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바람일뿐이라고 .
조용히 문이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 남자가 있다.
아이들의 중심이 되어 웃던 그는 문열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내게 시선을 멈춘다.
"안녕, 연경아."
그 인사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런 나를 한참동안, 아니 어쩌면 아주 짧은 시간동안 보고있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의 장난에 파고든다.
그 모습이 가슴 아파서 울음이 나올것만 같았다.
더러운 거리에 앉아 무릎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몹시도 배고팠다.
흘러오는 캐롤송은 나에게는 마치 TV속 세상처럼 먼것이었다.
아니, 그건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몹시도..
"헤이, 5만원에 어때?"
들려오는 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봐?"
재촉하는 목소리에 갈라진 목을 열었다.
"...밥도?"
"그래, 따뜻한 침대에서 잘 수도 있어."
그저 배가 고팠을뿐이다..
13살, 낯선 남자에 품에 안겨 내게있어 고통뿐이었던 잠자리를 가졌다.
"대단하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윤성현말이야, 굉장하지 않아?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 그는 천재야, 안그래?"
아아, 알 수있었다.
그가 바이올린을 켰으리라.
"그래, 굉장해."
"으응."
동경하는 눈빛을 빛내던 여자애는 손을 들어올려 조용히 눈을 가렸다.
"아직도 들려오는 것같아. 바이올린 소리가. 굉장히 사랑스럽고 따스해."
꿈꾸는 목소리에 나 역시 조용히 눈을 가렸다.
캄캄한 어둠, 그 속에서 굶주린 내가 눈을 빛내고 있다.
눈을 마주하고있자면 체온이 내려가는 것 같다.
아직도 그 겨울밤에 있는 것 같아.
"으응, 들려오는 것같아. 바이올린 소리가.."
온 몸이 몹시도 욱씬거려 주저앉아 손에 입김을 호호불며 거리의 사람들을 보고있었다.
따스한 햇빛이 몸에 내리쬐었다.
어제의 눈이 내려서 그런지 몹시도 하얗던 밤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그 햇빛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나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낯설음에 눈을 뜨자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도 사랑스러운 남자애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랑 같이 갈래?"
노랫소리같은 목소리.
그건 아마 그가 사랑받고 자라서였으리라.
"같이 가자."
그 눈동자에 매료되어 조용히 손을 내밀었지만, 곧 멈칫했다.
내 손길을 따라오던 눈동자는 실망한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지만 곧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손에 포개는 것이었다.
"잡은거야, 으응. 그리고 나랑 같이 있자."
그것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신발장을 열자 작은 꽃이 거기가 제자리인것 마냥 자리잡고 있다.
연분홍의 꽃잎과 연녹색의 줄기. 모든 것이 연한 꽃.
하굣길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나와 신발장 앞에서 잠시 멈추어 가는 듯 하다.
그 공간속에 무료히 그 꽃을 바라보던 나를 일깨운 것은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였다.
"연경아, 신연경."
그의 목소리다.
"..윤성현?"
내가 그를 부르자 희미하게 웃던 그는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
미열이 전해오자 나도 모르게 그 손을 꽉 잡았다.
"내 바이올린 소리 들어줘, 연경아."
물끄러미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박 웃음을 지은 그는 내 손을 잡아 음악실로 이끈다.
끌려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연하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되기위해 탈색하는 것 같아.
바이올린 소리.
그가 좋아하는 소리.
무료하게 앉아있는 나는 그의 바이올린 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울려퍼지는, 평온한 소리.
"한번 켜볼래?"
문득 심심해졌는지 그가 나에게 물었다.
고개를 저었지만 웃으며 손을 잡아 바이올린 앞으로 이끈다.
"잡아봐. 이렇게, 응. 그렇게.."
어색하게 잡은 폼을 그는 만족했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이런 것도 좋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내일부터 바이올린 가르쳐줄게. 응, 연경아?"
그는 선생님이 된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배우고싶지 않았지만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아 나도 어색하게 웃었던 것 같다.
"연경아, 여기 앉아."
조용한 음악실에 그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는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침묵. 해가 뜨기전의 숨죽이는 듯한 침묵이 우리 둘을 감쌌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이마부터 미끄러져오는 그 입술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살짝 입술이 포개져왔다. 가벼운 키스.
시간이 흐르자 조용히 입술을 뗀 그는 살풋 웃었다.
"사랑해ㅡ, 연경아. 지금 내가 치는 바이올린은 오직 너를 위한거야."
입술이 떨어진 미열에 왠지 오싹해져있던 나는 그냥 인형처럼 웃었다.
내 뺨에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거리던 그는 일어서서 바이올린케이스를 열어 바이올린을 들었다.
심호흡을 한뒤 바이올린을 켠다.
그만의 바이올린소리가 흐르자 잠자고있던 마음이 조금씩 들썩였다.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모든것이 휩쓸려가는 듯한.
눈을 감고 바이올린 소리를 따라 마음을 흘려보낸다.
"....신연경."
그의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나 역시 겁먹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주워왔어."
"......응"
"내가 너에게 이름을 주었어."
"......응"
"내가 밥도 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줬어."
"......응"
시계바늘이 째깍거리는 시끄러운 침묵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내가....내가 너한테 모든걸 줬어. 그치?"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다급해진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흠칫 놀라며 움츠리자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다급히 뗀다.
그리곤 다시 머뭇거리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는다.
"다 줄게.. 모든걸 너한테 줄거야...."
다급해진, 상기된 얼굴로 나한테 말한다.
"그러니.. 너도 줘..."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약간 떨리는,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눈을 깜빡이 쳐다보는 나를 그가 손을 올려 눈을 천천히 감기었다.
"네 바이올린소리를.....나한테 줘...."
9년전 겨울날, 나는 그를 만났다.
내가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를 그 남자를..
*
후기; 쓰고나니 마치 프롤로그처럼 쓴 것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와 과거를 요리저리 섞어서 어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읽어주시고 감상평한줄만 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분위기가 묘하네료....ㄹㄹ
흐음....;; 묘해요 암튼 그랟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