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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fmkorea.com/6749609171
짤은 일본의 유명한 명승지인 금각사다.
건물 전체에 금박을 씌운것으로 유명하며 현재의 건물은 1950년에 붙타 재만 남은것을 80-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금입택 불가능 가능을 살펴보기 전에
신라의 전성기를 표현하는 기사들을 먼저 소개한다.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와 6년(880) 9월 9일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자카리야 카즈위,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 중세 아랍 사학자 알 마크디시 <창세와 역사서>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
-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 알 이드리시<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
눈부신 금은채색이 신라에 넘쳐난다
- <일본서기>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금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개나 원숭이 사슬도 금으로 만드는데
신라의 진골귀족이 집 전체에 금박 씌우는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집전체에 금박을 씌울 경제력은 과연 가능했을지 한번 살펴보자
짤의 건물은 뭔가 수수해 보인다.
그러나 저 건물은 정창원이라는 것으로 바로 일본의 덴노들의 보물을 모아놓은 보물창고이다.
한마디로 일본 황실 보물고. 우리로 따지자면 조선시대 내탕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역사와도 관련된 놀라운 보물들이 잠자고 있다.
굳이 학교의 교과서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면
신라의 지방행정력과 그 형태를 알게해주어 역사의 한페이지를 바꿔버린 바로 그 문서
신라 민정문서가 정창원 출신(?)이다.
이 민정문서의 중요성에 비해 우리는 민정문서 실물을 일본에 가도 볼 수 없다
why?
민정문서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 이라는 정창원의 불경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포장지이기 떄문이다.
즉 현대의 우리가 이면지 재활용 하는 것처럼. 민정문서 쓰고 오래된거라 포장지로 재활용 했다 이말이다.
저 민정문서는 사진을 찍고 다시 화엄경론질의 포장지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실물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민정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신라는 서라벌 몰빵의 지방통제 안되는 국가에서 촌구석 뽕나무 갯수와 키우는 개가 새끼 쳤는지까지 문서에 기록하는 국가로 재발견 되었다.
이처럼 정창원 보물의 포장지에조차 놀라운 유물이 잠들어 있는데 놀라운 물건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신라의 양탄자
엥? 우리 민족이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알라딘이 타고 다닐법한 양탄자를 만들었다고?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에서 표현된 신라 양탄자의 화려한 모습이다.
저 정창원의 보물중 신라의 양탄자가 있다.
이야 신라 수출품 ㅈ되네를 말하기 전에
저 양탄자의 수출은 과연 신라 정부가한 걸까? 를 따져봐야 한다
정창원의 신라 양탄자에는 오늘날의 태그가 붙어있다(1500년전 과거라고 현대와 다를바는 없다)
신라관등 17관등중 12관등 따리 집안의 자초랑이라는 아가씨의 브랜드가 수출되어 일본 황실 수장고 보물이 되어
1500년을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다.
즉 귀족집안의 아가씨가 브랜드 런칭을 하고 휘하의 장인들을 조져서(?) 수출을 해서 기업을 일궈 해 먹고 있던게 통일신라라는 사회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저 수출품들은 일본황실의 보물로 남았지만 신라 내수에서는 5두품 귀족의 수레용 깔개로 사용될 정도로 흔히 사용되는 소비재였다.
통일신라의 귀족들은 현대사회로 따지면 재벌기업이 권력을 쥔 구조라고 봐야한다.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들은 저택의 이름을 내걸고 각자 장인을 보유해 수공업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
725년(성덕왕 24)에 조남택(照南宅) 집안에 소속된 장인 사▨(仕▨) 대사가 주문을 받아 이 종을 주조했다고 새겨져 있다.
즉 현대에 국보로 남은 대종조차 국가에서 귀족사업체(?)에 주문해서 받았다는 것.
이외에도 에밀레종의 4배규모였다는 역사상 최고의 종인 황룡사 대종조차 35대 금입택 중 하나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장인이 주조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저정도 대종을 주문받아 납품하고 해외에는 수출하는 기업체 재벌집안이
어 저집은 돈 많이 벌어 집에 금 씌웠다더라 란 소문듣고 가만히 있었을까?
sns보여주기식으로라도 금박 따위는 씌웠다고 생각하는게 타당하다.
저 시대 귀족재벌들은 집에 금박씌우고도 남을 사치스러움과 재력이 충분하던 대귀족들이다.
현대시대에 100대 재벌이니 10대 재벌이니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신라 금입택 소유주들은 35대 금입택재벌이니 39대 재벌이니 따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진골귀족에 비하면 심지어 급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하급귀족이라고 생각되는 6두품조차 우리생각과는 달리 최상급 귀족이었다.
참고로 고구려 항복귀족은 6두품, 백제 항복귀족은 5두품을 줬다.
금입택이 충분히 존재했다고 신라시대 귀족들 경제수준을 보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번외로
정창원의 보물엔 또 무엇이 있을까?
포장한채로 수출했는데 포장지도 안뜯고 그대로 보물창고로 들어간 신라산 숟가락
유기하면 조선시대 안성유기? ㄴㄴ 유기그릇 원조는 통일신라
유기그릇과 접시 700여점 정창원 보관 중
신라팝도 한가락 들어보시라고
신라금과 신라비파...보내드려용
우리 먹도 잘만들어 하이쿠 지을떄 한번 써봐
놀고나면 피곤하니까 사포닌도 챙기셈
신라인삼 띵호와
그럼 신라는 수출만 했나? 팔아먹었으면 조금은 사주는게 상인의 도리 아닌갑쇼?
어휴 비싸보이는게 왔네? 흔해빠진 금으로 씌워라.
천마총 야광조개 국자
참고로 야광조개는 인도양및 태평양 서해안의 열대 산호초 지역에 서식한다...
뭐시여 이런 쓰레기 잡것은?
응애 나 야광조개야
뭐시라 앵무조개라는게 들어왔다고? 그걸로 술잔이나 만들어야 것다.
야광조개 술잔.....
참고로 앵무조개는 선캄브리아기 때부터 살아남은 살아있는 화석같은 생물인데
인도양·태평양의 열대 해역 수심 300미터 이하 심해에서 서식한다.
아따 로만글라스에 술좀 따라 마셔부러.
엇 손잡이가 떨어져 버렸네? 이거 귀한건데 흔해빠진 금실로 감아서 쓰자;;
로마산 황남대총 유리잔세트....
계림로에서 수도공사하다가 파낸 황금보검
트라키아라는 동네에서 황금보검이 왔다네.
금이야 흔하지만 가넷과 마노가 박혀있으니 그럭저럭 봐줄만 한가?
황금보검의 복원품이다.
참고로 트라키아란 현대의 불가리아 지방이다. 황금보검은 전세계에 온전한 실물이 저 신라 황금보검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벽화로 존재하거나 칼의 가드부분만 남아있다.
참고로 위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도 아니고 5세기 신라의 유물들이다.
좆밥시절이던 400년대에 조차 인도양산 야광조개, 로마산 유리, 불가리아산 황금보검이 쏟아져 들어오던게 당대 신라였다
이런 무역덕분에 중동에서도 상인이 많이 왔고,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이 중동인이라는 설이 굉장히 유력하다.
처용=도꺠비한테 마누라 ntr당한 ㅄ....대인배
참고로 신라 서라벌은 현대의 경주도시로 생각하면 안된다.
자꾸 현대의 경주 끌고와서 배후지가 어쩌니, 규모가 ㅈ만하다느니 하면서 내려치는데
당대 서라벌의 규모는 담장과 담장이 바다까지 이어지는 광역 도시였다.
즉 현재의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서울로 따지면 경기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서울이 아니라 수도권으로 봐야한다.
또한 생각해볼 일이다 당대 신라의 무역국가 기조와 여성들의 활발한 무역참여에 의한 신라의 시스템을 저평가 하고 있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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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저때 나오던 금은 다 쓴건가?? 역시 터를 잘 골라야...
개재밌다...
와 재밌다…
너무 재밌다
하 너무 신기해... 타임머신타고 가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