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여 생지옥의 참극을 만들었다.”
“세 사람을 쏴 죽이고 그 송장 위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수라제프카 동구 앞 벌판에서 33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사격, 포격,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참변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참변의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약한 사람 중에는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1년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 해제는 내부 투쟁을 격화시켰다." |
안녕하세요.
1921. 6. 28.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에서 일어난, 자유시사건 100주년을 추념하며, 사건을 요약하고 참고용 글을 적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러시아에서 작고 하신 리인섭 선생님 및 러시아에 계신 자유시 사건의 후손분들께는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해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략 아래와 같은 순서로 진행 예정입니다.
-자유시 사건-
1. 한국인의 만주, 간도, 러시아 이동 2. 1919년 3.1운동 3. 1920. 2. 29.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4. 봉오동, 청산리전투, 간도참변 5.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6. 군 지휘권 다툼 7. 마자나바(마사노프) 이탈 8. 화해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9. 사살명령 10. 1921. 6. 28. 수라제프카 포위, 조준사격 (일명 자유시 참변) 11. 사후처리, 참가자들의 증언 |
오탈자가 난무하고, 잘못된 번역이 많습니다. 수정중입니다.
좋은 의견이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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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간혹 다툼이 있는 부분은
1. 니항(오늘날의 아무르강 하루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 사건의 사망자 수입니다.
일본의 위키피디아 등도 최근에는
일본에 망명해 공산주의 타도를 위해 사실을 조작한 '구트만' 등의 친일 반공주의자의 주장들을 전부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대체로 백파쪽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은 '일본 천황에게 일본군을 보내어 니항의 볼셰비키들을 처단하라고 청원서를 쓰고 볼셰비키를 죽이는 공격에 가담한 결과 처형되었다'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측의 대부분의 기록도 공산주의 붕괴후에 '차르 러시아, 멘셰비키나 사회주의혁명당 계열을 더 이상 나쁘게만 평가하지 않고 있으며, 1920. 3. 12. 일경 볼셰비키를 공격하는데 가담하지 않았던
'일본인 어린이, 여자, 노약자, 죄가 불분명한 민간인의 처형에 반대한 볼셰비키들도 다수 억울하게 사망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서는 사망자수가 수십에서 수천명까지 다양한데,
대체로 1,000여명 미만이 사망하고, 1,000여명 미만 정도가 투옥되거나 노동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 자유시 사건을 리인섭, 김승빈, 최진일, 김재규, 이종학, 이동휘, 박일랴, 이용, 한운용, 김홍일, 박진순, 박애, 장도정, 계봉우 등은 이르쿠츠크파(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의 일방적인 학살로 규정하고 있으며,
까란다리시비리, 셰리쇼바, 오홀라,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리지택, 김낙현, (당시 러시아말을 몰랐던 이청천, 류동열) 등의 주장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과 같은 기록은 사실이고 자신들의 에세르(백파)와 친일파 지지 여부는 답변을 하지 않았으나,
사할린의용대가 니항에서 5,000여명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였고, 자유시에 와서도 자신들을 먼저 기습 공격하였기에, 수십명을 사살했고, 자유대대측은 1명의 사망자가 진짜 발생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주장입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은 일제가 독립군으로부터 ?? 획득한 문건으로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최진일, 김승빈, 이종학, 계봉우 등등의 증언과
러시아 정부 문서와 대조한 결과 '박병길이 니항을 해방시켰다. 박일랴 등이 5,000여명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무정부주의자다. 박일랴가 자유시를 먼저 공격하였다.'는 등등의 부분은 사할린의용대를 학살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다만 사할린의용대와 간도 독립군부대가 이만, 께르비, 자유시 일대에서 (6개월 이상 식량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고, 수만 루블을 (러시아 볼셰비키와 자유대대측에) 압수당하여) '강도짓'을 하였다는 부분은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이란 무엇인가? 자유시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증거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은 일제 침략자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측에서 획득하여 일본외무성의 비밀문서로 보관하여 오늘까지 전해져 오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문건입니다. 자유시 사건을 일으킨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주장이 잘 담겨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러한 허위 주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일부 사건의 발생 순서가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들과 일치되고 있어 단지 참고하고자 합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은 사할린의용대에 대한 사살명령과 무장해제 명령을 내린 과정을 합리화하려고 하였으나, 오늘날 공개된 사실과 대조하여 보면 대부분이 조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① 박병길이 니항에서 독립군부대를 만들었고 1920. 2. 29. 평화적으로 니항 해방을 했다. ② 박일랴는 니항의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주인공이며, 무정부주의자•아편중독자다. ③ 사할린의용대가 먼저 자유대대를 공격하여 어쩔 수 없이 반격하였다. ④ 사할린의용대가 먼저 1명의 자유대대측 병력을 살해하였다. ⑤ 사할린의용대 등은 러시아 주민을 약탈한 강도들이다. 등등의 악의적인 거짓말(무고)을 일삼고 있으나, 대체로 박일랴 측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주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박일랴 측은 이르쿠츠파를 ‘과거 연해주에서 일제와 협력하는 등 경력이 불분명하고, 친일 매국노라고 소문난 자들도 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자유시사건 당시 자유시 일대에 집결했던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이러한 이르쿠츠크 파의 거짓말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단지 독립군 내부에서 흔히 있었던 ‘군대 지휘권 다툼’에서 발단된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독립군은 자신들의 경험에 주로 의존하여 상황을 판단하였기에, ‘고의적으로 한쪽을 학살하기 위해 조작된 문서(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를작성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은 독립군 학살을 명령하거나 유도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