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회에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한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아라”라고
외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안이숙' 사모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은 1908년 6월 24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훌륭한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며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선천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있을 때,
선생님들과 학생들 전원, 학교 관계자들과
일본인들과 일본 형사들, 목사와 장로들이
신사참배를 위해 정렬해 있었습니다.
모두가 일본의 조상신인 신사를 향해
큰 절을 올렸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엎드려 있을 때,
어여쁜 여교사가 홀로 서 있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학교로 돌아오자 일본 형사들 4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수실로 연행되어 갔는데,
그녀에게 호통을 치던 군수는 급한
전화를 받고선 황급히 밖으로 나가버렸고,
안이숙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가장 위험한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고, 평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한복 차림을 한 노인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 노인은 하나님이 안이숙을 찾아가라는
음성을 듣고 왔다고 했고,
안이숙은 그가 평남 십자병원의 의사이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서다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굴하지 않았던
박관준 장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경고하도록
하나님이 경성으로 보내시려고 함을 말했고
안이숙은 위대한 믿음의 용사를 만난 곳에
무척 기뻤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
몇 날 며칠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길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다니는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권능 목사님이었는데
목사님은 그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벙어리요?
예수님을 믿는데 왜 입은 꼭 다물고 살어?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입으로는 밥만 먹고 전도는 안하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 입니까?
복음을 전해야지 가만히 있는다고 평안할 것 같소? “
그 말에 안이숙은 해머로 머리를
쿵 하고 맞은 것처럼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고
안이숙은 하나님이 최권능 목사님을 통해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었다고 확신하고
박관준 장로님과 일본이든 어디든
가야한다는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단호했습니다.
“순종해라 내 딸아! 이것이 사명이라면
이 사명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딸이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을 지 알면서도
어머니는 일본으로 가야할
안이숙의 길을 밝게 열어주었습니다.
1939년 1월 안이숙은
박관준 장로님과 함께 동경으로 떠났고,
일본의 목사들과 장로들 정치가들 군인들을 만나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임을 알리고 다녔고,
조선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일본 국회의원들과 전세계에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전사로 소개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경고문 전단을 뿌린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안이숙은 며칠 뒤 평양 형무소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죄수번호 92번을 단
만주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17살의 나이에 늙은 사람에게 팔려가
시집을 가게 되었지만
남편을 죽이고 도망갔다가 붙잡힌 여자였습니다.
당시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 미쳐버렸으며
계속 고함을 지르고 대소변도 전혀 가리지 못해
독방을 쓰고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안이숙도 그 고성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그 괴성은 살려달라는
영혼의 부르짖음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안이숙은 간수에게 부탁해
그 여자와 같은 방을 쓰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안이숙도 미쳤다고 생각했고,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 같아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미친 여자는
아무 때나 안이숙에게 달려들어
사나운 행동을 했으며 공격을 가했습니다.
안이숙은 끊임없이 그 여인을 붙들고 기도했고
혹독한 추위 속에 그녀가 편히 잠들 수 있게
그녀의 얼음 발을 가슴에 품은 채
잠에서 깰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안이숙은 그녀를 위해 금식 기도를 했고,
귀한 양식을 그 여인에게 고스란히 주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아무것도 먹지 않아
안이숙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92번 여인에게 밥과 국을 떠먹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 여인은
안이숙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놀랍게도 미친 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당시 안이숙은
그녀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토록 큰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쓰레기 더미에 내다버린 한 영혼을 당신의 사랑은
이토록 다시 살리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저는 또 한번 이 엄청난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주님을 따라서라면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92번 여인은 결국 남편을 죽인 죄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녀는 사형 집행 직전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안이숙에게
“언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헤어지지 말고 살아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안이숙은
형무소에서 단추 다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일을 안하겠다고 하자,
화가 난 소장이 그녀를 불러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형무소 소장인 나는
대일본제국 천왕 폐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성스러운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57번에게 일요일도 일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자 57번 안희숙은 조금도 물러서지 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유창한 일본말로
소장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 안이숙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주장하시고
이루시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하고
이레가 되는 날에는 쉬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신분으로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
안이숙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안이숙을 째려보던 그 소장이
화난 표정을 풀더니 한숨을 내쉬며
낮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말로만 들어왔는데,
오늘 내가 그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았소”
안이숙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고
그 소장은 여자 간수장을 불러 앞으로
57번에게는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시간이 흘러
이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1945년 8월 안이숙의 사형 날짜가 잡혔고,
안이숙은 순교를 각오하며
준비를 차곡차곡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에게
믿음을 굳게 지키라 부탁했고,
신사참배 거부 자들과 천국에서 만나자며
작별 인사도 미리 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집행 며칠 전 8월 15일
일본 천황은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조선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이숙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혹독한 감옥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석방되었습니다.
6년이라는 시간을 혹독하고 더러운
감옥에서 처녀의 몸으로 견뎌 낸 것은
그 어떤 위대한 간증 보다도
예수님의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목사도 장로도 아니었던 그녀는
평신도의 신분으로 그 시련을 이겨낸 것입니다.
해방 이후 1948년 안이숙은
미국으로 건너가 김동명 목사님을 만나 결혼했고,
로스엔젤레스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했으며,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실패한 순교자 지망생이라며
자신을 낮췄지만,
한국교회는 그녀를 살아있는 순교자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전세계 선교 활동을 벌이다가 1997년 10월 1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제 밑에서 6년간 옥고,
사형을 앞두고 출옥한 실격한 순교자,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
- 감동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