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막
동건은 1년이란 시간을 거의 매일 같이 수연의 가게를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수연의 꽃가게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피스텔을
얻어 그곳에서 산지 6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 동건을 매일같이 외면해온 수연에게 방금 전 동건의 회향(回向)적 고백을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동건은 뜨거운 눈빛으로 수연을 응시했고 수연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시선을 자신의 발끝에 두고 있었다.
동건의 머릿속에선 후회와 찬사가 서로 부딪쳐 여러 가지 생각들의 잔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과연 수연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 모든 촉각이 곤두서 있는 가운데 드디어 수연의 입에서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이미 전 선생님께 제 생각을 일러 드린 걸로 아는데요."
“.......”
“이곳에 찾아오시지 말란 말씀을 이미 여러 차례 드린 것으로 이해가 부족하신가요?"
동건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응수했다.
“아뇨 충분합니다. 하지만 수연씨가 저를 밀어내고자 하는 이유에선 절대 인정할 수가 없기에 전 끝까지 멈추지 않을 거란 것 또한
분명히 예기가 되었었지요.”
“저에 대한 죄책감, 동정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저 선생님 원망 안 해요. 처음부터 선생님 잘못 아닌 거 알고 있었어요.
사실.......
그때는 원망할 누군가가 제겐 필요했고 그 상대를 선생님으로 택했던 것뿐이었어요. 이런 말씀을 이제야 하게 된걸 많이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이 꽃은 사실 필요 없으니 그냥 가 주세요."
수연은 1년이라는 시간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해묵은 마음속에 이야기를 쏟아 놓고나자 마음 속 깊은 골목골목에서 배회하던
미안 함들이 고마움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와 빈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입은 생각과 달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워버린 표정에서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바뀐 수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동건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다물고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만다.
너무나 서운해서 실망스럽다 보단 일부러 뒤늦게야 얇아진 마음속 가림 막을 들추는 것이 못내 서러워서 목구멍으로 구멍보다
커다란 무언가가 밀고 올라오는 통에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채 닫아버리고 마는 동건. 다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동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죄책감이란 것은 없었어요.”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농밀하게 차오른 외로움이 가득한 눈으로 동건을 본다. 그러나 동건의 시선과 허공에서 만나자 분노에 이른
눈으로 어느 정도 원망이 녹아 있는 눈빛으로 변해갔다.
“제 말은 그런 이유에서 수연 씨를 찾아왔다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처음은 연민이었다 해두죠.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매일같이 걱정되고, 궁금하고, 안보면 보고 싶고, 생각하면 설래 이게 되는 거……. 이런 거…….
사랑……. 아닌가요?"
수연의 머릿속이 순간 하예지 더니 크나큰 상실이 있었던 날 가슴 한쪽에다 치워놓았던 본심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추기 시작했다.
마치 박하사탕 하나를 마음속에다 밀어 넣은 듯 가슴 한쪽에서부터 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동건이 힘없이 말을 내려놓고 문을 향해 몸을 돌려 걸었다. 너덜너덜 해진 가슴을 붙잡고 또 한 번의 회귀(回歸)를……. 회귀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는 하루가 또다시 쓰이고 있었다. 막 문밖으로 동건의 모든 몸이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이번 주 수요일 시간 되세요?”
그 순간 숨이 멎을 만큼의 환희가 동건의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멍한 머릿속에선 그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동건은 아무 말도 못한채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거리로 나왔다.
한순간에 뒤 바뀌어 버린 세상과의 대면에 순간 움찔했을 정도로 해연하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 장소를 순간 이동하는 웜을 통과해 나온 것처럼 한 순간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오랜 다림 끝에 얻어낸 수연과의 첫 데이트 약속하나로 동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신세계로 변해 있었다.
매일 보던 거리의 풍경이 아니었다. 우울하고 피곤하게만 보이던 행인들의 모습이 행복을 만나러 가는 환희에 찬 얼굴들로 변해
보였다. 몇 개 남지 않은 나뭇잎 때문에 쓸쓸해 보이던 은행나무 또한 결코 외롭지 않아 보였다. 쓸모없이 발길에 채이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를 두게 만들어 버렸다. 때때로 버겁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면서 좌절과 싸워온 1년이란 시간이 일순간에 위로를
받는 것 같아서 그것이 서운했는지 바람의 온도를 체감할 만큼의 눈물이 눈물샘을 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3. 첫 데이트
2014년 12월24일 수요일
이날은 동건 그리고 수연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었다.
1년 전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한 날이었고, 수연은 한 순간에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슬픔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또한 이날은
예수님 탄생을 하루 앞둔 축복된 날이었기에 그 어떤 이유에다가도 가감된 의미를 더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늘이란 날짜에 또 하나의 의미를 추억 속에다 새겨 넣으려 하고 있었다.
수술도중 계속해서 시간을 살피고 있는 동건을 향해 꾸짖는 듯하다. 눈빛을 보내고 있는 윤희, 그런 윤희의 눈을 의문을 갖고
바라보던 지성. 그리고 처음 수술 방에 들어와 초긴장 상태에 있던 인턴한명과, 어시스트중인 간호사 한명, 그리고 마취과
의사한명이 한 공간에 있었다.
윤희의 헛기침 소리에 잠시 산만했던 정신을 가다듬은 동건은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미안함을 가지며 다시 수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연과의 약속을 한 시간 앞두고 응급수술 환자가 병원을 찾아오게 된 것이 엇다.
약속시간이 좀 늦어 질 수 있다고 문자를 남기긴 했지만 생각보다 길게 늘어진 수술시간은 세 시간을 훌쩍 넘어서 까지 이어지고
있었기에 동건의 마음은 더욱더 조마조마해져 갔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약속시간을 어기는 것을 넘어 약속날짜를 어기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지만, 오늘이 가진 수명 고작 50여분이 전부였다.
주차장으로 황급히 달려 나온 동건은 생각 외로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차들을 보고 놀랐다. 오늘 같은 날 저차들은 왜 하필
이곳 에와 주차되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불러들인 생각만이 아니었다. 동건은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사 이를 빠르게
통과하며 연신 차량 리모컨에 그려진 나팔모양의 이미지가 새겨진 버튼을 눌러댔다. D주차구역에서 E주차구역 쪽으로 막
돌아서는 순간 전면 우측코너 방향에서 주광색 점등 불빛과 함께 짧게 끊어지는 크랙션 소리가 공허하던 지하 주차장을
시끄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동건의 눈앞에 새로 나온 경차 레이(Ray)와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구형 그랜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노란 경고등을 반짝반짝 빛을 뿜으며 동건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BMW 6시리즈 최고 사양인 M6쿠페가 눈에
들어왔다. 동건의 무거웠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흡족한 듯 밝게 웃는 얼굴이 차지하고 있었다. 차들이 많아 찾기 어려울
거란 예상과 달리 빨리 찾은데 서오는 기쁨도 한몫했다. 동건 자신의 차는 아니었다. 물론 동건의 능력정도라면 이정도 차는
조금무리해서라도 살 수는 있겠지만 평소 검소한 성격의 동건과는 거리가 있는 물건이었다. 차는 부자 아버지를 둔 후배의사의
차였다.
동건이 일전에 도움을 준 일도 있고 동건을 존경하고 있는 후배였기에 동건의 부탁에 오히려 감사하다며 흔쾌히 차를 빌려준
것이었다.
동건은 수연과의 데이트를 위해 오랜 기간 지켜온 권의의식이나 체면 따위는 이날만큼은 옷장 캐비닛 안에다 가운과 함께
걸어두고 나왔다.
동건은 수술실에서 빠져 나와서 바로 피 묻은 수술복을 탈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수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수연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었다.
지금 성당에서 내일 있을 미사 준비를 돕고 있으니 염려 말고 천천히 오라는 답장이 있었던 터라 그나마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오늘을 넘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전히 조급증이 뒤따르고 있었다.
동건은 수연과의 약속장소인 명동성당 앞으로 가기위해 반포대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하루 종일 꽉 막혀있던 대교 진입로가 자정을 앞에 두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한산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늘씬하게 잘빠진
M6쿠페가 막 반포대교 남단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여의도 한간둔치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는 가뜩이나 들뜬 동건의 마음을 더욱더 흥분되게 말 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리에선 다리양옆으로 화사한
금빛 조명을 받으며 뿜어져 나온 물줄기들이 워터커튼 (water curtain)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동건은 순간 이모든 것이 마치
수연과의 첫 데이트를 축복하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기획한 이벤트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 정도로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기분을 일순간 지워버리게 하는 상황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짧은 순간이 꿀 타래처럼 길게 늘어지고 있다는
자각이 들 정도로 기묘한 관경이 동건이 탄 차가향하는 차선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차선이 아닌 다리 난간위에
서 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검은색 상복 같은 것을 입은 여자가 다리난간 위에 올라서 있는 모습이 기억 속 잔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건은 머리에서 그 어떤 결정을 내릴 틈도 없이 발이 먼저 브레이크를 밟았다.
약속시간에 늦은 터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다리고 있었음에도 차는 흔들림 없이 최단거리의 제동거리를 만들어 세워졌다.
뛰어 내리듯 차 밖으로 나온 동건은 빠르게 지나쳐 온 길을 거슬러 뛰어갔다.
잠시 후 동건과 여자사이에선 왕복 8차선이라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장벽 없는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팽팽한 긴장 감속에 머릿속에선 불꽃놀이보다 더욱 정신없이 다양한 색의 불꽃들이 명멸하고 있는 통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런 가운데 차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을 가르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힘차게 내달릴 고 있었다.
동건은 순간 여자를 향해 소리 지를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판단이 급히 뛰어들어 이를 막아서는 바람에 생각을 실행치
못한다. 혹여 소리에 놀라 정말로 뛰어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서 이었다.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엉켜가고 있었다. 종내 가서는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길을
건너 저 여인을 설득시킬 것인가, 아니면 119에 전화해 양심의 가책을 다독여주는 차원에서 마무리 할 것인가.
그러나 싸움은 시작도 없이 손쉽게 끝나게 되고 만다. 양자택일을 놓고 고심하려는 순간 난간 위를 치솟아 오른 기둥하나에 겨우
의지하고 있던 팔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동건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동건은 고개를 들어 좌측을 한번 살피고는 빠르게 대로를 횡으로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4차선 도로를 횡단하는데 성공한 동건의 시선이 이번에 오른편에 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머릿속 계산기에서 연산이 끝나기도 전에 전두엽에선 성급한 명령을 다리로 하달해 버리고 만다. ‘달려’ 교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오늘따라 따스한 밤공기와 만나 옅은 물안개를 만들고 있던 터라 쉽사리 달려오는 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는 사실상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전두엽이 관장하는 공명심, 의협심, 충동적 성향 이런 것들이 이성과 지성의 의결권을 묵살하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위험에 처한 환자는 무조건 먼저 살리고 봐야 한다는 오랜 의사 생활에 의해 만들어진 습관적인 집착증이 모든 판단기관의
결정권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동건이 마지막 4차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크랙숀 소리가 휘황한 불빛을 앞세워 동건을 향해 덮쳐왔다.
이어서 노면과 타이어의 마찰소리가 소름 끼치게 뒤를 따랐다. 순간적으로 다리위에 여자보다, 자신이 먼저 죽음과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번엔 신경반사를 담당하는 중뇌에서 다리에 온힘을 다해 몸을 날리라 명한다.
동건의 몸을 연하게 비췄던 불빛이 순식간에 전신을 환하게 밝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건의 몸에서 사라져 버렸고 동건의 몸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떠오른 순간 시간은 또다시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느려지는 시간 속에선 한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릿하게 웃는 얼굴인가 싶더니 어느 순간 오랜 시간 보아왔던 슬픈
얼굴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가엾은 사람.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에 가장 큰 상처를 경험해야 했던 불쌍한 사람.
그렇게도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슬픈 기억이 그녀에게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 짧은 순간 동건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머리 쪽에서 통증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가물가물 의식이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경적이 멈추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미친놈아 죽으려고 환장했어? 너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님 나한테 죽었어. 새캬~ 교회 가서 예수에게 감사하다고
기도나해……. 에이 씨발놈”
동건의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는 동건의 몸과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한 차량 안에서 퍼붓는 악다구니였다. 차가 잠시
멈추는 듯 했으나 뒤이어 달려오는 차량의 불빛을 보았던지 빠르게 속력을 높여 다리 건너편 쪽으로 사라져 갔다.
동건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동건은 고개만 겨우 움직여 여자가 올라서 있던 난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여자도 동건을 보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때 동건의 시야는 눈앞에서 안개가
짙어지듯 서서히 흐릿해 져만 갔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한번은 어디선가 분명히 조우했던 얼굴인 듯싶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고기처럼 기억은 좀처럼 생각의 그물에 걸려들려 하질 않았다.
여자의 모습이 결국 스크린 뒤에 숨겨진 실루엣처럼 흐릿해 졌다. 게슴츠레 하게 뜬 동건의 눈이 몇 번을 껌벅이는가 싶더니
일순간 세상의 모든 명암이 사라져 버렸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 저……. 그 전화 이동건씨 휴대폰 아닌가요?”
수연은 전화기 너머에서 동건의 목소리 대신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얼굴에서 전화기를 내려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다.
[이동건 선생님]
분명 자신이 전화를 잘못 건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다시 얼굴로 가져다 댄다.
“저 혹시…….”
『아…….네……. 전 이 전화기의 주인은 아니고요, 반포경찰서 형사입니다.』
수연은 순간 당혹스런 나머지 물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형사는 상대가 반응이 없자 몸뚱이를 잘라낸 말 한마디를
툭하고 던져 상대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 시킨다.
『큰 사고는 아니고요…….』
“사고요?”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수연이 바로 반문했다.
형사는 예상대로 상대가 놀란 목소리로 반응해오자 마치 이러한 상황을 즐기기라도 한 듯 일부러 한 박자 쉬고 다음 말을 이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아참 그나저나 전화 거신 분은 전화기 주인분과 어떤 관계
신지요?』
순간 수연은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막막해 지고 만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관계를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스스로에게 조차 자문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질문이었다.
“ 그…….그게…….”
『아무튼 이분 지금 병원으로 이송 해야 하니까, 보호자 되시는 분과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가 갈게요…….”
동건은 쓰러진지 30분 후 자신이 일하고 있는 병원에 의사가운대신 환의를 입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119구급 대원이 동건의
지갑에서 명함을 발견한 것도 이유지만 그보다 사고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진찰 결과 무릎과 팔꿈치에 가벼운 찰과상만 있을 뿐 외관상에 커다란 이상은 없었고 엑스레이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비어있는 병실에 임시로 동건을 입원시킨 것이었다. 병실로 옮겨진지 한참이 지나서도 동건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경찰서로 돌아갔던 경찰이 4시간쯤 지나서야 다시 동건을 찾아왔다.
남자가 한명이 노크도 없이 불쑥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동건 곁에 앉아있던 수연이 놀라며 의자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 저 환자분 의식이 돌아 왔나요?”
“사고 경위서를 써야 해서요”
그제야 수연은 상대의 등장에 의구심을 품었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권위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아…….아직요.”
수연은 마치 죄지은 사람 마냥 목소리를 작게 했다. 잠시 후 밀폐된 공간에 낯선 이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지 헛기침을 하고는
침대에서 창가 쪽으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침대 끝 쪽에 서있던 경찰관이 수연이 서있던 자리로 와서는 가만히 동건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혼잣말처럼 수연에게 사정 얘기를 한다.
“어쩌죠? 제가 2시간 후에는 교대를 해야 하는데…….”
수연은 경찰관의 뒷말이 없어도 하고자 하는 말에 뜻을 알 듯 했다.
동건이 빨리 깨어나야 진술서를 받고 정시에 퇴근을 하게 될 터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는 오늘 같은 날 연장 근무를 해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됨을 하소연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또다시 노크 없이 병실 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경찰관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고 윤희가 입은 의사가운을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환해진 얼굴로 변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질문을 해대기 시작한다.
“저 선생님~ 이환자 상태는 어떤가요? 어제 깨어날까요? 깨어나긴 하겠죠?”
경찰관이 여라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속사포처럼 쏘아 댄다. 그러나 윤희는 이를 들은 척도 안했다. 침대 가까이 다가오는 내내
시선을 수연에게 둔 채 경찰관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침대 곁에 다가서서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이고는 윤희가 막 수연에게 무언가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경찰관이 윤희의
얼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저~ 선생님.”
윤희는 자신보다 머리하나 정도가 더 큰 경찰관의 눈을 올려보더니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몸을 홱~ 돌려 동건을 바로
보고 썼다.
동건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려놓고는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잠든 사람을 깨우듯이 말이다.
“선배~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어서요!”
수연을 의식해선지 평소와 다르게 여성스런 말투를 쓴다. 윤희가 깨우자 정말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동건이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걱정이 많이 돼서 슬퍼보이던 수연의 얼굴이 순간 심드렁하게 변하는가 싶었고 그와 달리 경찰관은 연장근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어서 이었는지 표정이 확연히 밝아지고 있었다.
“선배, 무릎과 팔꿈치 쪽에 가벼운 타박상하고 머리 쪽에 약간의 - 윤희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띄어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
찰과상이 있을 뿐 CT나 MRI검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이 멀쩡하니까 오늘 하루만 쉬고 일어나세요, 선배 때문에 나 오늘 같은 날
데이트는커녕 집에도 못 가게 생겼으니까, 선배가 나 델꼬. 살거 아니면…….”
수연을 의식한 나머지 너무나 많이 와버린 것이 뒤늦게 서야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얼른 화제를 돌린다.
“여기 계신 경찰분이 선배한테 궁금한 것이 많으신 것 같으니까요, 전 이따가 다시 올게요. 그리고 저기”
윤희의 손가락이 경찰관을 향하자 경찰관이 한발 옆으로 물러서 주었다.
“ 어…….여기 계시던 여자분 어디 갔지?”
윤희가 경찰관의 눈을 보자, 경찰관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들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이 알바 아니라는 듯
동건에게 다가선다.
윤희의 시신은 계속해서 그 곳에 있었고 눈길이 머문 자리에는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바람이 커튼 자락을 붙잡고
비키라고 하고 있을 뿐 수연은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 가까이 다가선 경찰관은 서둘러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 선생님 몇 가지 질문 좀 하겠습니다. 우선…….”
그러나 그때 느닷없이 질물은 가로채는 동건의 목소리가 자못 진지하게 말한다.
“그 여자는 살아있나요?”
예상 밖의 대답을 떠나서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며 되묻는다.
“여자라뇨?”
“다리 난간위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그 여자 말입니다.”
순간 경찰관의 표정 속에는 여자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보다 공들여 작성해 가지고온 질문지 전부를 다시 재수정해야 함은 물론
연장근무를 해야 함이 확실시 되고 있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이 더욱 농후하게 묻어나 보였다.
“아니 그럼 선생님께서 위험천만하게 교량 한가운데서 무단 횡단하신 이유가 자살하는 여자에게 달려가기 위해 그랬다는 말씀이
십니까?”
“네에?, 아니 그럼 제가 미쳐서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설마…….”
동건이 정색하며 말하자 경찰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경찰관의 시선은 여전히 동건의 두 눈에 고정한 채 두 손은 바삐 움직여 자신의 파카 주머니를 더듬었다. 주머니 하나에서
전화기를 꺼내 든 경찰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입을 벌려 말하려다 말고 수화기 쪽을 남은 한손으로 막으며 동건에게 잠시 통화를 하고 오겠다는 뉘앙스를
보이고는 문으로 향했다.
“선배 그게 무슨 얘기야, 여자는 또 뭐고?”
그전까지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의 얘기를 그저 듣고 있던 윤희가 경찰관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채근하기 시작했다.
병실에 남은 사람은 이제 둘뿐인지라 윤희의 목소리와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윤희가 다그치듯 물었지만 이엔 아무런
답도 없이 누운 채로 시선만 돌려 병실 안을 빠르게 훑더니 묻는다.
“ 지금 몇 시야?”
“ 오전 7시 반 ”
윤희가 가운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며 말한다.
“뭐야 그럼 내가 여덟 시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단 말이야? 수연씨 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이런…….”
동건은 혀를 차며 스스로를 힐난했다.
“뭐? 누구 수연씨? 수연씨가 누구야, 그…….그럼 혹시 아까 여기 있었던…….”
윤희가 좀 전에 창문 앞에 서있었던 여자를 떠올리는 순간 때마침 병실 문이 열리더니 수연이 안으로 들어선다. 두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료수 캔이 각각의 손에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동건이 수연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머리에 통증이
왔는지 한손으로 머릴 감싸며 짧은 신음을 토해낸다. 수연이 다급히 동건에게 다가가 일어나는 것을 만류한다.
“일어나지 마세요. 몸이…….”
“수연씨 미안해요. 저…….”
“아니에요, 괜찮아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마치 탁구장경기를 보듯 뜨악한 눈을 한 채 좌, 우로 시선을 돌려 보던 윤희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막아서려는 듯 한발 앞으로 나선다. 그러나 동건이 먼저 선수 쳐 말한다.
“조선생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줄래?”
“네? 아…….그래야지. 그럼요. 그럼 전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럼 말씀을 계속 나누세요.”
윤희가 자리를 비켜주기 싫은지 뭉그적거리자 동건이 미간을 오므려 뜨려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제야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는 윤희.
윤희는 무척이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동건의 표정, 자신에 대한 호칭, 이전에 없던 조근 조근한 어투를 조합한
결과 결코 자신이 이 자리를 버티고 서있어서는 안 된다는 묵시적 암시가 있음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로 문을 향한다.
“미안해요. 수연씨 약속장소로 가던 중에 그만…….”
동건이 지난밤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하자 수연은 의심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때론 공감하며 동요하고, 때론 동건의 기묘해
하는 표정을 따라 하기도 했다.
동건이긴 설명 끝에 목이 탄지 잔기침을 하자 수연이 정수기 쪽으로 가서 컵에다 물을 따라와 동건에게 가져다준다. 수연은
동건이 컵에든 물을 다 마시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중에 밖으로 나갔던 경찰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동건은 자살을
시도한 여자의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했을 비스듬히 누웠던 자세를 곧게 펴 바로 세워 앉았다.
동건이 호기심어린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경찰관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저…….”
경찰관이 무슨 이유에선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며, 수연을 곁눈질로 보았다. 동건이 조급증을 못 이기고 빠르게 채근한다.
“같이 들어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아니 그 여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경찰관의 표정이 일순간 진지해 지더니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동건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는 반문한다.
“지금 뭐라고 그랬습니까?”
3막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