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집에서 기도하던 날
이정우(알베르토)
신자
아주머니 한 분이 돼지국밥집을 차렸다면서
한번
다녀가라고 하셨다. 김밥도 어묵도 소주도 있노라고 했었다.
벌써
삼십 수 해 전 시골성당에 있을 때였다.
그날
오후 서너 시쯤 나는 스쿠터 오토바이를 타고 거길 갔었다.
국밥
한 그릇과 더불어 또 특별 대접으로 소주 대신 맥주 한 잔을 놓고
나는
이쪽 구석진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막 숟가락을 들 참에
웬
여자가 이쪽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대뜸,
“천주교는
술도 처묵고, 담배도 피워대고, 나무로 만든 예수나
마리아께
절도 한다문서요? 또 제사도 지내면서 조상에게 밥도
멕인다면서요?"라고
일갈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차,
깜박 잊고 이런 때 로만칼러를 하고 나오다니……
그렇지만
이른바 가정 사목방문인데 칼러쯤 안하고 올 수도 없지 않나?”
그처럼
살기등등한 질문도 아닌 ‘말로써 사람 잡는’ 도전적, 전투적 공세에
나는
무어라 답하기가 싫었다.
그것도
지금 맛있는 돼지국밥을 먹고 있는 중이 아닌가.
이런
경우엔 묵묵부답, 그저 국밥이나 열심히 퍼먹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게 또한 쉽지 않았다.
내
옆에 바짝 붙어선 그 여자는 계속 욕설을 발설하는데
죽을
맛이었다. 온몸에 불이 확확 붙을 판이었다. 나는 그러나 참느라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 들었다 놓았다 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얼마 후 그 여자는 목청을 대포 소리로,
목젖이
찢어질 정도의 쇠톱 소리로,
“천주교
신자는 다 까마귀 새끼요, 지옥에나 갈끼다."라는,
‘말
같잖은 말'을 내질렀다. 그 말씀이-또는 개소리가?- 언뜻
내
귀에 쏙 박혀 들어올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슬쩍 쳐다봤더니
그
표정이나 손짓 발짓, 오장육부가
과연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용사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식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도 많은 이 마당에
한판
구경거리를 제공해서 창피를 줄 속셈이 틀림없었다.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돌아가 있는, 돌은<돈> 여자였다.
어쨌든
마귀 새끼 중에 중간 형님뻘이 될 만한 천주교 신부 하나를
죽일
심산인지도 몰랐다. 나는 죽어서 어딜 갈까?
“아무
데라도 좋으니 이런 여자가 없는 곳에 가게 해 주소서."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날
나는 돼지국밥을 3분의 1쯤밖에 못 먹고 일어났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 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문의 손잡이를 잡기 전에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그 여자 쪽을 바라보며 말하고 싶었다.
타일러라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다. “아주머니께 오늘 저는 무조건 졌습니다.
항복하고
갑니다. 혹 아주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강습소
출신의 사이비 목사가 아닌지 집에 가서 좀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거짓
목사의 속임수 섞인 말을 곶이 곶대로 듣거나 뭔가 아는 체 믿고,
또
남의 종교나 신앙을 함부로 취급하는 아주머닌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속아
사는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 아주머니 말고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아주머닌 대표적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질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그때 그 아줌마에게 죄인이었고 마귀<베엘제벨>였던 것이다.
그런
뒤 며칠 후 우연한 기회에 그곳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그와
나는 신앙 얘기, 교회 얘기를 한참 진지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고개를 끄덕여 가며 의견을 나눴다.
나는
그에게 그 불쌍한 여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얘기를
하던 가운데 그 어디쯤에선가 기회를 잡아
그
여자의 도전적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성실히 들려주었다.
천주교의
근본 입장과 삶의 지침을 쉬운 말로 설명해 준 것이다.
우리들은
그날 이후 친구가 되었다. 그 목사님은 그 곳 교회에
부임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점도 나와 꼭 같다고 했다.
‘그러면
그 여자는 그 이전 다른 목사의 제자였던가!'
우리는
나이도 비슷했고 서로 수차례 만나 그 지역 공장 지대의
청소년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를 함께 지을 계획까지 세우곤 했다.
아이구!
그렇게 청소년 사업을 같이 추진하기로 결정을 본 한 달 후,
그
목사님은 그곳 장로교회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아아,
얼마나 애통했던가. 그 목사님이 떠나기 전날 들려준 사연,
그의
진정성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부님,
제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 개신교 예배당 대신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면, 저도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데 가더라도 또 열심히 기도하고 일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