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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우리대표팀이,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포스를 선보인 시기는
97년이다.
98프랑스 월드컵 출전을 위해 펼쳐진,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대표팀은 그 유명한 도쿄대첩을 비롯해
거의 모든게임을 완벽에 가깝게 승리하며
6승 1무 1패의 대단한 성적으로 꽤나 여유롭게, 조기에 월드컵 출전티켓을 확보한다.
이 중 당한 1패가, 이미 월드컵 진출을 확정한 뒤 치룬 일본과의 경기에서 당한 1패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무결점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대표팀이다.
그당시 대표팀의 수장인 차범근 감독은
독일식 선굵은 스타일을 즐겼고,
덕분에 최전방에는 제공권과 몸싸움이 탁월한 최용수가 중용을 받았다.
그당시 최용수는 아시아에서는 막을 적수가 없을정도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선보였고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피니쉬 능력을 선보이며
차범근 감독의 황태자이자,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월드컵 진출티켓을 확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가 되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누가 제일 축구를 잘하냐고 물으면
열의 아홉은 최용수라 답했다.
더불어, 월드컵을 앞두고
장기 부상에서 돌아온 황선홍이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최전방은 너무나도 든든했고
많은 이들은 월드컵 본선에서
황선홍-최용수 투톱에 대한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더구나, 그당시 차범근 감독이
3-5-2 포메이션을 즐겨 사용했기에,
이 둘이 투톱으로 뛰는것을 보는것은 당연한것이었다.
그렇게 차범근 감독은
98프랑스 월드컵 최종엔트리를 발표했고,
차범근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 스타일을 보여주는
4명의 최전방 공격진이 완성되었다.
그 면면은 화려했으나, 정작 월드컵에서는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물을 만들었던
98프랑스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최전방 공격수 4인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황선홍 이다.
94년 미국월드컵 볼리비아 전에서의
헛발 작렬로, 대국민 안티를 양성했으나,
그 대회가 끝난이후 황선홍은 분명 성장했다.
그 덕분에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황선홍은 맹활약했고,
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와일드카드로 올대에 합류하였다.
허나, 96년에 1년간 무려 70경기에 가까운 경기를 치루면서
개혹사를 당해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덕분에 월드컵 지역 최종예선에서 황선홍은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재활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월드컵을 2개월여 앞둔
98년 4월, 폭우가 쏟아지는
잠실벌, 한일전에서
황선홍은 멋진 발리슛으로 일본을 침몰시키고
애국가의 삽입장면으로 유명한
비오는 그라운드에 가슴으로 슬라이딩 하는 대단한 세레모니를 선보이며, 화려한 복귀전을 치룬다.
더불어, 월드컵 직전 펼쳐진
그당시 피파랭킹 2위의 체코와의 평가전에서도
0:2 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최용수와 함께 1골씩을 뽑아내며 2:2 동점을 만들어
월드컵에서 보여줄 황선홍-최용수 투톱에 대한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더불어 장기부상을 털고 복귀한 황선홍의 컨디션이 생각보다 너무 좋았고
골감각도 빨리 회복되어 그에 대한 기대는 분명 컸다.
뿐만아니라, 황선홍 스스로도 94년 미국월드컵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허나.. 프랑스로 출국하기 하루 전날밤 잠실에서 펼쳐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그 꿈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김도근의 왼발 스루패스가 길게 뻗어나갔고,
황선홍은 그 볼을 잡기위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부심은 이미 옵사이드 깃발을 올렸으나,
황선홍은 가속을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뛰쳐나온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
그렇게 황선홍의 꿈은 날아갔다.
허나, 황선홍은 프랑스월드컵 최종엔트리에 선발되어
결국 프랑스로 날아갔다.
첫 경기 직전까지도, 황선홍의 경기출장이 가능하다 못하다를 놓고
언론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황선홍은 프랑스에 날아가
벤치와 관중석을 달구다 돌아와야만했다..
피지컬과 발밑기술을 보유했던
만능형 최전방 스트라이커 황선홍.
그는 분명 대단한 공격수 였다.
연계플레이도 훌륭했고, 발재간도 좋았다.
결정력도 있었고, 몸싸움과 제공권도 훌륭했다.
분명 황선홍은 대단한 공격수였다.
그가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을 뽑아내지 못했으면 어쩔뻔했나..
굉장한 능력치를 보유했던 선수였음에도, 94년 볼리비아 전 하나때문에..
끝내 명예회복 못하고 은퇴했을지도 모를 그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서 폴란드 전 황선홍의 골은 여러모로 다행이다.
서두에 밝혔다 시피,
그 당시 최용수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였다.
아시아에서 그에 대항할수 있을 만한 스트라이커는
이란의 영웅 알리 다에이 밖에는 없었다.
96 애틀랜타 올림픽을 통해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낸 최용수의
90년대 후반 포스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98프랑스 월드컵 진출티켓을 순조롭게 획독하는데에는
최용수의 공이 가장 컸다.
특히나 일본은 최용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렸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최용수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부상이 있으니........................
아까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부분을 기억하는가?
한국이 그당시 최종예선에서 거둔 6승 1무 1패의 성적에서 당한 유일한 1패가
잠실에서 일본에게 당한 패배였다고..
아직도 그경기는 생생하다.
97년 11월 1일 토요일.. 한 낮에 펼쳐진 잠실 주경기장에서의
한일전.
한국은 이미 월드컵 진출을 확정한 후였지만,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플레이오프 진출을 넘볼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은 반면 여유로웠고,
그 당시 리그에서 활약하는
김기동과 같은 선수들을 테스트했다.
허나 김기동은 최악의 경기를 선보이며
결국 그의 국대 커리어는 그 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더불어 최용수는 이날 본인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부상을 당했다..
헤딩경합도중 일본 수비와 충돌해
코뼈가 부러진 것이다...
위에 언급했던것처럼, 필자 본인이 최용수의 이 부상을 굉장히 안타까워하는것은
이 부상 이후 최용수의 헤딩능력이 한창 대단했던 때에 비해
하향 되었다는 점이다.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마지막 경기 벨기에 전에서
최용수는 후반에 단독 노마크 헤딩찬스 2번을 얻지만
하늘높이 솟구치는 어처구니없는 헤딩을 선보인다.
월드컵 지역예선 당시 최용수의 헤딩은 높은 타점뿐만아니라, 정확도도 상당하여
헤딩골을 꽤나 뽑아냈다.
허나, 일본과의 경기에서 헤딩 경합도중 코뼈가 부러진 이후
최용수의 헤딩은
타점도 낮아졌을뿐 아니라, 정확도도 떨어졌다.
암튼, 개인적으로는 최용수가 97년 11월 1일 한일전에 당한
코뼈 골절부상이 상당히 많이 아쉽다.
더불어 최용수는 98프랑스월드컵 본선 첫경기였던 멕시코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언론과 팬들은 차범근 감독을 향한 폭풍같은 비난을 쏟았다.
왜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고, 김도훈을 원톱으로 뛰게 했느냐며..
이 이야기는, 잠시후 김도훈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암튼, 2차전 네덜란드전부터 출장한 최용수는
0:5의 대패속에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후반 교체투입된 만19세의 신예 이동국 보다도 임팩트가 적었다.
벨기에전은 더 실망스러웠다.
후반에 얻은 2번의 노마크 헤딩찬스를 무산시킨데 이어,
후반막판 홍명보의 스루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맞선 단독찬스도 어처구니 없는 마무리 슛팅을 선보이며
말아먹고 말았다.
최용수가 그 경기에서 얻은, 3번의 단독 찬스에서 1골만 성공시켰다면
한국의 월드컵 첫승은 4년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암튼, 최용수가 아시아용이라는 비아냥을 듣기 시작한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허나, 최용수가 보여준 훌륭한 타겟맨 역할은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차범근 감독이 원하는 색깔에 가장부합하는 공격수는
누가뭐래도, 최용수 였다.
사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전방 공격수중 가장 불우한 선수는
김도훈 이라고 할수 있다.
하필이면 황선홍과 최용수 사이에 출현하여..
전형적인 '낀 세대'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황선홍과 최용수에 치여
만년 3인자 이미지가 강했다.
허나 훌륭한 체격조건과 더불어
섬세한 발밑을 지닌 김도훈은
분명 훌륭한 공격수 였다.
그 당시 일본은 한국의 최전방 자원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일본에는 없는 대형 스트라이커를
한국은 수두룩하니 보유하고 있었으니..
분명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물론, 일본을 위로하자면
대신 일본은 섬세한 미드필더들을 많이 보유했었지 않았는가...
암튼,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김도훈은 대표팀에서 늘상 3인자의 이미지 였지만
그는 1인자가 되도 이상할것이 없는
충분한 기량을 갖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 월드컵 본선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기용할수 없는 황선홍의 대체자로서,
그리고 이제, 아까 최용수에대한 이야기를 하다 말았던 부분을 말해주겠다.
첫경기를 앞두고, 최용수의 몸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허나, 언론에 이야기가 새나가면
밖에서 쥐고 흔들것이 분명했기에
차범근 감독은 그 이야기를 언론에 하지 않았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고심끝에, 그간 사용하던 3-5-2 포메이션을 포기하고
미드필더진을 두텁게한
3-6-1 포메이션으로 멕시코전을 시작했고,
최전방 원톱에 김도훈을 기용했다.
허나, 하석주의 예기치 못한퇴장으로 경기는 삐걱 거렸고,
더구나 김도훈은 근육 경련까지 나서
경기중에 바늘로 피를 뽑아내서 응급처치를 하는 등
온갖 악재가 다 겹친 멕시코 전이었다.
더불어 3-6-1 포메이션을 쓰면서 중원의 후방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한
노정윤 마저,
경기도중 부상을 당해 실려나가 버렸으니..
첫경기는 분명 운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첫경기를 말아먹고 98 프랑스 월드컵 전체를 잃어버렸다.
김도훈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보여준
가장 최고의 장면은,
2차전 네덜란드 전에서
경기 시작하지 5분만에 최용수와 원투 패스를 주고 받으며 만들어낸,
옆그물을 출렁이는 슛팅이었다.
허나 그장면을 제외하곤, 김도훈이 보여준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쉽게도...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선수.
이동국 이다.
이미 이동국의 국대 발탁은 이동국이 고3 이었던 당시부터 얘기가 나왔던 부분이다.
결국 이동국은 포철공고 3학년 당시,
대표팀에 호출되어 훈련을 치뤘으나, 부상을 당해 A매치 데뷔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몇달 후, 98년 포항에 입단한 이동국은
입단하자마자, K리그에서 3경기 연속골을 뽑아냈고
가뜩이나 그를 눈여겨 보고있던 차범근 감독은
K리그에 데뷔하자 마자 그런활약을 보이는 이동국을 다시 안부를리 없었다.
결국 이동국은 월드컵을 2개월여 앞둔
98년 4월 자메이카와의 평가전에서
황선홍과 맞교체 되어 A매치 데뷔전을 치뤘고,
그 기세를 이어가
결국 만 19세의 역대 한국인 최연소의 나이로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합류하여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까지 뛰게 되었다.
아직도 이동국이 만 19세의 나이로 월드컵을 뛴,
한국인 역대 최연소 월드컵 출장기록은 깨지지 않고있다.
대패를 당한, 참혹한 네덜란드 전에서
후반 32분경 서정원과 맞교체 된 이동국은
네덜란드의 다비즈와 코쿠를 앞에두고 통렬한 중거리슛을 쏘아올리며
대한민국 전역에 희망을 알렸다.
근데 많은 이들이 이동국의 이 중거리슛만 기억하는데,
사실 이 슛팅은 반데사르 골키퍼의 손에 스친것으로 판정되어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이 코너킥을 이상윤이 올렸는데
이동국이 달려들며 다이빙 헤딩슛으로 연결하여
2번의 유효 슛팅으로 반데사르 골키퍼를 놀라게 했다.
결국 대표팀 막내로 합류한 이동국은,
함께 최전방 자원으로 합류된 형들보다 더 대단한 임팩트를 선보여줬다.
당초, 차범근 감독은 네덜란드 전 참패로
예선탈락이 확정된 후,
3차전 벨기에전에서도 이동국과 같은 어린 선수들을 중용할 뜻을 내비쳤으나
현재 축구협회 회장인 조중연 그 당시 단장과 그 부분을 두고 큰 마찰을 빚었다.
조중연 씨는 그 당시 월드컵 팀의 단장으로 현지에 함께했었다.
2차전 네덜란드전 대패이후 한국의 예선탈락은 확정되었고,
차범근 감독은 마지막 3차전 벨기에전에서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이동국과 같은 어린선수들을 중용할뜻을 내비쳤다.
허나 조중연 단장은 실망에 빠진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최정예로 스타팅을 구성해 월드컵 첫승을 해야한다고 외쳤고
결국 그 과정에서 차범근 감독은 경질되어
월드컵 대회도중 귀국 길에올라
힘든 시간을 겪어야했다.
결국 이동국은 벨기에 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긴 하나,
벨기에전 후반 막판 최용수가 날려버린 3번의 결정적 찬스를 보면서..
패기넘치는 신예 이동국의 모습을 떠올렷던것도 사실이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결국 이동국은 그 이후 여러번의 시련을 이겨내며
현재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우뚝섰다.
황선홍이 그랬던것처럼
이동국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골만 뽑아내면
모든것이 완성되며,
그에 대한 은퇴 후의 평가도
상당히 달라질것이다.
이렇게 한국은 90년대 후반 우리가 자랑할수 있는
훌륭한 대형 스트라이커 4인방을
98프랑스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시켜 데려갔다.
허나, 황선홍은 부상땜에 한경기도 뛰지못했고
최용수 또한 아시아 예선당시의 포스를 선보이지 못하며 무너졌다.
그를 대체해줄 김도훈도 세계의 벽을 실감하며 고전했다.
그나마 신예 이동국은 짧은시간이었지만 가능성을 보이며
대회가 끝난 뒤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 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다.
그리고 98프랑스 월드컵 당시 꾸렸던 정도의
최전방 자원이 또 이루어질까 싶을정도로
그당시 4인방의 면면은 분명 대단했다.
(특히나, 일본이 무척이나 부러워했었지..ㅎ)
이제 다들 은퇴하고, 이동국 하나 남았다.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굉장히 아쉬운 결과물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당시 대표팀이 무척이나 좋았고,
많이 그립다..
첫댓글 많이 아까웠던 월드컵.. 하석주 퇴장도 그렇구요.
대한민국 월드컵 사상 최고의 공격수들만 포진햇던 98년 프랑스월드컵엿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K리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레전드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대한민국이 낳은 역대 최고의 클래식 윙어. 스피드, 돌파, 결정력 까지 겸비했던 선수. 94년 미국월드컵 때에는, 경험은 적은데 패기만 넘쳐, 개인플레이를 좀 많이 부린것도 사실이나, 어찌됐건 스페인전 극적 동점골을 뽑아내며, 아쉬움을 달래게 했고, 그 이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가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고, 98프랑스 월드컵때는 컨디션이 좋았으나 대회직전에 아들한테 수두가 옮았었나? 그래가지고 컨디션 난조 ;;; 2002 월드컵때도 수원에서 좋은 활약 보이고 있었으나, 세대교체의 명분속에 히딩크 감독이 이천수, 최태욱, 설기현, 박지성, 차두리 등의 어린 측면 날개로 꾸리면서 서정원은 탈락.. 하지만, 은퇴하기 직전인 2006-7
년 오스트리아에서 뛸때까지도 끝까지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클래식 윙어. 지금 이런 날개가 있다면 참 좋을텐데..
2014년에국동이형인생골ㄱㄱ 근데 갑자기궁금한게 주휘민님은안정환선수에대해서 어떻게생각하시는지궁금하네요
2002년 월드컵때, 원톱으로도 훌륭한 모습을 선보였으나, 역시 안정환은 공격형 미들이 딱 맞는 옷. 그런 의미에서 본프레레 감독의 이동국-안정환 공존 시도의 실패는 두고두고 아쉬움... 남아공때 잠깐이라도 그러한 구성을 다시 보고 싶었으나. 안정환 본인도 원톱보다는 공격형 미들로 뛰는것을 가장 좋아라 하고. 안정환 커리어 사상 최고의 경기는, 99년 코리아컵 멕시코 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잠실에서 직관하면서, 안정환이 저 정도였나 싶었을정도로, 활동량도 대단했고, 뭐 볼이 있는곳에는 언제나 안정환이 있었던... 그 정도의 테크닉을 지닌 선수가 한국에 그리 많지 않기에, 근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난듯한 부분이 아쉽죠.
지금 나타났으면, 좀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에게있어서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 갈색폭격기 김도훈 선수 하 아쉽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봤습니다.
추천꾹
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였나요? 상대방 박스 문전에서 황선홍의 힐패스를 유상철이 이어받아 무릎트래핑이후 슛 - 골
새벽에 역대 한일전의 역사 다큐같은걸 재방으로 보다가 그 장면에서 '저 시절에도 저런 센스있는 플레이를 했던 사람이 있었네 누굴까'했는데 황새였더군요 그 힐패스 하나만 봐도 역시 얼마나 센스있고 머리좋은 스트라이커였는지 클래스가 남달랐다는걸 느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