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잠도 안 주무시고 여기서 뭐하시고 계십니까?”
늦은 밤, 다니엘이 문을 따고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막 50대 중반쯤 되었을 법한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가 소파 위에 앉아있었다. 시원스럽게 빗겨진 은색 블론드 머리와
청록색 눈동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세련함, 현대적인 분위기의 남자는 그의 아버지인 이안
알몬드이었다. 집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늘 그는 흰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뭐든 것은
편한 게 좋은 것이라며, 늘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직업은 현 대학 교수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누군가가 대학 교수인 우리 아버지를 만약 집에서 본다면, 과연 안과 밖의
이미지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것에 크게 놀랄 것이다. 그만큼
밖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안에서는 심각하게 진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과 농담이 온 몸에
생활습관이 되어버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괴짜행각에 놀랄 힘도 없었다. 그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자신도 전혀 모르겠지만.
“왜, 내가 너를 기다리는 게 싫으냐? 아무리 기다렸는데 하도 안 와서 걱정했었다.”
“아버지도 저 왔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주무세요.”
“이대로 자기는 섭섭하구나. 새벽이 늦어져도 목이 빠지느라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들어온 게야?”
섭섭함과 걱정함이 배여 있는 목소리로 이안이 물어오자 다니엘은 피곤하다는 듯 가방을
내려놓고 아까 제인과의 좋지 않았던 이별을 떠올리며 말했다.
“……한국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와 정리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네가 어찌 된 사정이든 간에 그 아가씨는 너와 딱 어울릴 만한 며느리 감이었는데
좀 아쉽구나. 갑자기 그런 일이 닥쳤으니 그 아가씨도 마음이 심란했을 거야.”
진지한 고민 상담을 들어주는 듯 한 이안의 말에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 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어쩔 땐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오늘 일로 그 모든 것들은 다 정리되었다. 친구 같은 약혼녀라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쳐 입은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었는데 그 옷을 벗으니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의 줄다리기처럼 밀고 당기기 같은 것은 전혀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 아가씨한테는 네가 한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은 말 했니?”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안이 묻자, 다니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인데 굳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요.”
“그래도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제인 양은 너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제인 워클린. 그의 약혼녀이자, 어쩌면 그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인을 끝내 사랑할 수 없었고 결국 이번 파혼까지 가게 된 것이다. 무거운 짐을 한결 푼
다니엘은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될 감정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한번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영원히 끝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그
일을 번복하지 않았고, 오롯이 그 주관대로 행동해왔다. 제인이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는 다니엘을 바라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약혼이란 것은 결혼을 약속하는 하나의 중요한 예식과도 마찬가지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네가 좀 실수를 많이 한 것 같구나. 그래도 나는 언제나 네 선택을 따르마.”
이 곳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된지도 벌써 십여 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캐나다의 아버지, 한국의
어머니를 가진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국적은 두 개였다. 하지만 이중국적을 허용을
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한가지의 국적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캐나다의 국적
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Daniel Armand Lee. 처음 이 곳에 올 때 생긴 그의 캐나다 이름은 처음에는 불편하고 낯설기만
했지만 이제 벌써 이 이름조차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세월이고, 길면 긴 세월일
수도 있는 그 십여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이안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일을 주관대로 처리하는 다니엘을 보며 이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신붓감은 참 잘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면을 생각하면 아들의 선택이 한편으론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어렸을 때는 안 그런 것 같더니, 크면 클수록 너도 네 엄마를 닮아서 참 냉정한 면이 있구나.
그래, 잠시만 어디 보자. 오랜만에 아들이랑 술 한 잔 하려고 기다렸는데 술이 어디 있더라?
가지고 와야겠구나.”
“거기 앉아 계십시오.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으음…. 그래 줄래?”
찬장 밑에서 호박색 액체를 든 술병과 술잔 두 잔을 꺼내 들고 오던 다니엘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소파 위에 앉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 공항으로 일찍 출발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길게 얘기 안 끌 테니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있지 말고, 먼저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겠구나.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
한참 동안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골똘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이렇듯 처음 보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에 다니엘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무슨 중요한
할 말을 앞두고 있는 듯, 이안의 눈가에서는 비장함까지 섞여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
말 한마디가 떨어진 순간이었다.
“선미… 말이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니?”
선미, 이 선미. 그가 한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고 자랐을 때, 불리던 그의 누나 이름이었다.
십년 동안, 그가 잊어본 적 없는 그립고도 낯선 이름이 이안의 입에서 다시 불리게 되었다.
그 긴 세월동안 그는 아버지와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이안과 살면서
그 이름이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고, 이안 또한 별 관심 없었기에 그렇게 잊혀 가는 듯
했다. 물론,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누나는 이미 그에게 있어서 그리움의 향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 갑자기 아버지답지 않게 왜 옛날이야기는 꺼내십니까?
아직도 누나를 잊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어떻게 누나를 잊을 수 있어요.”
문득 옛날 생각을 하다가 가슴이 뭉클해진 다니엘은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가져와 선명한
호박색 액체가 탐스럽게 비추는 투명한 유리 글라스 용기에 가득 따라 마셨다.
“네가… 어렸을 때, 네 누나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지만, 네가 한국 가기 전
내가 미리 당부해둘 게 있다.”
평소 아무리 큰 사건이 터져도 웬만하면 긴장하는 내색 한 번도 내지 않던 이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말하기가 무섭게 술로 그 기분을 잠시 가라앉혀주고 있는 듯 잔잔한 이안의
음성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있었다. 그 떨림을 놓칠 리 없던 다니엘이 다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와서, 네가 내 뜻대로 대학교를 졸업했으니 그 아이를 찾으려고 한국을 가는 것을
내가 허락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야.”
쿵. 그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던 말을 늘어놓는 이안을 보며 다니엘은 그저 황당했다.
“아버지!!”
“네가 지금 한국에 가는 일, 선미 때문이라는 것을 완전 부정하지는 않는 걸 보니 아마
내 짐작이 맞을 듯 싶구나.”
이안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색만 하고 있었다. 갑갑하면 바람을 쐬러 가는
한국에 가는 것은 좋지만, 그의 누나를 되찾을 생각에 한국을 가는 거라면 반대한다는 이안의
말이었다. 다니엘은 그의 누나를 되찾아 어린 시절 그 일들을 다시 되새김질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이안은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눈치였다. 누나를 찾는 일이라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 이안이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대체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 것일까.
“제가 한국에 갈 준비했을 그 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누나는 제 기억 속의 일부분입니다. 아버지도 누나가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다니엘.”
다니엘은 이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선미도 엄연히
그의 딸인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조금은 궁금해 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이안은 그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말리고
있었다. 그녀의 행방이 묘연하다면 여태껏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행방을 찾으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그녀를 찾을 생각도 없어보였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한국에 가는 것을 반대했었다. 지금껏 반항 한번 안하고 자란 네가 이번
일로 쉽게 뜻을 굽히지 않을 거라고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반대하고 싶구나.”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이제 와서 말리시겠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갈 겁니다.
여태껏 아버지가 누나를 못 찾게 말리셨지만 이제는 저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에게 끌려 다니는 어린 애가 아닙니다.”
다니엘이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자 이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체념하듯 말했다.
“네가 지금 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네 누나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 말 들어. 굳이 네가 바람을 쐬러 가고 싶다면, 한국 말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해.”
“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마치 아버지가 무슨 예언사라도 되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잔뜩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하는 다니엘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안 이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가 한국에 갈 거라는 생각이 변함이 없을 거라고는 예상했었지만,
그러나 이대로 그를 한국으로 보낼 수 없었다.
“지금… 그 곳을 가려는 생각이 만약 그거라면 당장 그 짐 풀어 놓거라. 만약 그래도
네가 가고 싶다면 이 아비는 더 이상은 말리지는 않으마.”
“싫습니다. 또 제 일에 간섭하시려고 하시는 거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바꾸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래, 이제는 얘기해줄 때도 되었지. 도대체 이 얘기를 언제쯤 해줘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월에 바빠 잊고 살아서 뒤 늦게 해주게 되는 구나.”
잠시 옛날 생각이 나는지 추억을 회심하던 이안이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힘들었던 시절을 잊으려고 애써 몸부림 치고, 즐겁게 살아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그에게선 벌써 지나온 세월의 연륜이 느껴졌다. 새까맣던 젊은 시절, 검은색
머리도 지금은 흰머리가 조금씩 늘어났고, 그의 피부에 생긴 조글조글한 주름살과 손에 핀
검버섯은 그가 영락없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변해가는 그의
외모와 갈수록 늘어만 가는 달력 장들로 인해 자신도 그 세월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선미, 그 아이는…… 벌써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네가 무슨
재주로 볼 수 있겠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니엘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묻는 것 마냥 새우 눈이 된 그를 바라보던 이안이 짧은 한숨을 쉬며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은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만 하십시오. 지금… 제가 한국에 간다고 헛소리까지 하시는 거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네가 그 아이를 만나려고 한국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거야.
그러니 만약 목적이 그거라면 너를 위해서라도 내 말 듣는 것이 좋을 거다.”
차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말에 그는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한국에 가만히 잘 살아있는
누나를 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누나가 죽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충격적인 말을 함부로 내뱉는 이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새 그의 표정은
냉소가 가득해지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하!! 정말 아버지답지 않으십니다. 지금, 누나 가지고 장난치시는 겁니까? 제가 이런다고
한국에 가는 것을 포기할 거 같아요?”
이해할 수 없는 이안의 행동. 차마 믿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실에 그는 잠깐 동안 아무런
요동도 없이 정색해있었다. 고요하다 못해 어두운 침묵까지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허탈한 웃음을 짓던 다니엘이었다. 그의 똑바른 콧날 아래 자리 잡은 조롱하듯
일그러진 입술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니엘, 현실은 네가 지금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불행한 것들뿐이란다.
지금 좌절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와도 견뎌내기 힘든 고난일 거야. 이번 일로 네가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다니엘은 십년 동안 오직 이안의 말을 믿고 자랐다. 그의 말은 모두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의 정답은 그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그런 하늘같은 존재인
이안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지금의 이안은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다고 용기를
북돋아준 그가 아닌 것만 같아 절망적이었다.
“아버지가 저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태껏 사람들이 아버지가
괴짜교수라고 해도 믿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정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군요.”
“내가 너에게 아버지로서 철없는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구나. 하지만 나라고 편하지는 않았다.
엄마 없이 네가 어떻게 자랄지, 뭘 어쩌면 좋을지 아비로선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더구나.
이런 아비 마음은 어떻겠니?”
괴로운 듯 숨통 조이는 것처럼 하나하나 힘겹게 내뱉는 이안의 말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을
다니엘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모두 다 거짓이기를, 그냥 꿈속에서
악마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를 떠나 평생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현듯 먼 타지까지 왔으면서도 그녀의 대한
말 한번 떨어질까 무서워 이안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 얘기만 하면 서슬파란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제 기억에는 선미누나가 죽어있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누나의 대한 기억이 이렇게 또렷하게
남아있는데,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너는… 사고로 인한 후유증인 열병 때문에 밤새 앓았었다. 이 아비는 네 마음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그만 선미를 잊는 것이 너에게도 더 편할 거다.
내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믿지 않습니다.”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 이안의 청록색 해안이 어두운 빛으로 일렁였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내뱉어보시지, 왜 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태 저에게 하셨던 거처럼
장난이라고 말씀하시지, 왜 사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에 묻혀버렸다.
“믿을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 그만 하십시오.”
차갑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금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다니엘은 금방이라도
억제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이성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이 그의 누나에
대한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그게 부질없었다.
“십여 년 전, 네가 캐나다로 오기 전의 일이다. 아마 네가 17살이었을 무렵이지. 그때 집에
화재가 났었는데, 선웅이 너를 구하려다 그만 사고가 났다고 하더구나. 네가 믿건 안 믿건
그건 너의 자유니 마음대로 해라.”
지나온 세월동안 누나의 대한 말을 금기로 삼아오던 이안이 왜 다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가슴
저미는 사실을 말해주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서운 말,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감촉에 그는 몸서리가 쳐졌다. 모두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집힌 것 마냥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끓어오르고, 가슴은 미친 듯이 타 들어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10년 동안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이 많은 비밀들을 감추시려고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왜 저에게 한 말씀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일언반구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까?”
‘지금 당신이 너무나도 밉습니다. 왜 숨기기에 바빴는지, 누나 이야기를 그렇게 숨기셨는지 다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까. 그게, 그렇게 숨기는 것이 최소한의
방편이었습니까? 세월이 지나도 무딜 줄 알았다면 그건 아버지의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
시간동안 더 누나의 대한 그리움만 가득 사무쳤다는 것을, 아버지는 모를 겁니다.’
다니엘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특유의 혈향이 그대로 그에게 전해졌다. 그의 누나도
이 피의 고통에 물들다가 서서히 지쳐 잠이 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려서… 이 말을 하기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면 너무 아플 까봐 말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 뒷짐만 지고 있던 이안을 보며 그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어떻게 믿었던
아버지가 이럴 수 있는지, 차라리 그렇다면 사고 났을 때 상처가 빨리 아물 수 있도록
말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이야기를 피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자
너무나도 화가 났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 있는지, 세월만 흐르면 다
잊는다고 하는데, 시간만 지나면 다 괜찮다고 하는데, 10년 세월동안 누나만 생각하고 살았던
다니엘에게는 그 말들이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란 분은, 잔인하신 분입니다. 제가 누나를 그리워하면서 살아갔을 때는, 그렇게
누나를 찾아가고 싶다고 안달했을 때는… 그렇게 들어주지 않으시더니 결국에는 누나가
죽었다고 하시는군요. 처음부터 제 고통 따위는 무시하시고 말씀하시는 게 좋았을 겁니다.
그러면, 누나를 조금이나마 잊었을 지도 모르죠!!”
“이게 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미안하다, 아들아.”
다니엘은 이안의 이야기를 마저 들을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듣다가는 그의 이성이 미쳐
날뛸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허탈과 좌절, 절망이 그를 음습했다. 방금 전까지 남아있던 누나의
대한 희망은 저 멀리 사라져버리는 듯 했다. 이안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가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조금쯤은 희망을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캐나다에선 아버지 말이 무조건 옳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그런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왔지만 지금부턴 그러지 않을 겁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에 다니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가슴 속에 아물지 않는 피멍이
맺혔다. 주먹을 꽉 지고 지금 이 슬픔을 모두 다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의 눈가에 어린 시절
한국인 이 선웅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누나를 그리워하고 의지하던 꼬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시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이 선웅인데, 그런데 왜… 지금 그녀는 하늘로
가버렸을까.
“내가 너에게 이말 저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괴롭힌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네가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얘기만큼은 믿어줬으면 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누나가 죽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니엘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믿어지지도 않는 이 충격적인 사실이 그저 꿈처럼 허망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 들었던 사실이 모두 다 거짓이었으면, 진실과는 전혀 무관하고 아예
상관없는 아버지의 장난이었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이렇게 가슴에 커다란 피멍이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잊지도 못할, 씻지도 못할 아픔을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도 충분히 괴롭고 힘듭니다. 아버지의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누나가 죽었을 리 없습니다. 설사 누나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가겠습니다. 가서, 누나의
흔적이라도 찾아오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누나와 같이 살았던 고향에라도 갈 겁니다.
그러니까 저 말리지 마십시오.”
“선웅아!!”
다니엘은 자신을 선웅이라 부르는 이안의 말에 잠깐 경직되는 듯싶더니 이내 다시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이 선웅은 다니엘의 또 다른 본명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손수
지어주신 눈물 젖은 이름이었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인 이안은 한 번도 그 이름을 이토록
친근하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안이 그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그가 얼굴에 조소를 띄운 채 물었다.
“이제야… 불러주시는군요. 다니엘 알몬드, 그게 제 이름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기어코… 네 이름을 버릴 셈이냐.”
“훗.”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니엘의 시선을 피하던 이안이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찌를 듯이 파고들었다.
‘단 한 번도 불러준 적 없는 이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왜 지금에서야 그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인지…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삐딱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술병을 집어 들어 쓰디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게 그렇게도 싫었니? 너에게 그렇게 상처가 되었어? 그래서 그런 것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찢어질 듯이 비명과 통곡을 토해내고 있는데, 입술은 웃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매치와 감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인위적인 웃음은 눈물 대신이었다.
눈물 따위는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사실을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으니까.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이 사실이 정말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허탈한 웃음은 그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고, 허공만을 바라보는 텅 빈 눈동자는 그의 의욕마저 상실하게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버지.”
이안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이미 다 지난 옛날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다니엘의 상처가
너무나도 커보였다. 다니엘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난 다음에야 그는 자신의 잘못과
자책을 모두 다 술에 맡긴다는 듯 그렇게 하염없이 긴 한숨만 내쉬었다.
“여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책임까지 다 맡기고 떠나버린 거요? 참, 못난 사람이구려.
이젠 자식의 고통까지 아무렇지 않게 보아야 하는 나쁜 아비가 되어버렸으니.”
절대 거짓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이안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증오에
사로잡혔다. 지나온 세월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견딜 수 없던 다니엘은 이안을
뒤로한 채 그대로 방에 들어와 문 앞에서 괴로워하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앨범을 보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앨범 속에는 행복하고, 전혀 괴로움이 없는 온화한 두 남매가 나란히
웃음 짓고 있는 어린 시절이 함께 묻혀 있었다. 그 시절,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그늘이 되어주곤 했으니까. 이 모습 그대로 영원하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이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사진 속의 누나는 여전히 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지금 심정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닥친 현실을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고 여전히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누나, 사실이 아니겠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하지만 사진 속의 누나는 아무리 그가 불러보고 외쳐보아도 웃음만 지을 뿐 답을 주지 않았다.
세월만 흐르고 계절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변한 게 없는데.
이대로 잔인하게 떠나버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돌진하고,
무엇을 향해서 가야 하는가…….
그렇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버티기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그의 물음과 알 수 없는 해답 속에서 그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을
즈음엔, 이미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아침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의 생각이 모두 다 정리가 되자마자 그는 자신의 여행가방과 함께 앨범사진을 챙겨 방을
나왔다. 테이블에는 어제 먹다 남은 와인 잔과 빈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어제 그대로인 상태로 잠이 들었는지 편해 보이지 않는 자세로 이안이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버지…….”
잠자리도 편하게 갖지 못하고,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이안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누나의 대해서 숨기고 모른 척 하던 아버지였는데, 그래도 깊이
미워할 수는 없었다. 누나 때문에 힘들어 하던 시절, 아버지 따라 캐나다 왔던 생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 캐나다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린 시절 상처로 내내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다.
“선웅아, 미안하다. 선웅아.”
이안이 일어난 줄 알고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잠꼬대였다.
잠자면서도 마음 편히 잠자지도 못하고 그의 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하는 이안의 모습에 그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워하고 싶은데, 차마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용서를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는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 대신 소파 위에 자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에는 누나의 대한 감정일랑 싹 잊고 정말 보란 듯이 새 삶을 출발할
거라고 결심했다. 방금 전까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카페 게시글
하이틴 로맨스소설
[ 장편 ]
내 눈이 아프다 (My eyes hurt) 2.「못난 사람」
엘라··
추천 0
조회 23
08.08.31 02:2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