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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극과단(惟克果斷)
오직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惟 : 오직 유(忄/8)
克 : 이길 극(儿/5)
果 : 결과 과(木/4)
斷 : 끊을 단(斤/14)
출전 : 사기(史記) 129券 화식열전(貨殖列傳)
백규(白圭)는 주(周)나라 사람이다. 위(魏) 문후(文侯) 때 이극(李克)은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나, 백규는 시세의 변동을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백규는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는 사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사들일 때는 팔아넘겼다.
(...)
그는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루르며 옷을 검소하게 입고 노복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했으나, 시기를 보아 나아가는데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재빨랐다(能薄飲食, 忍嗜欲, 節衣服, 與用事僮仆同苦樂,趨時若猛獸摯鳥之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산업을 운영할 때는 마치 이윤(伊尹)과 여상(呂尚; 강태공)이 계책을 꾀하득 했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가 군대를 부리듯 했으며, 상앙(商鞅)이 법을 시행하듯 하였다.
따라서 임기응변할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 하는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어짊이 없거나 지킬 바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나의 상술을 배우고 싶어 해도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겠다(故曰; 吾治生產, 猶伊尹, 呂尚之謀, 孫吳用兵, 商鞅行法是也. 是故其智不足與權變, 勇不足以決斷, 仁不能以取予, 彊不能有所守, 雖欲學吾術, 終不告之矣)."
과단성(果斷性; 일을 딱 잘라서 결정하는 성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기(史記)'에는 재화(財貨)를 늘리는 것을 가장 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놓은 '화식열전(貨殖列傳)'이 있다.
중국 고대에 재화를 가장 많이 늘려 성공한 3대 상성(商聖)으로 범려(范蠡)와 백규(白圭), 호광용(胡光墉)을 꼽는다.
이 가운데 백규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자신이 재화를 늘린 방법을 소개하였다. 주로 마음가짐이다. 백규는 재화를 늘려 대부가 되기 위해서는 큰 부를 성취하기 위한 실용적 차원의 4가지 자격이나 능력을 제시하였다.
물가 등의 시세변화에 통달하는 지혜와 투자를 결단할 수 있는 힘과 남들이 버릴 때 취하고 남들이 취할 때 줄 수 있는 넉넉함인 인자함과 기회를 포착하는 강단 있는 힘을 중시하였다. 이 중에 과단성은 경제적 부를 성취하는데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서경(書經)'에서는 지도자가 공업을 성취하려면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무언가 처음에 작은 성과라도 그것을 완성하면 그것을 공(功)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공이 자꾸 축적이 되면 그것이 업(業)이다.
자신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의지이다. 의지가 없으면 아무런 일도 완성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성과를 자꾸 넓혀 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히 그 일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공은 더 이상 축적되지 않는다.
그런데 의지가 있고 부지런해도 기회를 보고 과감히 결단하여 실행하지 않으면 그 의지와 부지런함은 헛되게 된다. 이제마(李濟馬)는 사상인중 태양인이 과단성과 진취성이 유독 강하다고 하였지만 태양인이 아니라도 사람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화식가'의 대표로서 선택해 기술한 인물은 10여 명뿐이다. '화식열전'의 대표로 선택되는 데는 엄격한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화식열전'에서 언급되는 화식가는 당시의 수많은 화식가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상인이었다. 그들이 탁월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들에 대해 자본과 실력 축적 과정에서 각자가 지닌 장점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마천의 눈에 사업 현장에서의 이들은, 전쟁터에서 계책을 내고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모사(謀士)와 지자(智者)들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주나라 백규와 선곡 임씨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상업 경영에서는 "때를 알고(知時), 때에 맡기며(任時), 때를 따르는(趣時) 것이야 말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이다"라고 지적했다.
사마천이 말한 '시(時)'는 이른바 주로 시장 상황의 변화를 가리킨다. 시장 상황이란 천변만화의 복잡다단한 과정으로서 오로지 그 복잡한 현상에서 변화의 추세와 규율성을 찾아낼 때 비로소 '여시축(與時逐; 때에 맞추어 따라가다)'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시(時)에는 자연적 시기와 정치적 시기 그리고 시장에서 상품 가격이 등락하는 시기가 있다. 값싼 물건을 구매하고 값이 나가는 물건을 판매하는 최적의 시기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되며, 이것이 현대에서 말하는 '상품 동향의 예측'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를 과연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서 핵심적인 관건은 무엇보다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 변화 규칙을 파악하는 것이다.
시장 상품의 가격 변화를 예측하고 시기를 포착해 시기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전쟁과 동일한 이치이다.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상대가 준비되지 못한 곳을 공략함으로써 일거에 상품을 시장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상인들이 아직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상품을 수집하고 비축해 때를 기다리다가 정확한 시기에 시장에 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 상품의 가격이 극에 이르면, 생산자들은 더욱 생산에 박차를 가해 결국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고 가격은 자연히 하락하게 된다. 가격이 바닥에 이르게 되면, 생산자들이 감소해 서서히 그 상품이 희귀해진다.
그리하여 계연은 '가뭄이 들 때 배를 준비하고, 홍수가 들 때 수레를 준비하였고', 범여는 '여시축(與時逐; 때에 맞추어 따라가다)' 했으며, 백규는 '때의 변화를 살피는 것'을 즐겨했다.
이 모두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장 수요를 조사해 '시기에 맞춰 비축하고', 수요와 공급의 규율을 활용해 큰 이익을 얻는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전략을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구사한 사람이 바로 주나라의 백규와 선곡 임씨이다.
백규는 때의 변화를 즐겨 관찰하고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버린다"라는 원칙에 따라 곡물이 익어가는 계절에 그는 양곡을 사들이고, 비단과 칠(漆)을 팔았으며 누에고치가 생산될 때 비단과 솜을 사들이고 양곡을 내다팔았다.
백규는 상품이 계절에 따라 시장에 나타나는 이러한 틈을 교묘하게 이용해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선곡 임씨가 구사한 치부(致富)의 방식은 백규의 그것과 달랐지만 효과는 동일했다. 임씨는 전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곧 식량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 말기 호걸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금과 옥을 차지할 때, 임씨는 반대로 땅굴을 파고 그곳에 식량을 저장했다.
과연 전쟁이 계속되자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 쌀값이 만금에 이르렀다. 이때 임씨는 저장된 식량으로 호걸들의 금은과 바꿔 큰 재산을 모았다.
또한 다른 부자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사치했으나 임씨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업에 종사했다.
논밭과 가축도 다른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모두 싼값으로 매입했지만 오직 임씨만은 비싸고 우량한 것을 매입했다. 그들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모두 커다란 부호로 살았다.
그 밖에 범여와 교요 역시 사업의 시기를 포착하는 데 정확했다. 교요는 국가가 변경을 개척하는 기회를 이용해 목축업을 발전시켰다. 소와 말 그리고 양이 만 필이었으며, 식량은 만 종으로 계산했다.
도간의 뛰어난 용인술
'사기' '유경숙손통열전'에서 사마천은 속담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천금의 갖옷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무 가지만으로 만든 것이 아니듯이, 하·은·주 삼대의 태평성대는 한 사람의 지혜로써 이룬 것이 아니다."
무릇 천하의 모든 일은 많은 현재(賢才)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일꾼, 즉 직원을 만족시켜야 한다.
직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재적소, 적절한 직원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 적절한 직원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것에는 이른바 '인물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고객의 수요에 따라 직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런 연후에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사람을 기용하고 일을 맡겨야 한다.
'화식열전'은 수미일관하게 사람을 잘 알아보고 기용함으로써 부를 쌓은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가의 여부와 믿을 수 있는 조력자를 고르는 능력 역시 화식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범여는 사람을 선택하는데 능했으며, 연로했을 때는 자손에게 맡겨 경영하도록 해 부호가 되었다.
도간(刀間)의 경우는 더욱 전형적이다. 제나라의 풍속은 노예를 낮고 비천하게 여겼지만, 오직 도간은 그들을 아끼고 중시했다.
교활하고 총명한 노예는 주인들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대상이었지만, 오직 도간만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또 이용해 그들을 파견함으로써 자기를 위해 고기잡이나 제염을 하도록 하거나 혹은 상업에 종사하게 해 이익을 얻도록 했다. 그러면서 노예들을 관리들과 교류하게 했고, 갈수록 그들에게 커다란 권한을 맡겼다.
마침내 그가 이러한 노예들의 힘에 의해 가문을 일으키고 커다란 부를 쌓아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관직을 받느니 차라리 도간의 노복이 되겠다'라는 속담까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도간이 노복 스스로의 부를 쌓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도간은 교활한 일부 노예들의 본성을 활용함으로써 노예들 스스로도 부자가 되었고, 자신 역시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
일부 성격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좋은 지도자가 이끄는 '상황'과 '교육'의 힘에 의해 자신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일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이들 상인들이 용인(用人)에 능하고 부하들이 그들을 신뢰하게 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재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성공한 화식가는 반드시 효과적인 전략을 지니고 있다. 상업 전략에는 반드시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결코 일시적인 이익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화식열전은 이에 대한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촉군(蜀郡) 탁(卓)씨의 선조는 본래 조(趙)나라 사람으로 야금업을 통해 부호가 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탁씨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탁씨는 포로로 잡히고 약탈을 당해 부부가 수레를 끌며 새 이주지로 옮겨갔다. 그곳으로 이주한 다른 사람들은 인솔하는 진나라 관리에게 앞다투어 뇌물을 바치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탁씨는 "이곳 토지는 협소하고 척박하다. 문산(汶山) 아래에는 드넓고 비옥한 전야(田野)가 있고 땅속에는 토란이 자라나 능히 양식할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전혀 굶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 상업을 하기에 유리하다"라고 생각해 일부러 먼 곳으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탁씨는 임공 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곧 철이 생산되는 산에 가서 광물을 채굴해 풀무질하고 주조했으며, 인력과 재력을 기묘하게 운용하고 심혈을 기울여 경영했다.
결국 그는 큰 부자가 되어 한 국가의 군주에 비견되었다. 탁씨가 이렇게 큰 부호가 된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런 안목은 그들이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데에서 비롯했다.
역발상의 지혜를 발휘하라
선곡(宣曲) 임(任)씨의 선조는 독도 지방에서 양식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였다. 진나라가 멸망할 때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호걸들이 모두 금, 옥, 보물을 탈취했으나 임씨만은 땅굴을 이용해 곡식을 저장했다.
그 뒤 항우와 유방이 형양에서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을 때 부근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쌀 1석(石) 가격이 1만 전으로 뛰자 호걸들의 금, 옥, 보물이 모두 임씨에게로 넘어왔다.
임씨는 이때 큰 재산을 모았다. 다른 부자들은 모두 앞다투어 사치했으나 임씨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일을 했다. 논밭과 가축도 다른 사람들은 앞다투어 모두 싼값으로 매입했지만 오직 임씨만은 비싸고 우량한 것을 매입했다.
그들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모두 커다란 부호로 살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뛰어넘어 그 상식 뒤에 있는 본질을 꿰뚫어보고 남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대상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비범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을 예측하라
중국 춘추 시대에 '억(億)'이라는 글자는 예측(豫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희는 이 '억(億)'에 대해 '의탁야(意度也)'라고 풀이했다.
자공은 "물건이 희귀해지면 비싸진다"라는 원칙에 따라 상품의 수요와 공급 관계로부터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으며 정확하고 시기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정확한 시기를 포착해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하고 가격이 등귀했을 때 판매해 상품과 화폐의 상호 전화(轉化)를 통해 재부의 증식을 거둠으로써 시장을 성공적으로 운용한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또 계연은 천시(天時)의 변화와 농업 생산의 수준에 근거해 자신의 경영 방식을 예측하고 이를 실행했다. 그는 "농업 생산은 6년에 한 번 풍년이 들고, 6년에 한 번 가뭄이 들며 12년에 한 번 큰 기근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농업의 풍작과 흉작을 미리 알고 식량의 수요와 공급 추세를 예측해 풍작이 들 때 사들여서 비축하고 수해나 흉작, 가뭄이 들 때 판매했다.
백규는 목성의 운행을 농업 생산의 작황과 연결시켜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시장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부터 비롯된다.
근검절약하라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 근검절약이야 말로 재원(財源)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사기'는 이러한 근검절약의 좋은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백규는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지만"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욕망의 향수를 절제하며 기호(嗜好)를 억제하고 극히 소박한 옷만 입으면서 해마다 그를 위해 일하는 노예들과 동고동락했다."
사사는 "100대의 수송용 수레를 가지고 있었고 천하의 각 군국 무역에 있어 그가 일찍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曺)의 병씨는 "야금업으로 흥기해 수만금의 부호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부자 형제가 규약을 제정해 엎드리면 줍고 하늘을 쳐다보면 받아서 천하의 모든 곳에 고리대금업과 무역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재산이 왕후와 비견될 정도였지만 오히려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선곡 임씨는 그 부가 몇 대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일을 했다.
그는 가훈을 정해 자신의 밭농사와 목축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입지도, 먹지도 아니하고 공적인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서 본보기가 되었고, 부유해져서 황제로부터도 존중받았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라
'화식열전'은 말한다. 절약과 검소 그리고 노동은 재산을 늘리는 정확한 길이다. 원래 농사는 가장 우둔한 업종이지만 진양(秦楊)은 농사로써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부를 모았다.
도굴(盜掘)은 본래 법을 어기는 일이지만 전숙(田叔)은 그것으로써 부를 일으켰다. 도박은 비열한 업종이지만 환발(桓發)은 이것을 통해 부를 이루었다. 행상을 하며 물건을 파는 것은 대장부가 하기에는 천직이지만 옹(雍)의 악성(樂成)은 오히려 그것에 의지해 부유해졌다.
동물의 유지를 판매하는 것은 치욕을 느끼게 하는 일이지만 옹백(雍伯)은 이 일로써 천금의 이익을 얻었다. 장(漿)을 파는 일은 아주 작은 장사에 지나지 않지만 장씨(張氏)는 그것으로써 천만금의 재산을 모았다.
칼을 가는 일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기술이지만 질씨는 대귀족처럼 진수성찬을 먹을 정도의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일에 전심전력해 비로소 부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재물이 없는 빈민은 오로지 힘써서 일할 수밖에 없고, 재물이 있으나 많지 않을 경우에는 곧 지략으로써 조그만 재산을 취하며, 부유한 사람은 기회를 노려 투기를 함으로써 큰 재산을 모으게 된다.
이것이 재산을 얻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명제는 일찍이 사마천이 천명했던 바였다.
사업은 전쟁 같은 것… 유리할 때 움직여라
'사기' '화식열전'에서 백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경영을 할 때는 이윤(李尹; 상나라 탕왕 시기의 명재상)이나 강태공이 계책을 실행하는 것처럼 하고, 손자와 오기가 작전을 하는 것처럼 하며, 상앙(商鞅이 법령을 집행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므로 변화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없거나, 과감한 결단을 내릴 용기가 없거나, 구매를 포기하는 인덕(仁德)이 없거나, 비축을 견지할 강단이 없는 사람은 비록 내 방법을 배우려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알려주지 않겠다."
백규는 자신의 치생지술(治生之術)이 춘추 전국 시대의 병가와 법가 사상 및 학술에 대한 연구와 활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백규의 치부(致富)에 대한 근본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병법학에 따라 화식의 대강(大綱)을 논하는 사마천의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은 자신의 조상이 군공(軍功)을 세운 것을 자랑스럽게 기술하면서 자신이 병가(兵家)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나라로 간 (사마천의) 조상 중 일파는 검술 이론을 전수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괴외(蒯聵)가 그의 후손이다. 진(秦)나라로 간 사마착(司馬錯)은 장의와 논쟁을 벌였는데, 진나라 혜왕은 사마착에게 군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사마착은 이를 함락시킨 뒤 촉군 군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무안군 백기(白起)를 수행하였다. 사마근과 무안군은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장평에 주둔한 조나라 군사들을 생매장시키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진시황 시대에 괴외의 현손(玄孫) 사마앙은 무신군(武信君)의 부장으로 있었는데 조가(朝歌)를 순찰하였다.
군사는 전쟁에서, 사업은 시장에서 결정된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 자신 역시 20세 청년 시절 전쟁터를 누비며 낭중(?中)의 직책을 맡아 몸소 전쟁의 세례를 받았음을 묘사하고 있다. "낭중으로서 한나라 조정의 사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서 파촉(巴蜀) 이남 방면을 토벌하고 남쪽으로 가서는 공(邛), 작(笮), 곤명(昆明) 등의 지방을 경략하고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가의 후예이자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병법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태사령이 된 뒤 그는 병법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각종 병법서를 독파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군사 전쟁은 전쟁터에서 결판이 나고, 상인의 승패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상업의 경쟁은 사실상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과 상업은 그 기본적 전략 원리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
상품 경제는 일종의 경쟁 성격을 지닌 경제 형태이고,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경쟁의 형태이다. 이것은 상인이 처음부터 병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이다.
병법가들은 "이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이익이 없으면 머무른다(合迂利而動, 不合迂利而止)"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좋은 계책을 채택한 뒤,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작전 실행을 돕는다(計利以聽, 乃位之勢, 以佐其外/손자병법)"라고 한다.
이 '이익'이라는 말이 곧 상가(商家)의 생명이다. 병가(兵家)는 "아직 싸우지 않고도 미리 승리를 안다. 승리를 예측하는 것에서 보통 사람들의 식견을 뛰어넘지 못하다면 고명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지적한다.
상가(商家)에서도 이익을 예측하는 일에서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병가는 "작전을 잘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것을 알게 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 있는 오묘함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군대가 적군을 격파한 사실 그 자체는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전쟁은 기존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 되고, 서로 다른 상황에 맞게 다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무궁하다"라고 강조한다.
상가(商家) 역시 경영 책략에서 동일한 이치로 시장 변화에 따라 유연하고 적절하게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 한다.
바로 이러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마천은 전국 시대부터 진한 시기의 성공한 화식가들에 대해 기술할 때 '손자병법'의 원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큰 홍수 뒤에는 가뭄이 따른다
사마천은 화식 활동에의 종사를 용병술(用兵術)과 동일하게 파악해 사전 예측과 상업 기회 포착 그리고 뛰어난 사전 기획 등의 방책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화식 경영의 환경은 전쟁 상황과 동일하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잔혹하고, 대결과 경쟁 등 불확실한 환경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상장(商場)은 곧 전쟁터이며, 경쟁은 전쟁과 같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인이나 상공업자는 모두 하나의 동일한 생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어떻게 기회를 포착하고 위험을 극복하며 이로부터 자신의 생존 발전을 획득해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지피지기(知彼知己)와 시기에 따른 대응을 강조한다. '손자' '모공편(謀功篇)'에서는 "자신을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자신을 알지만 상대방을 모르면 1승 1패가 된다. 자신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라고 했다.
계편(計篇)에서는 "아직 싸우지 않고도 미리 승리를 안다면, 승산은 매우 많다"라고 했다.
허실편(虛實篇)에는 "물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그 방향을 조정해나가고, 작전은 상이한 적정(敵情)에 따라 상이한 책략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용병과 전쟁에는 고정된 방식이 없으며, 불변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적정(敵情)의 변화에 대응해 기민하게 움직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용병의 신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화식열전'은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이해하는 사람은 곧 평시에 군사 준비를 정비한다. 물건을 세상 흐름에 맞추어 사람들이 찾게 하려고 하면, 즉 평시에 물건을 이해해야 한다. 시세의 수요와 물건의 특징이 세상에 분명하게 알려진다면, 이 세상 수많은 물건의 생산과 수요·공급 규율 역시 알 수 있게 된다. 세성(歲星: 목성)이 금(金: 서쪽)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풍년이 들고, 수(水: 북쪽)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수해(水害)가 들고, 목(木: 동쪽)에 있을 때에는 기근이 들며, 화(火: 남쪽)에 있을 때에는 가뭄이 든다. 큰 가뭄이 든 뒤에는 반드시 홍수가 있기 때문에 가뭄이 든 해에는 곧 미리 배를 잘 준비해두고, 큰 홍수 뒤에는 반드시 가뭄이 있으므로 홍수가 난 해에는 곧 미리 수레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물자의 등락을 장악하는 도리이다.…"
가격이 올라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곧 떨어지게 되고, 가격이 떨어져 일정한 수준을 넘게 되면 곧 오르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가격이 올라 일정한 수준을 넘게 되면 물건을 마치 인분(人糞) 보듯이 하여 한 점 주저함 없이 내다 팔아야 하고, 가격이 떨어져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물건을 마치 진주 보듯이 하여 아무런 주저함 없이 사들여야 한다.
물건과 화폐는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유통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화식 활동에서 상인들은 마땅히 장군이 몸소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친히 전쟁에 나서는 것과 같아야 한다.
'손자' 모공편(謀功篇)은 "장수는 국가의 보좌(輔佐)이다. 보좌가 용의주도하면 국가는 반드시 강해지고, 보좌가 허술하면 국가도 반드시 허약해진다"라고 했다. 또 "상하가 뜻을 같이하면 승리한다"라고 했다.
부하들과 일심동체가 되다
또한 지도자의 소질과 임용 기준에 대해 '손자병법'은 "장자, 지, 신, 인, 용야(將者, 智, 信, 仁, 勇, 嚴也)이다"라고 말한다. 즉, 장군은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智)는 계략을 낼 수 있게 하고, 신(信)은 상벌을 내릴 수 있게 하며, 인(仁)은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용(勇)은 과단성이 있게 하며, 엄(嚴)은 권위를 세울 수 있게 한다.
한편 상업에서는 백규의 '상재사품(商才四品)'론이 있다.
1) 지족여권변(智足與權變)
시장의 경쟁은 무정한 것이며, 상업 상황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업 경영자는 반드시 시장 상황을 분석하는 것과 시장의 정세를 예측하는 것에 능해야 하고, 충분한 지혜와 많은 방책을 지님으로써 정확한 경영 전략 및 정책 결정을 수행해야 한다.
2) 용족이결단(勇足以決斷)
시장의 정보는 항상 불확정 상태에 있기 때문에 상업 경영과 이익 추구에서는 항상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인은 행동에서 과감해야 하고, 정책 결정에 용감해야 한다.
3) 인능이취여(仁能以取與)
상인은 모름지기 먼저 줌으로써 얻을 줄 알아야 한다. 직원에게 관심을 베풀고 좋은 물질적 보상과 격려를 제공함으로써, 직원들이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고객과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과 좋은 품질 및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상업 경영자는 장기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4) 강능유소수(强能有所守)
상인은 모름지기 강건한 의지가 있어야 하며, 신용을 분명하게 지키고 규정을 엄수해야 한다. 재능이 출중한 경영자라도 항상 상황이 좋을 수는 없다. 오직 의지가 강건하고 신뢰를 지키며 상업 규칙을 준수할 때만 성공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도를 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지도자는 이신작칙(以身作則), 즉 스스로 모범이 되어 실천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고 함께 비바람을 맞으며 위신을 세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 '손자오기열전'은 오기에 대해, "오기는 언제나 가장 낮은 병사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잘 때도 자리를 깔지 않았으며 행군할 때도 마차에 타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의 식량은 자기가 직접 가지고 다녔다. 그는 항상 병사들과 함께 있었으며 고락을 같이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부하들을 자신의 몸처럼 돌보는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을 잡아먹고 인골(人骨)로 취사를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도 병사들이 등을 돌리거나 도망치지 않는 군대는 손빈과 오기의 군대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기의 통솔력은 훌륭했다.
병법가와 장군으로서의 오기는 실로 뛰어나 '오자'라는 책을 보면, 오기가 위나라에 있을 때 76회의 전쟁을 했는데 그중 68회는 이겼고 나머지 8회는 무승부였다고 쓰여 있다.
또 '사기' '이장군열전'에서는 "이광 장군은 사병과 함께 식사를 했다. 군사를 인솔해 행군 중에 식량과 식수가 부족할 때 수원(水源)을 찾게 되면 모든 군사가 물을 마신 뒤가 아니면 마시지 않았고, 또 모든 병사가 식사를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도 식사를 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
한편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백규에 대해서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욕망의 향수를 절제하며 기호(嗜好)를 억제하고 극히 소박한 옷만 입으면서 해마다 그를 위해 일하는 노예들과 동고동락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부호로서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자기가 고용한 일꾼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이다. 성공한 상인과 걸출한 장군의 행위는 이처럼 유사하다.
백규의 이러한 모습은 '손자' 계편(計篇)에서 언급되는 도(道)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장군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고, 장군과 함께 죽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백규는 상업이라는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손자병법의 도(道) 원리를 거울로 삼아 일꾼들과 동고동락한 것이다.
그 목적은 일꾼들이 일을 하는 데 곤란한 점이나 생활상의 고초를 이해하고 해결하며, 그와 일꾼들 간에 존재하는 장벽을 없애 감정이나 물질적인 은혜로써 일꾼들에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로써 일꾼들의 적극성을 충분하게 자극하고 발휘하게 해 최종적으로 백성들과 장군이 더불어 뜻을 같이하는 단계에 이르고, 합심 단결해 경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게 하는 것이다.
경영자가 이러한 자질을 갖추게 된다면,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부하들의 충성을 받게 되며, 그로부터 상하가 합심해 다시 사업을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잘 선택하고, 때를 파악하라
'화식열전'에서 선곡 임씨는 "가훈을 정하여 자신의 밭농사와 목축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입지도 먹지도 아니하고 공적인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부유하였다.
'손자병법' '작전편'은 "병사들을 아는 장군은 백성의 생명을 책임지며, 국가 안위의 주인이다"라고 했다.
'세편'은 "전쟁을 잘하는 자는 자신에 유리한 태세를 잘 이용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임용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라고 했다.
'지형편'에서는 "병사를 젖먹이처럼 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으며, 병사를 사랑하는 아들처럼 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두 장군이 그 병사를 이해하고 그들을 신임하며 그들에게 가혹하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들을 기용할 때, 비로소 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가족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화식열전'은 범여에 대해 "천시(天時)에 맞춰 이익을 내는 데 뛰어났으며, 고용한 사람을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경영에 뛰어난 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선택하고 좋은 시기를 파악할 줄 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도간에 대해 "도간만이 노예들을 받아들이고 또 이용하여 이익을 얻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노예들을 관리들과 교류하게 하였고, 갈수록 그들에게 큰 권한을 맡겼다. 마침내 그가 이러한 노예들의 힘으로 집을 일으키고 치부하여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라고 묘사한다.
범여와 도간은 정확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기용해 재능에 따라 각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맡겼으며, 신임하고 존중하여 마침내 그들의 힘을 활용하여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그들을 신임하며 대담하게 기용한 것은 대전략가들과 대상인들의 또 다른 성공 요인이었다.
백규(白圭)는 전국(戰國) 시대의 유명한 상인으로서 사람들은 그를 '천하 치생(治生)의 비조(鼻祖)'라면서 속칭 '인간 재신(財神)'이라고 불렀다. 송나라 진종은 그를 상성(商聖)으로 추존했다.
백규는 경제 전략가이자 이재가(理財家)로서 범여도 그에게 치부(致富)의 방법을 자문받았다고 전해진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신흥 봉건 지주제가 각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확립되었다.
생산력의 신속한 제고에 따라 시장의 상품도 급속하게 증가했고, 사람들의 소비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거상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백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백규는 일찍이 위나라 혜왕의 대신이었다. 당시 위나라 수도인 대량은 황하에 가까이 있어 항상 홍수의 피해를 받아야 했다. 백규는 뛰어난 치수 능력을 발휘해 대량의 수환(水患)을 막아냈다.
뒤에 위나라가 갈수록 부패해지자 백규는 위나라를 떠나 중산국과 제나라를 유력했다. 이 두 나라의 왕이 모두 그로 해금 자기 나라에 남아 치국에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백규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는 제나라를 떠난 뒤 진(秦)나라로 들어갔는데,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백규는 상앙의 중농억상 정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진나라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백규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정치에 대해 혐오감이 강해졌고, 마침내 관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낙양은 이전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였다. 낙양 출신이던 백규는 본래부터 상업에 뛰어난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 시대 최고의 대부호가 되었다.
당시 상업이 급속히 발전해 상인 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공평한 매매와 정당한 경영을 실행했다. 하지만 일부는 희귀한 물건을 엄청나게 매점 매석하고 시장을 독점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리대를 해 폭리를 취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상인들을 두 종류로 분류해 한 쪽을 성고(誠賈)나 염상(廉商) 혹은 양상(良商)이라 했고, 다른 쪽은 간고(奸賈)나 탐고(貪賈) 혹은 영상(?商)이라고 지칭했다.
상성(商聖)으로 숭앙된 백규
당시 상인들 대다수는 보석 장사를 특히 좋아했다. 대상인 여불위의 부친은 일찍이 보석 사업은 백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규는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그 직종을 택하지 않고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해 농부산품(農副産品)의 무역이라는 새로운 업종을 창조했다.
백규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고 안목이 비범해 당시 농업 생산이 신속하게 발전하는 것을 목격하고 농부산품 무역이 장차 커다란 이윤을 내는 업종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농부산품 경영이 비록 이윤율은 비교적 낮지만 교역량이 커서 큰 이윤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해서 백규는 농부산품과 수공업 원료 및 상품 사업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백규는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나는 경영을 할 때는 이윤(李尹)이나 강태공이 계책을 실행하는 것처럼 하고 손자와 오기가 작전하는 것처럼 하며 상앙(商鞅)이 법령을 집행하는 것처럼 한다"라고 말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다
백규는 자기만의 독특한 상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 원칙을 여덟 글자로 만들었다. 즉,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라는 것으로서 바로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라는 뜻이었다.
구체적으로 상품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서 아무도 구하지 않는 그 기회에 사들인 뒤, 수중에 있는 상품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가격이 크게 오르는 그 기회에 판매하는 것이다.
어느 날 많은 상인이 모두 면화를 팔아넘겼다. 어떤 상인은 면화를 빨리 처분하려고 가격을 헐값으로 팔기도 했다. 백규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부하에게 면화를 모두 사들이도록 했다. 사들인 면화가 너무 많아서 다른 상인의 창고를 빌려서 보관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화를 모두 팔아넘긴 상인들은 이제 모피를 사들이느라 혈안이 되었다. 본래 그들은 누구에게서 들은 소식인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모피가 크게 팔릴 것이고 겨울에 사람들이 아마도 시장에서 살 수도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돌았었다.
그런데 당시 백규의 창고에는 때마침 좋은 모피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백규는 모피의 가격이 더 오를 것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모피를 몽땅 팔아 큰돈을 벌었다.
뒤에 면화가 큰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면화를 손에 넣지 못하게 된 상인들이 면화를 찾느라 야단법석이 되었다. 이때 백규는 사들였던 면화를 모두 팔아 다시 큰돈을 벌었다.
백규의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의 경영 원칙은 일종의 상업 경영의 지혜이며, 그것은 맹목적으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재산을 움켜쥘 때는 마치 맹수가 먹이에 달려들듯
사마천이 보기에 성공한 상인들은 모두 때를 아는(知時) 사람들이었다. 범여는 "도 지방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각국 제후들과 사통팔달해 화물 교역의 요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의 산업을 경영해 물자를 비축하고, 적절한 때에 맞추어 변화를 도모했다. 그는 천시(天時)에 맞춰 이익을 내는 데 뛰어났으며, 고용한 사람을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영에 뛰어난 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선택하고 좋은 시기를 파악할 줄 아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범여는 장소를 알고(知地), 때를 알아(知時)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규의 '지시(知時)'는 주로 사물에 내재된 규율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었다. 이로부터 시장 동향을 예측하고 자신의 정책 결정에 있어 맹목성을 감소시킴으로써 객관적으로 상품을 언제 매입하고 매도하는지를 파악했다.
백규는 상가(商家)에서의 '지시(知時)'는 곧 '때의 변화를 즐겨 살핀다'라고 인식했는데, 이는 풍흉의 예측에 근거해 경영 방침을 적시에 조정하는 것이었다.
백규는 초절정의 시기 포착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문학과 기상학의 지식을 응용해 농업 풍흉의 규율을 알아냈으며 이러한 규율에 따라 교역을 진행했다. 풍년이 들어 가격이 저렴할 때 사들여서 흉년이 들어 가격이 등귀할 때 판매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그 밖에도 백규는 일단 기회가 오면 곧바로 신속하게 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겨야 함을 강조했다.
사마천은 이러한 백규의 모습을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다"라고 묘사했다.
사마천은 말한다. "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敎誨之, 其次整齊之, 最下者與之爭."
선자인지(善者因之)는 상품 경제의 발전을 그대로 순응해 방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因)'은 순응과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자인지(善者因之)는, 가장 좋은 경제 정책은 경제 발전의 자연에 순응해 개인들이 생산하고 무역하는 활동을 그대로 맡기고 간여나 억제를 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여지쟁(與之爭)'은 국가가 직접 상공업을 경영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며 동시에 경제의 모든 분야에 간여해 전면적으로 상품 경제를 억제하는 것으로서, 선자인지(善者因之)와 대비되는 양 극단의 정책이다.
한편 '이도지(利道之)'는 개인이 경제 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순응하고 방임한다는 전제 하에 국가가 사람들이 어느 특정 분야의 경제 활동에 종사하도록 일정하게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도에는 마땅히 일정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농업과 공업이 균형적인 이익을 얻도록 보호하는 정책이다.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경제 피폐시켜
'교회지(敎誨之)'는 국가가 교화의 방법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분야의 경제 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거나 혹은 어느 분야의 경제 활동은 하지 말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다. 유가가 주장하는 예의로써 욕망을 절제하는 정책이다.
승상 공손홍이 "한나라 조정 승상의 신분으로서 남루한 포의(布衣)를 입고 식사도 한 가지 반찬만 먹으면서 검소하며 소박하게 생활한다"라고 말한 것, 한 무제가 복식을 존중해 백성들에게 국가에 재산을 바치도록 권했던 정책 등이 이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상 공손홍의 검소함에도 세속의 사치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바로잡지 못했다. 오히려 공명과 이익을 좇는 풍조는 더욱더 만연해질 뿐이었고, 복식에 대한 존중 역시 효과가 거의 없었다.
'정제지(整齊之)'는 국가가 행정 수단과 법률 수단으로써 사람들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고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해 제한하고 강제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중농억상 정책으로서 그것의 강화가 곧 '여지쟁(與之爭)'이었다.
사마천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과 무역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개인들의 일로서 국가 혹은 그 관리들이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것은 인민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나쁜 정책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국민 경제를 관리하는 가장 좋은, 즉 선(善)의 정책은 '인지(因之)'라고 역설했다. 이를 '선인론(善因論)'이라 지칭한다.
사마천에 따르면, 민간들의 사적 상업 활동과 관련해 국가에게 가장 좋은 정책은 경제 발전의 자연 규율을 준수해 상인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사람들의 재부 추구에 따라 생산을 발전시키게 되면 국가는 무한대의 재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이익으로써 장려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교화 혹은 계도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국가 권력을 운용해 조정과 제한을 하는 것이며, 가장 나쁜 정책은 바로 국가가 직접 경영함으로써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다.
사마천은 도가의 '청정무위'와 '여민휴식(與民休息)' 경제 사상에 따라 인간들의 영리 추구 활동을 자유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리해 그는 "빈부의 도는 줄 수도 뺏을 수도 없다(貧富之道 莫之予奪)"라고 천명한다.
그는 인간의 영리 추구 활동은 본래부터 자체적으로 내재된 규율을 지니며, 재부 증식을 존중하는 객관적 규율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나라 초기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예로 들고 있다. "한나라가 흥기해 이미 70여 년이 지났을 때, 국가는 태평무사해 홍수나 가뭄도 없었고, 백성들은 모두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각 군과 현의 곡식 창고는 꽉 차 있었고, 정부 창고에는 많은 재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한 고조와 한 혜제까지의 문경지치(文景之治) 시기에 시행한 요역과 과세 경감 조치 및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재정 정책은 한나라 중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즉, 문제(文帝) 때 전조세(田租稅)를 완전 면제하고 적대국에 대한 출병도 최대한 삼갔으며, 궁실 내 거기(車騎) 의복을 증가시키지 않고 휘장에도 문양을 넣지 않도록 했으며 지방에서의 특산 공물도 바치지 않도록 했다.
결국 문경지치(文景之治)는 중국 역사상 경제 발전 수준이 최고조에 올라간 성세(盛世)로서 한 무제의 흉노 토벌은 기실 이러한 경제력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한나라 초기의 '무위' 경제 정책이 경제 발전에 가져온 긍정적 효과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국가가 강대하고 인민이 부유해지는 좋은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다.
국가가 자원과 생산 독점해 이익 내는 행태는 사회 혼란의 근원
하지만 한 무제가 제위를 계승한 이래 잦은 흉노 정벌과 각종 수리(水利) 및 토목 사업과 궁중의 호화 생활로 인해 70여 년 계속되어온 '휴양생식' 정책으로 이루어놓은 재부가 모두 탕진되어 국고가 텅텅 빌 정도가 되었다.
이에 한 무제는 동중서, 장탕, 상홍양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점차 국가의 거시 경제 정책을 바꿔 간섭주의를 실행했다.
그러나 국가가 추진한 이러한 재정 확대 정책으로 인해 해내(海內)가 텅텅 비도록 고갈되고, 인구가 반감했으며, 대농부(大農府) 창고에 비축해놓은 금전도 모두 써버렸고 세금도 모두 군사비에 사용되어 병사들을 뒷받침할 수가 없게 되었다.
또 상공업 발전의 억제를 초래한 재산세 징수, 즉 산민령(算緡令)과 고민령 정책으로 "중간 이상의 상인 대부분이 파산했으며, 백성들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의복만 찾고 향락을 추구해 두 번 다시 전답을 사들여 생업을 경영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특히 한 무제가 상홍양을 기용해 염철의 국영화와 균수, 평준 정책을 강행한 조치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즉, 그러한 정책들은 결국 경제 발전의 객관적인 규율을 위반하고 그것이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고, 시기에 따라 매매를 결정해 재부가 증가하는 경제 자유주의와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관리들에게 시장에서 장사시키며 물건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관영 상업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가장 나쁜 정책의 극명한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사마천은 국가가 자연 자원을 독점하고 상공업 생산을 독점해 국가의 이익을 내는 행태를 극력 반대했고, 그러한 행태들이야말로 사회 혼란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 惟(생각할 유)는 ❶형성문자로 唯(유)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묻다, 알아보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 유)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묻다, 전(轉)하여 생각하다의 뜻이 있다. 또 음(音)을 빌어 발어(發語)의 어조사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惟자는 '생각하다'나 '사려하다',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惟자는 心(마음 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隹자는 꽁지가 짧은 새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유'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惟자는 단순히 '생각하다'나 '사려하다'를 뜻하기 위해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인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오직'이나 '오로지'라는 뜻으로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惟(유)는 ①생각하다, 사려(思慮)하다 ②늘어 세우다 ③마땅하다, 들어맞다 ④~이 되다 ⑤오직, 오로지 ⑥오직, 홀로 ⑦생각컨대 ⑧이(어조사; 伊, 是) ⑨~와(접속사) ⑩~으로써, 때문에 ⑪예, 대답(對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만 단(但), 다만 지(只), 생각 념(念), 생각 사(思), 생각 상(想), 생각할 임(恁), 생각할 륜(侖), 생각할 억(憶), 생각할 려(慮), 생각할 고(考)이다. 용례로는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삼가 생각하건대를 복유(伏惟), 삼가 생각함을 앙유(仰惟), 다시 생각해 봄을 고유(姑惟), 두루 생각컨대를 통유(統惟), 공경히 생각함을 장유(莊惟), 매 위에 장사 있나는 속담으로 매질하는 데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을 유장무장(惟杖無將),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분주하고 다사多事하여 날짜가 모자란다는 말을 유일부족(惟日不足), 먹는 것을 백성들은 하늘과 같이 여긴다는 말을 식유민천(食惟民天),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는 말을 인유구구(人惟求舊),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가볍게 처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죄의유경(罪疑惟輕) 등에 쓰인다.
▶️ 克(이길 극)은 ❶상형문자로 剋(극)의 간자(簡字)이다. 克(극)은 사람이 갑옷을 입은 모양을 본떠 갑옷의 무게에 견딘다는 뜻에서 전(轉)하여 잘하다, 이기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克자는 '이기다'나 '참고 견디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克자는 十(열 십)자와 兄(맏 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克자의 갑골문을 보면 맹수가 입을 벌려 돌도끼를 으스러트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승리를 거두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상대의 돌도끼를 이빨로 으스러트리는 모습을 통해 '제압했다'나 '이기다'는 뜻을 표현했다. 이것이 후에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十자와 兄자가 결합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克(극)은 ①이기다 ②해내다 ③참고 견디다 ④능(能)하다 ⑤능력(能力)이 있다 ⑥이루어내다 ⑦메다 ⑧다스리다 ⑨정돈(整頓)하다 ⑩승벽(勝癖: 지기 싫어하는 성질) ⑪그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길 승(勝), 견딜 감(堪), 참을 인(忍), 견딜 내(耐)이다. 용례로는 싸움에 이겨서 적을 복종시킴 또는 곤란을 이겨내어 마음대로 함을 극복(克服), 원래의 태도로 되돌아 감을 극복(克復), 제 사욕을 의지로 눌러 이김을 극기(克己), 속속들이 잘 밝힘이나 똑똑히 밝힘을 극명(克明), 집안을 잘 다스림을 극가(克家), 어버이를 잘 섬김을 극효(克孝), 적을 무찔러 나라를 평화롭고 안정되게 함을 극정(克定),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 내고 정려함을 극려(克勵), 어려움을 참고 이겨냄이나 곤란 또는 난관을 극복함을 극난(克難), 욕심을 눌러 이김을 극욕(克慾), 매우 풍요로움을 극풍(克豐), 잘 이행함을 극천(克踐), 능히 해냄을 극과(克果),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극근(克勤), 자기를 누르고 사양함을 극양(克讓), 이겨서 복종시킴을 극종(克從), 사사로운 욕심이나 그릇된 생각을 눌러 다스림을 극치(克治), 싸움에 이김을 극첩(克捷), 충분히 감당함을 극감(克堪), 난관을 극복함을 초극(超克), 온화하고 공손함을 온극(溫克), 시새워 이기려고 함을 기극(忌克), 충분히 조사함을 심극(審克), 권세를 믿고 함부로 돈이나 물건을 거두어 들임을 부극(掊克), 욕망이나 사된 마음 등을 자기자신의 의지력으로 억제하고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극기복례(克己復禮), 네 가지 악덕으로 남을 이기기를 즐기는 일과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일과 원한을 품는 일과 욕심을 내고 탐내는 일을 이르는 말을 극벌원욕(克伐怨慾), 성인의 언행을 잘 생각하여 수양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성인이 된다는 말을 극념작성(克念作聖),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 길을 개척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극세척도(克世拓道),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을 이유극강(以柔克剛) 등에 쓰인다.
▶️ 果(실과 과/열매 과, 강신제 관)는 ❶상형문자로 나무 위에 열매가 열린 모양을 본 뜸, 또 열매를 맺는다는 데서 일의 결과나 혹은 과감히 함을 뜻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果자는 '열매'나 '과실', '결과'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果자는 木(나무 목)자와 田(밭 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果자의 갑골문을 보면 나뭇가지 위로 열매가 맺힌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이것이 간략하게 田자로 표현되었다. 과실수는 일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가을에는 잘 익은 과일을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果자는 비단 열매만을 뜻하지 않고 어떠한 일의 최종 '결과'나 '결실'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果(과, 관)는 (1)결과(結果) (2)인연 소생(因緣所生)의 일체(一切)의 법 (3)불과(佛果) (4)과실(果實)이나 과실 나무를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실과(實果), 과실(果實) ②열매 ③결과(結果) ④시녀(侍女) ⑤과연(果然), 정말로 ⑥끝내, 마침내 ⑦만약(萬若), 가령(假令) ⑧과단성(果斷性)이 있다, 과감하다 ⑨이루다, 실현하다 ⑩속에 넣어 싸다 ⑪시중들다 그리고 ⓐ강신제(降神祭: 내림굿)(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열매 실(實),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인할 인(因)이다. 용례로는 결단성 있고 용감하게 행동함을 과감(果敢), 알고 보니 정말로를 과연(果然),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를 과실(果實), 과실나무로 열매를 얻기 위하여 가꾸는 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과수(果樹), 수행한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은 지위를 과상(果上), 과실 깎는 칼을 과도(果刀), 과연이나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를 과약(果若), 과실을 담는 쟁반을 과반(果盤), 과단성 있고 예민함을 과예(果銳), 딱 잘라 용기 있게 결정함을 과단(果斷), 술과 과실이라는 뜻으로 매우 간소하게 차린 제물을 주과(酒果), 과실을 솎아냄을 적과(摘果), 뒤에 나타나는 좋지 못한 결과를 후과(後果),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결말을 결과(結果), 보람으로 나타나는 좋은 결과를 효과(效果), 일의 이루어진 결과를 성과(成果), 원인과 결과를 인과(因果), 온갖 과일을 백과(百果), 신선한 과실과 채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청과(靑果), 차와 과자를 다과(茶果), 말린 과실을 건과(乾果), 굳세고 과감함을 강과(剛果), 실과가 익을 대로 다 익지 못하고 저절로 떨어진 것을 낙과(落果), 행위에 대하여 그 결과를 몸으로 받는 일을 득과(得果), 미리 말한 것과 사실이 과연 들어맞음을 이르는 말을 과약기언(果若其言), 악한 원인에서 악한 결과가 생긴다는 뜻으로 악한 일을 하면 반드시 앙갚음이 되돌아옴을 이르는 말을 악인악과(惡因惡果), 착한 원인에 착한 결과라는 뜻으로 선업을 닦으면 그로 말미암아 반드시 좋은 업과를 받음을 이르는 말을 선인선과(善因善果),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딸을 먼저 낳은 다음에 아들을 낳음을 이르는 말을 선화후과(先花後果), 원인과 결과가 서로 호응하여 그대로 갚음을 이르는 말을 인과보응(因果報應),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를 이르는 말을 인과응보(因果應報) 등에 쓰인다.
▶️ 斷(끊을 단)은 ❶회의문자로 부수(部首)를 나타내는 斤(근; 도끼, 끊는 일)과 계(실을 이음)의 합자(合字)이다. 나무나 쇠붙이를 끊다, 일을 해결함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斷자는 ‘끊다’나 ‘결단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斷자는 㡭(이을 계)자와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㡭자는 실타래가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잇다’나 ‘이어나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실타래가 이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㡭자에 斤자를 결합한 斷자는 실타래를 도끼로 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斷(단)은 (1)결단(決斷) 단안 (2)번뇌(煩惱)를 끊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일 등의 뜻으로 ①끊다 ②결단하다 ③나누다 ④나누이다 ⑤결단(決斷) ⑥단연(斷然: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 ⑦조각 ⑧한결같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끊을 절(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을 계(繼), 이을 속(續)이다. 용례로는 일단 결심한 것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는 모양을 단호(斷乎), 먹는 일을 끊음으로 일정 기간 음식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먹지 아니함을 단식(斷食), 딱 잘라서 결정함을 단정(斷定), 죄를 처단함을 단죄(斷罪), 유대나 연관 관계 등을 끊음을 단절(斷絶), 결단하여 실행함을 단행(斷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함을 단속(斷續),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를 단연(斷然), 끊어짐이나 잘라 버림을 단절(斷切),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림을 단념(斷念), 열이 전도되지 아니하게 막음을 단열(斷熱), 주저하지 아니하고 딱 잘라 말함을 단언(斷言), 교제를 끊음을 단교(斷交), 어떤 사물의 진위나 선악 등을 생각하여 판가름 함을 판단(判斷), 막아서 멈추게 함을 차단(遮斷),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여 병상을 판단함을 진단(診斷), 중도에서 끊어짐 또는 끊음을 중단(中斷), 옷감 따위를 본에 맞추어 마름을 재단(裁斷), 옳고 그름과 착함과 악함을 재결함을 결단(決斷), 끊어 냄이나 잘라 냄을 절단(切斷), 남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의 의견대로 결단함을 독단(獨斷), 잘라서 동강을 냄을 분단(分斷), 가로 자름이나 가로 건넘을 횡단(橫斷),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단장(斷腸),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베를 끊는 훈계란 뜻으로 학업을 중도에 폐함은 짜던 피륙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훈계를 이르는 말을 단기지계(斷機之戒), 긴 것은 자르고 짧은 것은 메워서 들쭉날쭉한 것을 곧게 함을 이르는 말을 단장보단(斷長補短), 남의 시문 중에서 전체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따서 마음대로 해석하여 씀을 일컫는 말을 단장취의(斷章取義), 단연코 용서하지 아니함 또는 조금도 용서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불용대(斷不容貸), 떨어져 나가고 빠지고 하여 조각이 난 문서나 글월을 일컫는 말을 단간잔편(斷簡殘篇), 머리가 달아난 장군이라는 뜻으로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 장군을 이르는 말을 단두장군(斷頭將軍), 단발한 젊은 미인으로 이전에 흔히 신여성의 뜻으로 쓰이던 말을 단발미인(斷髮美人), 오로지 한 가지 신념 외에 다른 마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단무타(斷斷無他), 단단히 서로 약속함을 이르는 말을 단단상약(斷斷相約), 조금이라도 다른 근심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단무타려(斷無他慮),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어물어물하기만 하고 딱 잘라 결단을 하지 못함으로 결단력이 부족한 것을 이르는 말을 우유부단(優柔不斷),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듦을 일컫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어미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과 애통함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모원단장(母猿斷腸), 시작한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고 중간에 흐지부지함을 이르는 말을 중도반단(中途半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