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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追跡者)-03
“제임스. 뭔가 방법을 찾았나? 특별한 생각이 없으면 내일 내가 직접 서울로 가려 하네. 내가 알아 볼 것도 있고 마침 또 다른 볼 일도 있어서.”
“그래. 잘 되었군. 내가 곧 자네 집으로 가겠네.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군.”
나는 랩탑 컴퓨터를 필요한 서류와 함께 스위스 아미 브렌드가 부착되어 있는 검은색 빽쌕에 집어넣고 주머니가 7 개가 달린 면으로 된 짙은 청색 데님 바지를 입었다. 위에는 티셔츠와 그 위에 역시 같은 색 면 조끼를 입고 빨강 바탕에 검정 글씨로 피러 엔 잭슨이라고 이름 한 담배와 은색 지포라이터를 같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문자판이 눈처럼 맑고 하얀 바탕에 검은색 아라비아 숫자 12 개가 인쇄되어 있는 금 도금된 외장에 밴드는 소가죽으로 된 시계를 왼쪽 팔목에 차면서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10 시 30 분을가리키고 있었다. 조끼의 왼쪽 윗주머니에는 휴대폰 오른쪽 주머니에는 볼펜 3 개와 캐나다 국기가 붉게 인쇄된 작은 메모장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지갑은 엉덩이에 붙은 뒷 주머니 중 왼쪽에 넣었다. 자동차가 왼쪽으로 급 회전할 때 좌측으로 쏠리는 엉덩이를 조금이나마 안정되게 하려는 본능적 습관이었다. 9 층에서 지하 2 층까지의 엘리베이터는 고속이었다. 지하 이 층이었지만 주차장은 한적했고 공기가 맑아 긴장되었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였다. 말리부는 동쪽 끝 구석에 자리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산 지 8 년 2 개월, 35 만 킬로를 달린 짙은 녹색 말리부의 범퍼를 한번 쓰다듬으며 뒷문을 열어 빽쌕을 던지듯 집어넣고 자리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말리부는 부드럽고 연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말리부는 주차장을 튕기듯 빠져나와 출근 시간이 지나 한가해진 우드 바인 스트릿을 거쳐 하이웨이를 달렸다. 404 돈벨리를 타고 남쪽으로 시속 100 킬로로달려 10 분 후 우회전하여 60 킬로로1분 정도 다시 달려 401 하이웨이를 좌측에 끼고 좌측 진입 사인등을 켜고 100 킬로 속력으로 달리며 서서히 401 로진입하였다. 조금 열어 둔 앞 차창으로 여름의 마지막에 불어오는 인디언 썸머의 훈훈한 바람이 들어와 뒷 창으로 빠져나갔다.
하늘은 끝없이 높고 맑았으며 바람은 달리는 차 창을 제외하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였다.
말리부의 경쾌하고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느끼며 악세레터를 밟았다. 토론토의 도심을 가로질러 동에서 서쪽으로 말리부는 제 세상 만난 듯 빠르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옥빌의 출구까지는 지금의 속도로 달린다면 아마 30 분 안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필지역을 동서로 가로질러 가는 로컬도로가 있고 동쪽 끝 온타리오 호수를끼고 동서로 난 레이크쇼 도로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좀 서둘렀다.
3-4 년 전까지만 해도401 을 하루에 서너 번씩 왕복하며 말리부의 진가를 뽐내면서 쉐비를 무료로 광고해 주었다. 그런길이기에 시속 130-140km/hour에서도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며 운전하는 중에도 머릿속에 무언가꾸준히 생각하는 요령도 터득하였다. 나는 일 차선을 타고 달리며 머릿속에 지금까지 에드로부터 듣고 내가보고 확인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진정한 동기를 스스로에게 타당하고만족스럽게 부여하는 것이 그 일을 위하여 혼신을 다 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하였을 때만이필사의 힘과, 하여서 완성하고자 하는 의욕이 자유의지에서 발생하고 닥치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줌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가치있는 동기부여를 해야 했다. 에드는 같은 한국인이다. 그가 그의 집에서 오래된 아기 마미를 발견하였다. 그 마미를 싼 오래되고 낡은 신문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작은 쪽지에서 한인 여성이 모태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짙은 한글 주소를 발견하였다. 63 내지 64 년 전의 한국 여성일 개연성이 농후한 연필로 적은 메모의 주소는 뭔가를 밝혀주길 바라는 운명으로 나와 에드에게 발견되었다. 에드 부부는 그 추적에 의한 진실을 밝혀주기를 의뢰하였다. 특히 조경순의 평범치 않은 추적에 대한 열기는 감동적이었다. 나는 불투명하기까지 한 이 사건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생활이 그렇게 열악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평화롭고 즐겁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사건의 시작을 알아버린 지금 내가 모른 체하고 전처럼 편안히 지낼 수 있을까. 에드를 방관자로 보며 지낼 수 있을까. 이곳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지내고 있다.
복잡한 문제에 개입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있다.그런데… 그런데, 주소는 한국이고 박인서는 한국사람이잖은가. 나도 나의 두 아들도 한국인이잖은가. 그런데도 모른 체하며 방관자로 전처럼 편히 지낼 수 있을까. 그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 에드에게는 나에게 과한 일이어서 맡기는 어렵다 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예전 처럼 출근하고 퇴근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갈등을 하면서 어느 사이 옥빌로 나가는 싸인을 따라 우측 간선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에드의 집이 바라보이는 20 미터쯤에서나는 말리부의 속력을 20 킬로로 줄였다. 계기판 옆의 아날로그시계는 11 시 1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옥빌은 부유층이 사는 오래된 동네라서 집집마다 관목과 단풍나무들이 높고 넓게 자락을 드리워서 숲속의 한적한 동네에 들어선 것 같은 고즈넉함과 한가로움을 느꼈다. 나는 에드의 BMW RSV 옆에 말리부를 주차하고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피러엔잭슨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길게 한 모금 빨아 허공에 뱉으며 옆집을 보다가 재빨리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꺼서 꽁초를 잔디밭으로 차 넣고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좋은 날입니다.”
나도 역시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인사를 하였다.
“응. 그래. 젊은이. 또 보는구먼. 젊은이의 미소는 아주 좋아. 오늘도 좋은 날이 될께야.”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름진 할머니의 내민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젊은이는 예절을 아는구먼.”
하며 기뻐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가득 얼굴에 띄었다.
“할머니. 저는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나는 할머니가 부르는 젊은이에서 이제는 좀 더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 주도록 요청하였다.
“아~ 그래. 제임스. 자네는 스코트렌드 출신인가. 제임스 본드는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그 뭐야. 007 스파이 말이야. 당신도 스파이인가. 참 좋아. 부르기 쉽고 정이 가네. 나는 에리자벳이야. 잉글랜드 퍼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캐나다로 왔지.”
젊었을 때의 모습은 이쁘고 고상하였을 것 같은 할머니는 나에게 출신과 이력을 말해주었다.
6 살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와서 이곳 옥빌에 정착한지가 76 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엘리자벳을 보며 내 꼬부랑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70 평생 자식과 손주들의 따뜻한 효도 한 번 받아보지못한 채 일찍 아들을 보내고 손주들 뒷바라지로 남은 생을 사시다 가신 내 할머니. 이북 연변에서 가족과 헤어져 울릉도로 시집갔다가 자식 하나 낳고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되어 외아들과 육지 마을인 울진으로 와 갖은 고생하시며 지내시다 아들마저 6∙25 전쟁에 보낸 후 그 아들이 총알 박힌 왼쪽 다리를 잘라 고무다리를 한 채 돌아오자 그래도 자식이라 공부시켜 시골의 농업 협동조합 조합장이 되게 하였다. 어느 정도 살만할 때 자식마저 잃고 주름진 얼굴에 백발이되어 온통 거칠어진 손으로 내 등을 비벼주며 체한 배를 달래주시던 그 할머니가… 이름도 웃겼다. 권아지.
에드워드가 포치에서 나를 부른 것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나에게 막 물었을 때였다.
나는 코리아에서 왔다고 말하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면서 에드에게로 가려고 돌아서는데 할머니의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코리아? 제니도 코리아에서 왔다 했는데…”
나는 이미 할머니를 떠나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경계석을 넘고 있었다. 에드는 불안과 어떤 흥분으로 뒤범벅이된 채 얼굴표정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와서 함께 아침 식사하세요.”
내가 에드워드와 거실에 들어서자 에드의 아내 조경순은 맑은 블루칼라 면 원피스차림으로 분주히 우리들 아침을 식탁 위에 준비하며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가득한 채 인사를 하였다. 에드보다 6 년 아래인 사십 대 초반의 조경순은 아직도 풍만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고등어구이와 된장찌개 그리고 김치가 곁들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을 때까지 사실 마음의 결정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식사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못하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 라도 한 듯 조경순은 이미 그 일의 시작은 되었다는 확정적인 목소리로 본격적인 계획을 물었다.
“제임스. 어떻게 시작하기로 하였는지 말해 주실 수 있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쎄지로같이 맑고 아름다웠다. 그 짧은 순간에 불현듯 쎄지로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비교하게 되었다. 쎄지로의 음성은 더 아름답고 맑고 감미로운데…
에드는 식사를 마치고 컵에 냉수를 따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게 이 사람아’ 그는 그런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주춤하자 조경순도 부창부수이듯 식탁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역시 바라보며 무언의 재촉을 하였다.
“우선, 이 일을 한인사회에 알려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를 먼저 묻고 싶네.”
나는 결정하기 전에 이 일에 대한 공개 여부를 물어야 했다. 막연한 과거의 일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여야 하므로 한인사회에 공개하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고 그 결말도 어떻게될지 짐작을 하기에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묻자 기다린 듯이 조경순이 단호하게 말하였다.
“저희는 비공개로 하길 바래요. 이런일이 한인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기억되길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제임스께서 사명감을 가지고 혼자 조용히 추적하여 구천에 떠돌고 있을 불쌍한 영혼을 잠재워 주길 바라는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든 에드가 아내의 말을 보충하려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