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던 바보를 만나러
끝물 장마 여운이 아직 남은 칠월 끝자락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다. 시기상으로는 장마 종료를 선언해도 되겠으나 기상청에서는 공식으로 발표를 미루는 듯하다. 까닭인즉 필리핀 근해에서 발생해 대만을 거쳐 중국 남부로 상륙하는 태풍 ‘개미’가 밀어 올린 비구름이 우리나라 종반부 장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나마 구름이 끼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주어도 날씨 덕을 본다.
이른 아침 베란다 창밖으로 바라보인 정병산 산등선으로는 짙은 구름 뭉쳤으나 비를 몰아올 기운은 아닌 듯했다. 강수 기미를 보이는 아침에는 놀이 붉게 서리기도 했는데 그런 현상은 비치지 않았다. 이른 아침밥을 해결하고 자연학교 등굣길로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정류소에서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도중에 팔룡동에서 내려 2번 마을버스 첫차로 갈아탔다.
1번 마을버스와 가술 모산까지는 운행 노선이 겹쳐 근교 회사나 비닐하우스 일을 나가는 부녀들이 주요 승객이다. 1번 마을버스를 13년 운행하다가 올봄에 2번으로 옮겼다는 기사는 고령이라도 건강을 잘 관리해 와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듯했다. 이른 시각에 외지인으로 가끔 그 버스를 이용하는 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할 듯한데 난 무슨 용무로 다니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버스 기사는 용잠삼거리까지 가는 한 사내와 얘기를 나눴는데 요즘 이른 시각 부녀 승객이 줄어듦을 화제로 삼았다. 하우스 농장주가 할머니 일손 능률이 떨어져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는데 내가 보기는 그렇지 않았다. 풋고추 따기는 계절적으로 노지 풋고추가 출하되는 때라 수확할 시기가 아니었다. 지금 들녘 비닐하우스 안에는 가을 이후 딸 어린 모종을 심어 키웠다.
가술을 지나면서 승객은 혼자였는데 북부리 동부마을에 이르니 가술로 가려는 노부부가 타 종점까지 타고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우암을 둘러 갈 듯했다. 나는 종점 못 미친 유청삼거리에서 내려 들판으로 나갔다. 주천강이 흘러와 낙동강 샛강으로 합류하는 유등 일대는 농경지가 아주 넓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창원 대산과 김해 한림이 맞닿는데 진영 신도시 아파트단지가 가까웠다.
농가에서는 벼농사 이후 가을에는 비닐하우스에 키우는 당근이 주 소득원이지 싶다. 벼들이 싱그럽게 자라는 들녘에는 풋고추나 토마토를 가꾸는 사계절 비닐하우스도 간간이 보였다. 논으로 흘러드는 농수로 언저리에는 들깨나 고추를 심어 잘 가꾸었다. 잡곡을 심을 밭이 없기에 자투리땅은 놀리지 않고 콩이나 참깨도 심었다. 어디나 땅이 기름져 잡초만 제거하면 작물이 잘 자랐다.
들판 가운데로 드니 멀리 김해 무척산과 강 건너 밀양 초동면 덕대산으로는 구름이 걸쳐져 있었다. 아침이라도 등 뒤로 와 닿은 햇살로 땀이 흘러 배낭에 상비약처럼 준비해 다니는 죽염을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고 얼음 생수를 마셨다. 땀을 많이 흘릴 한여름 야외 활동으로 탈수가 와 물을 마실 때면 적정한 양의 소금기를 채워줌은 젊은 날 병영생활에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였다.
들녘 들길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 나가자 유등에서 우암으로 가는 자동찻길이었다. 길섶에 조경수로 심어둔 배롱나무는 붉은 꽃술을 달아 계절이 여름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장마철부터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꽃은 사당이나 서원 뜰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나 근래는 도심이나 거리에서 조경수로도 흔해졌다. 우암 당산에 올라서니 돌탑과 함께 두 그루 회화나무가 당목이었다.
우암을 거쳐 가술에 닿아 마을도서관에 들러 어제 뽑아둔 이덕무 산문선 ‘책에 미친 바보’를 펼쳐 읽었다. 책만 보던 바보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외교에서나 규장각 검서관 직을 수행한 당대에서 가장 박식한 지식인이었다. 책을 소리 내어 읽으니 추위와 배고픔과 근심과 기침이 사라지더라고 했다. 선비는 마음 밝히기를 거울같이 해야 하고 몸 규제하기를 먹줄같이 하라 했다. 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