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우리 여기서 그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약혼 이쯤에서 정리했으면 해.”
사방에는 온통 영문으로 된 간판들이 현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오색으로 반짝 트인
네온사인의 불빛 거리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 아름다운 거리 속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한 커플은 슬프게도 이별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사이사이가 비춰지는 그
모습들은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데, 정작 문제인 그 커플들은 풍경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아무 이상 없이 연인관계를
지속하며 지금보다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에서 연인까지 발전하기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여태까지는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고 약혼까지 치룬 사이였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다지도 냉랭한 모습을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런 거라면…”
“아니, 여기서 끝내. 그냥 충동적으로 이러는 거 아냐. 오랫동안 많이 생각해 온 일이야.”
늦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달빛을 가득 받아 한층 더 빛나 보이는 여자의 황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려 나부꼈다. 관능적인 몸짓을 취하는 아름다운 각선미의 선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대로 드러났다. 호리병처럼 타고난 몸매와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건강을 상징하는 듯 창백해보이지도, 그렇다고 연약해보이지도 않았다. 이정도면 다른 여자들에
비해 절대 뒤쳐질 외모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그녀에게 이런 충격적인 말을 감히
내뱉을 수 있는지, 그녀는 잠시 동안 100톤짜리 커다란 망치와 같은 둔탁한 물체에 얻어맞은
듯 한 통증을 느꼈다.
“장난하는 거지? 그런 거지? 어떻게 그 동안 나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어?”
제인의 곱게 뻗은 여성스러운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적막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상처 받은 약혼녀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냉정한
표정으로 제인을 무시하는 다니엘의 시선에 여태껏 그녀가 쌓아올린 자존심이 팍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제인에게 있어 남자라면 코에 발끝만치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서있는 남자, 다니엘만큼은 뭔가가 달랐다.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운명처럼 이끌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그녀의 놓치고 싶지 않는 첫사랑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제인을 정말로 좋아해. 그렇기 때문에
여러 번 생각도 해본 거야.”
“하,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제인의 애꿎은 입술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미 하늘같은 자존심에 지워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커다란 생채기를 내버려놓고선, 이제는 마음마저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헤어지고 싶어 하는 변명의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는 그의 말에 제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이별의 이유가 될 수가 없어. 단지 헤어지기 위한 구실밖에 되지 않아. 날 위해서
이러는 거라면 제발 그만둬.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제인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렇게 서로를 보살펴주고 편하게 잘 대해왔던
그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내심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어느 날 갑작스럽게 정해버린 그의
이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여태껏 제인이 그에게 한번
모진 소리 내뱉은 적 없고, 사랑한다는 믿음 하나로 잘 대해왔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걸 다 이해할 시간에 그녀는 머릿속이 터져
이해하기도 전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과분한 여자야.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만들어.”
“약혼까지 다 해놓고서 이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해.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어째서 너의 마음만 생각하는 거야?”
“이런 일로 제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원해.”
제인의 대한 미련이 한 올만큼도 묻어있지 않은 다니엘의 표정은 한결 그 자체였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변한 그녀를 보고서도 다니엘은 무뚝뚝한 무표정만 유지한 채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가면을 덮어쓴 것처럼 감춰버린 그의 표정에 제인은
지금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기분일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더 비참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누군가가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심정이었다.
단 어떤 남자에게서도 실연을 당해본 적이 없어 이런 암담한 심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
그녀로서는 이 감정이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잔인해. 당신이라는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면서 어떻게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
제인은 약혼을 다 하고 결혼을 앞두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품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다니엘 알몬드라는 사람의 여자라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비록 그녀와 다르게 국적이 두
개였고, 그는 동양인과 흡사한 외모를 가졌지만 인생의 단 한번 맞는 사랑을 한 것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실감이 채 얼마 가지도 않아 아득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벌써 그녀의 마음은 송두리째 빼앗아갔으면서 이제는 미련 없다고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려고만 하는 그가 무정하고 야속하기만 했다.
‘이럴 거면 아예 흔들어 놓지를 말지, 친구로만 만족하고 있을 때, 그냥 그렇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잖아. 왜… 왜, 날 흔들어 놓은 거야.’
그를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애타는 심정에 제인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첫사랑은 원래 이루기 힘든 법인데, 그 동안 그녀가 남자 알기를 우습게 내려 하늘이 내린
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벌은 그녀가 치르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하기만 했다.
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자신의 곁에서 보내도록 내버려둘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영영
보내버리면 그녀의 앞에는 이제 다니엘이 보이지 않게 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있는 곳이 아닌
어디 저 먼 곳으로 떠나버릴 것만 같이 위태로운 그의 모습에 더더욱 잡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 친구로서도 나설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괜히 하는 말 같은 그런 거 아니야. 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생각도 해보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이야. 나와 결혼을 한다면 제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게 너라면 난 행복해. 네가 어떻게 말하든 다 상관없어. 결혼은 진행대로 할 거야.
그러니까 날 위해주려는 척 헤어지려는 생각하지 마.”
“그만 둬.”
어쩌다가 사랑에 두려울 것 하나 없을 것만 같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을까. 벌써 다니엘은 그녀의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 에게 시선을 빼앗긴 듯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끝까지 다니엘을 잡고 싶었다. 빈껍데기라고 해도, 그녀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제인의 마음만을 더 애타게 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그녀에게
해줄 것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아보였다.
“제발 이러지 마. 이제는 제인도, 그리고 나도 성인이야.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제인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평생을 살아야 해. 제인이 행복할 거 같아?”
“날… 사랑하지 않아?”
이유 없는 집착을 하는 제인을 보며 그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대체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 항상 아무런 미련 없이 단칼에 잘라버리는
제인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여태껏 친구로만 자리 잡은 시간이 더 많았기에 그를 남자로 느낄 여유는 없었을 거라고
판단한 그는 이번 헤어짐이 그녀에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훨씬 더
간편하게 이별을 통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헌데 그녀의 반응이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빗나가고 있었다.
“……그래. 사랑하지 않아.”
그녀의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갈기갈기 짓밟고, 높을 줄 모르던 콧대마저도 꺾이게 한
이 남자가 너무나 미웠다. 자기 혼자 다 생각하고 결정할 찰나에 제인은 이 남자와 결혼할
생각으로 한껏 꿈에 부풀어있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그와 이별을 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분위기는 감히 그녀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사상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던 시나리오는 이런 최악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소중한 사람을 다니엘이라고 지목했어. 그런데… 왜?”
“그런 제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기대는커녕 실망만 하게 될 테니까. 이별의 아픔은 곧
이전처럼 사라질 거야.”
“아니!!! 사라지지 않아. 나는 여자 아니라는 거야? 이별에 쉽게 치유되고 상처 되는 그런 쉬운
여자인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야. 그 상대를 고르려고 했다면 다니엘은 나를 잘못 봤어.”
제인에 대해서는 다니엘 자신이 그 누구보다 친구로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결별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난생 처음 보이는 제인의 소유욕에 놀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왜 이런 식으로 제인이
흥분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다니엘은 그녀를 이해 시켜주고, 자신이 준비해왔던
말들을 하나하나 꺼내가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자신감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너를 좋아했을 것 같아? 친구였을 때부터? 아니면, 연인으로 사귈 때부터?”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지금 내가 제인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제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무심한 정혼 자는 그녀의 애간장만 잔뜩 타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이미 받을 대로 받아버린 충격인지라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충격 받지 않을 자신만은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렇게 후들거리는 다리를 제대로 주체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힘이 들었다. 제대로 서있는 것조차 버겁고 온 몸에 진땀이 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렵기에 앞서고, 정신은 혼돈스러웠다.
“내게 있어서 그 일은 정말로 중요해. 어쩌면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고,
무의미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지만 그 일보다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없을 거야.”
“다니엘이 원한다면 이해해 줄게. 나 진심이야. 너를 사랑해. 이런 느낌 누구에게도 가져본
적이 없어. 정말 처음이라고. 네가… 나에게 사랑이란 걸 알려 주었잖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애절한 표정으로 절규하는 제인 앞에서, 그는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가 뭘 어떻게 해준다고 해서 상처 받은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다시 사랑을 나누던 연인 사이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도 정말 최선의 노력을 한 결과였다. 순간마다 자신의 여자인 제인을 사랑하고 아껴주려고
노력했지만 다 허사였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 속에 꾹 눌러앉아서는 나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런 마음으로서는 제인과 함께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너를 버리지 마. 그렇게 하기엔, 제인이 너무 아까워.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마.”
“내가 좋으면 그런 건 아무것도 상관이 없는 거라고 다니엘이 그랬었잖아. 응?”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그녀와는 달리 다니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한테 민폐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니엘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일렁였다. 모든 결심을 굳힌 듯 초연한 그의
앞에서 제인은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성대한 의식만 치루면
그 뒤로 언제나 함께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그에게서 갑작스럽게 무서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될 줄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나에게서 떠나갔어. 이건… 갑작스러운 게 아니야. 그래, 그가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일인지도 모르잖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그가 미치도록 야속해보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빛 하나 꿈쩍 하지 않는 다니엘의 모습이 미치도록 차가웠다.
“그 여자 일 맞지? 지금 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다니엘!”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꾹 다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리고 그 예상은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제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그 앞에서 더 이상은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소식도 끊겼다며? 어디 살고 있는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서. 그런데도… 아직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제인이 함부로 말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야.”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나는 다니엘의 약혼녀인데,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여자가 솔직히 원망스럽고 미워.”
단지 태어났다면 다니엘의 누나로 태어나서 그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것뿐인데도 머리
속에서는 그 순간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인이 돈을 줘도 갖지 못했던 그와의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너무나 부러웠다. 이제 정말로 그에게 버림받고 있는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뭐야? 지난 세월 간, 너에게 보여주었던 내 마음은 뭐야? 다 거짓이란 거야?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에게 약혼녀로 보인 적 있니?’
“그녀는 나와 제인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접어둬.”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어? 그 여자가 아니면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럴 리
없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제인 워클린!”
상처로 얼룩진 제인의 눈빛이 너무나 아파보였다. 절절하게 다가와 애절하기까지 한 그녀의
눈빛을 다니엘은 애써 무시했다.
“그녀와는 아무 상관없이 지금 내가 제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솔직히 감이 잡히지 않아.
이런 애매모호한 감정 따위와 제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감정은 전혀 차원이 다른 거니까.”
제인은 이별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고 조각 같은 얼굴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남자는 바로
이 남자 한명 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차갑고 못된 남자라고 해도 약혼까지
다 해놓고, 이제 결혼만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별을 결심했다면 보통 미안하단 기색
한번이라도 내비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니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니엘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대답에 모든 것이 갈려있었다. 놀란 눈빛으로 제인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제인의 진지한 눈빛을 바라보자 긴 한숨을 지으며 무거운 입을 뗐다. 그녀가 아파할 거라는 건
뻔히 알지만, 한번 정한 그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제인은… 좋은 친구 같은 존재야. 이번 일로 좋은 친구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해.”
“친구? 그럼… 나는 약혼할 때조차도 너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단 말이야? 어떻게… 나한테!!”
분노 심에 잔뜩 일그러진 제인 앞에서 그는 미안하단 눈빛 외엔 아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인은 이대로 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얻은 다니엘의 약혼녀 자리인데,
마음속에 그녀가 없다 한들 상관없었다. 이대로 끝내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인은 현재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 정말 여태까지 알고 있던 다니엘 알몬드라는 사람이 맞나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 지금 내 말을 듣고 많이 화나기도 할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됐어야만 했어.
그저 편하다는 안일한 생각만으로 지금의 상황을 악화시킨 것뿐이야. 만약, 지금의 일 때문에
제인이 많이 아프고 힘들다면 얼마든지 보상 해줄게.”
순식간이었다. 다니엘의 차가운 말투에 화를 이기지 못한 제인이 그의 뺨을 잽싸게 때렸다.
그녀의 반격에 그의 고개는 반쯤 돌아가 있었고, 제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날아가는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에게 맞은 그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기어코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져 내려 제인의 아픈
마음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감히 보상이란 말이 떠오를 수 있지? 전혀 다른 사람같이
아무 연관도 없다는 것처럼, 나한테 왜 이렇게 낯설게 구는 거야. 다니엘!”
그의 뺨이 살짝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아픈 표정은커녕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태껏 네가 알고 있던 다니엘이란 존재는 뭐였지? 대체 나에게 뭘 바랐던 거야? 제인.”
이제 거의 힘을 다해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그녀에게 다니엘은 거침없이 상처
받을 말만 쏟아 붓고 있었다. 제인은 다니엘의 대한 신뢰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고,
갈수록 실망만 더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다니엘은 적어도 이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픈 말만 내뱉고, 사람 상처 주는 것을 즐기던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모로 돌려버린
그녀는 이 순간이 외롭게 느껴졌다.
“때릴 거면 실컷 때려. 네가 풀리는 대로 때리려면 마음껏 때려도 좋아.”
“다니엘이 이런다고 내가 놓아줄 줄 알아? 절대 안 놔줄 거야. 이 약혼 너 혼자 했어?
나랑 둘이 했어!”
잘못이 있다면 그녀가 아닌 바로 그 자신에게 있었다. 긴긴 세월 친구로 지내왔으면서 제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판단한 그의 오차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약혼이고 뭐고 처음부터 그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옳았다. 아니면 차라리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실수를 해버린 자신을 자책하는 듯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이제 정말 질릴 것 같으니까 그만해. 나도 정말 힘들어. 괜히 이러는 게 아닌 거 몰라?”
“그래서? 너는 네 의견만 밝히면 다인가 본데, 난 아니야. 나는… 지금 다니엘을 사랑해!”
현재 약혼녀인 자신의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주지 않고 이렇게 떼쓰듯이 파혼하자고 하는
다니엘을 보며 그녀는 콧방귀를 꼈다.
‘이대로 빼앗길 수 없어. 너를 위해 노력한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파혼이라고?’
“내가 사랑 때문에 구걸을 해. 나 이런 적 처음이야. 아무한테나 구걸하는 값싼 여자 아닌 거
당신도 잘 알잖아? 다시 한 번만 생각해줘.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나와 결혼한다면 다니엘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다니엘은 이렇게까지 그녀를 흥분 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제인 워클린이라는 여자는 그가
만난 많은 여자 중, 가장 사리 분별력 있고 이해심이 깊은 여자라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그녀와
친구관계를 나누기 전까지는 그래왔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이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를 꺼내도
한결같이 이해해주려고 너그럽게 받아줄 줄 알았는데, 모든 잘못은 그의 대한 제인의 감정이
깊은 탓이었다.
“내가 여태껏 제인을 잘못 알았던 거야? 그런 거라면 정말 실망이야.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여전히 제인은 모르고 있어.”
“그게 아니잖아. 대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여자가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겠어? 열이면 열,
둘이면 둘, 다 이 상황 이해 못 해. 이 번 만큼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거야. 파혼은 아무나
하는 불장난이랑은 다른 거니까.”
제인은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놓으려고 했지만 모든 것들이 다 끝난
상태였다.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다니엘이 그녀를 더 많이 사랑했더라면, 아니 딱 그녀만큼만 사랑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잘 알아들었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너와의 결혼식에 나가지 않아. 지금까지
내 마음 다 밝혔고, 날 이해해주겠다는 너의 마음도 잘 알고 있어. 그것도 거기까지야, 제인.
너의 말대로 파혼은 아무나 하는 불장난과는 다르지만, 결혼도 그만큼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소리야. 부모님께 잘 말씀 드려. 우리 둘 사이에서 오해하실 수 없도록.”
그는 멍하니 서있는 제인을 바라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 하는 제인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더 커져 갔지만, 확실히 여기까지였다.
그녀의 대한 마음에 보답을 할 수 없었고, 그녀에게는 사랑보다 우정이란 감정이 더 편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이 제인에게 악수를 건넸지만, 아무런 말없이 미묘한 표정만 짓고 있는
그녀는 그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그에게 끊임없이 양보하고 선하게 웃어주던 그녀가 이렇듯 표독스러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적잖이 놀랐지만 그런 모습에 더 미안해지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먼저 이별의 경고장을 던진 그가 그녀를 못됐다고는 말할 처지가 못 되지만 사랑이란 감정
없이 하는 약혼은 그녀에게도, 또 그에게도 결코 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지금에야 좋다고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하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그의 마음을
이해해줄 날이 올 것이다.
“……흐으으, 흐윽… 흐윽…….”
멀리서 들려오는 제인의 울음소리에 그 자신이 너무나도 나쁜 남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에 대해
그는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결국 이렇게 됐어야 했던 건데 그 동안 자신이 너무
우유부단하게 감정처리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국으로 가기 전
그녀와의 마지막 정리가 깔끔하지 못한 것이 못마땅했지만 지금 현재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반듯한 그의 이마에 곤란한 이상이 그어져있었다.
‘어차피 내가 그녀에게 간다고 해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녀의 대한 내 사랑의 대가는
이렇게, 아픈 추억밖에 없으니까.’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제인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이채가 서려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내 약혼녀인 지금의 제인이 아니라, 그리웠던 내 친구 제인을 만났으면 해.
그때는 너 자신보다 더 너란 여자를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져. 그래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고, 그 사람 꼭 붙잡도록 해. 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니까. 십년지기
친구로서 그건 보장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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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로맨스소설
[ 시작 ]
내 눈이 아프다 (My eyes hurt) 1.「사랑은 아픈 추억을 남기고」
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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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31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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