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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내일의 죠’(1980)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는 본래 길거리에서 주먹 쓰기를 좋아하는 건달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가 그를 훌륭한 권투선수로 키워냅니다. 그런데 죠에게는 항상 내일을 향한 목표가 생깁니다. 일본 챔피언을 꺾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의 라이벌과 경기하던 중 라이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큰 실의에 빠진 그는 그 후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구토증상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는 큰 노력으로 동양 챔피언이 되었고 세계 챔피언과 시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이 떨리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챔피언전에 나서지 말라고 청합니다. 그렇지만 죠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치고는 숨을 거둡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후후…. 불태웠어…. 모두 새하얗게….”
다 타버린 연탄재가 연상됩니다. 뜨겁게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왔던 죠. 하지만 죠에게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 타버린 연탄재에게 고마워합니까? 치워야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죠”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늘 권투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에 목적이 부여되면 그 일을 하며 자신을 소진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지치고 소진되고 결국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어떤 사람이 꼴찌인지 말씀해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씩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내어주었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이 첫째고 그것밖에 안 주냐며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꼴찌입니다. 그 이유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제가 유학을 나가서 공부할 때 목적은 학위가 됩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자신을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목적이 됩니다. 학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며 학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허태균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고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시험을 보면 엄마도 같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하여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립니다. 왠지 그래야 자녀가 잘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 시험이 끝나면 더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 생활을 할 때 틈틈이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로 사고를 내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었다면 그 자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즐기지 못하고 군 생활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꼴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임 씨는 두 아이를 하나는 서울대에, 하나는 카이스트에 보냈습니다. 유 씨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미끄럼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온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는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재미있게 읽게 하고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 하였습니다. 공부하였으면 ‘폐인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폐인처럼 게임도 하고 TV도 보는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공부한 시간보다 두 배를 놀게 했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도 좋게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때 밀러 갑니다. 그런데 때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나갑니다. 굳이 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밉니다.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 오래 못 있습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목욕탕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래 즐깁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고 사우나도 하며 잠도 잡니다.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누가 목욕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 일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떤 봉사를 하든 행복해야 합니다. 사제로 살면 사제로 사는 하루하루가 목적입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열매가 맺힙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고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달 마감에 시달립니다. 바로 이 책, ‘쓰담쓰담’ 묵상집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 뒤에 후원회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입니다. 2016년 9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묵상집의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이미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써왔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단어에 힘듦을 매달 느끼고 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제때 묵상집을 발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난 6월처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고 회복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면 몸과 마음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마감이 없는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상태가 아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자극받아서 글을 쓰게 됩니다. 또 마감이 있어야 그 날짜를 염두에 두고 계획성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삶도 마감이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죽음에 자극받아 더 발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내 삶의 마감인 죽음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지금을 계획성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그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른 아침에 장터의 인력시장에서 일할 일꾼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 기온이 너무 높아서,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이 찾아갔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그 희망으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은 그냥 품고만 있는 게 아니라 꺼내어 놓아야 빛을 발한다(변종모).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