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지식백과, 암 알아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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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캐롤이 울려 퍼지던 12월 중순,
경기도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에서
이해인 수녀를 만났다.
한풀 꺾인 추위에 거리의 눈은 모두 녹았지만,
고즈넉한 마을의 성당에는
아직도 눈꽃이 지붕에 남아
수녀의 정갈하면서도 청아한 분위기와 닮아있었다.
약간은 피곤한 얼굴로 들어선 수녀는
전날 밤에도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저녁에 있었던
강연과 사인회 일정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강연이 잡혀 있었다.
1945년 생, 67살의 여인으로
만만한 스케줄이 아니다.
게다가 대장암 수술 4년 차,
아직도 6개월에 한 번은
검진을 받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나 인터뷰 도중 피곤한 모습은 곧 사라졌고,
수녀는 이내 활기를 되찾았다.
웃음과 발걸음은 마치
소녀의 그것과 같이 맑고 가뿐해 보였다.
2008년 6월 말,
수녀는 한 성당에서 강연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온 몸의 길이
꽉 막혀버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해 초 화장실에서 혈변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무심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다.
그러나 그날은 식은땀이 흐르며,
예삿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7월 초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대장내시경을 받던 날 의사는
이상하게 결과도 설명해주지 않고,
오늘은 바쁘니까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여느 때 같았다면 내시경 결과를
조목조목 설명해줬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총장 수녀와 원장 수녀가
그녀의 방을 찾아 암이라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수술 얘기부터 꺼냈다.
바로 입원 가방이 꾸려졌고,
그렇게 등떠밀리듯 다시 병원으로 가서야
의사에게 암이란 진단을 들었다.
“화가 나거나 진단 결과에 대한
의심이 들진 않았어요.
다만, 차가운 바위에 내동댕이 치는 것 같은
‘캔서’라는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2013년이면 수술을 받은 지 햇수로 5년이 지난다.
정확히 2008년 7월 14일,
대장 직장암으로 30cm 정도의 장을 잘라냈다.
검사 후 바로 입원해 수술까지 채 보름이 안 걸렸다.
수녀는 얼떨결에 지나간 시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종양 크기는 약 5cm였다.
암세포가 림프절로도 전이된 3기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의 생존율은 30% 정도였다.
대장암 수술 중 난소에서도 이상이 발견돼
한쪽 난소도 같이 절제했다.
나머지 한쪽 난소에서는
작은 혹이 발견돼 여전히 관찰 중이다.
대장암의 원인 중 주요하게 꼽는 것들이
육류 위주 식생활과 섬유질 부족, 운동 부족이다.
수녀는 대장암에 걸리고 나서
육식을 즐겨 먹었냐는
사람들의 말이 가장 서운했다고 털어놨다.
종교에 귀의해 수녀로 살아온
40년이 넘는 시간은 육식 위주의
식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대장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지자,
육식을 즐겼냐는 오해가 생겼다.
암의 원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수녀는 과일이나 채소 등 섬유질이 많은 음식보다는
밀가루 음식 등을 좋아해 섬유질이 부족했던 것,
책 읽기와 글 쓰기가 좋아
운동을 소홀히 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어쩌면 여기에 이름이 알려지며 겪게 된
유명세에서 오는 스트레스까지
알게 모르게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가족력은 없었다.
그녀는 수술 후 6차까지
모두 30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도 28번 받았다.
흔히 말하는 탈모나 피부발진 등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은 심하지 않았다.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시작할 무렵,
간호사와 동료 환자들이 말해 주는
부작용을 들을 때는 겁도 났다.
고통 앞에서는 성직자도 평범한 인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소풍 가는 기분으로 즐겁게 가자고 마음먹었다.
병원에 입원할 때면 병실에
이런저런 장식도 하고 밝은 기분을 유지하며
최대한 병원생활도 즐기려고 애를 썼다.
그런 그녀의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수녀는 무려 58번의
힘들고 지난한 항암 · 방사선 치료를
큰 부작용 한 번 없이 모두 잘 견뎌냈다.
긍정적인 마음 하나로
아픔을 걷어내던 그 무렵,
수녀에게는 유독 암을 고친다는
건강식품과 민간치료센터의 유혹이 많았다.
이름이 알려진 덕분인지,
여기저기서 갖가지 좋은 식품과
무료로 고쳐주겠다는 제안이 넘쳤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좋은 음식들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너무 비싼 선물은 돌려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주치의의 지시에
따른 표준치료만 받았다.
여기에 오로지 보태어진 것이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3기 진단을 받았지만, 항문을 살릴 수 있어
인공항문을 만들지 않아도 됐던 것을 감사하고
(직장암은 항문과 가까이 있어
초기라도 항문을 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여러 수녀님들과
격려 편지를 보내주는
많은 이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투병을 시작하면서는
불안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고,
죽음을 즐겁게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죠.”
유서도 쓰고, 영정 사진도 찍어뒀다.
그때부터 무심히 보던 사물도 한층 애틋해지고,
늘 하던 일들도 새롭게 느껴졌다.
수술이나 치료 때문에 한동안 앓고 난 후에는
스스로 신발을 신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신기하게 금새 통증을 줄여주는 약이란 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 약을 군소리없이 받아들여주는
신이 주신 육신도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 한 소절에도
감사한 마음이 절로 넘쳤다.
수녀는 치료 후 자신이 살던
부산의 수녀원으로 내려가
암에 걸린 수녀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었다.
위암, 자궁암, 난소암, 유방암 등
암에 걸린 수녀들과 함께 만든
이 모임의 이름은 ‘찔레꽃’이다.
“고통의 가시와 함께 있다는 의미예요.
평상시 모일 때도
‘암환자 모이세요’라고 하기보다는
‘찔레꽃 모이세요’하니 부르기도 좋고,
또 얼마나 예뻐요?
찔레꽃은 장미꽃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 어릴 적 누이같고, 이모 같고,
엄마 같은 그런 꽃이죠.”
찔레꽃 모임은 서로 기도도 해주고
간식도 나누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한다.
아무래도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있다 보니
서로 말도 더 잘 통하고 의지가 된다.
투병기간 동안 썼던 글도 발표했다.
2011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암치료 후 그녀는
오랜 세월 겪어온 불면증 증세가 사라졌다.
체력은 조금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감사하며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수녀의 한쪽 난소는 아직도 관찰 중이다.
더 커지지 않고 나빠지지도 않으니,
그 또한 감사할 따름이라는 그녀.
최근 그녀는 자잘한 합병증이 이어져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도 하다.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던
통풍도 두 번이나 겪었다.
때로는 어깨에 석회질이 쌓여 통증이 느껴지고,
혈압약과 콜레스테롤 약도 늘 먹고 있다.
그래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얘기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그렇게, 삶은 그녀의 곁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수녀는
아직도 활기차고 씩씩했다.
또 밝고 유쾌했다.
때로는 소녀같은 에너지도 넘쳤다.
세월도, 아픔도 비껴 지난 사람만 같다.
아직도 소녀처럼 명랑한 수녀는
그렇게 나이를 잊은 채, 병마도 잊은 채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해인 수녀가 보내는 한 마디...
보호자에게
일반인보다
죽음과 더 가까이 있는 암환자지만
그렇다고 곧 죽을 사람 대하듯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무엇보다 사랑을 담아 환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환자에게
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 때문에
너무 힘들 때는 내 몸과 대화를 하며
고통을 객관화 시켜보는 것도 좋아요.
혼자 고통 속에 빠져
‘힘들다, 아프다고’만 생각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이
세상 어떤 아픔보다도 힘들게 느껴져서,
더 괴롭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그럴 땐 내 아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가만히 몸과 대화를 나눠보세요.
첫댓글 수녀님 건강하세요
마지막 시가 ㅜ눈물찡 건강하세요
멋있으시다….
ㅠㅠ... 건강한 마음이 최고다 진짜
너무 좋은글..좋은분이야
투병생활하신지 몰랐네... 어떤 결심 정말 좋아해서 필사 여러번 한건데 이런 사연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