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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에즈라기의 말씀 9,5-9>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5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6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7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9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오늘 독서는 에즈라기이고 복음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에즈라 예언자는 단식을 마치고 나서 제사를 드리러 하느님 앞에 나와 먼저 참회를 하고 이어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난 뒤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에즈라처럼 단식과 참회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복음의 제자들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둘 다 살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어리석지요.
그런데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제가 종종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대에서 20대까지는 반성과 참회를 많이 했는데, 이때 저는 거의 매일 반성과 참회가 주조인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반성과 참회는 상당히 자기 비하적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30대를 지나 40대와 50대가 되자 반성과 참회는 현저히 줄고, 피정 지도니 강의니 북한 선교와 해외 선교와 같은 복음 선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일기는 가끔가다 쓰는 정도였지요.
그러다 지금은 그마저도 아예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영적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매일 복음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부족하지요.
그런데 세상을 복음화하려면 먼저 자기 복음화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회개와 참회 없이 어떻게 자기 복음화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도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거였잖아요?
그러니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나도 들어가고 너도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 복음이 아닌 사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참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부터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저는 에즈라의 참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회개(悔改)를 위해 꼭 참회(懺悔)를 해야 하나?
후회(後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왠지 참회하기 싫었던 것이고 그래서 참회가 아닌 후회 정도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인데, 참회와 후회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 참회와 후회, 둘 다 과거 자신의 삶이나 행위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그런데 후회는 후회로 끝나고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데 비해, 참회는 진정한 뉘우침이고 그래서 반드시 회개로 이어지지요.
그리고 둘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관계성 여부입니다.
후회는 혼자서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이며, 그래서 죄의식을 반드시 동반하고 그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그런데 이 참회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칠 수가 있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가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야를 죽인 다윗이 우리야 가족 앞에서 참회할 수 있는데, 다윗은 굳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아무튼 후회는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부정적인 감정일 뿐 진정한 뉘우침이 아니기에 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 사랑을 부수고 깬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파 그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래서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런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의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하시면서 한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태 6,33)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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