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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 2코린 3,4-11
복 음 :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사랑-예수님
-율법의 완성이자 분별의 잣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장기간 유럽 여행중인 분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행을 하면 가족의 사랑이 새롭게 보입니다.
아기들을 보면 지나간 시간이 보이고, 노부부를 보면 다가올 시간도 보입니다. 여행은 사랑입니다.”
‘여행은 사랑입니다.’ 새롭게 마음에 와 닿은 말마디였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절대적인 곳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어디서나 자기 직분을 묵묵히 수행하며 기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고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 있는 곳에 함께 계심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사랑이, 꽃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계시고 바로 거기가 하늘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휴가 끝날 예산에 있는 금오산 향천사香泉寺라는 절에 들렸습니다.
대개가 명산을 배경한 명찰임을 깨닫습니다.
백제 의자왕 16년 서기 656년 의각선사께서 창건한 절이라 하니 무려 1400년 된 절입니다.
절의 자산은 노목과 노승이라 했습니다.
인내의 사랑을 상징하는 278년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향천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임박한 때였고 스님 한 분이 지나길 래 합장으로 인사했습니다.
“점심이나 들고 가시죠?”
친절한 인사말이 참 마음 편안하게 했습니다. 환대의 사랑을 새롭게 체험했습니다.
곳곳에 발견되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랑이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 하나의 인류 가족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마도 여행이나 휴가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체험 학습장이란 생각도 듭니다.
평생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끝없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이며 평생 사랑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율법이나 예언서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사랑엔 크고 작은 것이 없듯 율법도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이, 예언서 사랑이 얼마나 단호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의 문자 넘어 하느님 사랑을 직관하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단호하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있다는, 지도자는 디테일이 강해야 한다는 말도 문득 생각이 납니다.
작다하여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이나 율법이든 사랑의 표현이기에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여 사랑은 모든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휴가 중 작은 사랑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휴가 첫날 목적지에 일착으로 도착했고 다음번에 도착한 생일이 한 달 늦은 사촌 동생이
“형님, 커핀 한 잔 드시겠어요.” 친절히 사다 준 커피 한 잔의 고마운 사랑이 휴가 내내 행복하게 했습니다.
이어 차 안에서 마침 빵이 한 개 있어 반쪽을 혼자 먹고 나누기가 쑥스러워
남은 반쪽마저 혼자 먹으려다 반쪽의 반을 그 사촌 형제와 나누었더니 반갑게 받아먹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혼자 다 먹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옆자리의 사촌 형제는 옆에서 제가 먹고 있는 것을 다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사랑 실천은 무궁무진합니다.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깨어 있게 하고 이웃을 배려하게 합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옛 고향집 자리에 들렸다가 옆에 귀향하여 혼자 사는 친지분을 방문했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에 반갑게 맞이하였지만 풀어진 모습, 무너진 모습이 너무나 완연하여 충격을 받았습니다.
잘못하면 무질서한 삶으로 폐인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태한 일인지 한눈에 배울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둘이라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서로 버팀목이 되는
상호사랑이 참으로 절대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공동체란 안전망의 사랑이, 일과표에 따른 규칙적인 질서 있는 삶이,
그리고 우리의 수도복이 참으로 든든한 사랑의 버팀목임을 깨닫습니다.
제 옛 고향집은 주인이 바뀌어 주말 농장집처럼 바뀌었고
많이 비워진 탓에 흡사 그 옛날의 영혼과 깊이,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죽은 집처럼 보였습니다.
사랑이 빠지면 자연도 집도 생명과 빛이 사라져 죽은 듯 보이니 시골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든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바로 이런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자 지혜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길이자 생명이요 진리라 고백합니다.
그러니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이 모든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겠는가 생각하면 저절로 옳고 그른 것은 분별이 되기 마련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새 계약의 일꾼, 성령의 직분, 의로움에 이르는 직분도 제가 보기엔 결국 사랑의 직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을 사랑으로 바꿔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주어진 사랑의 직분에 충실한 이들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새 계약의 일꾼이 되어 성령의 직분,
사랑의 직분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치통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줘야겠다고 남편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내 몰래 전복죽을 쒔습니다.
처음 해보는 전복죽이었지만 인터넷 조리법을 꼼꼼하게 보면서 정성껏 전복죽을 만들어서 아내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을 했지요.
그리고 한 숟갈을 떠서 먹은 뒤에 인상을 쓰면서 그냥 숟가락을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남편이 요리를 하면서 맛을 보았을 때 너무나 괜찮았거든요.
따라서 한 숟가락만 먹은 뒤에 수저를 내려놓는 아내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왜? 맛이 없어?”라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맛은 있는데 지금은 먹지를 못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다시 재촉을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좀 먹어봐. 맛이 괜찮잖아?”
이렇게 말해도 아내는 “아니야. 도저히 못 먹겠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남편은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정성을 아내가 무시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내 정성을 무시하는 거야?”라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복이 너무 질겨서 이가 너무 아파.”
이 아픈 아내를 위한 정성은 물론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성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지요. 정성은 앎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위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이란 혹시 내 편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상대방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행하는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큰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랑에 대해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완벽하게 아는 가장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셨고, 연약한 인간처럼 죽음까지도 당하십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완벽한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 역시 이 완벽한 사랑, 큰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계명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하게 지켜나가면서 주님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나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철저하게 알아나가면서 주님의 입장에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큰 사람이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직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초등학교 때 사칙연산을 배웠습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입니다.
제 기억에 나누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누기보다는 받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칙연산은 다른 모든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이 되었습니다.
사칙연산을 하지 못하면 다른 수학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사칙연산은 수학이라는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습니다.
운전하기 위해서는 교통신호와 표지판을 알아야 합니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교통신호를 어기고, 표지판의 내용을 무시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음주운전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생명에도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교통신호와 표지판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인생에서 길을 찾는 사칙연산과 같습니다.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교통신호와 표지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과 계명을 어겨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듯이, 율법과 계명은 사람을 구속하고 억압하지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사람을 하느님께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겸손의 첫 번째 단계는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의 두 번째 단계는 십계명은 물론 작은 규율까지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평일 미사까지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피정, 교육에 기꺼이 참여하고, 단체 활동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도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걸어갔던 겸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通)하고 이어집니다.
사랑이 율법이고
사랑이 구원의 예언서들입니다.
처음도 사랑이고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랑이
이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여정을
걷는 사랑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사랑을
이끌고 가십니다.
사랑하기에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을 지키고
스스로 사랑을 가르치시며
하늘 나라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에도
예수님이 계셔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를 보여주시는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사랑은
삶으로 이루어지고
완성되어야 할
가장 치열한
삶의 선물입니다.
그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게 당연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
한 요양원에 65세가 넘는 노인들이 입주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어느 날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원장이 노인들에게 새로운 생활지침을 차별을 두어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1층 거주자들에게는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하셔야합니다.
먼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여드리는 영화관람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셔야 합니다.
또 정원의 식물을 돌보는 일과 물을 주고 풀을 뽑고 가지를 쳐 주는 일도
여러분이 알아서 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이 일에 대해서는 손을 떼겠습니다.”
2층에 사는 노인들에게는 이와 상반되는 생활수칙을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저희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영화 관람도 가장 편안한 시간으로 저희가 정해드리겠습니다.
정원 관리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각자의 건강만 잘 챙기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검사해보니 1층 노인들의 93%가 건강이 좋아진 반면
2층 노인들은 71%가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나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층 노인들의 사망률이 1층 노인들의 두 배나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일대학의 로딘(Judith Rodin)교수에 의해 주도된 실험입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더 일을 많이 한 이들이 더 건강해지고 오래 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게 되어
그 믿음에 맞추어 육체는 물론 정신적 건강도 함께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보면 당연히 받아들일 것 같은 사실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늘나라에서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늘나라 가면 똑같이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 행복이 채워질 것입니다. 다만 그 그릇크기가 다를 뿐인 것입니다.
그 그릇 크기는 이 세상에서 정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한 것대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면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당연하고 한 대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그것이 어떻게 정해지는 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로 요약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한 사랑의 크기만큼 저승에서도 그 보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반면 사랑이 적은 사람은 나만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사랑이 적을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말에 ‘나’라는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셔비츠(Larry Scherwitz) 교수는 6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여
어떤 사람들이 “나”, “나의”, “나를”, “내 것” 등의 말을 자주 하는지를 세어보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나’에 관한 말수와 심장병 위험성이 정확하게 일치하네!”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이웃에 대한 배려도 적고 그래서 건강도 좋지 못한 것입니다.
이 예들은 ‘왓칭’이란 책에 소개된 사례들입니다.
저자가 평행이론 등을 믿고 있어서 뉴에이지적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내용 자체보다는 소개된 사례들이 좋아서 인용하는 것뿐이니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건 이 예들은 정확히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고
그러면 건강도 그만큼 안 좋아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이 세상에서 이렇게 영향을 준다면
그 사랑으로 심판 받는 하늘나라에서도 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사랑의 계명이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