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권국가 대통령이라면 최소한의 해야 할 일
유시민 작가
미국 정부가 비밀문서 유출 용의자를 체포했다. 문서 유출 사건 자체는 미국 정부의 일이다.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닌 그 문서의 내용 중에 대한민국 정부와 연관된 정보가 여럿 있다. 어떤 것은 우리 정부가 반드시 진위를 밝히고 경위를 해명해야 할 정도로 의미가 크다.
핵심은 포탄 거래 사실이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에 155밀리 포탄을 제공했다. 오늘까지 나온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작년에 10만 발을 팔았고 올해는 50만 발을 빌려주기로 한 듯하다. 미국 정부가 그 포탄을 바로 우크라이나에 주었는지, 아니면 창고에 있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주고 우리한테 빌린 것으로 재고를 채웠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수출하거나 빌려준 만큼의 포탄이 우크라이나로 갔거나 가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분쟁지역에 살상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원칙을 사실상 파기했다는 뜻이다. 아무런 정치적 사회적 논의 없이 정부의 외교 원칙을 변경하고 그 사실을 숨긴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할 책무가 있다.
11일 오후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안전사회시민연대 등이 우리 정부를 도청한 미국을 규탄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레드카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3.4.11 연합뉴스
대한민국이 도청당하고 있다
유출 문서에는 우크라이나에 한국산 포탄이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중대하고 민감한 정보가 있다. 최근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통령실을 떠난 외교안보팀 핵심인사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이문희 외교비서관은 분쟁지역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파기하고 우크라이나에 공식으로 무기를 제공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김성한 안보실장은 그렇게 하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과 거래를 했다는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 청와대 평화·군비통제비서관과 외교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미국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최종건 교수가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출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한국 관련 정보를 담고 있는 문서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하고 해당 문서의 분류코드 TS/SI-G/OC/NF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 것이다. ‘친윤언론’이 보도하지 않아서 아직 모르는 시민이 많지만 머지않아 모두가 알게 될 최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유출 문서는 미국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최고 자문기관인 합동참모본부 보고서다.
(2) 분류코드의 TS는 ‘최고등급비밀(Top Secret)’의 줄임말이다.
(3) SI는 ‘통신을 가로채’ 얻은 정보임을 나타낸다.
(4) G는 ‘국가원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5) OC는 ‘문서 작성자가 정보를 가공함(Originator Controlled)’으로써 정보의 출처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6) NF는 ‘동맹국을 포함해 어떤 외국과도 정보를 공유하지 말라(Not releasable to Foreign nationals)’는 명령이다.
최고 등급 극비문서의 분류코드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그 문서는 미국 정보기관(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실 외교안보 책임자들의 전화 통화나 대화를 도청(盜聽)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정부여당과 친윤언론은 ‘도·감청’이라고 하는데, 그건 완전히 틀린 말이다. 감청(監聽)은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 누군가의 통신을 엿듣는 행위를 가리킨다. 미국 정보기관이 몰래 한국 대통령 참모들의 통신을 엿들은 행위는 감청이 아니라 ‘도청’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법률을 짓밟았고 주권을 훼손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하는 도청은 미국 정보기관의 일상 업무다. 과거에도 했고 지금도 한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연합 주요국 국가원수의 휴대전화까지 도청했다. 닉슨·레이건·부시처럼 호전적인 대통령 시대에만 한 게 아니다. 케네디·카터·클린턴·오바마처럼 진보적이고 인권을 중시한 대통령이 정부를 이끈 때도 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들은 대통령실과 국방부를 비롯한 우리 정부의 주요기관과 고위 공직자들을 도청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윤석열 대통령과 가족과 측근들에 관한 믿기 어려운 소문의 진위를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로 확인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왜 동맹국을 도청할까?
미국 정부가 한국 대통령실을 도청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 정부도 뭉개고 넘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정부의 진상조사를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게 현명하다. 일단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첫째, 미국은 왜 동맹국을 도청할까? 둘째, 윤석열 정부는 왜 도청한 미국을 두둔할까?
적대적인 국가를 상대로 정보를 수집할 때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동맹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도청이라는 불법 수단까지 써야 하느냐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가의 정부는 할 수만 있으면 동맹국에 대해서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수집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집단은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다. 개인은 양심과 이성으로 본능을 관리하고 욕망을 통제한다. 그러나 집단은 그렇지 않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집단 중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것이 국가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 정부를 구성하는 권력자들은 집단의 이기성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다. 힘과 능력만 있으며 무엇이든 한다. 미국을 보라. 19세기에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힘으로 빼앗았다. 20세기에는 베트남을 침략했고 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해 칠레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 21세기에는 국내법으로 국제무역의 규칙을 짓밟는 중이다. 특별히 나쁜 국가여서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 앞서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이나 냉전 시대 소련이 한 짓보다는 훨씬 덜하다. 중국이 미국처럼 힘이 세다면 더 못된 짓을 내놓고 할 것이다.
둘째, 미국 정보기관은 실력이 뛰어나다. 돈이 많고 인력과 기술이 우월하다. 그래서 러시아·중국·이란·북한 같은 적대적인 국가뿐만 아니라 영국·프랑스·독일 같은 나토 동맹국의 요인들까지 도청한다. 한국 대통령실과 정부기관을 예외로 둘 이유는 없다. 물론 다른 나라도 미국에 대한 정보를 몰래 수집한다. 돈이 부족하고 실력이 모자라서, 발각될 경우 당할 보복이 두려워서 미국처럼 하지 못할 뿐이다. 한국 대통령실을 도청했다고 해서 미국을 특별히 나쁜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들키지 않았을 뿐, 중국이나 일본 정보기관도 우리 대통령실을 도청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화내는 시늉이라도 하라
김태효 안보실 차장을 비롯한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유출된 비밀문서들이 제3자가 조작한 허위문서라고 주장했다. 악의를 가지고 도청하지 않았다며 미국 정부를 두둔한다. 미국의 야비한 행위와 대통령실의 무능을 비판하는 야당과 ‘일부’ 언론에게 한미동맹을 훼손하지 말라고 호통을 친다. 여당 인사들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도청 피해자인 대통령실과 집권세력은 도대체 왜 가해자인 미국 정부를 감싸는 것인가?
윤석열 대통령과 김태효 차장을 비롯한 외교안보 참모들을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윤석열 정부는 사대주의 외교를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사대주의’가 무엇인지 뜻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천문학적 군사비를 지출하는 소위 ‘천조국(千兆國)’국이다. 우리의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려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때로는 억울해도 참아야 하고 내키지 않는 일도 함께 해야 한다. 미국을 강대국으로 예우하면서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사대(事大)’라고 한다.
약소국이 ‘사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구촌의 모든 국민국가들이 이기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과 능력이 허용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모두가 주권을 보유했다고는 하지만 힘은 천차만별이다. 국제법이 있지만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아서 구속력이 약하다. 거인의 횡포를 꼬마는 막지 못한다. 미국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거인이다. 중국·러시아·유럽연합 등은 버금가는 거인이다. 일본도 나름 힘자랑을 하는 편이다. 우리에게 일본은 대적할 만한 상대이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버거운 이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태평양의 패권을 지키려고 일본과 한국을 파트너로 삼았고, 우리는 한미동맹을 뒷배로 삼아 중국·러시아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한국은 경제 선진국이고 군사강국에 속한다. 그러나 사방에 우리보다 훨씬 강한 나라가 포진하고 있어서 여전히 ‘사대’를 해야 한다. ‘사대’는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다. 못난 짓도 아니다. 생존의 방편일 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우리가 ‘사대’를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어떤 중국인은 조선을 명과 청의 속국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생존의 방편으로 ‘사대’를 했을 뿐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사대’를 한 적이 없다. 일본 정부가 아무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전쟁을 하지 않고는 독도를 가져가지 못한다. 우리가 전쟁하지 않고 독도를 내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전부터 지금까지 미국한테는 언제나 ‘사대’외교를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생존의 방편이었다. 미국의 속국이 되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사대주의’는 ‘사대’와 다르다. ‘사대주의’는 ‘사대’를 생존의 방편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 살기 위해서 ‘사대’를 하는 게 아니라 옳기 때문에 ‘사대’를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사대주의’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태효 차장을 사대주의자라 비난하고 싶지 않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북한이 침략해올 경우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미국에 의존하는 심리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대주의자라고 하기 어렵다. 같은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이번에는, 먼저 군 지휘부를 소집해 전투명령을 내린 다음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대답하리라 믿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사대’ 외교하는 것을 나무라지 말자.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부탁한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민의 자부심을 지킬 의무가 있다. 미국 정부한테 화를 내는 시늉이라도 하라. 그 정도는 바이든 대통령도 겸연쩍은 표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나마나한 유감 표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미국 정보기관들은 도청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 더 요구한다. 대통령실과 국방부를 비롯한 안보관련 정부 부처에 대한 외국 정보기관의 도청을 예방하기 위해 과감한 조처를 하라.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많고 기술이 앞선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을 막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계속 당한다면 주권국가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과 참모들이 하는 말과 전화 통화가 실시간으로 도청당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화를 내지도 막을 대책을 세우지도 않는다면, 그런 대통령을 뭐라고 하겠는가? ‘굴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대주의자!’ 이것 말고는 없다.
사대(事大)와 사대주의(事大主義) < 유시민 관찰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