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숲길] 정병경.
ㅡ추억ㅡ
어제는 전국에 가을 채찍의 비가 내렸다. 비온 뒤 아침 하늘은 해맑고 상큼하다. 30여 년 전 성북구에 있는 정릉의 기억을 더듬는다.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가족과 청수장 부근 계곡에 다녀왔다. 그 이후로는 가지 못했다.
오늘은 국군의 날이다. 평일이어서 차량 막힘이 없다. 마음에 그리던 정릉貞陵으로 핸들을 돌린다. 초행길에 네비를 잘못 보아 동네 한바퀴 도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경사진 비탈길 막바지인 정릉 정문에 다달았다. 능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포근함이 든다.
ㅡ시선ㅡ
입구에 들어서면서 색다른 모습을 목격한다. 다른 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직선길인데 비해 'ㄱ'자로 꺾였다. 능이 좌측 가까이에 있어 구조상으로 대안은 없다.
정릉은 조선 초대 임금 태조의 두 번째인 신덕고황후 강씨康氏(?~1396) 능이다. 다른 능에 비해 가파른 언덕이다. 본래 도성 안 정동貞洞에 정릉이 있었다. 태종(신의고황후 아들 방원)이 1409년(재위 9년)에 도성 밖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의 사랑을 극진히 받은 인물이다. 강씨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방석(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앉히려 했으나 무산됐다.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년) 때 방원은 반대 세력 정도전과 남온 등을 제거한다. 이복동생들(방번 17세.방석 18세)도 그냥 둘리 없다.
ㅡ고난ㅡ
태종은 태조 비인 신덕왕후를 왕비로 인정하지 않는다. 능을 묘로 격하시키고 후궁에 강등시킨다. 신덕왕후 능의 석조물을 홍수로 쓸려간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데 쓰고 정자각도 없앴다. 태종(방원)에겐 신덕왕후의 가족이 눈엣가시다.
2백년 후인 현종 때 송시열의 도움으로 신덕왕후 강씨는 왕비에 복위된다. 왕후 능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이다. 긴 세월의 고난이었다. 이 무렵 정릉 일대에 내린 비를 원한을 씻어주는 비의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한 일화가 있다.
추석명절에 경주여행을 했다. 상경하는 날이 정릉 제향일인 9월 23일이다. 미처 발걸음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근래들어 왕릉은 능침공간에 접근하지 못한다. 제향공간 범위인 정자각에서만 본다. 석조물은 형태만 멀리에서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ㅡ둘레길ㅡ
마사토가 깔린 능안 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사삭 소리를 낸다. 새소리와 풀벌레까지 거들어 계곡물 소리와 함께 조화롭게 들린다. 누가 이를 소음이라고 할까. 이미 점심 시간에 접어든다.
'한방향 걷기' 팻말이 보인다. 오른쪽 방향으로 걷는다. 솔숲 사이로 인근 북악 산봉우리가 살짝 보일 뿐 시내의 높이 솟은 건물들도 숲에 모두 가린다.
어제까지 내린 비에 흙내음과 풀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낮의 햇살은 겨우 잎 사이로 살짝 비칠 뿐이다. 맨발로 마사토 흙길을 밟고 지나가는 노인의 표정이 밝다.
울창한 숲으로 가려진 정릉 일대에서 가늘게 들리는 소음은 장단이다. 내리막길에 계단이 없어 편했다. 거목으로 둘러쌓인 1.4km 둘레길을 반시간 만에 5천보 걸었다. 나름 정릉의 도랑과 잘 가꾸어진 숲도 문화유산으로 칭한다.
재실 안의 신덕왕후 도서관 문이 잠겼다. 코로나로 휴관이다. 숲에 가린 명당 정릉은 신덕왕후의 쉼터다. 왕비가 편안히 잠든 땅에서 소음을 일으키고 돌아선다.
[정릉에서] 숲길을 걸으며 띄운다.
"생전에 임금 사랑
죽어서 유랑 생활
못이룬 아들에게
한맺힌 신덕왕비
도랑을
흐르는 소리
눈물 닦고 남은 물."
"헌릉과 등을 지고
천추의 한이 된 몸
북망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린다
만세를
이어오면서
정릉 숲이 피신처."
6백년 조선의 서막이 열리는 장안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들. 마치 잡초가 뽑히듯 구름 위로 사라진 인물이 누운 명당. 신덕왕후의 안식처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ㅡ고찰로ㅡ
인근의 흥천사로 향한다. 신덕왕후를 떠나보내고 태조는 능의 동쪽에 흥천사를 개찰한다. 재를 올리는 종소리가 들린 후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먼저 떠나 보낸 아내에 대한 태조의 지극한 사랑이다.
대가람 흥천사는 1396년에 건립된다. 억불정책에도 법통을 이어왔다.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 떠난 후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창건된 원찰이다.
1794년(정조18) 현재 위치로 옮겨 짓고 신흥사로 개칭한다. 1855년에 명부전을 짓고, 1865년(고종2) 대방과 요사채를 지으면서 다시 흥천사로 바뀌게 된다. 화재로 소실되어 우여곡절을 겪은 사찰이다.
법당인 극락보전에 금동천수관음상은 국가지정보물이다. 목조보살좌상, 목조여래좌상이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그외 문화재가 다수다.
최신 장비들이 담쌓기 공사에 바쁜 모습이다. 주지의 불사 능력으로 인근 주택들이 줄고 사찰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다. 흥천사는 그 면적이 짐작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흥천사 종소리의 [울림]이 궁금하다.
"태조의 귀를 울린
흥천사 종소리는
들어 줄 임금 없어
한잠에 들었구나
징하고
한 번 울어라
건원릉에 들리게."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오후 2시경 성북동면옥집으로 달린다. 맛집으로 소문나 식객이 여전히 붐빈다. 평양냉면으로 오찬을 즐겼다. 바로옆 성북동빵공장의 커피도 일품이다. 눈과 발이 행복한 왕릉에서의 반나절이다.
202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