復如是 存我之存疑無字之誤 應云無我覺我亦復如是 合上無別有氷知氷銷者之喩故也 又如湯銷氷 至亦復如是等文 當在猶如命根之下 却在於後 善男子若心照見至不離塵故等文 是當結文 當在亦復如是之後 先在於前 應云)
해설: “아마도 명수명상(名壽命相) 네 글자가 빠진 듯하다.”(恐闕名壽命相四字)라는 글은 전사하는 과정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아마도 선남자(善男子) 세 글자가 빠진 듯하다.”(恐闕善男子三字)라고 해야 옳다.
함허스님은 이 수명상의 문단에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선두는 앞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의 출처는 찾지 못했다. 그 뜻은 이러하다. 서론은 맨 앞에 있어야 옳고, 결론은 맨 뒤에 있어야 옳다. 그 차서를 바로잡은 글은 아래와 같다.
함허스님 수정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수명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고 요지한 바를 각지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일체 업지業智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명근과 같으니라. 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으니, 내가 나를 각지함이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수명상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云何壽命相 謂諸衆生心照淸淨覺所了者 善男子 一切業智所不自見猶如命根 如湯銷氷無別有氷知氷銷者 無我覺我亦復如是 善男子 若心照見一切覺者 皆爲塵垢 覺所覺者不離塵故 名壽命相)
함허설의: “선남자여, 무엇을 아상이라 하는가?”로부터 이 수명상에 이르기까지는 사상을 징석하고, 각 사상을 따라 그 이름으로 끝맺었다. 이미 이러하므로 바로 뒤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말세 중생이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면, 비록 많은 겁을 지나오며 부지런히 힘써서 도를 닦더라도, 단지 유위라 일컬을 따름이고, 마침내 일체 성과聖果를 성취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니, 그 문의가 서로 승접하고 조리가 분명함이 이와 같다. 독자는 의당 자세히 헤아려야 한다.(從善男子云何我相至此 徵釋四相 隨相結名 旣爾乃云 善男子 末世衆生不了四相 雖經多劫勤苦修道 但名有爲 終不能成一切聖果 其文義相承條理分明如此 讀者宜細詳焉)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면 요지가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고, 각지에 대하여도 여전히 잊지 못한다면 수명상이라 일컫는다.(心照淸淨 覺了爲非 於覺未忘 名壽命相)
일체 업지란 것은 무엇인가? 업은 진성과 대대이고, 지혜는 미혹과 대대이다. 이미 이러하다는 이연已然의 자취이니, 이를 일컬어 업이라 하고, 시비에 미혹하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지혜라 한다. 마음에 증지한 바가 있고, 증지한 마음이 여전히 잊히지 않으며, 증지가 허물인 줄을 오지하고, 오지도 또한 허물인 줄을 요지하며, 바로 전전하며 여전히 잊히지 않으니, 이는 이연의 자취이기 때문이다. 잊힌다는 것은 곧 한결같은 적멸이니, 바로 수순각성이다. 여전히 잊히지 않는 것은 바로 뒤섞여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것이니, 이연이 자취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업이라 한다. 증지에 대하여 여전히 잊지 못하고, 이미 그 증지가 허물인 줄을 오지하며, 오지에 대하여 여전히 잊지 못하고, 요지에 대하여도 여전히 잊지 못하며, 전전하며 그 요지가 허물인 줄을 오지하고, 시비에 미혹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을 지혜라 한다. 일체라 말한 것은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함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업지로 차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一切業智者 業與性對 智與惑對 已然之迹名之爲業 是非不惑名之爲智 心有所證 證心未忘 悟證爲非 了悟亦非 而轉轉未忘 此已然之迹也 忘則一向寂滅而隨順覺性 未忘則紛然散動 已然成迹故名爲業 未忘於證 旣悟其非 未忘於悟 未忘於了 轉悟其非 是非不惑故名爲智 言一切者 證悟了非一而業智成差故也)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명근과 같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면 요지가 허물인 줄을 각지하고, 일체 업지는 원각을 승접하면 갑자기 녹아버리며, 자취가 없이 저절로 다 없어지고, 다시는 능히 아는 마음이 없으며, 저절로 다 없어진 자취와 능히 다 없어지게 하는 원각을 반조하는 것이다. 오직 이 각심만이 명백하게 홀로 있을 따름이니, 오히려 명근과 같으며, 다시 둘째는 없다. 비유하면 얼음은 탕수로 인하여 다 없어진 것과 같다.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다.”라는 것은 오직 탕수만 홀로 있을 따름이고, 다시 둘째는 없다.(所不自見猶如命根者 心照淸淨覺了爲非 一切業智承覺頓銷 泯然自盡 更無能知之心 返照自盡之迹與能盡之覺也 唯此覺心了然獨存 猶如命根 更無第二也 譬如氷因湯盡 無別有氷知氷銷者 唯湯獨存而更無第二也)
“아상이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면 달리 아상이 없으니, 능히 아상에 대하여 각지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이는 바로 사상의 결문이다. 그러나 단지 아상만 거론한 것은 대체로 하나를 들면 바로 나머지도 아우르기 때문이다. 만일 전비全備하고자 하면 응당 이르기를, “아상이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면 달리 아상이 없으니, 능히 아상에 대하여 각지하는 것이고, 인상이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면 달리 인상이 없으니, 능히 인상에 대하여 각지하는 것이며, 중생상이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면 달리 중생상이 없으니, 능히 중생상에 대하여 각지하는 것이다. 오직 이 명근과 같은 각심만 명백하게 홀로 있을 따름이니, 또한 다시 이와 같다.”라고 한 것이다.(覺我爲非 無別有我 能覺於我 亦復如是 此乃四相結文 而但擧我者 蓋擧一而兼餘也 若欲備者 應云覺我爲非 無別有我 能覺於我 覺人爲非 無別有人 能覺於人 覺衆生爲非 無別有衆生 能覺於衆生 唯此如命根之覺心了然獨存 亦復如是)
위에서 아상과 인상 중생상에 대하여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한다고 배대하였지만, 이 수명상에 이르러서는 단지 각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하는 일체 업지는 원각을 승접하면 갑자기 녹아버리고, 녹아버리면 하나의 원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미 증지와 오지 요지가 허물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니, 바로 각 문단을 끝맺는 명칭이 상이고, 각지하는 마음도 능히 다 없어지는 곳에 돌아가면, 또한 각지하는 마음도 허물이 되는 것으로 결정하고자 하니, 바로 끝맺는 명칭이 상이다.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선남자여,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수명상이라 일컫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일체 각은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하는 일체 업지를 가리키는 것이다.(上於我人衆生以證悟了配之 到此但言覺者 證悟了一切業智 承覺頓銷 鎔成一覺故也 旣定證悟了之爲非 而結名爲相 歸於覺心之能盡 又欲定覺心之爲非 而結名爲相 而言曰 善男子 若心照見一切覺者 皆爲塵垢 覺所覺者不離塵故名壽命相 一切覺指證悟了一切業智也)
능각과 소각은 무엇인가? 능각은 이른바 비춰보는 것이고, 소각은 이른바 일체 각이다. 이른바 설령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하는 일체 각을 각지할지라도 모두 경계의 허물이다. 곧 이 각지하는 마음도 또한 경계의 허물이기 때문에 수명상이라 일컫는다. 아상과 인상 중생상 수명상이 또한 그 명칭이 상이고, 또한 그 명칭이 업이며, 또한 그 명칭이 지혜이니, 지혜는 곧 진성의 이칭이기 때문이고, 업도 바로 상의 이명이기 때문이다. 상과 업 그리고 지혜와 진성은 마치 안목이란 호칭과 같다. 진성이 일어나면 상이 되고, 이연은 업이라 일컬으니, 이연의 업이 바로 진성이 일어난 상이다.(覺所覺者 覺卽所謂照見也 所覺卽所謂一切覺也 謂雖覺證悟了一切覺 皆爲塵垢 卽此覺心還是塵垢故名壽命相 我人衆生壽命亦名爲相 亦名爲業 亦名爲智 智則性之殊稱也 業則相之異名也 相與業智與性 如眼目之稱也 性起爲相 已然名業 已然之業卽性起之相也)
조적照寂은 진성이 되고, 허명虛明은 지혜가 되니, 허명한 지혜가 바로 조적하는 진성이다. 아상에 대하여 증지한다 말하고, 인상에 대하여 오지한다 말하며, 중생상에 대하여 요지한다 말하고, 수명상에 대하여 각지한다 말한다. 무릇 증지하고 오지 요지 각지함에 대하여 전전하며 허물인 줄을 알지만, 그러나 여전히 정견情見을 잊어버리고 지해知解를 끊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을 업이라 하고, 또한 그 명칭을 상이라 한 것이다. 만일 낱낱이 정견을 잊어버리고 지해를 끊어버리면, 이른바 증지하고 오지 요지 각지하는 것이 당체가 허명하고, 대대가 끊어져 중연이 끊어진다. 오로지 그 이름이 지혜뿐이니 업이라 칭명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이름이 진성일 따름이니 상이라 칭명하지 않는다.(照寂爲性 虛明爲智 虛明之智卽照寂之性也 於我言證 於人言悟 於衆生言了 於壽命言覺 夫於證悟了覺 轉轉知非而未能忘情絶解故名爲業 亦名爲相 若一一忘情絶解 則所謂證悟了覺 當體虛明 絶待絶緣 但名爲智 不名爲業 但名爲性 不名爲相)
해설: 함허스님이 사상의 요체를 대하소설처럼 펼쳐놓았다. 중간에 해설할 만한 곳이 하나나 둘 있었지만, 도중 도도한 문세文勢에 허물이 될까 하여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한 구절만 해설할까 한다.
위 글에서 사상의 결문이라 하는 “아상이 허물이 되는 줄을 각지하면 달리 아상이 없으니, 능히 아상에 대하여 각지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覺我爲非 無別有我)라는 글은 경문에 없다. 다만 “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으니, 내가 나를 각지함이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如湯銷氷無別有氷知氷銷者 無我覺我亦復如是)라는 글에서 위 문구를 촬략撮略한 것이다. 바로 이 무아각아(無我覺我) 네 글자가 사상의 결문이고, 곧 결론이며, 바로 총결산이다. 아래는 감산스님의 해설이다.
경문: “선남자여, 무엇이 수명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청정을 비춰주고 요지한 바를 각지하는 것이니라. 일체 업지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명근과 같으니라.”
감산직지: 이는 수명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앞에 능히 요지하는 마음이 중생상이다. 지금 관지觀智로 더욱 밝게 비춰주어도, 이 요지하는 마음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청정한 각체뿐이니, 이른바 심원心源을 각지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 일컫는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경계와 지혜가 함께 없어지고, 일체가 모두 여의어진다. 이른바 마음을 여의지 않는 지혜로 여전히 적멸의 체상을 원조하니, 경계와 지혜가 일여하다. 마치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일체 업지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이른 것이다.(此示壽命相也 謂前能了之心爲衆生相 今觀智增明照 此了心亦不可得 唯一清淨覺體 所謂覺心源故名究竟覺 到此境智俱泯 一切俱離 謂以即心之智還照寂滅之體 境智一如 如眼不見眼 故云一切業知所不自見)
망심을 돌이켜 진심에 돌아가면 법신의 극칙처極則處에 이른다. 단지 적멸만을 단단히 지키고, 전위轉位하여 회기廻機하지 못하면, 이른바 “장대의 끝을 끌어안고 지키기만 하고, 사수死水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라는 것이니, 종문은 그 이름을 존귀타尊貴墮라 한다. 곧 이 존귀타처는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명근과 같으니 수명상이라 한다. 어록에 이르기를, “백척간두에 앉아있는 사람이 설령 틀림없이 들어가도 여전히 진경眞境은 아니다. 백척간두에서 거듭 나가야하니, 대천세계에 전신을 드러낸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묵좌하고 현미玄微만 지키고, 명근은 끊지 못한다. 앞에서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는 바로 열반상에 머무르는 것이다.(以返妄歸眞 至法身極則處 但守住寂滅 不能轉位迴機 所謂抱守竿頭靜沉死水 宗門名爲尊貴墮 即此墮處 不能超越故 猶如命根 爲壽命相 語云 百尺竿頭坐的人 雖然得入未爲眞 百尺竿頭重進步 大千世界現全身 故以坐守玄微 命根不斷 前云不住生死不住涅槃 此正住涅槃相耳)
해설: 존귀타尊貴墮는 조산본적 선사의 삼종타三種墮 중에 하나이다.
경문: “선남자여, 만일 마음으로 일체 각을 비춰보는 것은 모두 경계의 허물이니, 능각과 소각이 경계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마치 탕수가 얼음을 녹이면, 다른 어떤 얼음이 이전에 얼음이 녹은 탕수인 줄을 알 수 없음과 같으니,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감산직지: 이는 망심의 근원을 바로 제시한 것이다. 일체 각이란 앞의 세 가지 상相이다. 이른바 마음으로 청정한 원각을 비춰주니, 앞의 삼상이 모두 경계의 허물이다. 곧 이 각지하는 마음도 또한 여전히 경계를 여의지 못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망심을 비춰주면 망심이 바로 진심이다. 이 때문에 마치 탕수에 얼음을 녹이면 얼음이 바로 탕수인 것과 같다. 지금 “내가 나를 각지함이 남아있다.”라고 하면, 마치 얼음이 얼음을 아는 것과 같으니, 자기를 차견할 수 없다. 마치 스스로 명근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수자상이라 하는 이유이다. 아래는 아상이 법의 장애가 됨을 천명한 것이다.(此直示妄源也 一切覺者 前三相也 謂心照清淨覺 前三相皆爲塵垢 即此覺心亦未離塵 然以眞照妄妄即是眞 故如湯消氷氷即是湯 今存我覺我則如氷知氷 以不能自遣 如不自斷命 所以爲壽者相也 下明我爲法障)
해설: ‘일체 업지’와 ‘일체 각’은 무엇인가? 경문의 선후로 말하면 일체 업지를 먼저 설명해야 옳겠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일체 각이다. 감산스님은 “일체 각이란 앞의 세 가지 상相이다.”(一切覺者前三相也)라고 정의한다. 곧 아상과 인상 중생상이다. 함허스님은 “일체 각은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하는 일체 업지를 가리키는 것이다.”(一切覺指證悟了一切業智也)라고 하니, 그 범위는 동일하다.
감산스님은 일체 업지를 구경각으로 본 듯하다. 아래와 같다. “이른바 앞에 능히 요지하는 마음이 중생상이다. 지금 관지로 더욱 밝게 비춰주어도, 이 요지하는 마음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청정한 각체뿐이니, 이른바 심원을 각지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 일컫는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경계와 지혜가 함께 없어지고, 일체가 모두 여의어진다. 이른바 마음을 여의지 않는 지혜로 여전히 적멸의 체상을 원조하니, 경계와 지혜가 일여하다. 마치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일체 업지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이른 것이다.”
함허스님은 일체 업지를 일체 각과 동일하게 본 듯하다. 아래와 같다. “위에서 아상과 인상 중생상에 대하여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한다고 배대하였지만, 이 수명상에 이르러서는 단지 각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증지하고 오지하며 요지하는 일체 업지는 원각을 승접하면 갑자기 녹아버리고, 녹아버리면 하나의 원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무릇 증지하고 오지 요지 각지함에 대하여 전전하며 허물인 줄을 알지만, 그러나 여전히 정견을 잊어버리고 지해를 끊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을 업이라 하고, 또한 그 명칭을 상이라 한 것이다. 만일 낱낱이 정견을 잊어버리고 지해를 끊어버리면, 이른바 증지하고 오지 요지 각지하는 것이 당체가 허명하고, 대대가 끊어져 중연이 끊어진다. 오로지 그 이름이 지혜뿐이니 업이라 칭명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이름이 진성일 따름이니 상이라 칭명하지 않는다.”
위 글 중에 “만일 낱낱이 정견을 잊어버리고 지해를 끊어버리면, 이른바 증지하고 오지 요지 각지하는 것이 당체가 허명하고, 대대가 끊어져 중연이 끊어진다.”라는 구절을 백미로 본다.
8. 사상을 알지 못하면 성과와 해탈을 얻지 못한다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이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면, 비록 많은 겁을 지나오며 부지런히 힘써서 수도하더라도 단지 유위라 일컬을 따름이고, 마침내 일체 성과聖果를 성취할 수 없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일체를 실아實我라 인식하고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고, 또 증지하고 또 오지하며 성취했다고 일컫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도둑을 자식으로 여긴 것과 같으니, 그 집의 재보는 마침내 성전成全하지 못하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열반을 좋아하니, 나의 애근을 잠복시키고 열반상으로 삼느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생사를 싫어하니, 사랑하는 것이 진실로 생사인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 때문에 유별나게 생사를 미워하나니, 해탈하지 못한다고 일컫느니라.”(善男子 末世衆生不了四相 雖經多劫勤苦修道 但名有爲 終不能成一切聖果 何以故 認一切我爲涅槃故 有證有悟名成就故 譬如有人以賊爲子 其家財寶終不成就 何以故 有我愛者亦愛涅槃 伏我愛根爲涅槃相 有我憎者亦憎生死 不知愛者眞生死 故別憎生死 名不解脫)
함허설의: “이 때문에 그 이름을 정법말세라 한다.”(是故名爲正法末世)라는 글은 응당 아래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不堕邪見)라는 글의 뒤에 있어야 한다. “마침내 일체 성과를 성취할 수 없다.”(終不能成一切聖果)라는 구절은 “무엇 때문인가? 일체는 나를 열반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何以故 認一切我爲涅槃故)라는 글과 합쳐서 연결시켜야 한다.(是故等八字 當在下不墮邪見文後 終不能成一切聖果之句 合聯 何以故 認一切我爲涅槃之文也)
“유증애자(有憎我者)”의 증아(憎我) 두 글자는 응당 올리고 내려야 하니,(我憎) 위 유아애자(有我愛者)의 아애(我愛)와 대대하기 때문이다. “해탈하지 못한다.”(不解脫)라는 것은 아상은 안에서 단단히 붙잡고, 증애는 밖에서 도와 일으키니, 안팎에서 서로 도와 해탈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망, 선과 악, 성인과 범부, 고통과 쾌락을 막론하고, 다만 기뻐하거나 싫어하고, 취하거나 버리는 정견情見이 있기만 하면 곧 모두 증애이니, 바로 무명이 훈습하는 바이고, 아상이 구인하는 바이니, 곧 스스로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憎我二字當上下 與上我愛爲對故也 言不解脫者 我相堅執於內 憎愛資發於外 內外相資令不解脫也 不論眞妄善惡聖凡苦樂 但有欣厭取捨之情 則皆是憎愛 而無明所熏 我相所拘 而不能自脫者也)
해설: 함허스님의 견해에 따라 유증아자(有憎我者)를 유아증자(有我憎者)로 바꾸면, “나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생사를 싫어하고,”라는 구절이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생사를 싫어하고,”(有我憎者亦憎生死)라고 바뀔 것이다. 내가 객체가 되기도 하고, 또 주체가 되기도 한다. 후자가 전후와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논리 자체가 자명하고, 정연하다.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이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면, 비록 많은 겁을 지나오며 부지런히 힘써서 수도하더라도 단지 유위라 일컬을 따름이고, 마침내 일체 성과聖果를 성취할 수 없느니라. 이 때문에 그 이름을 정법말세라 하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아상이 도를 장애하는 근본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른바 “말세 중생이 만일 이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면, 설령 많은 겁을 지나오며 부지런히 힘써서 수도하더라도, 마침내 일체 성과를 성취할 수 없다.”라는 것은 아견에 집착하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정법말세는 이른바 말세 중생이 다행히 이 원교법문을 만나니 정법이라 할 만하다. 만일 뒤섞여 어지럽게 수습하거나 수행하지 않는 등의 연고로 행증行證이 없으니, 말법이라 하는 이유이다.(此明我爲障道之本也 謂末世衆生 若不了此四相 縱多劫勤苦 終不能成聖果 以執我見而修故也 正法末世謂末世衆生幸遇此圓教法門 可爲正法 若錯亂修習 與不修等故無行證 所以爲末法也)
서가여래의 교법 중에 정법 1천년은 교리행과敎理行果 사법四法이 모두 온전하고, 상법 1천년은 교리행敎理行 삼법은 있지만 과위를 증득한 이는 적으며, 말법 1만년은 단지 교리敎理 이법만 있을 뿐이고 행증은 없다. 지금 교리는 비록 있을지라도 도로무익徒勞無益한 이들이 많다. 아래에서 세 차례나 자문自問하고 세 차례 설명하셨다. 이는 오랫동안 수행해도 행증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인가?” 이는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수행해도 행증이 없는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아래에서 설명한다.(釋迦法中 正法一千年 教理行果四法皆全 像法一千年 有教理行而證果者少 末法一萬年 但有教理而無行證 今教理雖存 而徒勞無益者多矣 下有三徵三釋 此久修無證之義 何以故 此徵何故久修無證耶 下釋)
경문: “무엇 때문인가? 일체를 실아實我라 인식하고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고, 또 증지하고 또 오지하며 성취했다고 일컫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도둑을 자식으로 여긴 것과 같으니, 그 집의 재보는 마침내 성전成全하지 못하느니라.”
감산직지: 경의 뜻을 해석한다. 이른바 오랫동안 수행해도 증득하지 못하는 이유란 것은 “일체를 나라 인식하고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고,” 증지하고 오지해도 여전히 잊히지 않고, 조금 얻고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일체를 나라 인식한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무릇 수행하는 것 모두는 아견을 의지하고, 이 아견을 열반으로 여기기 때문에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둑을 아들로 여긴다.”라는 것은 마침내 성취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라는 것은 이는 “무엇 때문에 아상이 바로 도에 장애가 된다고 인식하는가?”라고 질문한 것이다.(釋義 謂所以久修不證者 以認一切我爲涅槃故 以證悟未忘 得少爲足故 言認一切我者 謂凡所修行皆依我見 將此我見以爲涅槃故 終不成就耳 認賊爲子 喻終不成就 何以故 此徵何故認我便妨於道耶)
경문: “무엇 때문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열반을 좋아하니, 나의 애근을 잠복시키고 열반상으로 삼느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생사를 싫어하니, 사랑하는 것이 진실로 생사인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 때문에 유별나게 생사를 미워하나니, 해탈하지 못한다고 일컫느니라.”
해설: 하단의 글이 아무리 해석해도 그 대의가 일맥상통하지를 않는다. 별別자를 ‘특별히’ 또는 ‘유별나게’라고 해석하니,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감산직지: 경의 뜻을 해석한다. 아상이 도를 장애한다고 인식하는 이유란 것은 아상을 애증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릇 나를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열반을 구하면 곧 열반은 단지 애근愛根을 자양할 뿐이니, 진실한 열반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나의 애근을 잠복시키고 열반상으로 삼는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진실한 열반은 아니다. 무릇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수순하지 않으면 반드시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으니 또한 생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증오심은 본래 애착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 애착이 진실로 생사의 근본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수행인은 자기의 애근을 끊을 줄을 알지 못하고, 바로 유별나게 생사를 싫어하기만 하니, 미혹이 심하도다. 이 때문에 해탈하지 못한다. 또 “아상이 도를 장애한다고 인식한다.”라는 것은 애착이 애착을 자양하기 때문이다.(釋義 所以認我妨道者 以我爲愛憎之根本故也 謂凡執我者必愛我 今以我愛者而求涅槃 則涅槃但資愛根 非眞涅槃也 故云伏我愛根爲涅槃相 故非眞也 凡不順我愛者必起憎心 以有憎我者 亦憎生死 然此憎心本從愛起 不知此愛眞生死本故 今修行人不知斷己愛根 而別憎生死 迷之甚也 故不解脫 然說認我妨道者 以愛資愛故也)
9. 자기의 미증을 청정한 원각으로 삼지 말라
경문: “어떻게 응당 법으로 해탈하지 못하는 줄을 아는가? 선남자여, 저 말세 중생은 보리를 수습하는 중생인데, 자기의 미미한 증득을 스스로 청정한 원각으로 여기니, 오히려 여전히 아상의 근본을 다 없애지 못하느니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그의 법을 칭찬하면 곧 환희심을 내어 문득 제도하고자 하고,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그가 얻은 법을 비방하면 갑자기 화를 내느니라. 아상을 견고하게 호지하여 장식에 잠복시키고, 육근에 유희하며 일찍이 끊어질 사이가 없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저 수도인은 아상을 제거하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을 것이 없고,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상과 수명상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云何當知法不解脫 善男子 彼末世衆生習菩提者 以己微證爲自清淨 猶未能盡我相根本 若復有人讚歎彼法 即生歡喜便欲濟度 若復誹謗彼所得者便生瞋恨 則知我相堅固執持潛伏藏識 遊戲諸根曾不間斷 善男子 彼修道者不除我相 是故不能入清淨覺 善男子 若知我空無毀我者 有我說法我未斷故 衆生壽命亦復如是)
함허설의: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는 것이 없다”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양구의 글은 서로 거들어준다. 만일 글을 완전하게 하려면 마땅히 이르기를,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는 것이 없고, 나를 헐뜯는 것이 있으면 여전히 아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아상을 끊으면 내가 법을 설함이 없고,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전문은 곧 전구만 들고 후구는 남겨두며, 후문은 후구만 들고 전구는 남겨두니, 이것이 서로 거들어준(互擧) 것이다. 바로 역자譯者의 영략影略이 교묘巧妙하다.(若知我空無毁我者 有我說法我未斷故 此兩句文有互擧也 若令備者應云 若知我空無毁我者 有毁我者我未空故 若斷我相無我說法 有我說法我未斷故 今先則擧前而遺後 後則擧後而遺前 此所以互擧也 乃譯者影略之巧也)
해설: 영략影略은 영략호현影略互顯의 줄임말이다. 호거互擧는 호현互顯과 같다. 이를 분별하면, 호거는 원인이고, 호현은 결과이다. 두 가지 유관한 일을 설명할 때 이쪽에서 생략한 부분을 저쪽을 의거하여 드러내고, 저쪽에서 생략한 부분을 이쪽을 말미암아 설명하니, 이와 같이 서로 보충하며 완전을 이루는 설명방식을 일컬어 영략호현이라 한다.
예컨대 유마경 제자품 중에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다.”(斷煩惱 入涅槃)라는 구절이 있다. 이 전구에 원래 후구를 보완하면, “번뇌를 끊고 보리를 얻는다.”(斷煩惱 得菩提)라고 하고, 후구에 본래 전구를 보완하면, “생사를 여의고 열반에 들어간다”(離生死 入涅槃) 라고 한다. 곧 번뇌에 대대하는 보리와, 열반에 대대하는 생사를 호거 또는 호현하여 그 영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략影略은 그림자처럼 생략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찾아서 읽어내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장문을 단문으로 축소하거나, 또는 경의 한 장을 몇 수의 게송으로 축약할 때 이 영략의 기법을 많이 쓴다. 그래서 난해하고, 말세중생을 더욱 미궁에 빠지게 한다. 1천7백 공안도 또한 영략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영략에 자재하면, 6백부 반야경을 반야심경 단권으로 축소할 수 있고, 단권을 6백부로 확장할 수도 있다. 이 영략의 결정판은 일미진이다. 설의의 영략에 대한 해설은 아래와 같다.
“이는 전문은 곧 전구만 들고 후구는 남겨두며, 후문은 후구만 들고 전구는 남겨두니, 이것이 서로 거들어준(互擧) 것이다.”
전문;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는 것이 없다.(①若知我空 ②無毁我者) ~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는 것이 없고,(①若知我空 ②無毁我者) 나를 헐뜯는 것이 있으면 여전히 아공이 아니기 때문이다.(③有毁我者 ④我未空故) 이 후구는 아래 후문의 후구를 의거하여 보완한 것이다.
후문;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③有我說法 ④我未斷故) ~ 만일 아상을 끊으면 내가 법을 설함이 없고,(①若斷我相 ②無我說法)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③有我說法 ④我未斷故) 이 전구는 위 전문의 전구를 의거하여 보완한 것이다.
경문: “어째서 응당 법으로 해탈하지 못하는 줄을 아는가?”(云何當知法不解脫)
해설: 규봉스님은 대방광원각경대소에서 “법이란 열반이다.”라고 주석했다. 이 법은 바로 위에 있는 경문을 이어받은 것이다. 곧 “무엇 때문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열반을 좋아하니, 나의 애근을 잠복시키고 열반상으로 삼느니라.”(有我愛者亦愛涅槃 伏我愛根爲涅槃相) 내가 좋아하는 열반은 “나의 애근을 잠복시키고 열반상으로 삼는” 바로 그 열반이다. 이 열반 곧 그 법으로 어찌 해탈할 수 있으랴.
감산직지: 이는 질문이다. “어째서 응당 열반을 좋아하는 것이 근본 해탈법인 줄만 알고, 어찌 되돌아가 해탈하지는 못하느냐?”(此徵 云何當知愛涅槃者本解脫法 何以返不解脫耶)
경문: “선남자여, 저 말세 중생은 보리를 수습修習하는 중생인데, 자기의 미미한 증득을 스스로 청정한 원각으로 여기니, 오히려 여전히 아상의 근본을 다 없애지 못하느니라.”
감산직지: 경의 뜻을 설명한다. 열반법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이유란 것은 나를 집착하여 구하고, 미미한 증득을 취하며, 문득 스스로 이를 청정한 원각으로 여기고, 조금 얻고서 만족하는 것이니, 여전히 아상의 근본을 다 없애지 못하며, 이 때문에 해탈하지 못한다. 아래는 경험으로 해탈하지 못한 곳을 아는 것이다.(釋義 所以於涅槃法不解脫者 以執我而求 以取微證 便自以爲清淨 得少爲足 未盡我相根本 故不解脫耳 下以境驗知不解脫處)
경문: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그의 법을 칭찬하면 곧 환희심을 내어 문득 제도하고자 하고,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그가 얻은 법을 비방하면 갑자기 화를 내느니라. 아상을 견고하게 호지하여 장식에 잠복시키고, 육근에 유희하며 일찍이 끊어질 사이가 없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위순違順의 두 경계로 아상이 여전히 잊히지 않았는가를 징험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미 열반법을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그의 법을 찬탄하면 곧 환희심을 내고, 그의 법을 비방하면 바로 성내고 원망한다. 그러나 열반은 바로 공법空法이다. 어찌 희로애락이 그 사이에 있으랴. 지금 찬탄과 비방을 듣고 기뻐하거나 성내면, 바로 이 희로애락은 아상을 근거한 것이고, 열반이 아니다. 이 징험으로 그 사람은 아상이 견고하게 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자가 장식에 잠복하고, 경계를 만나 격발하여 현행하면 곧 육근에 유희하니, 일찍이 끊어질 사이가 없다. 이로써 구도한다면 어떻게 해탈을 얻으랴.(此以違順二境 以驗我相未忘也 言修行人自謂已得涅槃法矣 假若有人 讚嘆彼法則生歡喜 誹謗彼法則生嗔恨 然涅槃乃空法也 何有喜怒於其間 今聞讚誹而生喜怒 即此喜怒本於我相 非涅槃也 以此驗知其人我相堅固執持 以此種子潛伏藏識 遇境擊發現行 則遊戲諸根 曾不間斷 以此求道 云何而得解脫耶)
경문: “선남자여, 저 수도인은 아상을 제거하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나를 집착하고 구도하는 허물을 총결산한 것이다. 아래는 병의 근원을 뒤집어 드러낸 것이다.(此總結執我求道之過也 下翻顯病源)
경문: “선남자여, 만일 아공을 알면 나를 헐뜯는 것이 없고, 내가 법을 설함이 있으면 아상은 여전히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상과 수명상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해설: 위에서 함허스님이 인용한 영략호거의 경문이다. 은현이 자재하다.
감산직지: 이는 법으로 병을 징험하고, 아상이 여전히 잊히지 않았음을 뒤집어 드러낸 것이다. 이 열반은 바로 공법이다. 만일 열반을 증득하면 바로 아상도 반드시 공적하다. 아상이 만일 공적하면 어찌 찬탄과 폄훼가 있으랴. 지금 그 법을 찬탄하고 폄훼하여 기뻐하거나 성낸다면, 바로 아상이 여저히 끊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아상이 여전히 끊이지 않으면, 바로 인상과 중생상 수명상의 사상이 확실히 다 있는 것이 이와 같다. 바로 중생의 병근病根이니, 또 어찌 열반을 증득했다고 하겠느냐. 아래는 바로 병의 근원을 보인 것이다.(此以法驗病 翻顯我相未忘也 然涅槃乃空法也 若果證涅槃 則我相必空 我相若空 則何有讚毀哉 今因讚毀其法 而生喜怒 正是我相未斷 若我相未斷 則人及衆生壽命四相 居然全在如此 正是衆生病根 又豈可爲得涅槃耶 下正示病源)
10. 여래의 해행을 자기 수행으로 삼지 말라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병을 법이라 설하나니, 이 때문에 이름을 가련한 중생이라 하느니라. 비록 부지런히 정진해도 온갖 병만 더욱 늘어나느니라.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고, 여래의 견해와 수행한 곳으로 자기의 수행을 삼나니,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느니라. 어떤 중생은 얻지 못하고 얻었다 하고,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 하며, 수승하게 정진하는 이를 보면 마음으로 질투하느니라. 이로 인하여 중생은 여전히 아애我愛를 끊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善男子 末世衆生說病爲法 是故名爲可憐愍者 雖勤精進增益諸病 是故不能入淸淨覺 善男子 末世衆生不了四相 以如來解及所行處爲自修行 終不成就 或有衆生 未得謂得 未證謂證 見勝進者心生嫉妬 由彼衆生未斷我愛 是故不能入淸淨覺)
해설: “말세 중생은 병을 법이라 설한다.” 그리고 “말세 중생은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고, 여래의 견해와 수행한 곳으로 자기의 수행을 삼는다.” 이 양구는 같은 말이다. 이 때문에 제명으로 삼았다. 보각보살장 중에 “선남자여, 저 선지식이 증득한 묘법은 응당 네 가지 병을 여의어야 하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 병인가? 첫째 작병이니라.”(善男子 彼善知識所證妙法 應離四病 云何四病 一者作病) 선지식 보살도 또한 병이 있다. 그러나 모든 병 가운데 첫째는 본기무명의 최초일념이고, 아상이다.
함허설의: 정제업장보살장의 처음부터 여기까지는 아견의 허물을 깊이 밝혔고, 거듭하여 원각을 장애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아래는 비로소 혹장惑障을 남음이 없이 끊어버리는 묘방을 천명한 것이다.(自章初至此 深明我見之垢 重重以障覺言之 此下方明斷盡惑障之妙方也)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병을 법이라 설하나니, 이 때문에 이름을 가련한 중생이라 하느니라. 비록 부지런히 정진해도 온갖 병만 더욱 늘어나느니라.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병의 근원을 바로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말세 수행인은 여전히 아상을 끊지 못하니, 나를 법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설한다는 것은 바로 그 아상의 병을 설하는 것이고, 열반의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병을 법이라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고로 “비록 부지런히 정진해도 단지 온갖 병만 더욱 늘어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름을 가련한 중생이라 한다.”라는 글의 아래는 병에 집착한 허물을 제시한 것이다.(此正示病源也 謂末世修行之人 未斷我相 以認我爲法故 所說者乃說其我相之病 非說涅槃之法也 故云說病爲法 以此之故 雖精進修行但增益諸病 故不能入清淨覺耳 是故名爲可憐愍者下示執病之過)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고, 여래의 견해와 수행한 곳으로 자기의 수행을 삼나니,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병을 법이라 집착하는 허물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수행하는 중생이 사상을 요지하지 못하고, 단지 여래의 해행을 되돌려 자기 소유로 여기니, 자기가 친히 증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침내 성취하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此示執病爲法之過也 謂修行之人不了四相 但以如來解行迴爲己有 非己親證故 終不成就)
경문: “어떤 중생은 얻지 못하고 얻었다 하고,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 하며, 수승하게 정진하는 중생을 보면 마음으로 질투하느니라. 이로 인하여 중생은 여전히 아애我愛를 끊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병에 집착하는 허물로 반드시 증상만인에 떨어짐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는 얻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지만, 스스로 얻었고 깨달았다 말하고, 조금 얻고서 만족하니, 이 때문에 증상만이라 한다. 바로 아애를 여전히 끊지 못한 것이니, 어찌 이 열반을 알랴. 단지 수승하게 정진하는 중생을 보면 마음으로 질투한다. 그러나 이 질투하는 마음은 아애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중생은 여전히 아애를 끊지 못한 사람인 줄을 안다. “이 때문에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시니, 이는 진실로 아애가 병의 근원이라 말한 것이다. 아래는 심방尋訪의 허물을 경계한 것이다.(此示執病之過必墮增上慢人也 其實未得未證 而自謂爲證得 得少爲足 故爲增上慢 乃是我愛未斷者 何以知之 但於見勝進者心生嫉妬 然此嫉妬之心發於我愛 故知此人乃未斷我愛者 是故不能入清淨覺 此甚言我愛爲病根也 下誡訪過)
해설: 아래 “오직 다문만 더하여 아견만 늘어나게 한다.”(惟益多聞增長我見)라는 경문 중에 다문의 병폐를 일러 “아래는 심방尋訪의 허물을 경계한 것이다.”(下誡訪過)라고 표현했다. 이곳저곳 선지식을 심방하며 즐겨 묻기만 하고, 실참실수實參實修하지 않는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11. 용맹심을 일으켜 번뇌를 항복시키라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성도成道를 희망하지만, 오도悟道를 구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다문만 더하여 아견만 늘어나게 하느니라. 단지 응당 정근하여 번뇌를 항복시키고, 대용맹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며, 끊지 못한 것을 끊게 하라. 탐욕과 진에 애욕 아만이나 첨곡과 질투도 경계를 대하면 생기지 않고, 피아의 은애恩愛 등 일체가 적멸하면, 모든 부처님은 ‘이 사람은 점차 성취하리라.’라고 설하시니라. 선지식을 구하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이 때문에 이름을 정법말세라 하느니라.”(善男子 末世衆生希望成道 無令求悟 惟益多聞增長我見 但當精勤降伏煩惱 起大勇猛未得令得未斷令斷 貪瞋愛慢諂曲嫉妬對境不生 彼我恩愛一切寂滅 佛說是人漸次成就 求善知識不墮邪見 是故名爲正法末世)
함허설의: 상문에 “끝내 일체 성과를 성취할 수 없다.”(終不能成一切聖果) 다음에 “이 때문에 이름을 정법말세라 한다.”(是故名爲正法末世)라는 문구는 마땅히 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不墮邪見)라는 구절의 아래에 있어야 하니, 착오가 거기에 있다. 이른바 정법말세란 말이 거기에 있으면 마치 안중착설眼中着屑과 같고,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금상첨화錦上添花와 같다. 응당 이르기를, “선지식을 구하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름을 정법말세라 한다.”라고 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정법이란 정법이 유행하는 때이고, 말세란 사법이 치성하는 때이다. 비록 정법시대일지라도 만일 사견에 떨어지면 곧 그 이름이 말세정법이고, 설령 말세일지라도 사견에 떨어지지 않으면 바로 그 이름이 정법말세이다. 말세 중생이 스스로 오도를 구하지 않고, 오직 다문만 구하여 아견만 늘어나게 하면 곧 사견에 떨어진 중생이다. 긍지나 태만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선지식을 구하여 그가 닦은 법행을 의지하며, 용맹정근하여 탐욕과 진에가 생기지 않고 은애恩愛에도 적멸하면, 바로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 중생이다. 이 때문에 그 이름을 정법말세라 하니, 이는 점차 성취한다고 하는 이유인 것이다.(上文終不能成一切聖果之後 是故名爲正法末世之句 當在此不墮邪見之下 誤在於彼 所謂正法末世之言 在彼則如眼中着屑 在此則猶錦上添花 應云求善知識不墮邪見 是故名爲正法末世 何則 正法 正法流行之時也 末世 邪法熾盛之時也 雖是正法之代 若墮邪見 則名爲末世正法 雖是末世 不墮邪見則名爲正法末世 末世衆生不求自悟 唯求多聞增長我見 則是墮邪見者也 蠲矜怠慢 求善知識 依彼所作 精勤勇猛 貪瞋不生 恩愛寂滅 則是不墮邪見者也 是故名爲正法末世 此所以漸次成就者也)
선지식을 찾아가 용맹정근하면 곧 다문이나 아상을 증장하는 허물을 이미 여읜 것이다. 그러나 선지식을 찾아가는 곳에서 유달리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또한 아견이 장애가 됨을 면할 수 없으니, 바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 위에서 내려오며 말하기를, “들어갈 수 없다, 이룰 수 없다, 성취할 수 없다,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모두 아니불不자를 9개나 내려놓았지만, “점차 성취하리라,”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정제업장보살은 한 차례 미혹하여 청정각심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은 아상이 도를 장애하는 허물이 되는 것이 이와 같음을 거듭하여 드러냈지만, 성취한다고 말한 것은 겨우 하나뿐이고, 다시 점차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아상이 도를 장애하는 허물이 심하고, 또한 이 허물을 버리기도 어렵구나. 또한 원각의 바다는 용맹정근하고 아상을 남음이 없이 끊지 않으면 바로 들어갈 수 없음을 보이신 것이다.(求善知識 精勤勇猛 則已離多聞增我之過矣 然於所求善知識處別生憎愛 則亦未免爲我見之所障 而不能入覺也 上來言不能入不能成不能成就不解脫 凡下不字者九 漸次成就者一 菩薩一問迷悶不入之所以 佛重重顯我相障道過患之如此 言成就者纔一而復云漸次 於斯可見 我相障道過患之爲甚 而去之之難也 亦見覺海 非精勤勇猛斷盡我相 則不能得入也)
해설: 소작所作을 번역하기 어렵다. 위에서는 “선지식을 구하여 그가 닦은 법행을 의지한다.”(求善知識 依彼所作)라고 해석했다. 이는 미륵보살장에 “선지식을 만나서 그가 닦은 인지법행을 의지한다.”(逢善知識 依彼所作因地法行)라는 구절을 참고한 것이다.
경문: “선남자여, 말세 중생은 성도成道를 희망하지만, 오도悟道를 구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다문만 더하여 아견만 늘어나게 하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방과防過를 깊이 경계한 것이다. 이른바 위에서 병을 법이라 집착하는 사람이 사상을 여전히 제거하지 못한 이유란 다만 마음을 깨닫기를 기다리는 한 가지 일이 병의 근원이 될 뿐이다. 만일 대오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경의 전교典教를 널리 구하여 유사한 말들로 우기고, 되돌려 자기의 견해로 삼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다문을 더욱 늘리고 아견만 증장시킬 뿐이니, 진실한 수행은 아니다. 말법시대 도에 뜻을 둔 수행인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此深誡防過也 謂上執病爲法之人 所以四相未除者 秪是將心待悟一事爲病根耳 苟有待悟之心 則必廣求經教 執相似語 迴爲己解故 此但只增益多聞 增長我見非眞修也 末法志道之士 可不懼哉)
경문: “단지 응당 정근하여 번뇌를 항복시키고, 대용맹을 일으켜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며, 끊지 못한 것을 끊게 하라. 탐욕과 진에 애욕 아만이나 첨곡과 질투도 경계를 대하면 생기지 않고, 피아의 은혜 등 일체가 적멸하면, 모든 부처님은 ‘이 사람은 점차 성취하리라.’라고 설하시니라. 선지식을 구하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진수眞修를 권하는 것이다. 진수하는 수행인은 마음을 깨닫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또한 널리 다문을 구할 필요도 없다. 단지 응당 번뇌를 항복시키는 일을 첫째 도행道行으로 삼고, 또한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 여전히 얻지 못한 그 열반을 반드시 득지得志하고, 여전히 끊지 못한 그 번뇌를 결단코 끊어야 한다. 단지 경계를 겪으며 마음을 시험하라. “만일 탐욕 진에 애욕 교만 등의 일체 번뇌가 경계를 대하면 과연 생기지 않는가?” “피아의 은애에 이르러도 과연 일절 적멸한가?” 이와 같이 스스로 시험하고, 그 마음이 바로 한결같아야 한다.(此勸眞修也 眞修之士不必將心待悟 亦不必廣求多聞 只當降伏煩惱爲第一行 亦不可得少爲足 其未得涅槃必志得之 其於未斷煩惱決欲斷之 但歷境驗心 若貪嗔愛慢一切煩惱對境 果然不生否 至若彼我恩愛 果然一切寂滅否 如此自驗 其心即如)
고덕이 이르기를, “도를 배움에 마음을 깨닫기를 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일체번뇌의 경계 위에서 명백하면 이것이 바로 깨닫는 곳이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이 사람은 점차 성취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설령 이와 같을지라도 다시 선지식을 찾아가 결택해야 하며, 정사正邪에 분명하면 또한 사견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수행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상응이 있을 뿐이다. 학자는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古德云 學道不必將心求悟 但於一切煩惱境界上透得過 便是悟處 故佛說此人漸次可以成就 雖然如是 更要求善知識決擇 邪正分明亦不墮於邪見 如此修行方有少分相應耳 學者可不勉哉)
경문: “만일 구하는 곳에서 따로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바로 청정한 원각의 바다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감산직지: 이는 거듭 진수를 권면勸勉하고, 허물을 여읠 수 있게 경계하신 것이다. 이른바 반드시 위에서 설한 바와 같으면 바로 진수이다. 만일 이를 버리는 것 밖에 달리 흔염이나 취사 증애 등의 마음을 일으키면 필경 청정한 원각에 들어갈 수 없다.(此重勉眞修 誡令離過也 謂必如上所說乃是眞修 若捨此外別起欣厭取捨憎愛之心 則畢竟不能入清淨覺矣)
12. 게송
경문: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을 읊으셨다.(爾時世尊 欲重宣此義而說偈言)
정제업장보살은 응당 알지니라.
일체 모든 중생은
다 아애를 집착하기 때문에
무시이래 무턱대고 유전하느니라.
淨業汝當知 一切諸衆生 皆由執我愛 無始妄流轉
여전히 사상을 제거하지 못하여
보리를 성취할 수 없었느니라.
마음에서 사랑과 미움이 생기니,
첨곡이나 모든 상념이 있느니라.
未除四種相 不得成菩提 愛憎生於心 諂曲存諸念
이 때문에 미혹이 많으니까,
원각의 성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만일 정각세계에 돌아가려고 하면
먼저 탐진치를 제거해야 하느니라.
是故多迷悶 不能入覺城 若能歸悟刹 先去貪瞋癡
법애가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으면,
점차 이루어 낼 수 있느니라.
나의 몸은 본래 있지 않는데,
미움과 사랑인들 어떤 연유로 생기랴.
法愛不存心 漸次可成就 我身本不有 憎愛何由生
이러한 사람이 선지식을 구하면,
마침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구하고자 유달리 마음을 내면,
구경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니라.
此人求善友 終不墮邪見 所求別生心 究竟非成就
함허설의: 아상을 집착함으로 인하여 미혹하고 원각에 들어가지 못한다. 깨닫고 법애가 없으면 점차 성취할 수 있다. 선지식에 대하여 다시는 정견을 내지 말라. 바로 구경에 정각을 성취할 수 있다.(由執我相迷不入覺 悟無法愛漸得成就 於善知識更不生情 乃能究竟成就正覺)
감산직지: 성은 열반을 비유하니, 이른바 이 열반은 마왕이나 외도가 침입할 수 없다. 만덕이 모인 곳이고, 중성衆聖이 돌아가는 곳이며, 만행이 들어가는 곳이니, 이 때문에 성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찰刹은 바로 세계의 총칭이고, 또한 열반에 비유한 것이다. 마음으로 열반을 좋아하기 때문에 법애法愛라 이른 것이다. 나머지 게송은 알 만하다.(城喻涅槃 謂此涅槃魔外不能侵 萬德之所聚 衆聖之所歸 萬行之所入 故喻如城 刹乃世界之都稱 亦取喻涅槃 心愛涅槃故云法愛 餘頌可知)
13. 결어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세간은 배우고, 이해하며, 반복하여 익히는 것이다. 출세간은 문혜聞解로 신입信入하고, 무사無思로 계동契同하는 것이다. 신문信門에 들어가는 첫걸음은 정념이다. 원각경의 수습修習도 또한 그러하다.
“선남자여, 저 신학보살과 말세중생이 여래의 청정한 원각묘심을 구하고자 하면, 응당 정념으로 모든 환화를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먼저 여래의 사마타 정행靜行을 의지하되, 굳게 금계를 지키고, 대중처소에 편안하게 거처하며, 정실에서 연좌하라.”(善男子 彼新學菩薩及末世衆生 欲求如來淨圓覺心 應當正念遠離諸幻 先依如來奢摩他行 堅持禁戒安處徒衆宴坐靜室)
보안보살장의 이 정념은 현성에 상당하고, 말세중생 곧 범부의 분수 밖이다. 그러나 불교의 일체용어는 양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이 정념이 그러하다. 범부의 정념이 있고, 현성의 정념이 있다. 이 정념은 범부중생의 분수 밖이지만, 또한 범부중생에 상당하기도 한다. 이 정념이 없으면 수습의 첫걸음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정념正念을 파자하면 일지금심一止今心이다. 일지一止는 삼마타이고, 금심今心은 지금 마음이니 일념이다. 일체 망상이 그치고 지금 현전하는 일념을 정념이라 한다.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로지 알아차림이 더딤을 염려할 따름이다.”(不怕念起 唯恐覺遲) 삼매가 없는 생각은 모두 망상이다. 그러나 일념이 앞에 있으면 바로 일체 망상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이 순간에 일체 망상이 그친다. 이것이 범부의 정념이다. 불교의 일체 수습은 언제나 이 정념과 함께 한다. 정제업장보살장의 사상도 또한 정념을 확인하는 방편이다.
“무엇이 아상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의 마음으로 증지證知한 것이다.”
무엇을 증지하는가? 본기무명의 최초일념을 증지한다. 이것이 아상이다.
이 증지가 아상이 되는 데는 단서但書가 있다. “증지한 마음에 머무른다.” 이는 절대조건이다. 증지한 마음에 머무르면 아상이고, 오지한 마음에 머무르면 인상이며, 요지한 마음에 머무르면 중생상이고, 각지한 마음에 머무르면 수명상이다.
만일 머무르지 않으면 어떠한가? 증오료각證悟了覺이 모두 본기청정의 최초일념이 되니, 바로 청정각상을 원조하는 것이다. 증오료각이 본기무명의 사상이 될 수도 있고, 본기청정의 원각묘심이 될 수도 있다.
이 증오료각은 단 하나도 안다는 지知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증오료각에 지자를 덧붙여 증지 오지 요지 각지라 한 것이다. 수남선지식은 일찍이 이를 알고, “안다는 한 글자는 중묘의 문이다.”(知之一字衆妙之門)라고 갈파한 것이다.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도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方成佛道) 이 원조도 또한 안다는 한마디를 벗어나지 않는다.
후대에 이르러 “안다는 한 글자는 중화(衆禍)의 문이다.”(知之一字衆禍之門)라고 하고, 또 “알지 못한다는 한마디는 중묘의 문이다.”(不知一字衆妙之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십보백보이다. 일미와 무미, 일상과 무상, 일념과 무념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없다.
본기무명은 본기청정과 짝을 이루고, 사상四相은 사무상四無相과 짝을 이룬다. 잊히지 않으면 사상이고, 잊히면 사무상이다. 여기에 이르러 차별이 있는가? 주먹을 펴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바닥과 등은 차별이 있지만, 손은 평등하다.
2022년 6월 10일 74세 길상묘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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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삼마타송은 아래와 같다.
또 말한다. 난상亂想이 곧 병이고 무기도 또한 병이며, 적적이 바로 약이고 성성도 또한 약이다. 적적은 난상을 일깨워주고 성성은 무기를 다스리며, 적적은 무기를 일으키고 성성은 난상을 일으킨다. 적적이 비록 난상을 다스릴 수 있지만 다시 무기를 환생시키고, 성성이 비록 무기를 다스릴 수 있지만 다시 난상을 환생시킨다. 이 때문에 “성성 적적은 옳지만 무기 적적은 그르며, 적적 성성은 옳지만 난상 성성은 그르다.”라는 것이다. 적적은 조연助緣이고 성성은 정인正因인 줄을 사유하라. 거듭 요간料簡한 이후에 반드시 일념의 가운데 오음을 명백히 알아야 하니, 이른바 역력하게 분별하라. 명식明識이 상응하면 곧 식음이고, 마음에 받아들이면 바로 수음이며, 마음이 이 도리를 반연하면 곧 상음이고, 이 도리를 널리 쓰면 바로 행음이며, 진성을 더럽히면 곧 색음이다. 이 오음이란 그 전체가 곧 일념이고, 이 일념이란 그 전체가 완전히 오음이다. 명백히 보라. 이 일념 중에 주재가 없으니 곧 인공의 지혜이고, 환화와 같은 줄을 보니 바로 법공의 지혜이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 다섯 가지 생각과 여섯 가지 요간을 알아야 하니, 원컨대 이를 싫어하지 말지니라. 마치 진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으니, 기와 조각이나 벽돌 부스러기 그리고 가짜 보배를 분명히 알고, 단지 남음이 없이 없애버리기만 하면 그 뿐이다. 설령 진금을 알지 못해도 진금 자체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니, 어찌 얻지 못할까 근심하랴.(又曰 亂想是病 無記亦病 寂寂是藥 惺惺亦藥 寂寂破亂想 惺惺治無記 寂寂生無記 惺惺生亂想 寂寂雖能治亂想 而復還生無記 惺惺雖能治無記 而復還生亂想 故曰惺惺寂寂是 無記寂寂非 寂寂惺惺是 亂想惺惺非 寂寂爲助惺惺爲正思之 復次料簡之後 須明識一念之中五陰 謂歷歷分別 明識相應 即是識陰 領納在心 即是受陰 心緣此理 即是想陰 行用此理 即是行陰 污穢眞性 即是色陰 此五陰者 舉體即是一念 此一念者 舉體全是五陰 歷歷見 此一念之中 無有主宰即人空慧 見如幻化即法空慧 是故須識此五念及六種料簡 願勿嫌之 如取眞金 明識瓦礫 及以僞寶 但盡除之 縱不識金 金體自現 何憂不得)
이상을 추가했습니다.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일체 각과 일체 업지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최종 수정본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