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개 팔자가 상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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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들고 한참이나 썬 베드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한 마리의 개 같았다.
관리가 안되 꼬불거리는 흑갈색의 머리칼에 하필 입고 있는 옷마저 한 세트의 갈색 추리닝이라 더욱 개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낮잠에 든건지 구미의 인기척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를 깨울까 싶어 구미는 옥상 한 켠에 있는 빨래 줄을 향해 발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에서 왠지 그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정작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숨죽여 구겨진 티셔츠를 펼쳤다. 시원하게 탈탈 털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빨래 줄에 옷을 걸었다.
햇볕이 좋아 금방 마르겠어.
꼬물거리며 조금이라도 옷을 펴보려고 만지작거리는 와중에 갑자기 등 뒤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막 잠에서 깬 목소리였다.
별로 큰 소리도 아닌데 구미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일단 돌아선 구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하세요. 하하...”
용기 내어 건넨 인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뻘쭘해진 구미는 그냥 조용히 내려가려고 계단 쪽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지난 일도 있고 하니 괜히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내려가자.
하지만 남자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게걸음을 하고 있던 구미를 주시했다.
“뭐야, 너.”
“예? 저요? 저는...고구미에요....요기 밑에 계신 할머니랑 그냥 아는 사이인데.."
“뭐? 고구미?”
익숙한 반응이었다. 이름만 얘기하면 나오는 한결같은 그 반응.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구미는 쭈뼛대며 고갤 끄덕였다.
“네. 고구미요. 여기 올라온 건 옷을 좀 말리려구요. 제 옷에 뭐가 묻어가지구...할머니께서 여기에 말리면 잘 마를 거라고 하셔서..”
“우리 노인네가?”
“...노인네 말구 그 쪽 할머니가요.”
“그게 그거잖아!.”
아주 잠깐 동안 대화(대화라고 하기도 이상한)를 나눠본 결과, 할머니 손주라는 그는 할머니랑은 전혀 딴판이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사람을 꼬롬하게 바라보는 시선부터 초면에 말을 놓는 예의 없는 태도까지.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싫어진 구미는 대충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예...그럼..”
그렇게 서둘러 내려가려는 차에 남자가 다시 한 번 구미를 불러 세웠다.
“야!”
저 새끼는 날 언제 봤다고.
날카롭게 신경을 긁는 그의 부름에 구미는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더러운 똥을 밟지 않으려 애써 소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바라봤다.
“네, 저요?”
“너, 왜 내 옷 입고 있냐?”
“예?”
“내 옷을 왜 네가 입고 있냐고?”
역시나 이 옷 주인이 저 남자였구나.
일이 성가시게 됐음을 깨달은 구미는 눈을 굴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게...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긴데, 제 옷에 뭐가 묻어가지구 입을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일단 제 옷은 저어기 빨아서 널어 놓았구요.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은 당장 입을 게 없는 저를 위해 할머니가 빌려준 옷이에요. 근데 저는 이게 그 쪽 옷인지 저언혀 몰랐어요. 진짜루요. 그러니까....일단 오늘은 잘 입고 깨끗이 빨아서 금방 돌려드릴게요.”
“가지가지 하네.”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남자는 매서운 눈빛으로 구미를 노려봤다. 수염 사이로 드러난 눈은 마치 심기가 불편한 강아지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사납게 반짝였다.
“누구 마음대로 내 옷 입으래?”
“죄, 죄송해요...근데 저도 나름의 사정이...”
“내놔!”
“예?”
“당장 내놓으라고! 내 옷!!!”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썬 베드 위에서 뻘쩍 뛰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조용하던 동네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구미는 괜히 입고 있던 티셔츠를 꼭 부여잡고 대꾸했다.
“아니, 그쪽 옷 맘대로 입은 건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당장 어떻게 드려요!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옷이 지금 저렇게 젖어가지고...”
“알게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구미에게 위협적으로 달려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 때문에 구미는 지난 번 그와의 기억이 떠올라 소리를 꽥 질렀다.
“끄아아아악!!!”
구미의 비명과 함께 남자는 날아갔다.
가볍고 하찮게.
질끈 감았던 눈을 뜬 구미는 멀리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밀쳐냈을 뿐인데 남자는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마냥 쉽사리 날아갔다.
충격이 상당한지 바닥에 엎드린 남자는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많이 다친 건가 싶어 구미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의 옆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저....괘, 괜찮아요?”
짐짝처럼 엎어진 남자의 두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나도 간단히 날아간 게 민망한 건가.
혹시나 또 달려들까 싶어 구미는 발끝으로 남자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다시 물었다.
“이봐요. 괜찮냐구요.”
살아있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건드리니 남자는 마치 빨리감기를 한 것처럼 호다닥 일어나 자신의 옥탑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간 일이었다.
쾅 소리와 함께 옥탑방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옥상에 혼자 남은 구미는 한동안 벙쪄 그가 들어간 문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곧 옥탑방 안에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꼭 도로 가져와! 아끼는 옷이야!!! 알겠냐!!!!”
첫댓글 이거 이러다가 구미와 손주의 애정신으로 변해가는건 아닐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