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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 8,1-8>
1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3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4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5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
6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이것이 이 백성의 남은 자들 눈에 신기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 눈에까지 신기하게 보이겠느냐?
만군의 주님의 말이다.
7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8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해한다는 말은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 사람이냐로 싸우고 있었는데, 사실 작은 사람이 작은 사람을 더 잘 받아들이므로 더 큰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십니다.
어째서 겸손한 사람이 포용력이 좋을까요?
그 이유는 서로 커지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유용한지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런 욕심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미 부모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이를 친구로 맞아들입니다.
만약 제가 유튜브 조회수에 관심이 많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렇게 좋은 내용을 올리는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보지 않지? 참 이해가 안 되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없다면 어찌 될까요?
지금 구독하고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에게 더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 보는 분들은 ‘다 그분들만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라고 여기게 됩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내 욕심 때문에 나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에 만족하여 크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만족하여 ‘왜 우리 부모는 이러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을 보며 비교하게 되면서는 ‘왜 우리 부모는 다른 부모와 같지 않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해가 되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사라져 내 안에 여유가 생겨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입양도 거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고아원에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거주하는 레즐리와 더그 페이시라는 이름의 부부는 더그의 아버지와 함께 키릴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왔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보여줬어요.
그냥 쭉 내밀었죠.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그의 오른팔을 뻗어 내 오른팔을 만졌어요.”
크리스는 감격스러웠던 그 순간을 설명했습니다.
뒤이어 “키릴은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처음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라고 더그는 설명합니다.
오른팔이 없는 공통점을 가진 키릴과 크리스는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은 서로를 볼 때마다 짤따랗게 남은 오른팔 끝부분으로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3년 전부터 입양 준비를 한 이들 캐나다 부부는 한 고아원에 오른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같은 처지인 이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한쪽 팔이 없는 장애 때문에 다른 부부에게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됐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이 아이의 장애가 우선순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릴은 캐나다로 입양되어 부모가 생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롤 모델인 할아버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는 한쪽 팔이 없다는 장애를 극복하고 사업가로 성공했으며, 장애인 올림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더그는 말합니다.
“처음 아버지에게 키릴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나랑 똑같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더그는 덧붙입니다.
“아버지는 목표를 설정하면 무엇이든 해내는 분이지요.
아버지는 키릴에게 완벽한 롤 모델이 될 거에요.”
“난 이렇게 목욕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처음 봤어요.”
엄마의 말입니다.
“고아원에는 총 12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단 2명이었죠.
키릴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번도 목욕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키릴은 엄마 손을 잡고 장 보러 가는 극히 작은 일에도 즐거워한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키릴은 현재 캐나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출처: ‘팔 없는 아이 입양 고집한 부부, 왜?’, 김혜경 기자, 뉴시스, 2015. 11. 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처지를 겪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은 작아지고 가난해지고 초라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과 같은 처지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말썽부려도 이해합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아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아지면 감사하지 욕망에 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장 작아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집시다.
그래야만 작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도 만나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한 마음>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필리 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찌 큰 사람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이어서 하신 말씀 "내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를 받아들이되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하는 것인데, 주님의 정신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루카 18,16ㄴ-17)
주님은 모든 것의 기준과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의 기준과 중심이 어른이고, 어른들이 하는 데 '애들은 가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린이처럼 힘없는 사람이 쉽게 무시되고 배제되고, 하느님마저도 무시하고 배제하며 힘있는 사람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힘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고, 하느님마저 무시하고 배제하여 오직 자기뿐입니다.
그래서 남을 생각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을 속 좁은 사람이라고 하고 그런 마음을 밴댕이 속알딱지 같다고 하는데, 영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세상을 품는 것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있는 품이 큰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없다면 그것이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지요.
그렇기에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린이처럼 힘없고 약할지라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품을 수 없다면 영적 밴댕이 속알딱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 공동체 - 꿈의 현실화>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두 기사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찬의 친교는 분리가 아닌 환영에 의해 건설된다’ 는 어제 주일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복음을 주제로 한 말씀이요, 하나는 어제 ‘제107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이하여, ‘교황은 더 포용적인 세계를 요구하다’란 기사 제목입니다.
환영과 포용의 넓고 따뜻한 품의 공동체가 이웃에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봤던 ‘채계순(季淳)’ 수녀의 이름 뜻에 대한 글을 읽은 후 수녀에게 전한 문자 메시지도 재미있고 유익하다 싶어 나눕니다.
“끝 ‘계(季)’자의 겸손에, 순박할 ‘순(淳)’의 온유, 그대로 예수성심을 상징하는 이름이요, 또 이름을 바탕한 삼행시 역시 기막히게 좋습니다.
‘채’우려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샘솟는, ‘순’수의 우물, 사랑하는 ‘채계순!’
수녀님, 늘 이렇게 사세요.
그대로 하늘나라 꿈이 실현된 이름입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들면 이제 보이는 희망은 거의 사라지고 자칫 삶은 무미건조해질 수 있습니다.
노화와 더불어 학력도, 지식도, 기억도 거의 사라져 모두가 비슷해지다 죽음 앞에서는 똑같아지는 느낌입니다.
남는 것은 ‘좋은 사람’이었느냐는 것 하나뿐 같습니다.
하여 좌절감을 갖는 대부분 형제자매들에게 격려차 드리는 결론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희망은 하느님뿐입니다.
이제 삶의 목표이자 희망은 단 하나 하느님께서 뜻하는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성인이 되는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부분 환해지는 얼굴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궁극의 희망이자 소망이자 목표는 단 하나 성인이 되는 것이고,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하늘나라의 꿈을 현실화한 사람이 바로 성인입니다.
하늘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날로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꿈을 실현한 성인들이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늘나라 공동체 삶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늘나라의 꿈과 이상을 앞당겨 산 분들입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하늘나라 비전은 꿈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을 공동체 삶의 중심에 모셨을 때 실현되는 하늘나라 꿈임을 깨닫습니다.
‘시온’이,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내 몸담고 살아가는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진실한 도성, 거룩한 산으로 지칭되는 공동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 공동체인지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 예언자들이요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이어지는 예언도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늘나라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사는 공동체가 바로 예루살렘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중심에 계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실현되는 하늘나라의 꿈이자 비전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나라 꿈을 실현시킨, 하늘나라 꿈의 현실화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기념,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분투의 노력을 다해 성인이 되어 살 것을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영원한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요,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이자, 하느님 계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79세를 사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분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레오13세 교황에 의해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1885) 성인의 눈부신 활동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인은 애덕부인회(1617), 선교회(1625)를 설립했고, 협력자이자 영적 도반인 미망인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과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633)를 설립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인’이라며 가난한 이들의 종이 되기를 소망했던 성인의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하고 지체없이 행해져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규칙에 우선하며 만사는 무엇보다 사랑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한 주인이므로 그가 명하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새로워진 열성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무엇보다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내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주인으로 또 지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을 그대로 실현한 성인들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 하늘나라 공동체의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력하고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 모두입니다.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임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이와같이 가난한 이들을 온 마음으로 환대하는 겸손과 섬김과 자비의 가장 작은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들이요 이런 이들의 공동체야말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살아낸, 하늘나라 꿈의 현실화가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입니다.
이어지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있는 요한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말씀에서도 하늘나라 공동체의 특성을 배웁니다.
차별과 분리가 아닌 모두를 포용하는 넓고 깊은 하늘같은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 기쁨 중 하나는 하늘 그림 감상입니다.
늘 새롭고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가을 하늘은 그대로 하느님의 반영같습니다.
자주 되뇌어 보는 ‘하늘’이란 자작시입니다.
“늘 봐도/늘 좋은
하늘은/하느님의 얼굴/하느님의 마음
내 얼굴/내 마음
늘/하늘이고 싶다“
주님의 다음 결론같은 말씀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못하게 막은 옹졸하고 편협한 엘리트주의자 요한은 물론 우리에게도 참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참 넓은 마음의 포용적인 관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성령을, 하느님을 우리만이 독점하고 있는 양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곳곳에서 익명의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성인들도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환대와 포용의 성들의 공동체, 하늘나라 공동체로 성장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나라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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