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생 1952년 10월 26일, 부산광역시
▶ 소속 이로재(대표), 국가건축정책위원회(위원장)
▶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
▶ 수상 2011년 제1회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 패션플러스 분야 건축부문
2010년 제5회 에이 어워즈 인텔리전스 부문경력 2018.04~ 제5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 기타 : ‘빈자의 미학’이라는 철학을 가진 건축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15년간의 김수근 선생 문하를 거쳐 1989년 건축 사무소 이로재(履露齋)를 연 그는 ‘빈자의 미학’을 자신의 건축 철학으로 삼고 작업 중이다. 수졸당(1993), 수백당(1998), 웰콤시티(2000)등으로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하였고 우리에게는 파주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로,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으로 널리 알려졌다. 집이 사람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그는 과연 어떤 인생을 설계하고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건축가는 예술가 이전에 지식인입니다.”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신 과정이 궁금하네요. ‘그림을 잘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월남을 했어요. 부산의 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뭐,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고, 만화책부터 모든 활자 매체를 좋아했어요. 책을 달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건축가를 가게 된 건 누님이 권해서였어요. 누님이 건축을 잘 알아서는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림도 꽤 그리고 공부도 곧잘 하니까 권하신 것 같아요. 제가 누님을 워낙 좋아해서 아마 누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따랐을 겁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건축과에 갔죠. 건축과가 뭔지 모르고 간 셈이에요.
단순히 어린 시절을 넘어서, 건축인생에서도 피난민촌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건축을 하거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결정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피난민촌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귀소본능의 공간으로 남아있어요. 물론 환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여덟 가구가 모여 사는 삶의 풍경을 늘 기억하고 있지요. 요즘은 한동네에 살지만 모여 살지는 않잖아요? 편의 때문에 붙어 살 뿐이지. 그렇게 모여 사는 모습이 지금은 하도 귀해서 오히려 새롭고 기억에 남아요. 모두가 찢어진 상태로 사는 지금, 공동체로서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 김수근 선생님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건축계의 거장인 김수근 선생님과 15년을 함께 하셨어요.
대학교 4학년 무렵에 김수근 선생님을 뵈었어요. 굉장히 거만하시더라고.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시고. ‘아. 이 독재 시절에 살면서, 저 사람 밑에 가서 일하는 건 정말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존경하는 은사님이 졸업을 앞두고 나를 방으로 부르시더라고. 갔더니 “자네는 김수근 밑으로 가게.”하시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하셨지. “좋은 제자가 있는데, 데려가라.”하고. 그러니 그냥 어쩌지도 못하고 “예.”하고 말았어요. 형편없는 녀석이니 가서 훈련 좀 받으라고 하신 건지. 지금이야 그 배려가 감사하죠.
그렇게 김수근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고, 이후에 3년 동안 김수근 선생님의 유언을 받아서 <공간> 대표를 했으니까 15년을 김수근 문하에 있었던 셈이지요.
▶김수근 선생님과 함께 한 세월은 어떤 의미인가요?
15년 동안 건축가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철저하게 배웠어요. 건축의 기본에서부터 건축이 해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건축이라고 하는 게 고객을 상대하는 거지만, 제 상대는 김수근 선생님이었어요. 김수근 선생님을 넘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던 것이죠. 선생님이 “낼 아침에 10장 그려 놔라.” 하면 저는 20장을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그리라고 한 거는 이건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그것보다 나은 게 이런 게 아닐까요?”하고 내밀면 선생님도 가끔 당황하시지만 즐거워 하셨어요. 뭐, 항상 일하는 게 그런 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김수근 선생님도 저와 직접 일하시길 좋아하셨죠. 제가 직급이 낮았지만 실장, 차장, 거치지 않고 곧장 제게 설계를 맡기시기도 했죠. 물론 대항하는 족족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했어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논리적으로 지고, 특히 미학적으로 철저히 패배하고. 스트레스로 엄청나게 술을 먹었어요.
▶ 중간에 다른 길로 방황한 적은 없으셨는지?
<공간>에 입사하자마자 거의 내리 석 달을 밤을 샜어요. 세상과 절연하고 <공간>이라는 공간에서 먹고 자고 했지요. 그러고 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서 1년 동안 외도를 하고는 또 다시 들어갔어요. 그러다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이 땅에 살기 싫어서 유학을 빙자하고 떠나버렸죠.
그 당시에 한국의 젊은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어요. 길거리에 나가서 데모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등지고 골방에서 사느냐. 나도 학교 다닐 때 꽤나 데모를 했어요. 고등학교 선배이자 과 선배인 형이 그 당시 학생회장이었는데, 매일 흰색 한복 입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독재 타도’를 외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한번은 이 선배가 나한테 “너는 데모하지 말고 건축만 하라”는 거예요. 보스인데, 이야기를 안 들을 수가 없었죠. 그 다음부터 길거리에 못나가고 제도판이 있는 골방에 나를 가두게 되고, 세상과 절연하고 건축 속에 저를 가뒀어요.
▶ 건축에 대한 생각을 바뀌게 해준 인물을 유학 시절에 접했다고 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을 하면서 아돌프 로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는 건축으로 시대를 혁명한 사람입니다. 아돌프 로스 이전의 세계 건축은 관습과 역사, 전통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아돌프 로스가 “장식은 죄악이다” 하면서 새로운 건축물을 빈 시내에 세운 거예요. 모더니즘이 탄생하는 실마리가 되는 건축이었죠. 건축이 시대를 바꾸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 거예요. 그걸 보며 건축을 통해서 혁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식인으로서의 사고가 없으면 그런 종류의 시대 판단을 할 수가 없죠. 건축은 예술가 이전에 지식인이어야 된다는 걸 확실히 안 거예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전까지 건축의 방법을 수정하고 새로 시작하려고 다시 김수근 선생님께로 돌아왔어요. 새로운 생각에 대한 확인도 김수근 선생님 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지난 시대가, 지난날이 나빴건 좋았건 그걸 기억하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빈자의 미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네요. 늘 ‘나눔’이나 ‘공동체’를 말씀하십니다. 승효상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에서 비롯된 말이 아닐까 하는데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김수근 건축을 하니까 참 허무한 거예요. 그 전에는 뭘 해서 보여주면 맞다 틀리다 분명한 대답을 들었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김수근 선생님이 없는 3년 동안의 작품은 사생아적 작품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승효상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89년에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승효상 건축에 대해서는 그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막상 독립하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죠.
그러다 저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에 있는 건축가들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어요. 4.3그룹이라고.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건축계는 학연으로 모여 있어요. 서울대. 한양대. 홍대. 이런 식이죠. 건축 단체장들도 그들의 리그처럼 나눠 먹기식이고. 그런데 처음으로 그런 연고를 제외하고 젊은 건축가끼리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조직을 만든 거예요. 밤새도록 논쟁 하면서 나는 남과 무엇이 다른가를 고민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그러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품고 있었던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고는 어느 날,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달동네 모습이 내가 어릴 때 살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거예요. 건축가적 시각으로는 그 공간 구조에 무궁무진한 건축의 지혜가 담겨 있었어요. 남루하고 초라해서 그렇지. 가난하여 가진 게 적은 그들은 많은 부분을 나누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 근사해. 그래서 서울에 있는 달동네를 전부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고 다녔어요. 그리고 1992년에 4.3그룹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할 때, 제가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을 내걸고, 이것으로 내 건축의 화두로 평생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죠.
▶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람들을 더불어 살 수 있게 만든다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승효상이 생각하는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집이 만드는 좋은 삶은 무엇입니까?
선함과, 진실함과, 아름다움을 매 순간 발견할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물질과는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가난한 집에 살더라도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감격하고, 지는 해를 보며 아름다운 감수성에 젖을 수 있죠. 이것은 비싼 집, 싼 집 가릴 것 없이 만들 수 있어요. 건축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죠. 내가 이 사람에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배율을 맞춰서 창을 뚫을 수 있고, 빗방울 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들리도록 처마를 낼 수 있어요. 조그만 침실이라도 그 사람이 사유의 순간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빛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죠. 건축을 통해서 얼마든지 사람들의 지적 감수성을 유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축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을 희롱하거나 농락하면 안돼요. 그건 죄악이죠.
▶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실 옛 집에는 다 있어요. 초가집이건 기와집이건. 우리가 회복시켜야 하는 기능이죠. 다시 말하자면 조금 불편하게 살아야 해요. 즐거운 불편함이지요. 우리는 지난 20세기에 기능주의에 매도되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인간 스스로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기능을 퇴화시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반기능적 건축이 인류에게 더 유효한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봐요. 예컨대, 방과 방 사이를 될 수 있는 한 떨어뜨립니다. 이 방에서 저 방 가려면 몇 발자국 걸어야 하죠. 그 사이에 바깥 풍경이 보여요. 그 사이에 생각을 하게 되고, 그만큼 공간은 풍부해져요. 스스로 불편하게 살려고 결심하고 그걸 실천하면 놀랍게도 삶은 굉장히 건강하고 아름답게 변합니다.
우리 회사 건물만 해도 5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불편하죠. 뭐 하나 버튼으로 되는 게 없고 전부 다 나가서 열어줘야 해요. 방들도 다 터져 있어서 소리 지르면 다 들립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생각하게 되죠.
▶옛 집, 옛 것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단지 반기능적 건축이 주는 이로움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요즘 자주 말씀하시는 ‘터무니’와 연결시켜 말씀하신다면.
네. 그건 지속 가능한 환경,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속 가능한 환경이라는 게 요즘은 왜곡되어서 생태 건축이나 그린 아키텍쳐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죠. 마치 사람을 죽일 때 쇠칼로 죽이지 말고 나무칼로 죽이자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부터 반환경적입니다.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반환경적이나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가 산 흔적을 다음 세대에 연장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가 요즘 집을 짓는 형태는 그 전에 땅에 있었던 모든 기억을 허물어 새 땅을 만들고, 축대를 쌓고 집을 짓잖아요. 그러니까 터무니, 즉 터에 새겨진 무늬를 다 없애버리는 거죠. 주로 그렇게 짓는 게 아파트죠.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이에요.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것은 옛날의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고쳐서 다시 짓는 거죠. 그러면 옛날의 기억에 새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덧대어져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요. 기억을 없애는 것은 지속적이지 않은 거죠. 그 다음 미래도 없어요. 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우리의 정치 행태도 그렇죠. 소위 말하는 ‘새 역사의 창조’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그건 조물주가 하는 일이죠. 우리는 전 세대의 업적을 흡수해서 그걸 바탕으로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난 세월 동안 새 역사 창조를 계속 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급조된 환경에서 천박하고 날조된 풍경밖에 만들지 못했어요. 지난 시대가, 나의 지난날이 나빴건 좋았건 그걸 기억하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은 어떠신가요? 집을 짓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일 텐데요.
사실 디자인은 독재적 결정의 결과입니다. 의논해서 민주적으로 선택할 수 없어요. 선의의 독재죠. 그렇다고 해서 잠자다가 뛰어나와서 “이게 디자인이다!”라고 하면 허무맹랑한 것이고요. 건축 디자인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는 집을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어야 되요. 무엇보다 개념이 뚜렷해야 하고. 전개시키는 논리가 있어야 하죠. 그래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협업을 하기 힘들다는 것은 개념이 부족하거나, 논리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일은 있지요. 건축주가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건축가는 이걸 거절할 수 있어야 해요. 건축가는 건축주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에요. 건축주의 뜻이 공공의 이익에 반하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건축주의 시녀밖에 안되죠. 건축가는 사회를 위해서, 시민을 위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독립을 한 뒤에 이런 경험이 많이 있었어요. 건축의 공공성 측면에서 설명을 했는데, 건축주가 자기 욕심을 부리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건 당신 집이 아닙니다. 이 집의 사용권은 당신에게 있지만 소유권은 시민과 사회에 있습니다. 이 집에 의해서 다른 사람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하고 말했더니 화를 내고 가버렸죠. 이런 과정을 못 견디면, 다시 말해 굶는 일을 못 견디고 굴복을 하면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더 이상 건축가가 아닌 겁니다. 그러나 공공의 가치를 인식하는 건축주를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신명 나도록 일에 몰두하게 되지요. 요즘은 전과 달리 그런 건축주도 많아졌어요.
▶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다스릴 수 있는 작은 분노를 품어야 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건축 철학이신 ‘빈자의 철학’과 맞닿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무인도에 가서 사는 삶이 아닌 이상 더불어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어떻게 서로 많은 가치를 공유하면서, 나누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저는 ‘특별한 보편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의 특별함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찾는 거죠. 자신의 특별함을 찾거나 특별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처한 현실, 장소를 잘 파악해야 해요. 한국 사람이라는 것, 이 시대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이 저를 구성하는 특별함이죠. 그런 내가 런던에 살고 있는 사람과 가치를 공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축을 예로 들자면 초가집을 그대로 지어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한국의 정신이 깃든 것을 지었는데, 런던에 사는 사람이 “아, 살만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즉 특별한 보편성을 띄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서로 공유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미리 선언하고, 그 선언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십니다. 저서와 강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하고 계시고요. 혹시 내가 한 말에 얽매일 것이 걱정스럽지는 않으신지요. 제 친구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빈자의 미학’이라고 선언을 하겠다고 하니, “야,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미리 선언을 하느냐.”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게 더 편해요. 그렇게 선언한 순간에 그 안에서만 놀면 되거든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있지요. 진리 안에서만, 그 울타리 안에서만 놀면 자유로운 거예요. 밖에 나가면 방향에 뭔지 모르니까 불안하고요. 그렇게 저는 저를 옭아매기 위해서 먼저 말을 합니다. 말을 하고, 선언을 하고, 그 안에서 놀려고 노력을 하죠.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혹시 노력하시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끊임없이 저를 객관화시키고, 타자화시킵니다. 야성의 나를 끊임없이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가 되려고 하지요. 제도권 안에 들어가면 스스로 타락하고 말아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런 말을 했죠. “지식인은 특별한 인연, 관계로부터 탈출한 자여야 한다.”고요. 건축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믿는 저로서는 그런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결코 대중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사투리도 쓰고, 말도 더듬고. 하지만 대중 앞에 서는 것이 건축가인 제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봉사라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나라 건축은 세계적으로 빈도수는 최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축은 세계 건축의 변방에 머물러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부동산일 뿐이거든요. 결코 문화가 아니에요. 지금 전 국민이 도시 유목민적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이데거가 “정주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못한다. 시적인 자만이 정주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시도 못 쓰고, 정주도 못하고 있어요. 물론 건축가의 책임도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축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강의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쓰고 그럽니다.
▶ 한국의 건축계를 이끄는 위치에 서 계세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예전에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안 영 아키텍쳐>라는 책을 봤어요. 그 중에 60대도 있더라고요. 현존하는 최고령 건축가는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오스카 니마이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지금 105살입니다. 저는 아직 60살도 안됐으니까 아직 갈 길이 멀죠. 이제 길이 좀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실천할까 하는 생각이에요. 나의 믿음대로 살 것인가의 문제죠. 건축은 역사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것 대부분 그 건축가가 70대에 설계한 것예요. 김수근 선생님이 55세에 돌아가셨는데, 그게 너무 가슴 아프죠. 지금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정말 세계적인 걸작을 충분히 만드셨을 텐데…. 물론 내가 아직도 그 밑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건축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브랑쿠시라는 조각가가 천신만고 끝에 파리로 와서 작은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벽에 이런 말을 써 붙였지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저는 이 말이 너무 근사해요. 풀이하자면 신처럼 재능을 숨기지 말고, 직능에 대한 자존감을 버리지 말고, 정말로 성실하게 일하라.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희생하라는 이야기인데, 건축가에게 참 좋은 말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분노를 품으라고. 자기가 다스릴 수 있는 작은 분노를 품으면 스스로 타락하지 않죠. 또한 그래야만 늘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요.
부산 난민촌에 살던 어린 시절_다섯 살 무렵, 아버지 품에 안긴 승효상. 그는 부산의 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덟 가구가 더불어 살았던 그 시절의 풍경은 이후 그의 건축 철학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사춘기 무렵, 그는 신학을 하고 싶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신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은 장남이 돈을 못 벌까봐 신학교 진학을 반대했다. 미술을 하겠다고 하자 더 반대를 했다. 옆집에 살고 있는 화가의 삶이 너무 방만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승효상은 누님의 권유로 건축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 수졸당(守拙堂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의 서울
논현동 자택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했고, 당호가 수졸 당(守拙堂)이다.
유홍준은 집의 당호를 수졸당으로 정한 이유를 잡지 기고에서 밝혔다. 그가 좋아하는 경구가 있다. 그 경 구중 '소중현대(小中顯大)'는 사랑방에, '대교약졸(大 巧若拙)은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한다. 소중현대는 명 대 서화가 동기창의 말로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나 타나 있다"란 뜻이다.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은 "위대한 재주는 별 볼일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 중 대교약졸에서 나온 말인 '수졸(守拙)을 빌어 수졸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가 승효상에게 설계를 맡기면서 요청했던 사항들이 재밌다.
1. 집장사보다 싸게 지을 것
2. 여섯 식구가 살려면 방 5개가 필요한데, 건평은 50정도로 할 것
3. 생활하는 기능은 아파트보다 편리할 것
4. 집의 분위기는 한옥보다 아늑하고, 공간분할이 유기적일 것
5. 집의 외형은 화려해서는 안 되며, 조용하고 단순한 가운데 멋이 있을 것
6. 대지가 북서향이라 채광조건은 나쁘지만 집은 밝고 명랑하게 지을것...등이다.
수졸당은 대지 71평에, 연면적 59평으로 지어졌다.
ㄷ자 형의 마당을 둔 옛집의 정취에 거실과 안방에서 안 뜰이 바라다 보인다.
안 뜰은 마루를 깔고, 한켠에 감나무를 심었다.
옛 가옥의 마당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울 강남구청역에서 학동사거리 쪽으로 워킹~ 영동고 건너편 이면도로 골목 안쪽에 있다.
골목길에서 보면 스쳐 지나갈 정도로 특별한 외양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 건물들보다 더 소박한 정도다.
이 집의 가치는 외부보다는 내부, 내부보다는 주인장의 철학에 있으니...
대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니 반호정사(盤湖精舍)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반호에 있는 정사, 의역하면 넓은 호수가에서 배움에 정진한다는 의미이겠다.
▶ ‘수백당(守白堂)’, 비움을 지키는 집.
“다양한 표정과 이야기가 있는 집”으로 외관을 흰색으로 마감한 것은 ‘비움’을 강조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건축가는 설명한다.
이름에 걸맞게 이 집에는 비어 있는 방, ‘방 밖의 방’이 7개나 있다. 영역 표시만 있고 하늘로 뚫린 방에 대한 건축가와 건축주의 애착은 남다르다.
“하늘로 뚫려 있는 방은 대부분 목적이 없습니다. 물을 담기도 하고 마루나 흙, 돌을 덮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공백입니다. 이 공백은 마당이 아니며 더더구나 정원이나 뜰이란 말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수백당을 이루는 ‘방 안의 방’과 방 밖의 방‘들은 모두 독립되어 있다. 더러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다른 영역을 만들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하나의 공간이 다른 공간에 종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다른 세계다.
수백당은 나지막한 2층집이다. 아니 1층집니다. 집주인이 건축 중에 2층을 요구해 와 2층을 만들었지만 집의 느낌은 세로로 긴 단층집이다. 이 집은 가로 30m, 세로 15m의 영역을 갖고 있다. 2대 1의 비율을 갖는 직사각형 대지는 주변 땅과의 타협 속에서 찾은 것이다. 이 고정된 영역은 다시 내부에서 12개의 서로 다른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식당과 침실을 제외하고는 같은 크기의 공간이 하나도 없으며 각 공간이 만들어 내는 표정도 제각각이다. 이 집의 각 실은 대지를 가로지르는 브리지에 연결된다. 각 실은 독립된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실의 배치는 여느 집과는 다르게 식당을 맨 앞에 두고 중간에 침실, 끝에 작업실을 두었다. 사랑방으로 사용되는 공간은 본채 영역에서 떼어 놓았다.
이 집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공간은 작업실이다. 가로 5m40 cm×세로 9m60cm의 크기에 2층 높이의 천장고를 가지고 있다. 작업실 안에는 원형의 화장실이 있으며 다양한 크기의 창문이 빚어내는 빛의 움직임으로 인해 공간은 수시로 변한다.
작업실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받침대 없이 만들어 놓아 하나의 조형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2층엔 침실 위에만 방을 만들었다. 식당 위의 공간은 비어 있지만 침실과 작업장 부분의 높이와 맞추기 위해 가벽을 둘렀다.
이 집의 외관은 백색이다. 건축가가 백색을 고집한 이유는 이 백색 위에 많은 그림과 자국이 그려지고 남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수백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직영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집 설계의 중요한 키워드인 보이드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집은 건축주, 건축가, 건축의 삼위일체로 만들어졌다.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건축가는 건축주의 삶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져야 하며 건축주는 그들의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건축가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독실해야 한다. 따라서 주택을 매개로 건축주와 건축가가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깊은 인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