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상과 입상이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에는 1단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자연 대좌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마모가 심해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마애불상군이나 사면불을 보면 자연석의 큰 바위의 표면에 조각되어 있는데
미륵사의 마애칠불은 원추형 4면석에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이런 형태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4면 불을한 면에 조성한 예
역시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기
법의 둔화, 의문(衣紋)의 도식적(圖式的) 처리 등으로 보아
12~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 羅州 鐵川里 石造如來立像 )문화재 지정 :
보물 제462호지정연도 : 1968. 06. 10석상 크기: 높이 5.38m, 너비 2.2m
조성시대 : 고려 후기 (10세기 후반)주소 : 전남 나주시 봉황면 세남로 408-64
1999년 나주 미륵사가 조성한 3층 전각에 보존된 이 불상은
너비 2.2m 전체 높이가 5.38m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불신(佛身)과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광배 형태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을 취하고 있다.
민머리에 육계(肉髻)가 큼직하고 얼굴은사각형에 가까우며 양감이 뚜렷하다.
눈은 길고 코는 크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불상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귀는 긴 편은 아니며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신체는 괴량감이 충만하고 당당하나어깨는 부자연스러우며 굴곡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 右手),여원인(與願印, 左手)인데 어색하다.
원래는 불상 아래 기단이 이중대좌였다고 전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見)이며 의문(衣紋)은원호(圓弧)를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U자형 의습이다.
이런 의습은 우전왕상식불상양식(憂塡王像式佛像樣式)이라 부르는데
다만 Y자형을 선명하게 취하고 있지 않은 점은 차이가 있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이며 2조의 신광과 두광으로 구별되고 있다.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를 연화문을 돌리고 그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였고
신광 사이에는 구름무늬(雲紋)을 새겼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또는 괴체화(塊體化)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등이 보이나 상호에서 보여주는강한 인상 촘촘하게
주름진 활달한 의습,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으로 살찐 얼굴이라든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신체의 모습,그리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유행하던 거불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성연대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원래 나주 봉황면 철천리의 나지막한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봉황면 지역은 백제 때는 실어산현(實於山縣)통일신라 이후
조선초까지 철야현(鐵冶縣)이 있었던 지역이다.
삼성각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