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 같은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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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구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었는데 역시 손님은 없고 문 틈 사이로 라디오 소리만 흘러나왔다.
“저 왔어요.”
카운터에 기대어 가만히 라디오를 듣고 있던 할머니가 반갑게 구미를 맞이했다.
“어, 왔어. 아니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이것저것 샀어요. 여러 가지로 시도해봐야죠.”
“선생이 믿음직해서 좋네.”
곧장 주방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장바구니를 풀고 요리를 할 준비를 했다.
할머니가 익숙하지 않은 양식 메뉴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럼, 파스타를 먼저 해볼까요?”
“파, 뭐?”
“파스타요. 스파게티 같은 종류를 파스타라고 해요.”
구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유튜브 요리 영상에서 이것저것 주운 지식들을 총동원해 앞으로 만들 음식들을 설명했다.
의욕이 넘치는 할머니는 구미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작은 노트에 받아적으며 부단히 애썼다.
대중적으로 파스타 몇 가지를 만들어보고나서 할머니의 요리방식을 접목시킨 색다른 파스타를 만들 계획이었다.
이런 저런 일을 분담한 두 사람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주방은 금세 열기로 후끈해졌다.
홀은 손님 하나 없이 조용했지만 주방은 주문이 밀린 것 마냥 바쁘게 돌아갔다.
그렇게 크림이 들어간 파스타, 토마토 소스 파스타, 오일 베이스의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그전까지 식당에서 풍긴 적 없는 서양식의 맛있는 냄새가 집 안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긴 젓가락을 이용해 면을 돌돌 말아 예쁘게 접시에 담는 것까지 알려 드리고 나서 간단히 시식을 시작했다.
먹기 전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던 할머니는 걸쭉한 크림 파스타를 한 입 먹고 삼키기도 전에 급하게 김치를 찾았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구미는 맛있기만 하다고 놀려댔다. 속이 부대끼는 맛이라고 진저리를 치는 할머니에게 이게 요즘 사람들 입맛이라고 말하며 다른 파스타도 마저 권했다.
그렇게 김치와 파스타가 함께 한 시식이 끝나고 새로운 파스타를 개발하기 위해 두 사람은 냉장고 속 재료를 뒤졌다.
오징어 볶음과 갖은 나물, 가지와 생선살이 나왔다. 구미는 서둘러 면을 삶고 할머니는 팬을 달궜다. 이것저것 되는대로 집어넣으니 난생 처음 보는 색다른 요리가 탄생했다.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지만 냄새는 제법 그럴 듯했다.
“기왕 먹는 거 앉아서 좀 편하게 먹어볼까요?”
두 사람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하나 둘 식탁으로 옮겼다.
그런데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중에 갑자기 할머니가 휘청했다.
들고있던 붉은 색 파스타가 담긴 그릇이 그대로 날아가 앞서가던 구미의 등에 엎어졌다.
“으악!!!”
구미는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고 그릇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곧 바닥에 나뒹굴었다.
홱 하고 고갤 돌려보니 어지러움을 느낀 할머니가 벽을 붙잡고 위태롭게 서있었다.
등에 파스타가 묻은 것보다 할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구미는 서둘러 그릇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부축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응...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그보다 구미는 괜찮아? 데인 거 아냐?”
“전 괜찮아요. 별로 안 뜨거워요. 그보다 일단 이리 와서 좀 앉으세요.”
간신히 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구미는 갑자기 너무 무리한 건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내 괜찮다는 듯 웃으며 구미를 안심시켰다.
“늙으면 다 이래. 조금 걷다가 어지럽구, 또 그러다 괜찮아지구.”
“오늘 너무 무리하신 거죠?”
“아니야. 그보다 옷을 다 버려서 어째. 잘 지워지지두 않겠네.”
“옷은 괜찮아요. 그냥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인데요 뭘.”
“그래두, 잠시 기다려봐. 계속 그거 입을 순 없잖아. 내가 입을만한 거 가져올게.”
“아니에요...저 진짜 괜찮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주방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널찍한 티셔츠 하나를 들고 나왔다.
파랑새가 프린트된 노란색 티셔츠.
크기나 색깔로 볼 때 할머니가 있는 옷은 절대 아니었다.
할머니에게서 티셔츠를 받아든 구미는 입어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등 뒤에서 느껴지는 축축함과 불편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미는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입고나니 여자 옷이 아닌 게 더욱 확실했다. 옷 전체가 다 헐렁해 마치 포대자루를 뒤집어 쓴 것마냥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혹시 옥탑방 그 남자 옷일까.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입어도 되나.
하지만 소스가 잔뜩 묻어 엉망이 된 옷을 보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지저분해진 옷을 빨아주겠다 했지만 구미는 괜찮다며 할머니를 도로 앉혔다.
욕실로 들어가 대충 비누를 묻혀 옷을 빨았다. 얼룩이 잘 지워지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입으려 싸게 산 옷이라 상관없었다.
빨래를 끝낸 구미는 물기를 머금은 옷을 든 채 어디 말릴 곳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그 때 할머니가 가게 옥상을 추천했다.
“바람도 불구, 햇볕이 좋아서 금방 마를 거야.”
할머니의 말에 구미는 가게 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식당을 오고 가며 대문 옆에 있는 계단을 본 적은 있었지만 올라가본 적은 없었다.
옥상에 그 남자가 살고 있겠지.
구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도착한 구미는 빨래를 널기 위해 적당한 곳을 찾아 고갤 돌렸다.
그 순간 구미는 남자를 발견했다.
녹색 방수페인트로 칠한 바닥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흰 썬 베드 위에 무척이나 편안하게 누워있는 한 남자.
복슬하게 기른 수염과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거렸고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큼지막한 선글라스가 태양빛에 반짝거렸다.
구미는 한참이나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개....개 같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첫댓글 즐겁게 잘보았 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