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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말씀의 초대
요한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어,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들으시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신다(복음).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몸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나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 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소녀를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연인은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귀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귀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올라온 댓글로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나 잘 쓴 댓글일까요?
“빌 게이츠? 그저 운이 좋아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잖아.”
“사실 아이폰을 만든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지. 잡스는 진짜 천재인 워즈니악한테 빨대 꽂은 인간이지.”
“왜 다들 워런 버핏을 현자니, 뭐니 치켜세우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사람 그냥 주식으로 해서 돈 번 사람 아닌가? 개미들 피 빨아먹는 투기꾼일 뿐이야.”
어떻습니까? 진짜 공감이 가는 댓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할 필요도 없고, 공감할수록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족한 사람의 평가가 완전할 리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많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자기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새로운 일도 더불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 성모님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역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했던 두 사람은 우리 구원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에 집중하고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며,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크리스토퍼 리브).
성모 승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