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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풍요샘터 스크랩 이정우 신부님의 시와 글
*Anna 추천 0 조회 447 17.03.30 2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정우 신부의 시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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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 신부(神父)는 저와 경북중고 46회 동기생입니다. 詩人 신부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11월 16일날 대구에서 오랫만에 만납니다. 동기회 카페에 올려져 있는 그의 글을 퍼 옮겨보았습니다.

 

 

 

가을노래와 어머니

이정우

 

유년시절에 부르며 놀던 노래로 가을노래가 제일 많았던가 보다.

그런데 나에겐 이 노래가 -제목은 잊었지만,- 가장 잊히지 않는다.

 

                          뒷동산 산~길에 놀이질~때

                    기러기 기~럭기럭 울며납니다~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이나면~

                    쪽마루 끝~에앉아 별을헵니다  

 

     이 노래를 요즈음도 혼자 가만히 불러볼 때면,

     나는 하염없이 마음으로 울기도 한다.

     그 시절의 어머니, 어머니 생각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문기자로 취직했다가

     다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께

     신학교(神學校)엘 가겠노라고 여쭈었던 것이다.

     우리 집안 내력엔 신앙이란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의성, 안동 지방의 유교집안이랄 수도 있었다.

     그 무렵 읍내에서 병원을 하는 집의 맏아들이라면서

     혼사가 꽤 많이 들어오고, 어머니는 혼수 준비를 하느라 방 하나에다

     온갖 물품을 잔뜩 들여다 놓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아닌 밤 홍두깨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란 말인가! 어머니는 그렇게 느끼신 것이다.

     스물일곱 맏아들에게 처음엔 아무 말씀도 못 건네시다가 이윽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넌 그러고도 남을 놈인기라"라시며 뒤돌아서시던 어머니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도 선언하기도 하셨다.

     나는 작은 가방 하날 달랑 들고서 집을 떠났고,

     그후 여섯 해 집으로 발길을 끊고 살았었다. 가출한 놈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제서품 때(1976년 12월 16일) 어머니는 비신자로서

     나의 첫 영성체(靈聖體)도 받지 못하셨다.

 

     나의 첫 성체는 어떤 애꾸눈 할머니가 받으셨다. 나는, 성체를 그 할머니께

     건네주는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 순간 속으로 울면서 나의 사제생활 평생 할머니들을 잘 섬기리라고

     결심했으니까 말이다. 한편 그때 어머니는 계산성당 맨 뒤쪽 신자석에 숨듯이

     그냥 앉아계셨던 것이다.

 

     가톨릭 교리도 모르고 성당 가기도 아주 싫어하실 당시에 당신은 그래도

     아들이 신부(神父)가 된다니까 와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훗날 어머니는 영세를 하시고 성당 성모회(聖母會) 회장까지 맡으셨다.

     농촌 본당의 어려운 살림을 걱정하시느라, 병원집 사모님이란 미명을 쓰고

     교무금을 그 당시 매달 몇 십만 원을 기꺼이 내시길 주저하질 않으셨다.

     내가 교무금을 너무 많이 낸다고, 아직 신자도 아닌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선

     안 된다고 여쭈면, “야가 무슨 소릴 하노? 니는 신부라 카면서 내보다 모른데이”

     라시며 웃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꼭 회갑연 사흘 후 뇌출혈<뇌동맥류>로

     선종하셨을 땐, 온 읍내가 떠들썩하리만치 조문객이 몰려왔는데,

     그만큼 여러 사람을 남모르게 도와주셨기에 찾아뵙는 이가 많았다고들 했다.

 

     장례식 때 어떤 이는 “우리 사모님은 여장부이셨다.”고 말했는데,

     나도 그 소리를 들었다. 장례와 노제(路祭) 땐 워낙 많은 이들이

     성당을 찾아왔는가 하면, 장례미사 후 거리 장례행렬이 야단스러웠던 걸 두고서,

     읍내 성당 교우들은 “병원집 사모님은 죽어서 전교를 많이 했노라”라고들

     말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그렇게 느닷없이 일찍이 돌아가신 게 내 탓이라고 여긴다.

     맏이가 장가갈 준비를 다 갖추고 온갖 신접살이 그릇이니 도구니

     아주 다 마련해 놓은 마당에 그만 ‘집'을 나갔으니,

     그 참담한 심정과 심사야말로 일러 무어라 하겠는가.

 

     일자 소식도 없이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도 감감 모르신 채

     얼마나 애타하셨을까. 속내로 멍이 든다더니, 바로 그런 것 때문,

     나 때문에 당신이 병고에 사로잡혀 일찍 총총 발걸음으로 이승을 떠나신 것이다.

     이 무슨 한(恨)인가.

 

     가을노래 ‘뒷동산 산길에...'란 곡(曲)-노래 제목이 뭐더라-은

     그 노랫말 내지 내용이 여러가지다.

     그 중에 그것과 같은 곡(曲)에 가사를 바꿔 ’찔레꽃‘이란 제목을 가진 노래도 있다.

 

 

    

                         엄마일 가~는길에 하얀찔레꽃

                         찔레~꽃 하얀잎은 맛도좋~지

                         배~고픈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깊어 까~만데 엄마혼자서

                         하얀팔목 바~쁘게 내게오시네

                         밤~마다 보는꿈은 하얀엄마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꿈

 

      어릴 적 외갓집 버들못둑에서 멋도 모르고 외운 이 노래를 여태껏 잊지 않고

      가끔 혼자 맘속으로 불러본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는 늘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사죄하며

      용서를 빌곤 한다.   그렇다, 나는 내 죄를 알고, 그 죄를 용서를 받은 줄도 안다.

      어머닌 옛날에 벌써 나를 용서하신 것이다. 나를 너무나, 한없이 사랑하신

      우리 엄마니까 말이다.

 

     (참고로, 우리 어머니의 18번 노래는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이였다.

      나를 신학교로 떠나보낸 후 늘상 그 노래를 입속으로 부르시곤 하셨단다.

      나중에 세례를 받으신 후 나에게 그러했노라고,

 

    “그 노래 말이다, 가사가 엄청 좋은기라...”라며 쓴 웃음을 지으셨던 것이다.)

 

 

 

 

 

낙엽처럼

 

-10월의 시

이정우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거리의 나뭇잎들 무심히 떨어지고,

                내 어깨 죽지에 낙엽 되어 흩날리고-

 

                내 마음도 낙엽처럼 바람에 날리고,

                그대와 멀리 헤어진 서러움처럼

                이 거리 위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혼자서 돌아오는 늦은 저녁 무렵

                네온 불빛은 저쪽 도회지를 비추는데,

                나는 이쪽 골목길 어둠에 숨어가고-

 

 

 

 

 

 

 

바람 부는 날

詩 이정우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적 기저귀가

거기 널려 있습니다

 

내 맘속에도 바람이 불고

어머니의 머리칼이 날립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엔

빨랫줄의 빨래집게가 젤입니다

 

빨래집게를 보면서

또다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수필>>

돼지국밥집에서 기도하던 날

이정우(알베르토)

 

신자 아주머니 한 분이 돼지국밥집을 차렸다면서

한번 다녀가라고 하셨다. 김밥도 어묵도 소주도 있노라고 했었다.

벌써 삼십 수 해 전 시골성당에 있을 때였다.

그날 오후 서너 시쯤 나는 스쿠터 오토바이를 타고 거길 갔었다.

 

국밥 한 그릇과 더불어 또 특별 대접으로 소주 대신 맥주 한 잔을 놓고

나는 이쪽 구석진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막 숟가락을 들 참에

웬 여자가 이쪽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대뜸,

“천주교는 술도 처묵고, 담배도 피워대고, 나무로 만든 예수나

마리아께 절도 한다문서요? 또 제사도 지내면서 조상에게 밥도

멕인다면서요?"라고 일갈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차, 깜박 잊고 이런 때 로만칼러를 하고 나오다니……

그렇지만 이른바 가정 사목방문인데 칼러쯤 안하고 올 수도 없지 않나?”

그처럼 살기등등한 질문도 아닌 ‘말로써 사람 잡는’ 도전적, 전투적 공세에

나는 무어라 답하기가 싫었다.

그것도 지금 맛있는 돼지국밥을 먹고 있는 중이 아닌가.

 

이런 경우엔 묵묵부답, 그저 국밥이나 열심히 퍼먹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게 또한 쉽지 않았다.

내 옆에 바짝 붙어선 그 여자는 계속 욕설을 발설하는데

죽을 맛이었다. 온몸에 불이 확확 붙을 판이었다. 나는 그러나 참느라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 들었다 놓았다 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얼마 후 그 여자는 목청을 대포 소리로,

목젖이 찢어질 정도의 쇠톱 소리로,

“천주교 신자는 다 까마귀 새끼요, 지옥에나 갈끼다."라는,

‘말 같잖은 말'을 내질렀다. 그 말씀이-또는 개소리가?- 언뜻

 

내 귀에 쏙 박혀 들어올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슬쩍 쳐다봤더니

그 표정이나 손짓 발짓, 오장육부가

과연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용사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식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도 많은 이 마당에

한판 구경거리를 제공해서 창피를 줄 속셈이 틀림없었다.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돌아가 있는, 돌은<돈> 여자였다.

 

어쨌든 마귀 새끼 중에 중간 형님뻘이 될 만한 천주교 신부 하나를

죽일 심산인지도 몰랐다. 나는 죽어서 어딜 갈까?

“아무 데라도 좋으니 이런 여자가 없는 곳에 가게 해 주소서."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날 나는 돼지국밥을 3분의 1쯤밖에 못 먹고 일어났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문 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문의 손잡이를 잡기 전에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그 여자 쪽을 바라보며 말하고 싶었다.

 

타일러라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다. “아주머니께 오늘 저는 무조건 졌습니다.

항복하고 갑니다. 혹 아주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강습소 출신의 사이비 목사가 아닌지 집에 가서 좀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거짓 목사의 속임수 섞인 말을 곶이 곶대로 듣거나 뭔가 아는 체 믿고,

또 남의 종교나 신앙을 함부로 취급하는 아주머닌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속아 사는 불행한 사람이 세상에 아주머니 말고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아주머닌 대표적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질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그때 그 아줌마에게 죄인이었고 마귀<베엘제벨>였던 것이다.

그런 뒤 며칠 후 우연한 기회에 그곳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그와 나는 신앙 얘기, 교회 얘기를 한참 진지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고개를 끄덕여 가며 의견을 나눴다.

나는 그에게 그 불쌍한 여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얘기를 하던 가운데 그 어디쯤에선가 기회를 잡아

 

그 여자의 도전적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성실히 들려주었다.

천주교의 근본 입장과 삶의 지침을 쉬운 말로 설명해 준 것이다.

우리들은 그날 이후 친구가 되었다. 그 목사님은 그 곳 교회에

부임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점도 나와 꼭 같다고 했다.

‘그러면 그 여자는 그 이전 다른 목사의 제자였던가!'

 

우리는 나이도 비슷했고 서로 수차례 만나 그 지역 공장 지대의

청소년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를 함께 지을 계획까지 세우곤 했다.

아이구! 그렇게 청소년 사업을 같이 추진하기로 결정을 본 한 달 후,

그 목사님은 그곳 장로교회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아아, 얼마나 애통했던가. 그 목사님이 떠나기 전날 들려준 사연,

그의 진정성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부님, 제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 개신교 예배당 대신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면, 저도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데 가더라도 또 열심히 기도하고 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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