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3.12.13.수요일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
이사35,1-4ㄷ.5-6.10 1코린1,26-31 루카11,33-36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개안開眼의 여정, 사랑의 여정-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오늘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간 떠오른 우리 연합회의 모토입니다.
“루멘체치스” 라틴어 발음도 명쾌하고 “눈먼이에게 빛을!”이란 뜻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무지에 눈 먼 맹인들입니다.
“눈먼이에게 빛을!” 말마디에 연이어 떠오른 말마디들입니다.
“길을 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을 잃은 이에게 희망을!”, “꿈을 잃은 이에게 꿈을!”
바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절박한 소망이자 우리의 선교소명이기도 합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빛을 잃고,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꿈을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근원적 처방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하나뿐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바람 나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이때”
일어나는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런 은총의 빛과 더불어 날로 맑고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지냅니다.
루멘체치스; 눈먼이에게 빛을! 이라는 선교소명을 뜻하는 연합회의 모토도 오딜리아 성녀로부터 유래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673년 레겐스부르크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기적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수녀원의 원장으로 소임을 다하다가 720년경 선종합니다.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맹인들, 그리고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오딜리아 성녀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녀 오딜리아와 더불어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빛을 뜻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성녀 루치아는 313년경 순교합니다.
모진 고문으로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루시아 동정순교자는 어둠을 밝히는 성녀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니 성녀 오딜리아와 너무 흡사합니다.
말그대로 두분 성녀 다 주님의 빛을 발하는 빛의 성녀들입니다.
빛의 성녀인 오딜리아와 루치아 두분의 전구로 우리 역시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치는,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가는 개안의 여정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개안의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주님의 등불이, 주님 은총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마음과 더불어 온몸도 환해질 것이고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 세상의 빛으로서 살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눈먼 무지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빛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요 우리는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우리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동정 성녀들이 주님께 바쳤던 그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초연함, 사랑의 정주 끝이 없습니다.
첫째,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에, 사랑의 빛에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살아야 할 이런 사랑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을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둘째, 사랑의 순수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동정 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사랑할수록 순수해지는 마음에, 날로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지혜의 눈 혜안입니다.
동정녀 축일 때 마다 부르는 저녁기도 후렴의 아름다움에, 은혜로움에 늘 감동합니다.
노래로 부르면 더욱 감동적인 첫째, 둘째 후렴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순결을 보존하여 찬란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신랑인 당신을 마중나가나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다.”
주님을 기다리는, 개안의 여정중인 대림시기에 잘 어울리는 기쁨 가득 선사하는 사랑의 고백같은 가사입니다.
그대로 성녀 오딜리아, 성녀 루치아의 주님 향한 순수한 사랑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바로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랑의 초연함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 깨끗한 사랑, 품위있는 사랑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상이 아닌 영원하신 하느님께 사랑의 닻을 내린 동정 성녀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 공감합니다.
“형제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러해도 안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랑의 지혜, 삶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의 정주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는 내적여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역동적인 정주는 산속의 강같은 삶입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동정녀 축일 저녁기도 세 번째 후렴이 바로 사랑의 정주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떼제 마르코 수사님이 참으로 좋아하며 극찬했던 곡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았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정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날로 초연한 사랑의 여정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이에게 빛을, 길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과 꿈을 잃은 이에게 희망과 꿈을 끊임없이,
한결같이 선물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